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매패] 유일

동상이몽

황올 by 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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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것이 흘러들어오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고요하고 소란스러운 틈새. 나는 부유한다. 떠오르는가 가라앉는가. 흉내를 멈추고 의지가 옅어지면 비로소 나는 비좁고 드넓은 이 틈새에 빠짐없이 존재한다. 이곳은 요람처럼 안락하고 요람처럼 나 외에는 전부 외부의 것이다. 천장에 달린 모빌, 벽면을 채운 책과 장난감, 아기를 돌보는 부모. 이처럼 나를 위한 것은 모두 틈새 바깥에 있으나.

틈새에 끼인 채 나를 부르는 따뜻하고 그리운 목소리를 찾아 눈을 감았다. 감각의 확장. 에드워드. 에드워드. 애드. 에드워드.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 세상의 수만큼 이름이 들리고 떠오르고 뭉개지고 지워진다. 온도를 느낄 감각기관 따위를 형성하지 않았으나 온 몸이 시리게 얼어붙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흐르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흐르고 있구나. 이토록 많은 당신 중 그 누구도 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꼭, 당신이 아니더라도. 흐르고 흐른다. 멍청한 미련을 끌어안고 되감는다.

"에드워드."

네가 나를 부른다. 아직 네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말한 적이 없음에도 너는 종종 내 이름을 불렀다. 멀리 외출을 하거나, 도움을 바라거나 혹은 보고 싶다고. 어느 날에 내가 말을 흘린 건지 그 영악한 머리로 곰곰이 생각해 도출해낸 결론인지 모르겠다만 너는 나를 부른다. 에드워드도 애드도 연인도 아니다. 대체될 수 있는 역할 똑같이 생긴 같은 이름의 누군가가 아닌 나만을 찾는다. 네 덕분에 나에겐 여전히 이름이 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알테라에 갔다 올 거야. 나 없을 때 집 뒤집어 놓지 말고."

시선은 보라색 스크린을 향한 채 제 다이너모가 가져다주는 겉옷을 걸치며 말을 이어간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는 자그마한 애정이 담겨있다. 부른다고 하여 언제나 대답을 하며 한걸음에 달려가진 않으려 한다. 네가 나를 찾는 게 좋아서다. 어느 날이던 어떤 이유던 너와 나의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가 좋다. 이상하지? 목소리 같은 건 너나 나나 다를 것 없는데.

덧없는 희망과 끝없는 절망으로 빚어진 내 위에 놓인 유일한 너. 네가 모든 세상과 시간 속 유일한 나를 찾으니까 나도 영원히 너만을 연인이라 부를게. 내 말을 너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무한한 시공간은 서로 역겹도록 닮았지만 똑같은 건 없다. 너를 닮은 건 많지만, 너는 하나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있는 곳의 좌표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 혹여 떠돌다가 잊어먹기라도 할까 봐 전부 기록도 해뒀다. 네가 보고 싶은 날이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고 너를 잃어버리는 날 같은 건 오지 않는다. 당신을 향해 영겁의 시간 동안 배회하고 배회할 나를 위한 안식처야.

나와 달리 너의 시간은 유한하니까 네 모든 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더 이상 조금도 버틸 수 없어 부서질 때에 무정한 주제에 상냥한 너에게 기댈 수 있는 순간이 남아야 함을 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하나하나의 실패에 나는 여전히 절망한다. 다만 쌓이고 쌓여 희미해졌을 뿐이다. 빗겨 난 과거를 다녀온 다음에는 항상. 네가 보고 싶어.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흩어진 입자가 들러붙고 사람의 형태를 구성한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나를 안고서 사랑한다고 해줘. 손을 뻗어 틈새를 가른다.

"... ... 나도 갈래."

"뭐, 그래. 여기서 알테라까진 거리가 좀 있으니 나야 좋지."

제 눈높이쯤에서 낙하하는 나를 익숙하게 받아서 든다. 살아있는 따뜻한 온기와 오직 나를 보는 시선. 아늑한 품에 얼굴을 박고 너의 향을 들이킨다. 너는 동행하러 온 게 아니라 방해하러 왔냐고 궁시렁거리면서도 내 등을 쓰다듬으며 토닥인다. 너의 상냥함이 나를 바스러지지 못하게 한다. 아, 사랑스러운 사람.

2.

책상 앞에 앉아 전투 후 손상된 드론을 수리하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올 때가 되긴 했다. 옆에 걸린 부드러운 담요를 챙겨 소리가 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바닥에 떨어진 상태 그대로 네가 헐떡거리며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또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호흡하지도 않는 주제에 저러는지. 담요를 몸에 둘러주며 안아 든다. 피 냄새는 안 나는 것이 일단 한시름 놨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살살 달래주니 천천히 몸의 떨림이 멎어가는 게 느껴진다.

언제 너를 처음 만났더라. 떠올려보면 꽤 최근 같기도 하고, 아주 먼 옛날 같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고 불쑥불쑥 찾아와 지루한 내 일상을 엉터리로 메우고 있다. 너는 볼 때마다 다르다. 남의 피를 몽땅 뒤집어쓰고 귀신처럼 서 있기도 하고 잘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말 한마디도 움직임 하나도 없이 앉아만 있기도 하다. 어느 날은 나만큼이나 커져서 제 미련만큼이나 기다란 머리카락을 방 가득히 채우고 있기도 한다. 하는 말도 행동도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는 하루보다 먼 시간을 지나왔다.

한 손에 다 들어오는 너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너는 항상 뒤를 향해 걷는다. 뒤로, 뒤로.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뿌리를 찾아. 이것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알고서도 멈추지 않는다. 닳고 닳은 희망 한 조각을 품에 안고 깊은 절망에 구렁텅이에서 풍덩 가라앉는다. 허우적거리지조차 않는다. 계속 앞으로 굴러가는 레일 위에서 잠시를 모르고 언제나 뒤를 향해 달린다.

나는 안다. 너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나의 절망임을. 나는 외면해버린 나의 목적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절박함을.

길을 잃고 방황하는 너는 나를 기준점으로 여긴다. 나는 단지 뒤로도 앞으로도 가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을 뿐이다. 삶의 방향을 땅바닥에 내던져 스스로 포기해놓고 남은 건 얄팍한 자존심과 꼭꼭 숨긴 상처뿐인 내가 쉼 없이 향하는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나를 찾아와 기대는 너를, 언젠가는 한 것조차 잊어버릴 약속을 내거는 너를, 나는 날 위한 핑곗거리로 쓴다. 내 모든 실패와 순응이 너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

몸도, 마음도, 기억도 무엇하나 온전하지 못한 너는 내 삶 속에서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같은 마음으로 온전하다. 내가 뭣 모르는 아이였을 때부터, 마지막 숨을 뱉는 순간까지 너는 내 곁에 있을 게다. 꼭 제 이름처럼. 너는 내 손에 온전히 쥐어진 유일한 것이다. 하고 싶은 것 없고 되고 싶은 것 없는 내게 너는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게 열심히 뒤를 향하면서, 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바라봐 준다.

차가운 두 손을 맞잡고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달콤한 단어들을 뱉는다. 창백한 얼굴에 옅은 웃음이 피어나는 꼴이 사랑스럽다. 무릎 위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다 내 목에 제 얼굴을 비빈다. 불안과 고통에 달달 떨던 건 그새 잊어버렸나보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네게 무슨 일이냐 묻는다. 해결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같이 가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내게 칭얼거리는 너를 보고 있으면 뭐라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뒤틀린 모순. 나의 유일한 존재. 보잘것없는 나를 이정표로 대우하는 널 볼 때마다 자그마한 걱정이 자라난다. 너와 달리 나는 생각보다 일찍 아슬한 경계에 서게 되어도 아득바득 기어서 살아갈 만큼 삶에 대한 애착도 미련도 없다. 어쩌면, 호흡하는 것마저 지루해져서 그만둬버릴지도 모른다. 종착점이 어디든 어떤 이유든 중요한 건 무한히 떠도는 너와 달리 나는 유한하다.

내 모든 시간이 너로 꽉 채워지고 내 시간에 끝이 오고 난 후에 네가 길을 잃으면. 또 다른 나에게 달려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파하는 너를 위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품에서 웃으면. 혼자 망가진 라디오처럼 계속 되감기만 하게 되면. 나는 너의 유일한 존재가 절대 될 수 없는데, 없는데. 유일했으면 좋겠어, 이기적이게도. 같이 살아갈 용기도 없으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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