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chell

04

이피네이아

친애하는 이피.

잘 지내고 있니? 키르쿠스의 소식을 항상 받아보고 있는데, 근래에는 어떤 이야기에서도 네 이름이 빠지지 않더라. 답장이 어려울 정도로 바빴을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괜찮아. 나 말고도 네 대답을 기다리는 결정과 지시를 기다리는 부하들이 줄을 서 있겠지. 나한테도 그런 시기가 있었고… 그저 내가 보내는 편지가 잠시나마 네게 숨을 돌릴 여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보내.

나는 어제까지 남부의 대영주와 한판 하다 왔어. 정말로 한판 했다는 소리는 아냐, 점잖게 대화로 해결했지. 토벌대의 경계 초소 건립을 그렇게나 반대하더니, 마력석 광산이 죄다 마물의 공격을 받으니 토벌대의 손을 빌리고 싶어졌나 보더라고.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던 그림으로 동의를 얻어냈는데 썩 잘 해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나는 이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지만 않기를 바라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기분이야.

이피, 버겁지는 않니?

나는 항상 버겁다고 느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재주도 모자란 이가 덤비고 있다고. 빛의 왕자니 뭐니 하는 좋은 소문이 도는데, 이런 때일수록 희망찬 이야기가 필요해서 자꾸 과장이 되는 거겠지. 내 바보 같은 판단으로 현장에 도착하는 게 얼마나 늦어졌는지, 내 말실수 한 번으로 보급이 끊길 뻔한 일은 어땠는지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무서워. 그리고 매일 생각하지. 나보다 더 유능한 이가 나타나서 기적처럼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고. 분명 나보다 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다음에 생각해. 아냐, 이피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했잖아.

어릴 때 나는 욕심을 버리는 법만 배우면서 살았는데, 마법사가 된 뒤로는 그게 참 어려웠어. 오만하게도 내가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소르와 아소르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주고 싶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무릎 꿇고 부탁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이뤄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지.

그런 꿈을 꿔놓고 현실이 힘들 때마다 무심코 생각해 버리는 거야.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이런 이야기는 참 부끄럽지만… 이피, 네게 쓰는 편지니까. 

정말로 내가 무언가 이뤄내기는 했을까? 내가 있어서 좀 더 좋아진 일이 있기는 할까? 내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상냥한 부관과 다정한 친구들은 날 위로해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하지만 이피, 너라면 알 거야. 그런 말들은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되었는지 증명해 주지 않아.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끔 있기는 했는데… 

그 순간들이 모두 선명하게 기억나. 내게 들꽃다발을 선물하던 이름 모를 아이의 얼굴, 보잘것없는 치유마법으로도 안색이 좋아졌던 노인의 웃음, 내가 지키지 못해 부상으로 전역했던 부하가 한발 앞서 마물 소식을 전하면서 자랑스레 말했던 “아직 왕자님께 도움이 되지요?”라는 말… 그런 것들을 보고 들은 날에는 잠깐이지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

그리고 다시금 깨닫는 거야.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이피, 너도 그런 순간을 찾았니?

약한 소리는 이 종이 위에서만 할게. 봉투에 넣고 나면 다시 미첼 히스티온 타라넥 아소르, 제3부대의 대장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이피, 너도 이 편지를 읽는 동안에는 내 친구 이피였으면 좋겠다.

언제나 건강하고 무사하길 바라. 늘 기원하고 있을게.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미치로부터.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