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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일부)> 사랑의 선택

<인간의 노래> 샘플

줄리아는 삼 년 만에 돌아온 자의 눈 속에서 신을 본 유일한 자였다. 어릴 적 손에 쥐어진 성서에서 믿음을 배운 그녀에게 그자 곧 신의 증거였으니, 신은 갈라진 보름달 아래 그의 모습을 빌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아, 신이시여. 제가 무릎을 꿇고 경배하길 원하시나이까. 참회하길 바라시나이까. 그를 보고 악마의 존재를 맹신한 자 많겠으나 신을 본 자는 그녀밖에 없다. 신께선 그들에게 합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죄지은 자 앞에 그가 던진 돌을 맞고 피 흘리는 자를 세우는 것 같이, 줄리아의 신은 그녀 앞에 삼 년 전 지은 죄악의 증거를 내어 그분에게 망각이 없고 가리개가 없고 모든 저울이 한때는 평형이었음을 내비친다. 그자를 통해서 신은 줄리아에게 말한다. 보라, 네가 죽인 자다. 줄리아는 대답한다. 예, 제가 죽였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정한 자와 달리 줄리아는 단 한 번의 부정 없이 저의 부정을 인정한다. 줄리아는 삼 년 전 자신이 죽인 자를 잊지 않았다. 그를 자신이 죽였음을 잊지 않았다.

사신과 같이 형형한 눈을 가진 사내의 키는 줄리아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한 뼘이 더 컸으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삼 년도 더 전에 땅에 묻혀 썩었어야 할 남자는 기억을 거스르고 서 있다. 그의 몸에선 탄 냄새가 났지만, 줄리아는 그가 화장을 거쳐 매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줄리아가 기억하는 앙리 뒤프레의 최후는 단두대 앞에서였다. 그곳에서 줄리아는 성호를 그었다. 신에게 기도했다. 신께서 당신의 그물로 치어 한 마리도 놓치지 않으며, 낟알과 쭉정이를 한데 두지 않고 반드시 골라내어 아궁이에 던지시는 걸 알면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내 불태우고, 올이 풀린 천을 두고 보지 않으시며, 깃털처럼 가볍고 티끌처럼 작은 무엇도 그분의 저울을 기만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축복에 취해 그분이 단죄의 신이심을 곧잘 잊는 자들과 달리 그분의 엄정함을 잊지 않았음에도. 찬양하라, 경외하라! 우리가 그분 앞에 춤추고, 노래하고, 엎드리고,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라, 네 죄를 네가 감하지 못하더라도. 줄리아는 그날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내 가장 사랑하는 이를 대신하여 이 청년의 영혼을 당신의 손으로 거두소서. 지옥은 내 몫이리니, 나는 나의 임과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으리다.

수 시간 전처럼 여겨진다. 누군가 문을 두 번 두드렸었다. “무슨 일이야?” ‘누구야’라고 묻지 않은 건 저에게 용건 없는 자를 방에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 저택 안팎엔 본디 고용된 사냥꾼 외에도 빅터가 불러온 자들이 많았으나 줄리아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기억했고 구별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목소리는 이곳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빅터가 경고한 살인마. 정작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밝히지 않는 빅터의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접니다, 마님.” 방문자는 오랜 시간 저택을 위해 일한 사냥꾼이었다. “주인님께서 마님께 급히 전하실 말이 있으시다고.” “그래?” 익히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나 줄리아는 문 쪽으로 걸음 하는 대신 전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 떠나기 전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빅터의 당부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그의 누이를 죽인 괴물이 오늘 밤 자신의 출현을 예고했다. 저택 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신이 목숨 바쳐 막을 것이나, 혹시 모른다며 빅터가 쥐여준 권총은 그녀에게서 멀리 있지 않았다. 빅터가 총을 건네줬다는 사실과 총의 위치는 오직 줄리아만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으나 그녀는 깨어 있었다. 빅터는 괴물을 죽이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줄리아는 빅터가 돌아오기 전까지 잠들 생각이 없었다.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 유리등은 밤새도록 방을 밝힐지도 몰랐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으나 눕지는 않았고, 글자를 읽기엔 새벽이 멀어 다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암송하며 동이 트길 기다렸다. 저 밖, 홰 끝에 타오른 불이 어둠을 억지로 트고 유리 위에 불그스름하게 어른거리지만, 낮에 비교할 바는 못 됐다. 횃불 아래 밀려난 밤은 발아래에 짙게 고이고, 빛을 흡수하되 반사하지 않는 짙은 암흑은 그 속에 무엇을 숨겼는지 보여주지 않아 빅터의 불안을 부추긴다. 수 시간 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억지로 삼킨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고 끝내 게워내던 빅터의 곁엔 줄리아도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곁에서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저주를 받아도 나의 선택이고,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찾아온 고난을 끝내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같은 곳에 매장되리라고. ‘나는 그대와 함께 죽고 싶어.’ 빅터의 고백에 줄리아는 화답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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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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