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chell

03

2~3부

어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움의 대상인가?

왕자는 빛을 가져왔으나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아소르의 마물 토벌대는 아소르 왕실의 많지 않은 직속 군사 중 하나다. 각지의 영주들에게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영지를 가진 귀족은 치안 유지를 위해 일정 정도의 사병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나 마물은 사병의 수를 늘리는 데에 좋은 핑곗거리였다. 

마물 토벌대는 왕실이 귀족의 사병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라고 여겨졌다. 사병 증원을 허가하는 대신, 마물 토벌대를 파견해 주겠다고 하면 되니까. 때문에 토벌대는 그곳이 아무리 멀거나 험지여도, 터무니없는 임무더라도, 전투를 마친 직후일지라도 명령이 떨어진다면 향해야만 했다. 좋게 말해 기동대이고, 공공연히 왕실의 심부름꾼이라 불리기 일쑤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수도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개선 행진 따위는 없고 바로 다음 작전지로 향하는, 영예 따위는 없고 아무도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그런 부대.

때문에 2왕자가 직접 마물 토벌대를 결성했다고 했을 때, 당황한 것은 귀족만이 아니었다. “그런 부대가 있었어?” “기사단하고는 다른 건가?” 마물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수도의 평민들은 조금 혼란스러워했지만, 왕자가 마물로 고통받는 각지의 백성을 구하러 떠난다고 하니 곧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수도 백성들이 뿌리는 꽃잎과 환호를 받으며 왕자는 토벌대와 함께 성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는 귀족들의 심정은 좀 더 복잡했다. 왕실의 군대가 귀족의 땅으로 향한다. 2왕자가 몸소 이끄는 무장 세력이.




미첼이 처음부터 토벌대의 대장직에 자원한 것은 아니다. 미첼은 토벌대의 규모를 늘리고, 각 영지에 토벌대의 초소를 세우고 마법사를 파견해 아소르 전역의 마물과 하늘섬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했다. 마력석의 채굴량과 소모량을 파악하고 하늘섬과의 영향도 기록해야 했다. 어느 것도 왕실의 지원과 영주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마력석의 유통을 보고 받겠다는 주장은 귀족들에게 숨통을 막겠다는 말로 들렸다. 줄곧 바깥으로만 나돌았던 2왕자에게 이만한 사업을 추진할 힘도, 세력도 없는 건 당연했다. 

태녀는 왕실의 지원을 약속하는 대신 2왕자가 왕가를 축복하는 신성 마법사가 될 것을 요구했다. 미첼은 거절했다. 1왕자는 귀족들의 협조를 약속하는 대신 왕위 계승권 이양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미첼은 거절했다. 미첼은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그들의 도움을 부탁하는 동생이 아니라 아소르의 책임을 함께 지려는 왕자로 대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태녀와 1왕자의 경계심을 부채질했다. 태녀와 1왕자의 제안은 막냇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고, 미첼이 무릎을 꿇을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무대에서 퇴장할 생각이 없는 2왕자는 또 다른 경쟁자였다. 미첼은 원하는 만큼 토벌대의 규모를 키울 수도, 각지에 초소를 세울 수도 없었다. 

몸소 토벌대의 대장직을 맡은 건 달리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2왕자가 직접 토벌대를 이끌겠다는데 기사와 마법사의 충원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왕성에 더 이상 제 자리가 없었다. 

집인데 내 자리가 없다니 참 이상하지. 미첼은 성문을 나서며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첼이 이끄는 토벌대의 정식 명칭은 아소르 마물 토벌대 제3부대였으나, 세간에서는 흔히 빛의 기사단이라 불렸다. 실제로 토벌대 내에 기사 작위를 가진 자는 5할도 되지 않는다거나, 토벌대를 이끄는 왕자도 기사가 아니라는 점은 평민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미첼 왕자가 있는 전장에서는 어둠을 사르는 빛이 솟구친다. 강렬하고,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첼이 마력을 키우면 키울수록, 더 많은 수련을 거듭할수록 빛은 점점 몸집을 키워나갔다. 창공을 가르며 낙하하는 창의 몸신이 온통 빛으로 눈부셨고, 대지를 밝히는 빛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 마물로 뒤덮인 분지에 빛이 쏟아져 내렸다는 이야기에는 거짓이 없었다. 마물로 고통 받는 지역마다 왕자의 영웅담은 우후죽순 퍼져나갔다.

미첼은 그것이 단순한 마력의 응집체라고 설명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신의 마법으로 위안을 얻는 누군가가 있다면 거기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리라 여겼다. 토벌대에게는 정해진 주둔지가 없었으므로 언제나 떠돌이 신세였으니, 항상 피로와 싸워야 하는 병사들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낯부끄러운 찬양 정도야 감수할 수 있었다. 빛의 왕자라 불리든, 빛의 기사단이라 불리든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첼이 마물로 고립된 어느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일찌감치 빛의 기사단을 맞이하러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소문과 달리 빛의 기사단은 후광을 뿌리며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시간 말을 타고 달려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추레한 몰골에, 빛나는 은빛 갑주가 아닌 여러 번 수선한 오래된 갑주를 입은 전사들이 마을로 들어섰다. 선봉에는 백마를 탄 금발의 청년이 있었으나, 그 역시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 보통의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호해야 하는지 낙담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부관이 미첼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빛이라도 뿌려주세요, 왕자님. 다들 기대하고 있잖아요.”

“그게 지금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정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때 미첼이 보고 있던 것은 몰려든 사람들의 손발이었다. 겨울임에도 빛의 기사단을 맞이하겠다고 나와 기다린 사람들의 발갛게 언 코와 귀를. 오랫동안 장작과 석탄이 도착하지 않아 동상으로 잘라야 했던 손가락을. 해진 신발과 때로는 드러난 발을 보고 있었다.

미첼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결국 찾지 못했다. 눈송이 대신 빛무리가 느리게 떨어졌다. 햇볕만큼 작은 온기를 품은 빛은 잘라낸 손가락을 다시 만들어주지도, 배고픔을 잊게 해주지도 않았으나 얼어붙은 코끝을 녹일 만큼은 따뜻했다. 터서 갈라진 손끝을 조금 아물게는 해줄 수 있었다. 

잠시나마 대로변은 봄철 한낮처럼 밝았다. 마력의 고갈을 느끼면서도 미첼은 미소를 지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었으므로 미소를 짓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마물을 토벌하라고 보내진 부대가 무너진 수로를 복구하고 울타리를 세우는 일에 동원되어도 미첼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며 병사들을 달랬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교모임을 열지도 않는 왕자에게 왕실의 거액이 들어간다며 품위 유지비를 대폭 삭감당했을 때도 미첼은 불만이 없었다. 

아소르 전역에 빛의 기사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귀족들은 더욱 왕자의 토벌대를 경계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왕성에 돌아간 적도 없는 데도 태녀의 견제 역시 여전했다. 여전히 누구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기에 미첼은 각 영지의 귀족을 만날 때마다 토벌대의 초소를 건립하는 일을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개는 성과가 좋지 않았다. 미첼의 정직한 성품은 협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왕자로서 귀족을 대하는 요령이 생겼다. 그들에게는 토벌대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설파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왕실이 실시간으로 영지를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는 것, 언제 마물을 명목으로 자치권을 침해당하고 세수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미첼은 서서히 그들을 안심시키며 대화하는 법, 부드럽게 설득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물론 대화를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마물의 준동 소식을 듣고 요청을 받기 전에 달려갔더니 영지에 진입하는 것조차 거부당한 날처럼. 왕자의 무장 세력이 곧 왕실의 칼이라고 여기던 귀족은 영지 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며 문을 걸어 잠갔다. 차라리 ‘티온’일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며 미첼은 드물게 화를 냈다. 

왕자는 분노 앞에서 침착해지는 법도 배워야 했다. 화를 내서 문제를 악화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눈앞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좌절에 익숙해지는 법도 배워야 했다. 간발의 차로 놓친 목숨은 너무나 많았다. 좌절했다고 포기하지 않는 법도 배워야 했다. 포기하는 시간만큼 또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동료를 잃어도 슬픔에 깊게 잠기는 대신 선봉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닮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미첼은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 누님은 그토록 사람들에게 엄격했는지. 왜 형님은 언제나 진심을 감췄는지. 이해하게 되자 그들이 더 이상 지고한 왕위계승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누가 왕이 되든 훌륭할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고, 자신도 문제투성이인 평범한 인간이었으므로.




평범한 사람은 언제든 평범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야 했는데.

미첼이 테레시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벌써 2년 전이었다. 그나마도 토벌대 개편의 건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시간을 내 왕성으로 향했더랬다. 테레시아는 왕자의 명성이 왕실을 드높이고 있다고 칭찬했고, 미첼은 마력석 유통청을 만들어주지 않을 거라면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다며 선을 그었다. 결국 어느 쪽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헤어져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자고 할까 했더니, 이젠 내가 몸이 무뎌 안되겠구나.”

“이미 제가 어릴 때 충분히 괴롭히셨잖습니까. 저는 아직도 사람을 상대로 진검을 드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미첼.”

언젠가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미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헌화를 하며 대답을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과의 평화였다고. 어떻게 검을 겨누고 평화를 얻을 수 있겠냐고. 더 이상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은 흰 꽃들 사이에 잠겨 있었다. 

미첼은 죽은 태녀의 관 위로 빛을 내렸다. 그녀가 여러 번 바랐으나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부탁을 이제야 들어줄 수 있었다.




왕자는 숨이 차도록 뛰고 힘껏 두 팔을 벌려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왕자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웅담의 그늘 아래 묻혔다. 도시마다 유행하는 빛의 왕자를 찬양하는 노래에 왕자가 구하지 못한 이의 이야기는 없었다. 마치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나 왕자는 자신의 실패를 잊지 않았다. 밟고 서 있는 목숨을 잊지 않았다.

그것들만이 왕자의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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