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은 유하며,

다섯: 마파람

목동이 즐기는 것은 춤과 노래, 그리고 단련이 전부는 아니었다. 기실 상록의 초지가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요, 그 이전의 십육 년 내내 알레이 에버그린은 양치기로 살았으니 촌민의 삶이 익숙한 것도 당연할 테다. 그는 고아한 가극물보다 경쾌한 민요를 즐겼고, 교양 넘치는 무도회보다 여럿이 짝을 지어 추는 전통 무용에 능했으며, 각잡힌 기사의 창술보다 변칙적인 힘겨루기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그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서툰 팬플룻 연주이리라. 악기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참나무 지팡이와는 달리 그가 처음으로 양을 몰러 나갈 적 받은 선물로, 손때가 묻고 오래된 티가 나는 편이었다.


바람을 타고 마레 세레니타티스의 선율이 울려퍼진다. 청년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마을의 보부상이 싣고 온 뱃사람들의 노래였던 탓이다. 어기야 영차, 순풍을 바랍니다. 어기야 영차, 성룡에게 평화를. 어기야 영차, 인간에게 안온을. 어기야 영차, 오늘도 해가 뜬다네…….


목동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애하였으므로 삶을 노래하는 선원의 선율에 흥미를 가짐은 당연지사라. 한때는 바람 따라 배를 몰고 바다가 허락한 만큼의 수확을 거두는 그들의 삶에 부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바다가 변칙의 공간이라면, 대지는 끈기의 공간이기에. 그곳에서는 숨이 다할 때까지 실컷 헤엄칠 수 있겠지, 바람을 타고 영영 항해할 수 있겠지, 하고…….


물론 머리가 굵어지며 그만큼 대양의 파도는 거칠고 깊은 물에는 자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마는, 어디 머리에 익은 곡조가 쉬이 지워지던가. 하늘의 것이 발 디딜 땅조각을 찾고 바다를 헤치는 이들이 길을 찾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듯, 땅의 아이는 바다의 노래를 연주했다.


반복적인 선율이 변주를 담고 사크라 테라의 공기를 가른다. 입이 아닌 관을 통해 연주하는 것이었기에 가사는 없었으나 그 가락만으로도 수부水夫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노랫말을 익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틀 녘이면 그물을 지고 나가며 풍어를 기원했을 테고, 해질 녘이면 땅으로 돌아오며 안전한 귀로를 기원했을 테지. 단 한번도 가지 못한 미지의 땅이었으나 기실 그들의 삶은 곡괭이와 갈퀴를 진 농부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목동이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짧고도 긴 연주를 마친 청년이 악기를 내려놓았다. 이 조그마한 연주회에 어느새 모인 관객들을 둘러보며 웃는 낯에 수줍음이 가득하다.


“저는 제가 나고 자란 동녘의 노래도, 보부상이 연주하던 서녘의 노래도 모두 알고 있으나 제가 단 한번도 가지 못한 이 남녘의 노래를 제일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북녘의 노래만큼은 들어볼 수가 없어서, 배울 기회조차 없었어요.”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이 서툰 연주의 보답으로나마 북녘의 노래를 배우고 싶습니다. 며칠 전 엘프의 추억을 들었으나 가사 있는 가곡과 가사 없는 곡조는 다른 법이지. 머뭇거리던 양치기가 관객에게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한 곡조, 청하여도 괜찮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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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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