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 안쪽에 흐르는,
2022 합작 참여작: 그늘에도 마른 포도넝쿨 얽히매
*약간의 성적인 묘사와 상해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에블린 그 자신이 지른 불이었다.
잘 관리된 붉은 머리카락이 그 색을 똑 닮은 불길이 쏘아내는 바람에 휘날려 그물 같은 그림자를 엮어내고 있을 때, 에블린은 성냥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반절이나 비어있는 성냥갑이었다. 불길을 가속하는 기름과 저택이 완전히 불에 잡아먹히기까지 계속 던졌던 성냥개비, 불타고 있는 저택까지 모두 에블린은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에블린은 하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고 그가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사이의 우선순위를 아주 잘 알았다.
에블린은 이사벨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사벨라도 에블린을 선택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사벨라가 얼어붙을 것처럼 얇은 옷을 입고 잿가루를 눈처럼 맞고 있었다. 손에는 가주 취임식에나 쓰는 오래된 황금빛 잔을 들고서.
에블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휘날리는 재 사이로 손을 뻗으면 불꽃 같은 붉은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눈동자가 그의 품 안으로 가볍게 뛰어들어왔다. 에블린이 그 검은빛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짙은 불의 냄새가 났다. 한 입 깨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향이었다.
손목 안쪽에 흐르는,
공백 포함 10206자
도시에서 가장 밝은 데다가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살롱의 샹들리에 아래에서 소문은 바람 빠지는 법을 모르는 풍선처럼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신들의 인맥과 신분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자들은 부풀고 부풀다가 정점에 이르러 터지는 순간 사라질 소문을 한낱 유희거리로 소비하고 있었다. 가질만한 것들을 다 가진 이들이 소비하는 소문은 그런 것들이었다. 강도, 폭행, 불륜, 그리고 살인.
"오늘도 시체가 나왔다지요?"
"잉글랜드 은행 근처였대요."
"제가 지나가면서 봤는데, 또 온몸의 피가 다 빠져서."
"거리가 핏빛이었겠습니다."
"창백한 것이 그 시체에 한때나마 피가 있었다는 것도 모를 정도라고 하더군요."
"목덜미에 또 잇자국 두 개가 있었나요?"
"그렇다네요."
"낭만적이지요. 상대에게 목덜미를 온전히 내어주는 기분은 어떨까요?"
순간 기분 좋게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뚝 끊겼다. 사교계의 귀족들이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방법은 늘 그랬다.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양 입을 꾹 다무는 것.
그러나 개중에서도 외부인에게 호의적으로 구는 사람이 몇 있기 마련이다. A 후작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고 이사벨라가 무안해지지 않게 말을 붙여주기 위해 입을 떼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말을 쏟아내는 이사벨라에게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카멜리아 양."
"그 사람에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포도주를 넘겨줄 수만 있다면."
"벨라."
"이비?"
먼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잔소리하는 에블린의 뺨에 가볍게 비쥬를 남긴 이사벨리가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팔짱을 껴왔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잖아."
시선으로 소문의 온상지를 가리킨 이사벨라가 손가락으로 에블린의 팔을 옭아매듯 감싸 쥐었다. 상체가 더 가까워져 검은색의 짙고 가는 머리카락 바로 아래에 빙하를 닮은 푸르고 맑은 눈동자가 있었다. 그 눈동자가 이 살롱의 최정점에 있는 하트 가의 소공작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이사벨라는 자신을 대하는 사교계와 살롱의 공기가 어떤 색을 띠는지 모르는 것처럼 순진하게 굴지만, 지금의 이 행동은 지난주에 막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던 카멜리아 백작의 사생아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함의가 깊었다.
이사벨라 카멜리아를 몇 마디 말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몇 달 전 갑자기 나타난 카멜리아 백작의 외동딸.
사교계는 물론이고 귀족사회에도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그를 그러나 백작은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탓에 살인사건의 소문이 사교계의 물 위로 떠오르기 전 가장 큰 이야깃거리는 이사벨라였다. 더럽고 추잡한 정도를 가리지 않던 소문은 지난주, 사교계 데뷔를 하던 이사벨라가 영국 사교계에 군림하다시피 하는 하트 공작가의 소가주인 에블린 데브나 하트를 대동하고 등장하자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사교계의 인사들은 하트 소가주와 카멜리아 백작의 사생아의 사이를 추론하고 상상하기 바빴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에블린과 이사벨라 앞에서는 입을 싹 닫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
물어볼 만한 사람이 이사벨라밖에 없다는 것처럼, 에블린이 이사벨라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이사벨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주워들었던 살인사건에 대해서 몇 마디 설명했다. 에블린은 집중해서 듣는 척하더니 그의 시선보다 조금 낮은 검고 하얀 정수리에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팔짱을 낀 어깨에 가만 기대고 있던 이사벨라가 웃으며 살짝 핀잔을 놓았다.
"이비, 듣고 있는 것 맞지?"
"요는, 요즘 밤 골목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지."
"벌써?"
대답 없이 이끄는 손길에도 이사벨라는 더 말 붙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순순히 따랐다. 그 순순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에블린이 이사벨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붙잡아 바로 뒤를 돌았다. 인사 없이 자리에서 바로 등을 돌리는, 그 자리에서 방금까지도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무시하는 태도. 그것은 굉장히 무례했으나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이란 무례를 당한 이들이 그 무례조차 거침없음으로 포장해주게 했다. 숨을 죽이고 예법에 따라 무릎을 굽혀 그들을 배웅한 것은 자리에 있던 이들이었다.
에블린 님이 카멜리아 양을 많이 아끼나 봐요. 열렸다 닫힌 무도회장의 거대한 문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웅성거리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별다른 의미 없이 이사벨라에게 말을 붙여주고자 했던 A 후작의 등에 잠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몸을 돌려 걸어나가기 직전 에블린 소공작이 후작에게 주었던 시선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에블린 데브나 하트 소공작과 이사벨라 카멜리아 백작 영애가 무슨 사이인지, 영국 전역의 소문을 꿰차고 있는 영국 사교계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
하트 공작 저는 늘 타는 듯한 붉음을 유지했다. 붉은 벽지는 핏빛만큼 어두워 단단할 정도로 위엄있는 저택의 분위기를 유지했고 난간과 연결되는 커튼은 막 해가 뜨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내보였으며 서재에 깔린 융단은 금색의 태슬이 어울릴 정도로 붉었다. 응접실 소파의 쿠션마저 붉은색이었다. 눈을 피로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의 색을 덧대어도 자연의 색보다 뒤떨어졌다. 저택의 붉은색은 하트 가문이 자랑하는 붉게 곱슬거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돋보이기 위해 존재했다. 그것을 위해 저택 내부를 다소 강박적일 정도로 붉게 꾸며두었으나 가문의 직계가 지내는 방만큼은 붉은색보다는 검은색과 금색을 주로 썼다. 그것은 소공작인 에블린의 요구였다.
붉은색의 캐노피 아래에서 검은색 이불 위에 누운 채 에블린은 몸을 반만 돌려 턱을 괴고 있었다. 그가 돌아누운 쪽에는 당연하게도 이사벨라가 엎드려 있었다.
이 시간의 나른함과 따뜻함을 에블린과 이사벨라 둘 다 좋아했다. 보통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나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사벨라는 맨 어깨를 공기 중에 드러내고 책을 읽는 데 열중이었다.
에블린은 이사벨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전부 해주고 싶어했으므로, 바깥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의 방 안을 데우는 장작을 아끼지 않았다. 이사벨라가 어깨까지 이불을 올려 덮지 않은 이유였다.
캐노피 안쪽에 내내 고여있던 공기와 새벽 동안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타오르는 벽난로의 공기가 합쳐지며 살갗을 서늘하게 만드는 수증기가 있었다. 어쩌면 에블린이 두 시간 전에 남긴 물컵에서 솟아오른 단순한 수증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사벨라의 뺨에 내려앉은 물방울은 후텁지근했던 오 분 전의 방 안을 떠올리게 했다.
이사벨라는 요즘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맛을 들였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그전에는 취향이랄 것이 없었다. 에블린은 글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오랜 연인을 위해 바쁜 소가주의 일정 중에 시간을 내었다. 이사벨라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에 비하면 좋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글자 수업은 꽤 일찍 끝나 벌써 실전의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매주 화요일 저녁 에블린이 단어와 문장의 난이도와 길이 따위를 생각하며 골라 늘어놓은 책 중에서도 이사벨라는 언제나 로맨스 소설을 골랐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내용을 알아맞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붉은 표지를 보니 오늘은 「로미오와 줄리엣」인 모양이었다. 로맨스 소설. 그러나 서로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사랑하는 남녀가 나온다고 다 로맨스 소설은 아니라고 에블린은 생각해왔지만, 이사벨라는 아니었다.
"재미있어?"
벌거벗은 어깨를 문지르며 에블린이 물었고,
"재미있어."
대답은 에블린의 손이 둥근 어깨를 지나 뒷목에 가닿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책 읽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대답은 그럴듯했으나 깊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날 옆에 두고 읽을 정도로 재미있단 말이지, 벨라."
둥근 어깨를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기어코 뒷목까지 도달했다. 둥글게 깎인 손톱이 약간의 심술을 담아 이사벨라의 뒷목을 간질였다. 키득 웃기 시작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에블린은 손을 뻗어 이사벨라가 읽고 있던 책을 가져왔다. 이사벨라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머리 위로 손을 바짝 들어 올렸지만, 에블린이 옆구리를 간질여오자 깔깔 웃으며 손에서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 장까지만 읽을 생각이었는데."
"'성자상은 입술이 없나요, 그리고 거룩한 순례자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이사벨라가 천장으로 완전히 내보인 에블린의 가슴 위로 바짝 달라붙어 누웠다. 웃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책을 쥐고 있는 에블린의 팔에 닿는 위치였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만나는 것이 성스러운 순례자의 입맞춤이잖아요.'"
"'기도할 때 써야 하는 입술'은 어디로 가고?"
"어디 있을 것 같아?"
질문에 답해오는 질문에 에블린이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책을 덮었다. 그러면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사벨라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키스를 졸라왔다. 에블린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난스레 상대방의 입술 새로 호흡을 불어넣을 때마다 젖은 것들이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을 두어 번 반복하며 이사벨라가 얕은 곳에서 응수해올 때 에블린이 입안 깊은 곳에 숨을 집어삼키며 훅 밀고 들어갔다. 이사벨라가 즐거운 듯 눈을 휘어 웃으면서도 팔꿈치 안쪽을 꼬집어왔다. 그렇게 세 호흡을 내어준 이사벨라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에블린의 뺨을 꾸욱 밀어냈다.
"오늘 해줄 수 있는 키스는 여기까지야."
하지만 이사벨라가 반쯤 간과하고 반쯤 의도한 것이 있다면 에블린은 저택 내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단번에 몸을 뒤집자 에블린의 가슴 위에 누워있던 이사벨라가 검은색 이불 위로 떨어졌다. 그럴 때면 이사벨라의 검은빛 머리카락은 이불과 하나인 것처럼 넓게 퍼지고는 했다.
"글쎄."
에블린이 이사벨라의 귓가에 짚은 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전히 빼내어 캐노피 밖으로 휙 던졌다. 이사벨라는 책이 융단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가를 살짝 찡그렸으나 못 이기는 척 제 귓가를 매만지는 손가락에 얽혀들었다.
***
"벨라, 왜 내 피는 먹지 않는 거지?"
에블린이 그렇게 물었을 때 이사벨라는 막 첫 입을 맛보려고 했다.
이사벨라는 '식사'를 하고 싶을 때면 에블린에게 간단한 언질을 해두는 버릇을 들였다. 처음으로 말없이 저택을 나왔을 때 에블린이 화를 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에블린에게 꼬박꼬박 도착지를 알렸고, 가끔은 '메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러면 에블린은 언제나 이사벨라의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도착해있었다. 가끔은 '메뉴'를 먼저 준비해놓고 있었으나 언제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단단히 낀 채였다. 그러나 한 번도 동명이인을 데려온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식사' 때마다 아주 맛있는 향을 풍기는 인간을 하나 대동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은 것은 이사벨라에게 있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식사'의 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기보다는 참고 참다가 못 참을 때가 되어서야 그것을 맛보는 성격이었으므로 도리어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사랑이랑 식욕이 구분되지 않으니까 그래."
이사벨라가 얕은 대답을 던져놓고 다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아직 심장이 박동하느라 뿜어져 나오는 피에 입을 막 대려던 순간이었다. 내내 단단한 팔짱을 끼고 있던 에블린이 다가와 그 손목을 잡아챘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깃펜처럼 피를 흡수했다. 이사벨라는 손목을 잡아오는 인력보다도 한층 무거워진 제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는 중력을 먼저 인지했다.
"런던의 모든 귀족을 다 잡아먹을 생각이야?"
"어쩌면."
"왜?"
"푸른 피에서는 불의 맛이 나니까."
"나도 귀족인데?"
이사벨라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얇은 나이트가운과 코트 하나만을 입고 축축한 런던 뒷골목에 주저앉아있는 사람이 지을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손끝부터 손목까지 피투성이인 채로는 더더욱.
"그걸 원하는 거야, 이비? 내가 여기서 네 목을 물어주길 바라?"
"그래."
단번에 대답하며 에블린은 피로 젖어 끈적거리는 손에 깍지를 껴왔다. 이사벨라는 소리 내 한 번 웃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깍지를 풀어내고 바닥에 쓰러져 식어가는 남자에게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마지막 숨을 듣는 것처럼.
"나도 그러고 싶어, 이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왜?"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나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널 사랑하고 싶어."
그 말은 어쨌거나 이사벨라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에블린이라는 뜻이었으므로, 에블린은 순순히 깍지가 떨쳐친 채로 가만 서 있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이사벨라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이글한 눈빛을 쏘아 보내지 않고는 이 '식사' 자체를 못 견뎌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사벨라는 숨이 끊기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남자의 얼굴 위에 귀를 댄 채로 에블린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느리게 아래로 떨어지는 입술은 에블린에게는 남자의 피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이사벨라는 늘 '메뉴'의 마지막 숨과 동시에 첫 입을 맛보고는 했으므로 어쩌면 그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방금까지 살아있었던 피에서 온기가 올라와 남김없이 이사벨라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에블린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단단히 걸어잠근 팔짱은 늘 그 자리에 함께했다. 이사벨라는 그 시선까지 제 '식사'의 일부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오히려 달갑게 여기는 때도 있었다.
***
"'이사벨라'?"
"네에."
"'벨라'라고."
온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지나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비'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의 집무실까지 순순히 이 여자를 들여보낸 사용인을 보며 에블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에블린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사용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검은 머리의 여자는 그 시선 앞에서도 당당했다. 눈빛만으로도 무언가를 불태워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하트 소가주의 시선. 자신을 '벨라'라고 소개한 이는 그 시선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는 유일한 여자였다.
빙하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순간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무기질성을 띠었다. 동시에 온순한 빛의 눈동자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불온함이 있었다. 무거운 십자가와 교회의 종소리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불온함이. 그러나 에블린은 그런 불온함을 아주 좋아했다.
동시에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꾸준히 자신의 곁을 맴돌았던 이가 적합한 자리를 찾아온 것을, 에블린은 알았다. 시린 동시에 불타오르는 눈동자는 한 번 본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블린이 첫걸음을 뗄 때 손을 잡아준 사용인과 그의 데뷔탕트 드레스 자락을 매만져준 사용인은 모두 빙하를 깎아 만든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게 왔다. 에블린이 이사벨라를 선택한다면 이제 이사벨라는 에블린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카멜리아 백작의 딸로 들어가면 되겠네. 그에게는 아들밖에 없거든."
새 이름을 받은 이사벨라가 환히 웃었다.
"데뷔탕트는 일주일 뒤. 그리고⋯."
"결혼식도 하자. 그로부터 2주 뒤에. 어때?"
에블린의 말을 끊고 들어온 이사벨라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그 끝이 창백한 듯 붉었다.
***
저택을 집어삼키는 불길은 치솟아 흑사병의 시대에 지어졌던 고딕 성당의 첨탑만큼이나 높아졌다. 검은 죽음마저 불태우는 불의 그림자는 검었으나 차지 않고 뜨거웠다. 그 아래에서라면 이사벨라의 체온도 꼭 인간의 것 같아졌다. 무언가를 파괴할 때 솟는 적나라한 흥분과 드물게 목숨을 위협하는 커다란 불에서 느껴지는 약한 공포감으로 이사벨라의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에블린은 품에 안은 이사벨라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올렸다. 손길을 따라 푸르고 붉은 시선이 에블린의 눈가에 가닿았다.
"우리 결혼 서약에 증인을 서줄 사람은 다 죽고 없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에블린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사벨라가 대답을 가로채 갔다.
"그래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비! 불이 우리의 증인이 되어줄 거야."
이사벨라의 손이 에블린의 손을 덮었다. 불길에 데워진 손이 군데군데 사람의 온도를 띠었다. 법정에서 진실만을 서약하겠다는 맹세를 위해 성경 위에 손을 얹은 것 같기도, 성당에서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기 전 부끄러워하며 손가락 끝을 살짝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둘은 본질에서 동일할지도 몰랐다. 각자가 서로의 것이 되었음을, 삶을 동반자가 되었다는 선언은 판사 앞에서의 것만큼이나 엄숙했고 어길 수 없는 강제력이 있었다. 이사벨라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둘은 반지를 교환하는 대신 피 맛이 나는 키스를 했다. 처음 맛보는 피의 맛을 음미하며 내려다본 이사벨라의 입술은 에블린이 불을 지르기 전에 하트 가문의 모든 사람으로 목을 축인 탓에 에블린의 머리카락보다도 붉었다. 에블린은 인간이었지만 이사벨라가 말하는 불의 맛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사벨라는 늘 에블린의 머리카락을 불에 빗대어 설명했다. 에블린은 불만이 이사벨라를 죽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왜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비교하는지를 물었다.
"그건 내가 배고프지 않을 때 사랑을 하고 싶은 것과 같은 거야."
"어디가?"
"불은 모든 것을 만질 수 있는 내가 유일하게 만질 수 없는 것이거든. 그리고 너는 불을 닮았어, 이비."
따뜻해지기 시작한 손가락이 생각에 잠겨있던 에블린의 뺨을 건드려왔다. 이사벨라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늘 그렇듯 말없이 미소만 지은 채로 손에 든 것을 건네었다. 하트 가문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황금빛 잔은 이제는 옛 영광이 바래고 새 영광이 시작되는 자리까지 함께였다.
에블린이 말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양각으로 새겨진 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렸으나 곧 이 행동에 긴장뿐만 아니라 약한 흥분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사벨라가 자신의 손목 안쪽을 인간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이로 물어뜯었을 때 에블린은 놀라지 않았다. 반이 뜯겨나간 손목에서 메마른 적 없는 샘물처럼 피가 쏟아져나왔다. 에블린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황금빛 잔 안에 이사벨라의 피가 넘칠 것처럼 넘실대었다. 결혼 서약을 끝맺는 포도주. 이사벨라가 가진 가장 좋은.
"마셔, 이비."
한 번에 마셔야 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블린은 잔에 입을 대었다. 당장에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 그런 온도 아래서 눈 대신 재를 맞으며 마시기에는 그것은 너무 뜨겁고 신선하여 도리어 역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참을 수 있었다. 잔에 담긴 모든 것이 이사벨라의 일부였고 이 모든 과정이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이사벨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에블린을 너무 사랑해서 이사벨라는 이 모든 것을 불 앞에서 진행하고 싶어했다. 그것을 위해 에블린은 성냥을 아끼지 않고 불을 질렀다. 예정대로라면 그가 소유해야 했을 모든 것에.
두터운 융단이 얇은 책이 떨어지는 소리를 집어삼키듯이, 눈처럼 쌓인 재가 황금빛 잔이 떨어지는 소리를 집어삼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사벨라는 에블린의 목을 물었다. 이사벨라가 예고한 대로 무는 이와 물리는 이가 모두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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