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매패] 외로움
나는 언제나와 같다.
백만가지 상실 위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하여 멈추지 않는다. 파도에 쓸려간 모래는 행성 반대편의 해안에 다시 쌓인다. 내 상실이 방황하다 쌓일 곳은 오래 전에 정해져 있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와 같다.
오늘 내가 갈 곳은 어제도 간 곳이요, 내일도 갈 곳이다. 쉼터 하나 잃었을 뿐이니 목적지가 달라지진 않는다. 깜깜한 하늘 위에 서서 하나, 둘. 다시 계산한다. 58번째 오늘. 216번째 세상. 다시. 다시. 시간을 잘 못 정하고 있잖아. 300년은 더 전으로 가야 해. 잡념이 기워 만든 뇌 위에 차오른다. 58번째 오늘. 217번째 세상. 어쩌면, 73번째 어제. 기준점을 잃은 시계가 방황한다.
틈새가 벌어진다. 매개체가 없기에 진동이 없고 때문에 소리가 없던 나의 공간 위로 세상의 일부가 압력에 밀려 쉼 없이 빨려 들어온다. 그러니까, 바람이 분다. 적막한 곳을 소리로 채우면서 바람이 분다. 나는 내 여행의 과정 중 이때가 가장 싫다. 거센 바람보다는 갈 곳 잃은 소리의 파편들이 싫다. 날카롭고 찢어지며 울리고, 그리운 것들이 실려 온다. 예를 들면, 목소리 같은 것. 나를 위한 게 아닌 달콤한 목소리. 그렇기에 틈을 열고 나면 잽싸게 몸을 빼 빠져나온다. 나는 외부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그러나 나는 발을 뻗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웃음소리. 들은 지 오래된, 내가 그리워하는 소리. 흰색 정장을 입고 여유롭게 고개를 까닥이는 너.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 나는 갈라진 틈새 사이가 TV 화면이라도 되는 양 멀뚱멀뚱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는 TV.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는 중인. 너를 향해 손 한 번 뻗어보려다 그만둔다. 네가 아니니까. 내 존재가 너를 아프게 하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흰 옷을 입은 에드워드가 동료로 보이는 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화면 밖을 나가고 나서야 틈새를 다시 닫았다. 아니, 사실은 좀 더 그 앞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 빙빙 떠돌던 소리마저 희석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돼서야 닫을 수 있었다. 조금 춥다.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떠오른 것일 수도 있고. 그닥, 중요하진 않다. 나는 늘어진 기억을 엉금엉금 주워 담았다.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 심장이 간지럽다. 아직도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나보다.
어느 날부턴가, 너는 죽어갔다. 느리고 느리게. 처음에는 생활패턴이 무너져 온종일 잠만 자기도 하고 어떨 때는 죽어도 잠이 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흘 밤낮을 연구에 몰두하느라 혹은 급박한 전투가 쉼 없이 몰아 쳐서와 같은 요인이 잦았기에 누구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다친 적도 없는데 고통을 호소하고 툭하면 감기로 고생하더니. 이제는, 스스로를 상처 내고 갉아먹었다. 또 번뜩 모두 괜찮아진 것처럼 굴다가도 종일 울고 짜증 내다가 구역질을 했다.
너의 죽음은 너 자신도 모를 만큼 느리게 찾아왔기에, 네가 자각했을 즘엔 이미 웃는 법조차 잊어버린 후였다. 나는 여전히 선명하다. 내가 돌아오면 누워있다가도 내 이름을 부르고 안아주던 너를 기억한다. 그리고, 더는 내가 너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한 날을 기억한다. 차갑고 힘겨운 뒷모습. 무너져 누구 하나 누울 자리가 없어진 마음. 나는 내쫓기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네 옆에 앉았다. 잠시 여행을 멈추고, 꽤 오랫동안 네 옆에 머물렀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너를 깎아버리고 내게서 기댈 곳 하나를 또 앗아가는 마지막 과정. 눈물 한 방울 없었지만 옅은 웃음 한 조각 없던 시간이었다. 구태여 네 수발을 들거나 뭉개진 비탄을 달래려 노력하진 않았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누운 네 발치에 앉아있거나 등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듣는 뭐 그런 정도. 기껏해야 너의 하나 남은 말 상대가 되어주는 게 다였다. 이는 삶이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를 간호할 것도 아니면서 하루하루 병들고 닳아가는 네 옆에 남은 까닭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기에. 내가 겪은 고독을 네가 겪지 않았으면 해서다. 혼자 죽는 건 너무 아프고 쓸쓸하니까. 너는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떠나고 나면 내가 혼자 남아 외로울까 걱정하던 너의 말이 울렸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내 상실을 걱정할 온기가 남아있다면 네 손을 덥히는 데 써야지. 네가 떠나도 나는 언제나와 같을 거야. 혼자가 되는 게 처음도 아니니까. 끝까지 이기적이어야지. 우리가 지금까지 머나먼 미래의 땅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했던 것처럼. 너 자신을 위해. 끝낼 시간이야. 잘 자.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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