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안드로이드 AU

엔란 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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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카드를 제시하면, 단말기가 정보를 읽어내곤 문을 열어준다. 연구소는 넓지만 어딘지 황량하게 느껴진다. 이엔은 긴 복도를 따라 걷는다. 도시를 한참 벗어나 외곽에 위치한 이 연구소는 안드로이드를 연구하는 장소였다. 좀 더 실용적인 기술로서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철저히 연구 목적의... 말하자면 '인공적인 인간'을 개발해 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닫힌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적당한 넓이의 방이 나온다.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책을 읽고 있는 이는 고개를 들어 이엔을 바라봤다. 동시에 책을 덮는다.

"이엔."

반가움이 담긴 부름이었다. 옅게 웃는 표정과, 살짝 들뜬 목소리가 내내 그를 기다린 것처럼 들렸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이엔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잔잔히 웃고 있었다. 그 점이 또 껄끄러웠다. 이건 이엔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연구소에서 만들어낸 역작이자 실험체였다. 그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은 대부분이 부품과 금속이었고, 그의 감정을 구성하는 것은 복잡한 명령어의 작용일 뿐이었다. 이엔은 그의 신체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말과 정신을 프로그래밍하는 순간을 모두 지켜봤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간이라 믿는 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부정할 수 있는 한 사람이 그였다.

"오늘 공부는 끝인가요?"

"이엔이 간 다음에 하면 되니까... 얘기 하는 게 더 좋은 걸..."

그럼에도 그는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건 그의 대전제가 보다 더 사람다워 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걸 이엔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 이엔을 좋아하기 때문에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화내지 않는다는 그의 태도를 볼 때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가 인간답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고요한 미소로 이엔을 맞이했으나, 이엔은 그가 만들어지던 과정을 되새겨야 비로소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되새기는 이유는 호의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란은 다정하고, 이엔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조금 이야기를 나누면 금방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 감정이 프로그래밍 된 가짜라는 것을 떠올릴 때면 차가운 반응을 보이게 된다. 진짜가 아닌 것에 매달리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그 마음마저도 짐작한다는 듯 웃었다.

"내가 가짜라고 생각해?"

"최소한 인간은 아니잖아요. 전 당신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전부 봤으니까..."

안드로이드와 대화할 때는 존대와 정중한 호칭을 사용할 것. 다만, 반드시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아도 되며 솔직한 태도로 대할 것. 란과 대화를 나눌 때의 지침은 더 자세하고 많았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그랬다. 매일 주고받는 연구원들과의 대화로 란이 더 성장하고 배울 수 있도록. 솔직히 이엔은 이 시간이 껄끄러웠지만, 그의 업무 중 하나였기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란은 손을 뻗어 이엔의 머리카락을 살짝 쥐었다. 그 손길은 지나치게 섬세해서, 금속과 전선, 못과 실리콘 따위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기실 그보다는 더 전문적이고 세세한 재료들이었지만. 본질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수천개의 선으로 연결되어가던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이엔은 잠시 숨을 멈췄었다. 굳이 이렇게 만들어야 해요? 인공지능이라면 좀 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던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착각하는 거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어쩌면 덩그러니 놓여있던 안드로이드가 말했을 지도 모른다. 마음과 몸은 개별적인게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거야. 생김새가, 표정이, 움직임이 사람같다면 사람이라 착각할 수 있겠지. 그건 보다 더 인간다워지는 밑거름이 될 테고...

"어쩌면 그때의 란과 진짜 사람인 내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지..."

"연구소의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

"그러니까 이것도 거대한 프로젝트인거야... 너는 나를 안드로이드라 믿고, 진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는 어디쯤에 있는 연구하는 프로젝트..."

지금 내 몸을 열어보면 피가 흘러내리고 심장이 뛰고 있을 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란의 말은 허무맹랑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엔은 의식적으로 그 설득력을 무시한다. 그는 때때로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엔은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간 다 됐어요."

돌아가려는 몸짓이 급했다. 란은 그런 이엔의 손목을 잡더니, 가볍게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잘 가. 이어지는 인사는 다정하게 내려앉는다. 이엔은 당황하며 그를 밀어내고,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며 방을 나선다. 당황한 와중에도 보안은 잊지 않고 잘 챙기는 모습이 성실하게 느껴져서 웃음이 난다. 란은 다시 소파에 걸터앉은 채 이엔을 떠올렸다. 살짝 찌푸린 표정과 미미한 홍조, 퉁명스러운 말투와 어딘지 이쪽을 챙기는 대화.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 누군가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건 연구소의 연구원들이었다. 그런 인간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어주리라. 그는 인정받아야만 하는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인간이라도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거나, 프로그래밍 되었다거나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단지...

그 중에서 굳이 이엔을 고른 것은 그의 자의였다. 그는 이엔이 좋았다. 이것또한 더 효율적으로 사람다워지기 위한 방법이라 할 지라도.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펴 들었다.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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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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