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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자수

<인간의 노래> 샘플

그는 자수하였다. 결정한 이상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그러나 그가 자수하기 전까지 그는 이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과 같았다. 생각에 행동이 수반되었을 때 그 순간 드디어 그것은 결정되었고 확정되었다. 생각에서 그치는 결정은 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실체가 없으니 그것이 정녕 실존하느냐는 지적에 반박할 말이 궁해진다. 그러므로 그는 행동에 가치를 두었다. 행동으로 보인 결정엔 가치가 있었다. 설령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미한 변수가 되진 못하더라도 행동한 이상 행동은 행동 그 이상을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의지를, 두려움을 이긴 용기를, 또는 여전히 두렵더라도 마주하기로 한 자기 자신을. 지금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변화될 최악의 미래, 가능성, 그 모든 걸 대비하거나 예상하진 못하더라도 그 일부라도 감수하거나 감수할 수밖에 없도록 자신을 몰아넣는 의지. 신념. 그는 그것을 귀하게 여겼다. 귀하게 여기고자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설사 원명과 미움이 벌써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눌어붙었다고 해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 옳지 않았다. 오히려 고맙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다 네가 그런 짓을 저질러서, 또는 늦게 자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늦게나마 너는 행동했구나. 바로잡기 위해서 결정했구나. 나의 결정에 깃들 후회를 덜어주어, 그렇기에 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를 믿게 한다. 또는, 믿을 수 있도록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내가 믿던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믿을 수 있도록, 너는 너를 믿는 나의 등을 받친다.

그리하여 그는 자수하였다. 자수한 이상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기로 하였다. 자수하기 전 장의사의 집을 어지럽혔을 때도 얻지 못한 증거를 누군가 찾아내기란 요원했다. 그를 위해 다른 증거를 제시하기는 힘들 것이고, 그를 위하여 거짓 증언할 사람도 이 땅엔 없을 것이다. 거짓 증언인가. 그러나 그는 결정한 이상 자신을 가로막는 다른 증언을 모두 거짓 증언이라 주장할 용의가 있었다. 다행히 그가 입을 떼기 전에 진실을 거짓을 모는 다른 입이 있어 그는 피고인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고, 그의 입을 열지 않아도 되었다. 예상한 바였기에 새삼스레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직접 부정할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고마운가 하면, 대답할 수 없었다. 고맙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자신은 각오한 대로 그의 말을 철저히 부정하여 일말의 의심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알 기회가 사라져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앗아간 것에 앙심을 품을 리 없었다. 빅터가 첫 마디를 떼었던 순간에 당장 그의 입을 가로막고 가로채어 부정해야 했었나. 그러지 않은 그때의 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잠깐만, 잠깐만, 하고 돌이킬 수 없어진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나. 다행이다. 기회를 잃은 것에 그는 감사하였다. 요행을 바라기엔 늦었다. 왜냐면 그들의 손엔 이미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진정 결백했다면 그들이 이 자리에 선 것은 누명을 썼기 때문이겠고 억울한 그들은 누명을 벗기 위해 애를 썼겠으나 그렇지 않았다. 죽어 마땅한 자라고 해도 그들의 손으로 죽여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죽어 마땅한 자라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죽어선 안 되었다. 죽어 마땅한 자라고, 누군가 그를 가리키며 외친다. 한둘이 아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는 잠시 생각한다. 마땅한가. 이것이 나에게 마땅한 결말인가.

그러나 그는 자수하였다. 형은 아침에 집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바꿀 수 없고 바꾸지 않을 것이며 바꾸지 못할 결정이니 그가 이 같은 것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그때까지였다. 어쩌면 누군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난 뒤에 자신의 시간을 들여 그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모를 일이다. 그 누군가는 후일 그가 애써 잘 묻어둔 진실을 파헤친 뒤에, ‘마땅치 않았다’고 선언한 다음 횃불을 들어 올릴지도 몰랐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람은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도 알 수 없다. 무엇을 알 수 없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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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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