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끝

1923


언니는 어디에서 왔어요?

악의 없을 질문이 퍽 난처하게 느껴진다. 공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한나절을 울다가 겨우 말을 꺼낸 아이였으니 대화를 여기서 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색하지 않을 만큼 뜸을 들이다가 직전에 머무르던 마을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대신했다. 고작 사흘 머문 것이었지만, 질문에는 답이 될 것이었다. 자신을 골똘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느낀다.

나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어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엄마랑 아빠는 다시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언제라곤 말을 안 해요. 평생 집에 못 돌아가면 어떻게 해요?

부모가 이리로 오고 있다는 말을 믿은 모양이었다. 피난민 본부에 이름을 올려두긴 했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는 사실을 굳이 아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변명이야 아이가 먼저 물어올 때에 지어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연달은 질문을 해치워야 할 때였다. 에스더는 차라리 변명을 늘어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따뜻하게 데운 차를 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있잖아,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제법 흔한 일이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다. 그건 아이를 위한 설명인가, 자신을 향한 변명인가?

이곳은 중동의 한 분쟁 지역으로, 공습과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머글 세계고 마법사 세계고 혼란으로 가득했다. 길거리의 어딜 가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상실은 흔한 일이다. 사람들은 희망을 찾으면서도 희망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으며 때론 역겨웠다. 그러나 적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님이 찾아온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방공호에 들어가다가 아이를 놓쳤다는 그들은, 다친 곳은 없었으나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 쪽의 셔츠 단추가 하나 잘못 채워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그것을 지적할 상황이 아니기에 에스더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아이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헤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뒤늦게 그에게도 감사를 표해 왔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요.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을 그저 내버려둔다. 이들이 또다른 상실을 겪지 않았음에 기뻐함이 옳았다.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나야 할 텐데 아이를 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쉬고 가라는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는 가족을 배웅한다. 참을 수 없는 공허를 느낀다. 어째서?

홀로 떠돈지 꼬박 오 년이 되어갔다. 여전히 그는 좋은 사람이었기에, 동행과 일자리를 제안하는 사람은 꾸준히 있었다. 제안이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혼자를 택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상처입을 뿐이라면 더는 곁에 아무도 두지 않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안락함,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좌절감. 이제는 어렴풋해진 마을을 떠올린다.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였고, 그들이 미웠다. 오브라이언의 헛간이 떠오른다. 차가운 밤공기로부터 자신을 지키던 난로를 기억한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없었나? 자신에게 물은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돌아가지 않기를 택한 것 뿐이다. 적어도 오브라이언들은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 그러니 내쳐지기 전에 떠나왔을 뿐이다.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이 두렵다… 그는 학교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교사를 꿈꿨다. 자신을 거두어준 곳이므로 그곳을 벗어날 마음이 없었다. 우물 안의 세계에 만족한다. 나의 집, 나의 세상. 인간은 홀로 살아가지 못하므로 사람들 사이에 몸을 담군다. 함께하는 삶. 그것이 올바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버려진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은 올바름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었나?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도망친다, 머무르지 않는다, 뿌리가 메말라 숨이 막힌다, 눈을 감는다, 그저 죽은 듯 살아간다…

부모의 품에 안겨 웃던 아이의 얼굴을 되새긴다. 그것은 질투다. 혼자 됨을 두려워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기를 선택한 이에게 주어지는 환희. 자신은 오래 전에 포기한 것이었다. 두려움 뒤에 묻어두었던 진실을 응시한다. 에스더 골드슈미트는 언제고 귀환을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와는 맞서야 했다. 불화는 금물이다, 또다시 애정 어린 시선이 비난을 담은 것으로 변질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시선을 두는 한, 비난을 애정으로 바꿔놓을 가능성 또한 있었다. 오랜 꿈을 다시 꺼낸다. 그는 언제고 안온한 세계를 원했다. 그러므로 분열이 가득한 세상이 변하기를 바란다. 그래, 비난받는 것이 싫다면 비난하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거야. 실패하더라도 이제는 잃을 것도 없었다. 환희가 없는 삶이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졌으므로. 내일의 끼니를 위해 남겨 두었던 돈으로 펜과 종이를 산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한동안은 연락이 어려울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게 잘 될 테니까…

마지막 남은 종이를 제 앞에 놓는다. 결심을 적어내린다. 더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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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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