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해바라기 -4-
“아, 그렇게까지 피곤해 보이지는 않고요… 조금 눈에 거슬리는 정도? 원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 얼굴이 반쯤 죽은채로 다니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에요,괜찮아요!”
막말을 퍼부은 눈 큰 남자가 비닐봉지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더니 멋대로 내 주머니에 넣었다. 길에서 한 번 마주친 것 뿐인데 은혜 갚은 두루미처럼 행동하는게 당황스러워서 가져가라는 시선을 보냈다.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마음을 눌러담아 바라봤지만 남자는 싱긋 웃기만 했다.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밝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보이는 미소였다. 고작 몇 초를 조용히 있었다고 다시 입을 연 남자가 말을 쏟아냈다.
“그쪽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큰 도움을 받았어요. 그 때 대답을 듣고 제가 용기를 내서 말을 했거든요. 결국 싸우긴 했지만 그게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관계를 정리하는 거요. 사실 지금까지 이어온건 너무 길게 끈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이미 제 짐을 하나씩 빼고 있었는데 결국 터질게 터진거죠. 그 때 정리하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매일 싸우기나 했을거에요, 정말 감사해요. 그러고보니 은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네요.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제정신이 아닌건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어쩌면 이 남자는 술냄새를 숨기는 능력이 있는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헛소리를 해맑은 얼굴로 하는거지.
고개를 저어서 잡생각을 떨쳐내고 음료수 잘 마실테니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 했지만 붙잡혔다. 부끄러움도 없는지 남의 팔을 막 잡아 세운 그는 전단지를 한 장 건넸다. 인기 이자카야의 체인점 광고 전단지였다. 이 전단지를 가져오면 카라아게 한 접시가 공짜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고 새하얀 뒷면에 뭔가 쓰여있진 않았다.
“저 거기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거든요. 바쁜 시간에는 서빙도 직접 하고. 가라아게 한 접시 말고 공짜로 줄 수 있는건 없지만 음식과 술의 양을 조금 더 많이 담는건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 나면 오세요. 이름은 그 때 알려주시고요.”
손을 흔들고 발랄하게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 조용한 방 안에 들어오자 뭔가에 홀렸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자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남자는 내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남자인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도 현실감을 일깨워줬다. 나라면 흰 뒷면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줬을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보니 그 남자는 자기 이름은 벙긋도 안하고 내 이름만 알려달라고 졸라댔다는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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