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매패] 거짓말쟁이
냉정한 사람
“자, 가져. 너 이거 좋아하잖아.”
며칠 보이지 않던 패러독스가 대뜸 선물이라며 내민 것은 디아볼릭 에스퍼였다. 도미네이터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이 짜증 나고 귀찮은 사념체는 어느 날부턴가 집에 멋대로 눌러살며 제 관심을 끌려고 온갖 수작질을 해댔다. 꼭, 그 애와 똑같은 눈을 하고서는 사람 속을 온통 뒤집어놓는다. 그러더니 이제는 사람을 납치해와서는 선물이라고 내민다. 인신매매도 하는 줄은 몰랐다. 도덕성을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도미네이터도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도 정도가 있었다. 죽은 애인의 모습으로 찾아와 장난을 치고 같이 자자고 하지를 않나 소화도 못하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한다. 그 애가 좋아하던 1인용 소파에 앉아 잠을 자는 척을 하는 것도 짜증 나고, 둘이 함께 걷던 공원을 가자고 끌고 나가는 것도 싫었다. 그러더니. 그러더니 이제는 다른 시공간의 애인을 냅다 데리고 와서는 마치 그 애가, 에스퍼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도미네이터가 패러독스를 노려본다.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패러독스의 손에서 디아볼릭 에스퍼를 낚아채 제 등 뒤로 숨긴다. 패러독스에게 끌려오며 공격도 받았는지 디아볼릭 에스퍼는 제 복부를 부여잡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자신을 경멸하는 도미네이터를 보며 패러독스는 어리둥절해한다.
“왜 화를 내? 이제 곧 생일이잖아. 난, 난 그래서.”
“그래서 뭐. 죽은 애인 대신 데려왔으니 칭찬해달라고?”
“네가, 그것만 찾으니까. 제일 멀쩡하고 건강한 거 찾느라 며칠 동안 힘들었는데…. 얘 걱정만 하고, 나한테는 왜 화만 내?”
“넌 처음부터 역겨웠어. 항상 그랬다고.”
패러독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으나 도미네이터는 차가웠다. 그는 뒤를 돌았다. 디아볼릭 에스퍼를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 한번 흘기지 않는다. 저 것과 말씨름마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도미네이터는 패러독스를 당장이라도 공격하고 욕을 뱉고 싶었으나, 관심을 주면 또 좋다고 어디서 누굴 데려올까 봐 참고 참았다. 패러독스는 질문에 답도 얻지 못한 채로 덩그러니 혼자만 남겨졌다.
-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른다. 패러독스가 자신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른다. 평소 지내는 작은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때와 비슷했던 모습으로 화장실 거울 앞에서 연신 가위질을 한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아깝지도 않은지 망설이지도 않고 자신의 어깨보다 조금 위로 잘랐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그대로다. 정확히는 계속 다시 돌아가다. 돌아갈 수 없다. 그깟 생김새조차도 다시, 그가 사랑하는 모습과 비슷해질 수 없다. 패러독스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지만,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잠시라도 단 5분이라도 좋으니까, 돌아가고 싶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항상 돌아가고 싶어 하니까. 언제나 생각하고, 원하고, 온 힘을 다해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의미 없는 가위질. 도달할 수 없는 과거.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꿈에 잠긴 파편 속으로. 다시, 다시.
차오르는 슬픔과 고통은 비워질 줄을 모르고 흘러넘치기만 한다. 머리카락이 그의 슬픔만큼이나 길어진다. 야속하게도 머리카락이 잘려 화장실 타일에 떨어지면, 미세한 입자로 흩어져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몇 시간 동안이나 자른 머리카락은 어디에도 남지 않아서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조차 증명할 수 없었다. 가위를 쥐고 있는 손이 아린다. 쉬지도 않고 움직였기에 손바닥과 손가락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패러독스가 가위를 놓쳤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화장실을 채웠다. 얼마 안 가 부서질 것같이 아프던 손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끔찍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패러독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얼굴. 그리고 가장 미워하는 얼굴이 있다. 더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린다. 다시, 다시. 패러독스가 중얼거린다. 떨어트린 가위를 줍기 위해 몸을 숙인다. 그러나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커다란 몸조차 부서진다. 패러독스는 주저앉았다. 강박적으로 가위를 들어 다시 가위질을 해보지만 머리카락은 그 자리에 없다.
“에스퍼, 괜찮아?”
조심스럽고 다정한 목소리. 패러독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문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패러독스는, 차오르는 감정에 벌떡 일어난다.
“아, 에스퍼라고 불러도 돼?”
“그래. 맘대로 해.”
또 다른 목소리가 답한다. 그가 낮에 데려온 디아볼릭 에스퍼였다. 패러독스는 차가운 바닥 위에 주저앉는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설령 할 수 있어도, 성공하는 일은 없겠지. 성공한다 해도 어쩐지, 그의 반가워하는 얼굴보다는 또 무슨 짓거리냐며 경멸하는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아주 잠깐이라도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단 한 순간도 웃어 준 적이 없었던 매정한 사람. 거짓말쟁이. 패러독스가 훌쩍인다. 가지 말라고 했으면서.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보고 싶었다고 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항상 짜증 나게 만드냐고 해? 패러독스가 몸을 웅크린다. 밖에서는 다정한 대화 소리가 발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졌다.
패러독스가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다. 에스퍼가 지냈던 방의 문이 웬일로 열려 있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앉아 디아볼릭 에스퍼를 침대에 앉히고는 정성스레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좋아할 거면서. 패러독스가 투덜거린다. 패러독스와 눈이 마주친 디아볼릭 에스퍼가 흠칫 몸을 떨자, 그가 자리를 옮겨 디아볼릭 에스퍼를 가리고 앉는다. 끝내 단 한번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일부러 미숙하고 건강한 놈을 고르고 골라왔으니 아마 3년은 살 수 있을 거다. 시공간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1년은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4년. 자신이 그때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보다 2배는 더 긴 시간. 패러독스는 끔찍한 고독감을 느낀다.
패러독스가 그의 차가운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한참을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다이너모에서 ‘집’이라고 저장된 좌표를 지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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