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짓큐사니] 어제와 오늘 사이
[오마카세 타입] 김제스님이 신청하신 글커미션
written by. @saniwa_jeyeon CM
0.
아마도 잠결에 했을, 잠꼬대와 같은 말.
-있잖아, 카호씨.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카호씨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은 마치 어제처럼 아득하기도 했고,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기도 했다.
-사랑을 하는 방법을, 함께 알아가지 않을래?
이대로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우리 사이는 뭔가 변할까?
어쩐지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1.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폰 알람-진동소리지만-을 들으며 카호는 눈을 떴다.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피곤에 찌든 몸은 정직해서 그만 푹 자고 말았다. 그래도 잠이 보약이라고, 잠을 잔 몸이 가뿐하게 느껴져서,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카호씨,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네...짓큐씨도 잘 잤어요?"
여느 때처럼 아침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난 짓큐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를 먹으며 아, 계란후라이에 비엔나 소시지 조합은 참 맛있다, 케챱 찍어먹어야지...하고 우물거리고 있을 때 쯤이야, 카호는 간밤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뭔가 변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 그런 눈치가 아니다.
"짓큐씨, 저..."
"응? 계란 하나 더 부쳐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카호로서는, 그 고백과도 같은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하냐도 고민했지만, 과연 짓큐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랬는데 이 남자. 평소랑 똑같다. 고백같은 말을 했다는 자각도 없는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계란후라이 하나 더 해줄까하고 묻기나 한다. 그건 정말 꿈이었을까? 그건 아닌데,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럼 정말 잠꼬대 같은 거였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계란 후라이에 미원을 뿌려먹는 게 입에 맞는 것 같다며 웃는 짓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호는 그만 맥이 빠져버렸다.
이후에 이어진 것은 보통의 일상이었다. 함께 이제는 따뜻해진다기보단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며, 출근을 했다.
그러고 격무가 몰아쳤다.
카호와 짓큐는 며칠간 정말 바빴다. 다행히도 정화임무가 내려오진 않았지만 단지 그 뿐.
"이치고씨, 최근에 불편하게 느끼는 점은 없나요?"
"당신께서 제 주군이 되어주시지 않는 것, 정도일까요."
"인간에 대해 여전히 믿음이 있으시네요. 분명 이치고씨에게 맞는 좋은 사니와님이 계실거예요."
"...야속하신 분. 제가 당신의 짓큐 미츠타다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를 겁니다."
정화한 혼마루의 사후처리를 위한 센터 방문이라든가.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역시 감찰부로 돌아오지 그래? 정화부보단 감찰부가 낫지?"
"아뇨...말씀은 감사하지만 정화부도 나름 괜찮아요, 쵸우기씨..."
"뭐,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것도 카호의 귀여운 점이라는 거다."
"부장님..."
"남이 잘 키워놓은 부하직원 빼간 쪽이 잘도 말하는군 그래."
타부서와의 협업이라든가.
"마고로쿠씨, 왜 갑자기 서류가 많아진 걸까..."
"그야 우리 부서 애들이 두 팀이나 긴급 파견을 나갔으니까. 우리도 비상이지. 오죽하면 노리무네 녀석이 방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런가요..."
"자, 그럼 미스미씨도 힘내라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처리라든가. 정말로 바빴다.
"아...안 되겠다. 짓큐씨, 저 20분만 있다가 깨워주세요. 잠깐만 눈 좀 붙일게요."
"알았어. 걱정말고 좀 쉬어, 카호씨."
하품을 하며 무너지듯 책상 위에 엎드리는 카호의 위로, 담요를 덮어주는 짓큐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잠깐 쉴 수 있게 되자, 카호의 머릿 속에 미뤄뒀던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고백같은 말을 한 건 짓큐인데 카호 혼자만 초조해져서 생각이 많아지고, 오히려 카호가 짓큐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다시 한 번 먼저 말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방긋 웃는 짓큐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까, 카호는 그게 두렵기도 했다.
언제나 카호를 지키느라 주의를 기울이는 제 남사에게 당장 그게 무슨 말이었느냐고 추궁하기도 좀 그랬고, 잊어두고 있자고 생각해도…잊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서, 카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말았다.
"카호씨, 20분 지났어."
"아...이제야 좀 살겠어요."
"조금만 더 힘내자, 카호씨."
"네, 짓큐씨도 조금만 더 힘내요."
그렇게 폭풍같은 한 주가 지나가고 주말이 왔다.
2.
한가로운 주말 오후, 오전에 빨래며 청소같은 집안일을 다 끝낸 카호와 짓큐는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잔잔한 다큐멘터리 영화같은 걸 즐겨보던 두 사람이 어째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있느냐.
그건 고백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였던 걸지도 몰라, 짓큐씨잖아. 하는 카호의 회피의 결과다.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카호가 짓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함께 연애소설을 읽거나,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것 정도다. 매체에서 나오는 사랑이 보편적이거나 짓큐가 찾는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해줄 수 있는 게 카호로서는 없다고 생각한다.
짓큐씨가 나를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확정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나를 사랑하게 될거라고 그랬지.
짓큐씨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미 자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정했으니까 한 말이었겠지만…
언제부터, 어쩌다가, 나의 어떤 부분을.
지금에야,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과는 별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누군가 나를 좋게 봐주었던 적도 있었지만, 아무 것도 주고 받지 못한 채 스쳐가는 바람같은 일들이었다.
그때 뭔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고민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짓큐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다면.
카호는 고개를 돌려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짓큐를 바라보았다.
내가 짓큐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야, 스스로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데.
떨어져있으면 그립고, 함께 있지 않으면 생각나는 사람.
이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분명히 좋아함이겠지.
그렇게 카호가 멍하니 짓큐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불현듯 짓큐가 카호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건가 싶어 카호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짓큐가 카호를 덮치듯이 넘어뜨렸다. 문짝같은 몸으로 카호의 몸을 가려서 덮듯이, 아마 위에서 내려다보면 카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천장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카호가 눈을 껌뻑이고 있을 때, 물이 쏟아졌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이, 짓큐의 얼굴을 타고,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라 물벼락이었다.
3.
스프링쿨러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카호의 집에 설치된 스프링쿨러 중에 거실, 카호와 짓큐의 머리 위에 있던 하나만 오작동했단 것이다. 거실 바닥이 물바다가 되긴 했지만, 콘센트나 전자제품에는 물이 조금 튄 정도였고 소파도 방수가 되는 재질이었기 때문에 닦아내면 될 일이었다.
카호는 침착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니 오히려 머리 속이 차분해졌다. 고무장갑을 끼고 차단기를 내렸다. 그리고 나서 관리실에 연락을 하자,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관리인이 기사와 함께 달려와 살펴봐주었다. 듣자하니 어제도 한 집에서 스프링쿨러가 오작동을 일으켜서, 다음 주에 전체 긴급 점검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도 기사가 세세히 살펴보곤 아마 또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카호를 안심시켰다. 관리인과 기사가 돌아가고 나서야 카호는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비가 안 오니까 안에서 이런 난리가 나네."
"하하, 그러게."
“짓큐씨 옷 갈아입어야죠.”
“카호씨는 괜찮아?”
“짓큐씨가 막아준 덕에, 별로 안 젖었어요. 두면 마를 정도.”
카호는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닦지 않아도 금방 마를 것 같았다. 그리고는 거실에 있는 전자기기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콘센트 쪽으로 물이 튀거나 하진 않아서, 작동시켜보고 고장 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수건을 몇 장 들고 와 바닥에 던져놓고 소파를 닦고 있으니, 금방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짓큐가 자기가 하겠다며 수건에 손을 뻗는 것을, 그럼 같이하자고 말했다.
정리를 일단락하고 다시 나란히 앉아서 티비를 켰다가, 문득, 카호가 티비를 껐다.
“이번주 바쁘기도 정말 바빴는데, 주말까지 일진이 사납네요.”
“그러게.”
그러고 잠깐 침묵하는 것을, 짓큐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카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처럼, 혹은 어떤 말을 해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아까요. 우산 없이 소나기 속에 서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러게, 놀랐어."
"그런데 짓큐씨가 비를 맞지 말라고 나를 지켜주는구나. 안심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했다면 위기감을 느끼거나 긴장했을 법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짓큐가 카호를 넘어뜨렸을 때, 카호는 어련히 짓큐가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내게 익숙해진 사람이구나. 내가, 그렇게 이 사람에게 익숙해져 있구나. 아, 이 사람이 없으면 외로워지겠구나. 이 사람이 있으니, 외로울 틈이 없는 것이구나......
"짓큐씨. 그 말, 왜 한 거예요?"
"어떤 말을 말하는 건지, 말해줄래?"
"사랑하는 방법을, 함께, 알아가자고..."
사랑을 한다면 그건 카호일 거라고 했던 말은, 카호 제 입으로 꺼내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말이다. 카호의 말을 들은 짓큐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거, 들었어?"
"네, 들었어요. 그 말 했다는 자각은 있군요, 짓큐씨..."
"카호씨가, 자고 있는 줄 알고......"
"저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안 하길래 짓큐씨가 잠결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제대로, 다시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 주는 카호씨도 나도, 정신없이 바빠서..."
그 말을 들은 카호는 살짝 웃었다. 카호도 조금 덜 바빠진 후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미뤄뒀으니까. 결국 같은 행동을 한 거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은 것을 공유하고, 앞으로도 함께 있고 싶을 거다. 아마도.
"짓큐씨, 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제가 지금의 저를 참 좋아한다는 말."
"응, 기억해. 지난날의 카호씨가 열심히 쌓아온, 지금의 카호씨를, 나도 좋아하니까."
짓큐는, 카호가 한 말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또 분명 없겠지. 카호가 바라보기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차려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나한테는 내가 참 괜찮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일까 생각하면 확신이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이니까."
좋아한다. 카호는 짓큐 미츠타다를 좋아한다.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만사에 무던하게 반응하는 카호인데도 자신을 잃고, 확신을 잃는 거다. 카호가, 짓큐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짓큐씨에게 내가 괜찮은 사람일까, 하고 생각하면 굉장히 불안해져요. 그건 아마 짓큐씨가 저한테 굉장히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라서 일 거예요."
"어떤 게 불안한데?"
"단순한 동거인 관계에서, 연인 관계가 되었다가, 짓큐씨가, 나한테 질려버리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짓큐씨가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그게 불안했어?"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하던 짓큐가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카호씨를 참 좋아하는데. 아마,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랬다고 생각해.”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카호씨랑 있으면, 굉장히 행복해져서. 물론, 그런 부분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감히 카호씨에게 질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그렇게 단호하게 말해주는 게 카호 자신을 얼마나 안심시켜주는지, 짓큐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 말에 힘입어서, 카호는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짜냈다. 최대한의, 진심을 내뱉었다.
"좋아해요. 짓큐씨의 그런 점이, 그런 부분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당장에 함께 살고 있고, 사니와와 초기도라는 관계에 있다. 이리저리 재보고, 생각해야 할 부분도 많을 것이다. 인간과 도검남사이니 서로의 시간 차이도 감안해야 하겠지. 정화사니와와 그 남사인 만큼 어쩌면, 임무에 나갔다가 죽고 부러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죽게 된다면. 두 사람의 세상이 만약, 내일 끝나게 된다면, 카호는 마지막까지 짓큐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니까, 짓큐씨가 괜찮다면.”
연애니, 사랑이니. 도검남사인 짓큐는 물론이거니와 카호도 잘 모르는 영역의 일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사랑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사랑이 되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같이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알아가도록 해요.”
영화나 책에 나오는 것처럼 거창하고 강렬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저 언제나 함께했던 잔잔한 감정이지만, 분명하게 스며들어 있던 것.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 사이에 이미 있는 것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가면서, 서로의 품에 안겨주면 되는 일이다.
제가 했던 말을 따라 하는 카호의 말을 들으며, 짓큐 미츠타다는 웃었다. 카호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환하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혹여 내일 세상이 끝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한 나날이 이어져 나가더라도, 함께 있을 수 있으면 그걸로 좋겠지.
“좋아. 카호씨가 불안하다면, 내가 내 도생을 걸고 노력할게.”
짓큐는 그러니까 서로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다. 망설이지 말고, 겁먹지 말고.
“나야 그렇지만…짓큐씨도 그런가요?”
카호는 조금 놀랐다. 카호가 보는 짓큐는 그렇게 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태연하게 늘 하는줄 알았는데.
“몰랐구나. 나 카호씨한테 거짓말도 하는 거.”
“진짜요?”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되어가고 있고, 될거다. 서운해도 숨기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말하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사이.
계속 함께 있었지만 우리 사이는 지금부터이기도 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더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다.
분명히 확실하게, 조금씩 변해가는 게 있겠지만.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괜찮겠지.
"잘 부탁해요, 짓큐씨. 고마워요."
"나도 잘 부탁해, 카호씨. 고마워."
카호의 짓큐, 짓큐의 카호. 그렇게 우리니까.
그렇게 ‘우리’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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