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테] 크리스마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가 그와 완벽히 대조되는 화려한 트리 앞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너무 서둘렀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주위를 쓱 둘러보자 많은 연인이 서로 꼭 붙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시선을 다시 트리로 옮겼다.
'그 애는 언제쯤 오려나. 눈이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 줄까. 메리 크리스마스? 아, 아니면 뒤에서 놀라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 깜짝 놀랐다가 이내 얼굴이 새빨개져 맞지도 않을 주먹을 휘두르는 애인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나왔다.
'빨리 왔으면.'
5분, 10분, 15분,···30분. 여전히 빛나는 트리 아래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오직 남자만이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이미 30분이나 지났건만 그의 애인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내비치지 않았다. 슬슬 귀의 감각이 옅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곤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이미 부재중 전화가 몇 번 찍혀 있었다. 그는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은 같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
남자는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걸로 세 번째. 걱정인지 화인지 모를 감정이 슬슬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점점 가라앉던 순간, 멀리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화살처럼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
"야!!"
남자는 홱 옆을 돌아보았다.
“이반!!”
“···틸.”
한눈에 봐도 뛰어온, 삐죽삐죽한 회색 머리의 청년이 무릎에 손을 댄 채 헉헉대고 있었다.
“아, 다리 빠지는 줄 알았네.” 그가 말했다.
이반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애인의 잔뜩 빨개진 귀를 보니 정말 이상하게도 직전까지 느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반은 새삼 그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실감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이반은 곧 감을 숨긴 채 말을 꺼냈다.
"폰은 왜 꺼져 있었어?"
"아, 그거.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길래 시끄러워서 꺼 놨는데."
“그래? 그래서 내가 30분 동안 3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못 받았던 거구나.”
“어. ···어? 3번? 30분? 내가··· 30분씩이나 늦었다고?!” 틸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했다.
이반은 그의 애인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아, 어···, 그, 하아······.” 틸은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찡그리고, 이를 꽉 깨물고, 눈을 매섭게 뜨다 결국 한숨을 쉬곤 마지못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내가 전에 준 시계는?”
“···”
“잃어버렸어?”
“그··· 어쩌다 보니···.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있었어.” 틸이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잘못이 계속 색출되어 나오는 이런 상황이 부끄러운 건지 분한 건지 턱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이반은 고민했다. 여기까지만 할까. 아님, 조금만 더? 악취미가 발동했다. 애인이 이렇게까지 쩔쩔매는 상황은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하는 광경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약간은 즐기고 있었다.
이반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틸은 주머니에 손을 넣곤 뒤적거렸다. 그러곤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들더니 이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주황색 리본이 묶인 작은 선물상자였다.
“이게 뭐야?” 이반이 물었다.
“···열어봐.” 틸이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새빨간 귀가 더 잘 보였다. 이반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조그마한 스노우볼이 있었다. 혹여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히 손안에 품어보니 눈사람 옆에 앉아있는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이건···”
“네, 네가 전에 이거 마음에 든다며! 그, 크리스마스에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니냐? 그냥 오려다 빈손으로 왔다고 네가 또 X랄 X랄 할까 봐, 큼. 암튼, 이거 사 오려고 했는데 그때 그 가게를 바로 못 찾아서 좀 헤매느라··· 이, 일부러 늦은 건 절대 아니다?!” 틸이 봇물 터진 듯 말을 쏟아냈다. 그러는 동안 이반은 그저 가만히 고양이를 응시했다.
“야··· 화 안 풀렸냐···? 그, 다음부턴··· 전화 잘 받으면 되잖아. 시간도 잘 지키고. 이번은 진짜-!”
“하! 하하, 하하하!” 이반이 갑자기 스노우볼을 꼭 쥔 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야, 야! 이 X끼 이거 왜 이래···? 추운 데서 오래 기다려서 대가리도 얼어버린 거 아냐?!” 틸이 당황하여 물었다.
이반은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틸이,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게 고작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이었다니. 그것도 그를 위해 준비하느라 그랬던 거라니! 아마 틸은 이반이 그 고양이 스노우볼을 마음에 든다고 했던 이유를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반은 스노우볼 속 회색 고양이의 앙칼진 초록빛 눈동자를 흘깃 쳐다보곤 고개를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애인과 눈을 마주했다. 당장이라도 저 정돈 안 된 머리칼을 북북 쓰다듬어 버리고 싶었다. 그는 간신히 충동을 억누르곤 웃음을 멈췄다.
“아냐, 그냥.”
“뭔데.” 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반은 그저 평소처럼 웃으며 넘겼다.
“슬슬 들어갈까? 너도, 나도 밖에 너무 오래 있었잖아.”
“그러든가, 그럼. 어후, 추워죽겠네.” 틸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뒤돌아섰다. 이반은 때를 놓치지 않고 뒤로 바짝 붙어 냅다 양손으로 틸의 귀를 감쌌다.
“와씨, 깜짝아!” 틸이 화들짝 놀라 이반을 돌아보았다.
“하하, 뛰어왔어도 귀는 차갑네. 이 정도면 아주 얼겠어.” 이반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뭐 하는데!” 틸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리쳤다.
“따뜻해지라고.”
“따뜻 이러고 앉았네. 네 손 X나 미지근하거든?! 동상 걸려서 X지기 싫으면 얌전히 손 떼고 걷기나 해.”
틸이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커다란 손이 외투 주머니 속으로 쑥 들어왔다.
“미지근하면 이렇게 덥히면 되겠네.” 이반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틸의 오른손을 잡은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뭔, 미친! 당장 안 빼?!” 틸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이반이 단단히 깍지를 낀 뒤였다.
“왜, 이러면 따뜻해질 수 있고 좋잖아.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나고.” 이반은 얄밉게도 옆에서 계속 생글거렸다.
“X발 손잡는 거랑 크리스마스랑 무슨 상관인데! X랄 말고 빼기나 하라고!” 틸이 역정을 부렸음에도 이반은 손가락을 더 꼭 붙이곤 절대 빼지 않았다.
“아까 커플들 보니까 다 이렇게 하고 있던데? 우린 연인 사이 아니야?” 이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태도에 결국 틸도 마지막으로 화를 내며 포기했다.
“됐다, X발! 네 알아서 해라. 쓸데없이 힘만 세선. 망할.”
이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야, 밑에 조심! 미끄러진다고, 야!!”
“하하하! 괜찮아, 안 미끄러져.”
“안 미끄러지긴 X발, 손이나 빼고 얘기해라!”
“하하하!” 이반은 틸이 뭐라 하든 그저 웃으며 집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다소 늦은 두 사람의 크리스마스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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