Last (Love) Letter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소재주의: 성별 고정관념, 남아선호사상, 인종차별적 사고방식, 자식을 잃은 부모

0.

보내지 못한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친애하는 아이작에게.

1.

동시대에 호그와트를 다닌 사람 중에 포스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에 그의 성씨는 린드버그가 아니었고, 다섯 세대쯤 전에 혁명의 불길을 피해 바다 건너에서 건너온 어느 프랑스인 순수혈통 마법사의 후손임을 표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언제나 크지 않은 보폭으로 사뿐사뿐하게 걸음을 옮기곤 했으며 여자라는 이유로 슬리데린 퀴디치 팀의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 (“빗자루 타고 뛰어다니는 건 나랑 어울리지 않잖니. 비행 수업 때의 모습을 좋게 봐준 건 고마워.”) 날개뼈 언저리까지 물결쳐 내려오는 갈색 머리의 뒤론 흠모하는 시선들이 따라붙곤 했다.

아마 포스틴 본인도 그네들의 눈길을 꽤나 의식하긴 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과제를 작성하고 있는 아이작 윈필드의 곁에 착석할 때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엎드러지곤 했으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피로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 아이작이 잠자코 눈길을 주면 그는 고개를 들고 금세 자신을 정돈했다.

“공부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2.

슬리데린의 순수 혈통이란 족속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혈통에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아이작도 처음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글을 만나본 적도 없다고 말하던 반듯한 소년. 그러나 입학한 후 해가 갈수록 그는 다양한 친구들— 혼혈과 머글 태생, 다른 기숙사의 학생들— 과 붙어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는 종종 포스틴을 향해 머글 태생들이 부딪히는 부당한 차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고, 포스틴은 솔직히 말해 그 이야기의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꽤나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집안 간의 맞선으로 만나게 된 두 살 연상의 슬리데린 선배가 긴장한 풋내기같은 얼굴로 자신의 사상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포스틴은 무심결에 턱을 괴며 아이작 윈필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순수 혈통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십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고도 그 정도밖에 해내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건 의무에 대한 위반입니다, 의무가 수반되지 않은 권리는 부패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머글 태생과 이종족 혼혈들이 환경적 사유로 능력을 미처 다 발휘하지 못했다면 보다 좋은 환경으로 옮겨 잠재력을 확인해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마법부가 혈통 할당제를 도입해 머글 태생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면 좋겠는데요, 무슨 이유로 웃고 계신지 여쭤보셔도 되겠습니까?”

포스틴은 팔을 내렸다. 애정이 담뿍 어린 시선이 혼란스러워하는 마르쿠스 린드버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아뇨, 그냥. 저희 결혼하죠?”

졸업 몇 개월 뒤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부부의 연을 맺었다. 포스틴은 등 뒤로 부케를 던졌다. 아이작 윈필드가 얼결에 꽃다발을 받자 신부의 말간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다행히도 아이작이 포스틴에게 청첩장을 가져오는 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린드버그 부부는 하객의 자격으로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3.

“아이가 태어났어. 이름은 레아로 하려고. 아내가 좀 피곤해하는 것 같긴 한데, 금방 적응하겠지?”

4.

포스틴은 양털처럼 머리가 곱슬거리는 어린아이를 품 안에 어르며 본인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르쿠스는 다소 권위적일지언정 신사적이었고, 아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나가는 것에 별다른 말을 얹지 않는 남편이었다. 아버지의 엄격함 아래에서 루이는 철이 일찍 들었고 동생들을 세심하게 돌볼 줄 알았다. 메이블은 조금 장난꾸러기였지만 영특했다. 쥘은 사내아이였고 놀라울 정도로 얌전했다. 덕분에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이 생각만큼 힘들진 않았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이따금 이파리를 닦아줘야 하는 화분 세 개를 돌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집요정이 하나쯤 있었더라면 훨씬 편했겠지만, 마르쿠스는 이종족의 권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런 발상을 허용하지 않을 터였다.)

어머니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가 무섭게 칭얼거리기 시작한 쥘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포스틴은 미소지었다. 그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우리 꼬마 쥘, 네가 크면 호그와트에 가겠지. 거기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가까운 친구에게 너랑 나이가 같은 딸이 생겼다고 들었거든. 틀림없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애석하게도 열한 살이 된 쥘이 집에 데려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특히 얼굴을 쿠피예로 둘둘 싸매고 선글라스를 낀 아이가 기억에 남았는데, 포스틴은 어떻게든 눈치를 줘서 그 애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쥘에게 나쁜 물이라도 들이면 안 될 말이니까. 어느덧 나타난 루이가 눈치 빠르게 에스마일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포스틴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자 애쓰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유난스러운 어머니는 되고 싶지 않았다.

5.

“레아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말인데, 포스틴. 내가 레아를 잘 돌볼 수 있을까?”

6.

첫째 루이는 생각보다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자애가 오러같이 위험한 직업을 택했단 것에 대해 애아빠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불사조 기사단이라는 과격 집단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포스틴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쿠스는 대노했다. 루이에게 불호령을 내려 정의의 사도 노릇을 그만두게 하려는 몇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화살은 친우인 아이작 윈필드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작이 린드버그 부부에게 불사조 기사단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신임한지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다리 부상으로부터 미처 다 회복하지 못한 아이작은 피로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마르쿠스의 일갈을 듣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애를 물들였다고 탓하고 싶으면 하도록 해, 마르쿠스. 하지만 루이 말고도 기사단원들은 전부 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들이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지. 루이는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거야.”

마르쿠스는 노호성과 함께 몸을 돌렸고, 두 번 다시 아이작을 보지 않겠단 기세로 성큼성큼 멀어졌다. 포스틴은 남편의 뒤를 따라가려다 망설이는 얼굴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어찌 되었든 아이작은 그의 친구였고, 또한 큰딸인 루이를 곁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 그는 결국 아이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만큼 기사단을 지원할게, 아이작. 금품이든 정보든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그러니 루이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부탁할 수 있는 게 너뿐이네.”

아이작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미안한 기색이기까지 했다.

“물론이지, 포스틴. 내가 아까 했던 말은…….”

“아니, 네 말이 맞아.” 포스틴은 허공에 눈을 두며 중얼거렸다.

“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지. 하지만 배 아파 낳은 자식이 그 애들보다 소중한 나를 이해해 줘.”

7.

1980년.

포스틴 린드버그는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인다. 이내 문 밖에서 파열음이 난다. 그는 커튼을 들추고 창문 밖을 확인한다. 안색이 일변한다. 그는 급하게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메이블과 루이는 몇 명의 기사단원을 부축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루이의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메이블의 옷에선 탄내가 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팔에 부축받고 있는 청년은 한때 쿠피예를 두르고 집에 놀러왔던 아이다. 지금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몰골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초점 없는 눈이 거의 실성한 자에 가깝다. 포스틴은 반사적으로 청년을 떠받치며 한 손으로 손수건을 들어 루이의 이마를 닦아준다. 그의 눈이 붙잡혔다 풀려난 기사단원들 위를 정처없이 헤맨다. 그가 찾는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포스틴은 루이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믿고 싶지 않은 것처럼 떨린다. “아이작은?”

메이블이 흐느낌에 가까운 숨을 들이킨다. 루이는 입술을 달싹인다.

길어진 침묵으로부터 포스틴은 그가 앞으로 영영 오랜 친우를 만나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닫는다.

8.

1982년.

많은 일이 있었다. 쥘 린드버그는 에스마일 시프의 혀를 자르는 일에 손을 보탠다. 레아 윈필드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불사조 기사단 본부의 위치를 팔아넘겼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마르쿠스 린드버그는 죽어가고 있다. 벌어진 모든 비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그는 때로 정처없이 마법 세계를 떠돈다.

망토로 몸을 가린 채 길을 가던 포스틴 린드버그의 걸음을 멈춰세운 것은 얼굴 모르는 이가 낄낄거리며 친구들과 주고받은 짤막한 욕설.

“이 윈필드같은 자식 Son of a Winfield.”

그들에게 있어서 윈필드는 레아 윈필드다. 아이작의 명예는 수복되었으나 죽은 사람은 쉬이 잊혀지기 일쑤고, 윈필드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감흥은 대부분의 경우 지독한 경멸이다. 불현듯 어찔한 현기증이 그의 머리를 휩싼다. 그것은 길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 이제 이곳에 없는 아이작을 향해 그는 허공에 호소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했을까? 아이는 언제 주데카의 죄인이 되는가? 아이작, 제발. 나도 너도 있는 힘껏 살아오지 않았니. 완벽하진 못한 부모였지만 꽤나 성심껏 가르치지 않았니……. 손만 대도 부서져내릴 것 같은 사랑스러운 뺨을, 어른들의 대화에 방해될까봐 층계참에 서서 침묵을 지키는 배려심을 귀애하였는데. 나의 자식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세상을 능멸하고 너의 아이는 기사단을 몇 시클의 돈에 팔아넘겼지. 그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네 이름이 욕설로 쓰이는 이 상황이 무엇보다 버거운 나를 이해할 수 있겠니……. 포스틴은 웃고 싶어진다. 그러다 울고 싶어진다. 그는 정처없이 걷고 또 걷는다.

9.

친애하는 아이작에게.

네 뒤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

10.

1984년의 어느 밤, 슬로우 모션. “메이블이 죽었어요!” 루이가 울부짖으며 나타난다. “쥘이 메이블을 죽였어요!” 그의 품에 안긴 아이는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고 있어 꼭 잠든 듯이 보인다. 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뛰어나가자 벗겨진 슬리퍼가 바닥을 뒹군다. 그의 세상이 소리없이 두 딸에게로 쏟아진다. 잃고 나서야 무게를 알게 되는 것. 형편없이 떨리는 두 손이 차갑게 굳은 딸의 뺨을 몇 번이고 쓸어내린다. 짐승같은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올라온다.

메이블! 아아, 메이블, 내 딸! 눈을 떠! 제발…….

아비규환의 통곡 중 뒤에서 공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에스마일이 창백한 얼굴로 나타나 다가온다. 그 역시 쥘의 손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같은 순간 포스틴의 귓가에 속삭이는 아이작의 목소리: 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지.

한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소중히 여긴 죄로, 그는…….

울음이 섧게 무너진다. 포스틴은 메이블의 장례에서 에스마일을 끌어안는다.

미안해. 미안하단다. 다 나의 잘못이야.

11.

친애하는 아이작에게.

메이블을 잃은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쥘을 떠올리고, 그 애를 포대기에 감싸 안고 어르던 날의 꿈을 꿔. 정말 형편없는 엄마지……. 쥘은 왜 그랬을까? 레아는?

네 뒤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 나의 아이가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네 이름이 모욕의 수단으로 불명예하게 전락할 때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을지 의문하면서.

하지만 수치를 견디는 것까지 나의 업인 것 같아.

너를 죽음이 아닌 삶으로써 따라갈까 해. 기사단에 투신하고, 쥘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그건 나에게 내리는 형벌이기도 해. 끊어내지 못한 사랑을 외면하면서 남은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괴로울 수 있겠지.

너를 보는 일에 있어서 떳떳할 수 있겠지…….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