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노래> 샘플 페이지

<샘플(일부)> 초콜릿은 원래 쓴맛이다

<인간의 노래> 샘플

룽게는 제네바의 이름 높은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가신이었지만 처음 프랑켄슈타인의 성에 당도했을 땐 기억력이 조금 좋을 뿐인 작은 남자아이였다. 까마득한 수의 해가 성의 가장 높은 탑 끝에 걸렸다가 호수 아래로 잠기는 동안 그는 자랐고, 늙어갔다. 정원사 밑에서 갈퀴질을 하던 아이가 풋맨의 정장을 걸치고, 마침내 개인실을 허락받으며 경칭으로 불리기에 이르는 시간은 코 흘리던 소년이 장년을 넘어 중년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는 중에 때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곁에서 지키기도,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죽음을 지켜보기도 했다. 유년기에 저무는 생이 적지 않은 시절이었다.

룽게는 자신이 곰의 거죽을 두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프랑켄슈타인이란 뒷배가 있지만, 자신은 프랑켄슈타인이, 곰이 아니다. 거죽을 두르고 있을 뿐이지. 세상엔 얼마나 많은 토끼와 여우가 자신이 곰인 양 젠체하는가.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그런 자들이 득실거리다 못해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점 안은 매일 저녁 맥주잔을 깨뜨릴 기세로 테이블에 내려놓는 취객들의 한풀이로 떠들썩했고, 한창 젊은 시절의 룽게도 그들의 말에 동감했다. 자기네 주인이 백작 나으리라며 자기도 작위라도 받은 양 거만 떠는 꼴이란 정말이지! 안 그래도 재수 없는 자들이 가득한 귀족들 모시느라 하루에도 수 번씩 열이 뻗치는데 아랫것들까지 재수가 없으려니! 곧잘 분통을 터뜨리던 나날이였다.

그때를 추억하면 지금은 그때처럼 화를 내지 못하겠단 생각에 입안이 썼다. 룽게는 이제 매일 아침 눈을 뜨기가 전날보다 힘들었다. 힘쓰는 일을 마다할 정도는 아니나 젊은 시절보다 부쩍 줄어든 체력은 무릎을 굽힐 때마다 절로 아이고,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게 했다. 언젠간 일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안정된 생활을 이어나가려면 지금부터 얼마나 준비를 해둬야 하는지, 원.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리는 태도가 껄끄러웠고, 온당치 않은 결정엔 이의를 제기해야 속이 시원했던 자신은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다. 앞에선 고분고분하게 예, 예, 하고 대답하고 뒤늦게 머리를 싸매고, 폐는 끼치지 말아야 잘리지 않으리라 한숨을 쉰다.

어린 도련님과 단둘이 외국으로 떠나야 하던 날, 룽게는 내색하진 않았으나 참으로 심란했더랬다. 그렇게 오래 버텼더니 좌천인가. 불길한 소문과 함께 내쫓겼으나 아이는 여전히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일원이었고, 룽게를 믿고 맡긴다는 전폭적인 신뢰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모양은 일단 그러했다. 친우들에게 위로까지 받았으니 말 다 했다. 참담했으나, 룽게는 그러한 감정을 절대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한숨이 나오려 해도 제 손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아이를 본 순간 잇새로도 새어 나오지 못하게 입을 꽉 다물었다. 심란하다니, 참담하다느니 하는 표현을 어떻게 이 아이 앞에서 쓸 수 있겠나. 철없이 투정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눈을 감고 잠든 체하나 울음을 참느라 숨을 헐떡이는 아이의 머리를 조용히 끌어와 제 어깨에 편히 기대게 했다. 젖어가는 소매에 전과는 다른 이유로 심란함을 느끼지만, 아이가 혹 눈치챌까 봐 한숨은 속 깊은 곳에 가라앉혔다. 아이고, 이리 어리고 여려서 앞으로 어쩌시려고. 험하디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나가시려고.

타국 땅에서 어린아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행사하지도 못하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얻어내는 일은 룽게의 몫이었다. 뻔뻔하단 소릴 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소릴 들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 자라지 못한 새끼 대신 큼지막한 곰의 거죽을 둘러쓰고 덤벼드는 일을, 룽게는 단 한 차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아이가 이젠 키도 부쩍 크고 건장한 청년이 되어 앞서 걷는데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울기만 하던 꼬마가 농담도 먼저 던진다. 뿌듯하지 않을 리 없건만.

“룽게.”

“룽게!”

“룽게…….”

“아이고, 무슨 일입니까요, 도련님. 이리도 급하게 절 부르시고…….”

“룽게.”

“불 좀 꺼줘.”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