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범죄자의 수기
키워드: 가지 않은 길
2090.06.23.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에는 Diary Method(; Diary studies)라는 것이 있다. 이는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이나 특정한 작업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 일기, 또는 일지를 통해 연구자로 하여금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방법을 뜻한다. 이것은 일기를 통해 특정한 사용자 집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조사 방법 중 하나로, 연구 대상자의 실제 생활과 맥락에서 도출된 데이터 표본을 얻는 것에 주요한 목적이 있다. 연구참여자들에게 전달되는 일지나 일기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구조화 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으며, …
그러니 아마 내가 이 종이와 펜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 짐작한다. 감옥에 세들어 사는 범죄자의 일상이라 해봤자 뻔하잖은가? 특별한 사건도, 예상치 못한 일도 없을 텐데. 시시각각 머리 위에서 돌아가는 CCTV가 하루 일과를 전부 보여주고 있음에도 굳이 일기를 작성하라며 시킬 이유는, 내 머리로는, 그정도 사건이 아니고서야 짐작가는 게 없다.
하루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을 정하는 것. 그것이 심리학에서 생각하는 일기의 목적일 터다. 과거의 나로부터 오늘의 내가 만들어지고, 오늘의 나는 내일로 이어지며,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하루하루들이 모여 특정한 자아를 가진 개체를 형성한다.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하겠냐마는, 더군다나 과거의 죗값을 치루게 하겠다며 억지로 우겨넣은 사람들만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그 원인을 좇아 장단을 대어보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싶다.
서른을 족히 넘긴 이 나이에 다른 길을 생각해보는 것 만큼 무의미한 것이 또 있을까. 말 그대로의 인생이다. 나는 죄를 지었고, 보기 좋게 걸렸으며, 사람들에게 비난받았고, 그런 이유로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하나를 되짚어본다한들 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 뭐 어쩌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면 죄 따위 짓지 않고 건실하게 살며 이 아름다운 사회에 이바지하겠다, 그런 사탕발린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건가? 돈? 명예? 그딴 시덥잖은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내가 마약에 손을 댄 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차고 넘치는 돈이나 지위로도 갖지 못하는 건 단지 호기심에 대한 충족이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빌어먹을 연구 따위가 날 이렇게 만든 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다. 나는 표본이 필요했고, 이런 불법적인 일에 대한 표본을 공공연히 구할 수도 없었던 데다, 씨발, 내가 왜 이딴 변명이나 하고 있는 거야?
다른 길? 어디서부터가 다른 길이란 말이야? 모든 건 연쇄였다. 그 시작을 찾을 수도 없는, 어디서부터 시작된지 모르는, 모든 게 하나하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연쇄였단 말이다. 바꿔야한다면 어디서? 연예인들에게 마약을 팔았을 때부터? 아니, 그냥 판매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마약을 만들었을 때? 마약에 흥미를 가졌을 때? 마약을 먹은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궁금해졌을 때? 그것도 아니면, 심리학에 인생을 바쳤을 때? 그들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을 때? 전공을 정했을 때? 더 연구하겠다 마음 먹었을 때? 어떤 시기의 나를 원망해야 하고 잡아 죽여야 하는 건데? 그래야 당신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는 건데?
장담컨대 내 인생에 다른 길이란 없다.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빌어먹을 인간들을 밟고 서서 우월한 척 굴고 싶어서만은 아니고. 당신들이 사람 인생을 손에 쥐고 테세우스의 배 놀이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삶이 바뀌어야 괜찮은 인생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 바뀐 내가 결국 나라고 할 수 있겠냐고. 이 망할 감옥에 처박힌 것만 해도 13년인데. 처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게 스무 살인데. 서른이 훨씬 넘은 이 나이에 인생의 4할을 잘라내고 나면 뭐가 남느냐는 말이다. 그게 여전히 내 인생인가? 그게 여전히 현선희인가? 범죄자도 아니고, 보기에 예쁜 꼴이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은’ 모습으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내 것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시지. 부러워 미치겠다고. 어린 나에에 돈도 벌고 연구도 하는 모습이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그래서 질투난다고.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서라도 날 멈춰세워야만 했다고 지껄여보시지. 그게 대중의 본심이잖아. 나는 감히 하지 못하는 짓을 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고, 성공하고···. 왜? 너희가 떠받들던 그 인간들을 망친 게 나 같아? 웃기고 있네! 그 인간들이야말로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어!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왜 애꿎은 나한테 와서 화풀이야?
처음부터 기대 따윈 안 했겠지만, 애초에 이딴 걸 연구 자료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랬다면 더 멀쩡한 인간을 찾아갔어야지. 희대의 범죄자 운운하면서 카메라부터 들이미는 것도 역겨워 죽겠는데······.
관둬.
관두자고.
댓글 1
예의바른 청설모
범죄자를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것에 교화의 가능성이 있는가? 범죄자를 감옥에 수감시키는 것이 교화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징벌의 목적 그리고 격리의 목적도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을 제외로 두고 오직 교화만을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교도소라는 공간은 어떠한가?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교화되어 출소 이후 바른 삶을 살아가는 이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동시에 교도소라는 공간은 범죄 기술과 새로운 공범을 찾는 공간이자, 사회로 나갔을 때 지우지 못할 낙인을 찍어버리는 장소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악인은 결국은 악행만을 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 자신을 버리고 변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이다. 특히 자신의 죄에 있어서는, 인간은 결국은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기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진실로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손에 꼽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도소라는 시스템은 저 어려움을 돕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는가? 교도소의 또 다른 목적으로 격리와 징벌이 존재하는 이상 진실로 교화를 위한 교도소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교도소의 존재 가치를 퇴색시키는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범죄자를 교도소에 넣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저것보다 더 나은 범죄자의 처벌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교도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 또한, 그것이 기만이라고 생각될지라도, 단 한 명의 범죄자라도 교화될 가능성이 있다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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