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것
총 18개의 포스트
제이스는 널따란 초원 위에 선 차였다. 꽃과 나비가 환상적인 색채를 그리며 떠올랐다. 그에게는 영원히 심장 속에 남아있을 곳.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니야, 내가 알던 곳은 이런 곳이 아니야. 꽃잎이 뒤틀리고 나비는 몸이 꺾인 채 날아갔다. 이것까지 앗아가게 두지 않아. 제이스는 망치를 들었다. “모습을 드러내!” 이를 악문 채 괴
아침부터 연구실이 소란했다. 빅토르는 하나둘씩 들어오는 물건을 흘긋 보다가 다시 자료를 훑었다. “여기다 두면 될까요?” “그건,” 오늘 들여오는 건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주인이 부재중인 이상 조금의 도움을 주기 위해 말을 꺼냈다.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쪽으로 부탁합니다.” 듬직한 청년이 열린 연구
이건 뭐지? 빅토르는 눈을 떴다. 작고 반짝이는 결정들이 그의 몸 근처를 맴돌았다. 아이들의 발랄한 웃음소리도 귓가를 스치듯 퍼졌다. 행복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만약 낙원이란 게 있다면 이곳이겠구나 싶었다. 마치 따스한 욕조에 처음으로 몸을 담갔던 때처럼 그 감정은 크기를 키워서 곧 그를 뒤덮었다. 그는 이의 없이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연구
잔뜩 성난 등이 씩씩거렸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있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고 말했다. “엘리엇.” “…….” 그가 입을 다무는 건 좋은 전조는 아니었다. 평소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였으니까. “엘리엇 위-” “아, 피도 안 마른 꼬맹이 소리가 들리네.” 돌아보지도 않고 툭 던지는 말에 심지가 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해.” “
서머스 박사가 항상 연구에만 몰두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현재에는 과거에만 연연할 수 없는 이유가 많았고 메리는 그 몇 가지를 수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그의 과거 동료-지금은 살인 로봇 반열에 들어섰지만-라던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구는 어린 여자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이 그를 가만히 두기로 결심한 모양이었으니, 쉬기만 하면
안개 낀 새벽은 여러 의미로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두 번째, 고요한 사위가 산책을 나가기에 적격이었다. 항상 붐비는 시장이지만 이때만큼은 아니었다. 사이퍼는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몇몇 상인들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그들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잠깐 쳐다보더라도 곧 고개를 돌렸다. 깊게 눌러 쓴 모자에
엘리엇이 격리된 지 나흘 째 되던 날, 나는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관계를 들키거나 하는 일은 이제 부가적인 문제가 되어 있었다. 제일 큰 건 역시나 그의 부재였다. 딱히 사람에게 크게 애착을 두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와 각별한 사이가 되고 난 후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씩 불안해졌다. 나는 지난번 내게 말을
그 일은 아주 작은 사건 하나로 시작됐다. “아야.” 엘리엇이 손을 휘젓자 툭, 하고 죽은 벌레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워낙 식생이 다양한 행성이었다지만 눈에 띄게 크고 끔찍한 모양새가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별거 아니야, 모기 같은 건가봐. 이 놈의 인기란.” 그는 머쓱한 듯 웃으며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 그의 목덜미에는 붉은
“자, 아, 안녕, 내 이름은 미라지야! 다들 알고 있지? 레전드 오브 레전드, 미라지. 엘리엇이라고 불러도 돼. 오늘은 말이야, 재밌는 걸 하나 해 보려고 해. 뭐냐하면 바로! 숨은 크립토 찾기! 사실 그 녀석, 없어진지 꽤 됐는데 다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내가 누구야, 엘리엇 ‘미라지’ 위트라고. 걔는 날 보고 망할 위트라고 자주
느릿한 곡조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아는지 흥얼거리기 시작하던 제이스는 곧 팔을 쭉 뻗었다. 오래 앉아있던 탓에 온몸이 뻐근할 시간이었다. “딱 춤추기 좋은 노래네. 안 그…아,” 빅토르는 파트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갑자기 말을 거둔 제이스에게 몸을 돌렸다. 지팡이를 꽉 짚고 움직이던 그는 왜 제이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는지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