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낭만주의적 로망
비밀번호 : 성사일
1
트리스탄 로에그리아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과거 열여섯의 소년이었을 적 예술에 목매어 열병을 앓았던 것은 나이에 따른 귀여운 치기라 쳐도 나이에 열을 더한 지금까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아스트리아라는 나라를 견인하는 청년 지도층 중 한명으로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측면에 발을 두어야 했다. 정치란 자고로 눈으로 재고 머리로 측량하여 혀로 구현하는 실현의 노동이라 꾸는 꿈마저 몽상과는 멀어야 했다. 트리스탄은 가능성을 그 무엇보다 일순위로 두었다. 실현할 수 있는가. 현실에서 구현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계속 골몰 하다보면 모든 공간에서 낭만과 로망은 사라지고 지독한 무채의 세상만 남았다. 흐린 하늘과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보며 하는 감상 또한 우울보다는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챙겨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지독한 무감함은 개인이 현실에 매여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인 트리스탄 로에그리아에게 아발란체의 대표이자 마피아 보스인 이사카 반 다이크는 몽상과 환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정치인과 마피아 사이의 유착 관계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트리스탄 또한 머리로는 이사카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계속 견지해왔다. 그가 진탕 취해 누군가를 끼고 입술을 맞추건, 총을 맞고 너덜너덜한 몸으로 집앞을 찾아오건 간에 그는 이사카가 어두운 길을 걷게된 시점부터 제 맡은 소임을 위해, 더 나아가 자신이 책임지는 모든 인간을 위해 이사카를 무시하고 현실로 나아가야 했다. 이사카는 흰 돛 조차 아니다. 새카만 검은 돛. 희망 대신 찾아온 절망같은 존재이니만큼 다시는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트리스탄 로에그리아는 가끔 사무치게 외로운 날 스스로 자문하고는 했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이사카 반 다이크를 만나러 가는 게 맞지 않아? 내가 그렇게 보고싶어해 마지 않던, 네가 깊이 사랑하던 연약한 영혼을 끌어안고 네 편이 되어주겠노라 속삭이는 게 너의 원망(願望)이지 않았어? 어린 날의 마음은 트리스탄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번져나와 눈에 보일 만큼 커져간다. 무시하려해도 천장에 난 얼룩을 계속 바라보듯 트리스탄 로에그리아는 제 감정이라는 얼룩을 계속 바라보았으며 끝내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욕망을 저버리지 못함을 인지했다.
긴 시간 내내 트리스탄 로에그리아는 이사카 반 다이크가 보고 싶었다. 마음을 긍정받아 위로받고 싶었다. 그 또한 그랬노라 듣고 안도하고 싶었다. 현실에 머무르는 둘의 한계가 보이는 와중에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하는 일. 고작 그 하나가 트리스탄에게 남은 마지막 낭만이고 로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사카 반 다이크는 우산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트리스탄 로에그리아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그의 수몰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현실이지. 그는 지독한 무감함을 삼킨다.
2
비가 내리고, 가쁜 호흡이 귓가를 맴돈다. 느슨하게 풀린 긴장을 끌어올려 눈꺼풀을 올리면 뺨이 발그레한 남자가 있다. 잠든 사이에도 예민하게 비를 감지했는지 열이 올랐다. 트리스탄은 이사카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훑어 닦아내고선 몸을 일으킨다. 보통 슬그머니 눈을 떠 자신을 보곤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는지 고개만 푹 숙인 채다. 이렇게 열에 달떠 끙끙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소년의 낯이 겹쳐진다. 연약하고 무구한 반 다이크의 면모. 짙은 눈썹을 쓰다듬던 손이 눈가에서 멈춘다. 눈썹부터 길게 가로지른 흉터의 묘한 굴곡이 여러 감정을 이끌어낸다. 이 외에도 남자의 몸 구석구석에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리는 증거가 남아있다. 흉터부터 문신, 연이은 주사로 남은 멍과 알싸하고 텁텁한 풀의 잔향….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
“이사카. 많이 아파?”
“응…. 선배….”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부르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하는 후배의 뺨을 꾹 누른 손이 떼어지고 머리로 이후 할 행동이 차근차근 정리된다. 일단 물과 약을 준비하고, 몸을 닦을 만한 수건도 필요하다. 이전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며 투덜거리겠지만 비가 올 적의 이사카는 그 누구보다 연약하다. 그만큼 성가셔서 그에게 묘한 슬픔과 기쁨을 함께 주기도 했지만 이건 이사카가 알 필요가 없는 영역이었다.
“누워있어. 물부터 가지고 올 테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차 이사카의 손이 그를 힘없이 붙든다.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베개에 파묻혀 사라진다. 지낸 시간이 헛은 아닌지 용케 알아들었다. 하지만 가지않을 수는 없다. 트리스탄은 그를 두고 바삐 일련의 생각들을 빠르게 수행한다. 물, 약, 수건, 미온수…. 돌아왔을 적 남자는 벌겋게 익은 몸을 반쯤 들어올린 채 문을 응시하고 있다. 왜냐고 물으면 한참 말이 없다 작게 중얼거린다.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왜?”
“꿈에서는 늘 그랬으니까.”
“내가?”
“응.”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약해지고 정신이 무너지면 헛생각을 한다. 침대가에 앉아 손을 뻗어 뺨을 대면 고분고분 얼굴이 손바닥에 비벼졌다. 몽상의 영역에서 상처는 현실보다 깊이 벌어진다. 밤은 어둡고 고요해 잠재한 성가신 생각들이 통제없이 풀어진다. 가끔은 그 중 하나가 부피를 키워 갈비뼈 안쪽을 꽉 짓눌렀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런 답답함과 두려움으로 이룩되었다. 과거 어린 소년들은 서로 난 상처와 불안을 양껏 핥아주며 이를 치유했다. 위로는 둘에게 있어 큰 공감대였으므로 형성된 양태에서 안정을 느꼈다. 작금의 둘은 어떠한가.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심음으로 지워내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들이 교차한 지점은 아주 머나먼 과거로, 다시 돌아와 얽혔다 한들 둘은 서로의 과거에 어떠한 공감도 할 수 없다. 다만 사랑했다. 트리스탄은 이사카의 등에 한쪽 팔을 두르고 뺨을 맞댄다. 이럴 때만 따끈거리는 몸은 열네살의 소년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제 등을 꽉 쥔 손만큼은 지독히도 차가워 시리다. 눈을 깜빡이면 호흡이 닿는다.
“선배 어디 안 가.”
나직하게 속삭이면 이사카의 차가운 손은 다시 바닥을 향한다. 남은 손으로 굳게 잡는다. 다시는 놓지 않으려고. 마지막 남은 낭만과 로망은 그렇게 길게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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