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쓰기
안 사귀는 태대태... 의 밑바탕으로 할 셈... 중학생~옥상 이후~바이크~농최날 이후 날조 종합 세트......를 1년 이상 끌다가 그냥 방생
1992년 8월 8일
"농구부, 들어갈까 하는데."
"그래."
료타의 말에 사과를 깎고 있는 카오루는 큰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마디를 뭐라고 뗄지 밤새 고민한 것치곤 맥 빠지게 쉬운 통보였다. 괜한 고민을 했다. 료타는 긴장 탓에 꽉 쥐었던 주먹을 펴 손바닥을 허벅지에 비벼 닦으며 작게 한숨을 돌렸다. 반가운 소식에 안나가 조금 신이 난 듯 식탁 위로 몸을 쭉 빼며 료타에게 다가갔다.
"료쨩, 예전처럼 시합하는 거야?"
"모르지, 시합은 주전이 하는 거니까. 라기보다 아직 입부 신청서도 안 냈고, 받아줄지도 모르고."
입부 신청서를 내기에는 좀 늦었다. 그래도 어차피 낼 거라면 개학하자마자, 8월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8월이 지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앗, 엄마! 피!"
"괜찮아, 먹고 있어."
과도에 손가락을 베인 카오루가 잠시 자리를 떴다. 안나는 깎다 만 사과와 과도를 집어 들고 마저 껍질을 벗겨냈다. 서툴지만 느긋하고 떨리지 않는 손은 금세 사과를 깎아냈다. 금방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온 카오루는 조심스럽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 주에 무슨 일 있었어?"
"저번 주?"
"공 가지고 나갔다가 금방 들어왔다면서."
네가 말했냐는 물음을 담아 안나를 쳐다보자 그래서 불만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별로.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응."
아무 일 없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저 누군가와 한 순간 마주친 게 전부다. 그러니 굳이 말할 만한 것도 없었다. 말수가 적은 카오루는 말수가 적은 료타를 추궁하는 일이 없었다. 딸은 그것에 익숙했고 내킬 때만 가족을 대신해서 캐물었다. 그렇게 료타의 농구부 입부 선언은 조용히 받아들여졌고, 카오루는 드디어 한시름을 놓았다.
잘했어, 힘냈다. 이 느낌, 잊지 마.
1994년 9월 19일 ⇒ 1995년 4월 1일
사립 학교는 돈이 든다. 스포츠도 돈이 든다. 나는 입시 때문에 고민 중이며 농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사립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낼 만큼 꼭 없어서는 안 될 수준의 체격이나 실력까지는 아니고 공부도 영.
소쨩이라면 오키나와에서 진학을 했겠지. 그리고 오키나와 대표로 전국 대회에 나간다. 나는 카나가와에서 진학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소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상은 의미가 없다. 아니, 인생을 좌우하는 고민을 하는 순간마다 소쨩에 대해 떠올리는 걸 그만둬야 한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느 학교로 갔을까. 아니면 그 때 이미 고등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지도. 아, 소쨩 생각을 그만하려고 할 때마다 이 녀석을 대신 떠올리는 짓도 그만 둬야한다.
"쇼호쿠는 어떠냐?"
"예?"
지난 현 대회 고교부의 토너먼트 표를 펼쳐 놓고 공립 학교에만 동그라미를 쳤다. 1회전이라도 이긴 학교에는 동그라미를 하나 더 쳤다. 그리고 통학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현 지도를 꺼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골라낸 명단에 쇼호쿠는 없었다. 그런데 진학 상담에서 나온 이름이?
"공립이고, 편차치는 조금 높으니까 공부를 신경 쓰는 게 좋겠다만은."
"저는……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쇼호쿠에도 농구부 있어."
아니, 그거야 알지. 아무런 고민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종이를 뒤적거리는 고문 선생님의 모습을 보자 약간 속이 끓었다. 참자, 이 사람도 농구를 좋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길 수 있는 학교로 가고 싶은데."
"그러니까 쇼호쿠지. 감독은 그 안자이 선수고, 올해는 괜찮은 신입생도 있다더군. 키가 190이 넘는대."
"아, 네."
"아, 그래. 작년 중학 MVP, 그 녀석도 쇼호쿠에 들어갔다고 했지. 이름이 뭐더라."
금시초문이다. 그래도 작년 중학 MVP가 누구였는지 생각하는데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선생님이 박수를 짝, 치며 외치는 게 더 빨랐다.
"미츠이 군!"
"미츠이."
"올해 대회에서는 한 번도 얼굴을 안 내밀었다던데, 그만한 녀석이 농구를 쉽게 관두지는 않았을 테니 뭔가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전 중학 MVP에 현 내에서도 벌써부터 손꼽히는 높이의 센터, 이 둘이 있으면 꽤나 해볼 만 한 팀 아니냐?"
그런가.
"너도 한 실력 하니까 네가 들어가서 다섯 중에 최소 셋이 쓸 만하면, 내년이나 내후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잖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강호교도 아니니 벤치가 부실한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기회라면 기회다.
“뭐, 미야기 넌 그 동안 키 좀 커야겠다만.”
이 영감탱이가.
진학 상담은 쇼호쿠를 고려해보는 쪽으로 무난하게 끝났다. 다른 스포츠계 부 활동도 있고, 여차하면 공부를 하면 된다는 거다. 확실히 190이 넘는 센터를 가진 학교는 강호교 중에도 흔치 않지, 게다가 딱 한 학년 위…….
쇼호쿠에 가기로 마음 먹은 뒤로 체력을 기르는 메뉴를 짰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가진 약소교에 가는 만큼 곧바로 주전이 되어 시간을 알차게 쓸 생각이다. 3학년의 존재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괜찮은 선수가 있었다면 현 대회에서 그렇게 빨리 삭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아, 가능해.
머릿속에 그린 그림이 확고해지자 료난의 스카우트도 큰 고민 없이 거절했다. 료난은 사립이기도 하고. 왜 하필 쇼호쿠냐는 물음에 사정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안자이 감독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입학식을 코 앞에 두고 견학을 갔더니, '미츠이 군'과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우연치 않게 근황부터 알게 되었다. 부상으로 농구부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사람이 기껏 계획을 세워놨더니 시작도 해보기 전부터 이 난리다.
영 맥이 빠져 입부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 농구는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공부를 하면…… 아니면 지금이라도 료난에 전화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봄이 왔다. 그리고 그녀와 만났다.
꺾이지 마!
1995년 5월 11일
옥상 구석에 누워있다가 '밋쨩'을 찾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본 건 입학식으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후의 일이다. 내가 쳐다봤을 땐 이미 사라져서 아무것도 못 봤지만, 그 녀석도 쇼호쿠에? 따위의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직감적으로 그 녀석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농구부에 없는 거지. 만약 같은 학교라면 당연히 농구부에 있어야 하는데 없는 두 놈의 조각을 끼워맞추다보니 영 싫은 그림이 그려진다. '미ー어쩌구'에 대해 생각하는 걸 집어치웠다.
스스로 핀치를 읽는 거야!
⇒ 1996년 1월 21일
겨우 잠들었다 싶더니 달갑지 않은 꿈을 꾼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공기는 바닷물을 삼켜서 무겁고, 햇볕을 받아 뜨거운 열기까지 머금어 무척 답답하다. 멀리서 실바람이나마 불어와야 겨우 숨통이 트인다. 눈앞에는 림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3점 슛 라인 앞에 서서 느리게 공을 튀기는 남자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꿈이란 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코트를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간다. 바닷가에서나 굴러다닐 고운 모래 알갱이가 운동화에 짓이겨지는 소리가 난다.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탕, 탕, 반동으로 튀어 오르는 공이 땅을 커다랗게 울린다. 그리고 훌쩍, 높지는 않지만 가볍고 빠른 점프슛이 공을 림 안으로 집어넣는다. 그물은 공이 통과한 후에도 거칠게 흔들리더니 림의 바로 아래에서 파도가 솟아난다. 거대한 파도는 굉음과 함께 코트 전체를 덮는다. 요란한 바닷물이 빠져나간 땅은 여전히 여름볕을 받으며 바짝 말라 있다. 어느 새 들려오기 시작한 매미 소리는 그렇게 크던 파도 소리를 집어삼켰다.
유령 같은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공을 주워 든 녀석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와 까만 반바지를 입었다. 왼쪽 손목에는 붉은 리스트 밴드가 끼워져 있고, 흰색에 붉은 선이 그어진 생김새가 익숙한 아식스 밧슈를 신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가벼운 바람에 잘도 나부낀다. 이렇게 더운데도 타지 않은 목덜미와 팔꿈치가 하얗다.
등 뒤까지 다가가도 돌아보질 않길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양손으로 들고 있는 공을 밀어 떨어뜨렸다. 깜짝 놀란 녀석은 공을 사수하며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아, 그렇군. 아는 얼굴이다.
싫을 정도로 강렬하게 새겨졌던 얼굴인데, 어제 막 그 얼굴 자체도 싫어진 참이다. 이름이 뭐더라. 꿈 속에선 아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르는 것을 생각해낸다.
녀석은 내게 공을 패스했다. 그리고 자세를 취한다. 상대할 마음이 들지 않아 받은 공을 어깨 뒤로 던졌다.
그대로 그 애의 멱살을 쥐고 넘어뜨린다. 땅과 부딪히는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놀란 얼굴은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위에 올라타, 녀석의 목을 쥔다. 기억보다 가는 그 목을 감아쥔 내 손도 생각보다 작고, 왼쪽 손목에는 검은 리스트 밴드를 하고 있다. 문득 앞머리가 눈가를 찌른다. 아, 젠장.
손에 힘을 주려고 했다. 잘 안됐다. 그저 가는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만 있을 뿐이다. 내 손등 위로 다른 손이 겹쳐온다. 녀석의 손이다. 붉은 리스트 밴드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아주 궁금하지는 않다는 기색과 약간의 흥미를 띄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다.
초등학생?
"아닌데."
꿈이라서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등 위로 누르는 힘이 가해졌다.
보여주기만 해선 못 빠져나가. 압박을 가해, 압박을.
"하……."
벌써 포기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
모처럼의 기술이 아깝잖아.
"모처럼의 기술이 아깝지, 너야말로."
들리는 목소리는 희미하다. 목소리라는 개념도 아닐 것이다. 단지 의미를 전달할 뿐.
꿈은 항상 조금씩 어설프고 엉망이기 때문에 꿈이라는 걸 이해할 때가 있다. 그 때 들었던 목소리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하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은 것처럼 착각하는 바로 지금처럼.
내 대답에 녀석이 빙긋 웃었다.
또 하자, 다음엔 이기러 와.
"시끄러."
진짜 싫다. 시끄럽다고 일갈하니 녀석의 이름이 떠올랐다. 밋쨩, 그리고 미츠이 히사시. 그러자 림과 바다는 사라지고 잿빛의 옥상이 된다.
옥상 한 켠에는 뒤집힌 배가 처박혀 있다. 보이지 않는 옥상 난간 너머에서 또 다시 파도 소리가 들린다. 아니, 바람 소리다. 하늘에서는 온갖 쓰레기가 내려와 난간 너머로 떨어지고 있다. 끊어진 낚싯줄, 올이 풀린 리스트 밴드, 찢어진 그물, 한 장 한 장 뜯어져 나간 월간 바스켓볼, 구겨진 가정통신문, 망가진 밧슈, 텅 빈 케이크 박스, 부러진 낚싯대, 먹어 치우고 남은 딸기 꼭지.
내 아래에는 먼 옛날의 다정하고 건방진 중학생과 미츠이 히사시.
그 이름과 얼굴을 함께 떠올리자 얌전히 쓰러져있던 기다란 몸에서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고압적인 시선이 나를 본다. 이것도 아는 눈이다. 오히려 이 중학생의 얼굴보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니 다음엔 무슨 말을 할지 쉽게 예상이 간다.
앳된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이 어떤 여름과는 다르다. 볼품없는 눈이 내리는 늦겨울과 닮았지. 녀석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한다.
"내 이름을 말해 봐."
모든 것을 내던진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온 머리에 울려 퍼지는 순간, 손 끝이 미츠이 히사시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깜짝 놀라서 잠이 깼다.
내 손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중학생의 목이나, 머리 하나는 큰 고등학생의 목이 아니라 내 목을 쥐고 있다.
어제 눈이 내려서 그런가, 흐리지만 커튼 너머가 밝다.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제대로 잠을 자기는 다 틀렸다. 정신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자 목이 쓰리다. 욕실로 가 거울을 보니 손톱이 파고들었는지 살갗이 조금 까졌다. 어차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 때문에 그 정돈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잠결이었던 만큼 힘껏 조른 건 아닌지 그 상처 외에 어딘가가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에 늘어진 상처들을 보니 다시 화가 났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게 변하지 않아도 됐잖아. 아직도 무의미한 말을 쏟아내고 싶은 내가 바보 같다.
농구가 잘 안된다. 요즘은 농구를 하는 이유마저 가물가물했다. 우리는 괜찮은 신입생이 한 명이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다음 여름에도 기적을 기대해야 하는 원맨팀에 가까운 학교다. 그나마 선전을 기대할 수 있는 선배와도 아직 호흡이 맞지 않는다. 나는 성질을 참지 못해서 아껴야 할 시간과 몸을 낭비하며 싸움을 했고 집에는 또 사고 쳤습니다, 하며 다친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자진 신고를 했다. 그리고 농구를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뭐 하나 잘 안 되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좋아질 것 같았는데.
나는 계속 제자리다. 한 발 내디뎠다가도 금세 뒷걸음질을 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부 그 자식 때문이다. 그 자식이 밧슈를 걷어찼다. 그 자식이 키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그 자식이 농구를 그만뒀다. 그 자식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농구를 다시 알려줬다. 그 자식이 먼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왜, 그 자식은.
당연히 원망스럽다. 그 사람에게서 소쨩을 느꼈던 내가 싫다. 그래서 이런 엉망진창으로 모든 게 섞인 악몽이나 꿔야하는 게.
소쨩.
농구는 추억으로 남겨두려고 했다. 소쨩이 없는 세상에, 소쨩과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농구 뿐이니까 그만둘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어. 단지 태어난 곳을 떠나 도착한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야. 본격적으로 팀에 들어가지 않아도 농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해변공원 쪽에서 큰 파도가 치면 혼자서 공을 만지고 있어도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소쨩의 마지막이 떠올라서 몸이 무거웠다. 그저 여태껏 해오던 대로, 관성적으로 공을 튕겼다. 그리고, 그 사람이 끼어든 거다.
모처럼의 기술이 아깝잖아, 그 말은 여기서도 여전히 내 농구를 할 수 있다는 성적표 같았다. 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가 어떤 확신이 됐다. 나는 소쨩을 보고 농구를 시작했고, 미츠이 히사시를 만나서 다시 농구를 시작했고, 그리고…….
바람을 쐬러 나가기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주워 입었다. 이부자리 밑에 어제 내던진 밧슈가 든 박스가 눈에 띈다. 잘 닦인 체육관에서만 신기 때문에 낡아서 버릴 때까지도 거의 깨끗한 표면이 지저분한 옥상 바닥을 굴러 얼룩덜룩했다.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 영 보기가 싫다. 내 눈앞에서 그걸 걷어찼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화가 난 상태로 다시, 거듭해서 화가 난다.
거실의 서랍장에서 테이프를 찾았다. 밧슈를 제대로 박스 안에 집어넣고 그 위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집에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도로가 막힐 것 같지 않아 조금 달려보기로 했다. 표지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도로가 이어진 그대로 달린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겠어, 아직은 쌀쌀한 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좀 식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밟고, 앞 차를 피하고, 밟고, 성가신 노란불을 무시하고, 다시 밟고.
나는 뭐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공부는 매번 낙제를 면하지 못했고 키는 별로 크지 않았고 성질을 참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집의 캡틴이 되지도 못했다. 빈자리를 채우는 건 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소쨩,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그 말을 되돌리고 싶어, 네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쓰러진 다음이 승부다, 료타!
1996년 5월 8일
누구보다도 과거에 얽매이는 건, 바로 당신이잖아.
이제 됐어.
1996년 5월 15일
예전처럼 머리를 깎고 나타난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인상을 구기고 센 척을 하길래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걸 제일 앞에서 관람했다. 앞인가? 아니, 옆이다.
어찌됐든 연습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다른 부원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으로 구는 모습은 전혀 없었고 갑자기 좋은 부활동 선배가 솟아난 것처럼 굴었다. 그 자체로 낯설어서 신경이 곤두서는 바람에 슛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하나미치 마저 놀리면서 신경을 긁길래 쥐어박았다. 그 사람은 힐끗 보기만 하고 1학년들의 지도에 집중했다.
하지만 문 단속만큼은 안 했다. 정리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먼저 사라졌다. 당당하게 돌아와놓고, ‘농구부’가 끝난 후의 시간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수요일, 주말에는 첫 경기.
할 수 없이 정리를 마치자마자 따라붙었다.
"헤이."
"아? ……뭐야, 너냐."
나리(ダンナ)나 코구레 상과는 연습 중에 대화를 한다. 그건 동갑이기도 하고, 세 사람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더는 예전 일을 말하는게 의미가 없다는 걸 세 사람이 모두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도 선배답게 농구에 대한 걸로 이래라 저래라 잘도 떠들었다. 듣고 있으면 꽤 유익하기도 했다.
문제는 나였다. 이 인간이 알고는 있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알든 모르든 쇼호쿠의 주전 포인트 가드는 나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맨날 도망을 가요."
"하? 누가 도망을 가."
턱 끝으로 당사자를 가리켜 보였다. 건방지다고 화를 내려나 했더니 의외로 별 말이 없다. 좋다, 내가 선심 쓰자.
"나한테 미안해서?"
"너한테 미안한게 아니라 내가 잘못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른 애들 안 불편하게 하려고 그러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인간, 치사하고 구질구질하다. 도저히 그 화제를 먼저 꺼내지는 못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길래 봐줬더니 한다는 말이. 그냥 좀 쳐다봤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선을 피한다. 답답해서 한숨을 쉬고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냥 미안하다고 하라고요."
내 말에 덩달아 한숨을 쉬고 뒷통수를 벅벅 긁는다. 그 난리를 피워놓고 사과 한 번 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고?
"너한테 따로 사과해봤자 그게 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짓 같아서 어려워서 그래.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면 받아주긴 하냐?"
"나 참, 사과를 해보기나 하지."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지 맘대로 판단한다. 사과가 사과지 마음이 편해지자고 하는 사과는 또 뭐란 말인가. 쓸데 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 내가 선심에 인심까지 쓴다.
"미안합니다."
"……뭐야."
내가 먼저 사과를 했더니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가로등 아래에 우뚝 멈춘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과를 들을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말 대신 이, 하며 앞니를 가리켰다. 아ー, 하고 알겠다는 소리를 내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하긴, 너 나 뒤지라고 팼지. 내가 니 밧슈 발로 차서."
어떻게 알았지.
뒤지라고 때린 건 아닌데요, 하고 대꾸하니 그냥 무시한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다시 농구를 하는 건 좋은데 그거 말곤 다 빡세. 체육관 밖에서 애들이랑 마주치면 진심 토할 것 같아."
"왜요?"
진심으로 묻냐는 듯 황당한 얼굴이 돼서 잔잔한 윽박을 지른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 방황은 끝나도 성질머리는 그대로다.
"나도 사람인데 당당하겠냐? 쪽팔려."
"나한테 한 마디도 안 걸더니 판 깔아주니까 안 물어본 말까지 하네."
"넌 그런거 신경 안 쓰잖아."
"내가요."
"응."
왜 이렇게 넘겨짚는지.
"나 존나 신경 써요. 티가 안 나서 모르나?"
"……."
저 때문에 열받아서 죽다 살아났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할 지경이다. 그래도 됐다, 그건. 생각해봐야 피곤하기만 하다.
"저기, 이런 말 하려고 일부러 따라온 거 아니에요."
"그럼 하고 싶은 말 해. 나 이 앞에서 길 건너야 돼."
"내가 우리 팀 포인트 가드인 건 알고 있죠?"
"어."
막상 순순히 대답을 듣고 본론이 나올 때가 되니 나하고 대화를 좀 하자는 말을 어떻게 해야 간지럽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전에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던 말을 꺼냈다.
"목소리 내면서 합시다."
"하…… 네가 아카기냐?"
아 씨.
"그게 아니라, 소통이 안 되면 팀 플레이도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심지어 가드 둘이서."
"알아, 그냥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랬어. 너도 걱정하지 말고 시킬 거 있으면 시켜. 스크린이든, 패턴이든."
"걱정 안 해요."
"얼굴에 다 써 있구만 뻥치시네."
아니 씨,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기가 막히고 말문도 막혀서 황당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말을 잇는다.
"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잖아."
"누가요. 내가요?"
"옥상에서 봤는데 모르겠냐?"
"……."
내가 저에 대한 건 신경을 안 쓰는 줄 아는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건 알고 있다고?
종잡을 수가 없다. 오지랖을 부리길래 다정한 줄 알았더니 치졸하게 집착했고, 눈치라곤 더럽게 없는 줄 알았더니 남들이 모르는 건 또 금세 알아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남 모르게 놀아난 게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미안했다. 진심이야."
주절주절 말이 많길래 절대로 사과는 하지 않을 줄 알았던 미츠이 히사시가 또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나 밖에 없는데. 게다가 길바닥에서 왜 이래, 이 인간. 편의점 앞이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다.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는 건 많아보이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정정당당하게 군다. 그렇다고 정정당당한 것도 아니잖아, 당신.
숙인 머리통을 내려다보니 밤송이 같기도 하다. 아무 대답도 없이 보고만 있자 먼저 고개를 든다. 인내심은 또 왜 이렇게 부족해, 머쓱한 얼굴이 올라가는 걸 그대로 쫓았다.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어요."
"아니, 이새끼야. 네가 무슨 반응일지 걱정되니까 그러지! 목소리 내면서 하자던 놈이 입 딱 다물고 선배 정수리를 쳐다만 보고 있네. 그렇게 봐 가지고 뚫리겠냐?"
“성질머리 하고는.”
"표정 보니 이제 됐나 보네. 나 간다. 내일은 말 걸면서 할게. 다음부터는 이런 일도 없게 하마."
가방을 다시 어깨 뒤로 둘러매면서 몸을 반쯤 돌린다. 고개만 이쪽을 향하고 선 모습에 기시감이 든다. 이 인간 이렇게 말해놓고 내일 되면 또 쪽팔리다고 안 나오는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도 문득 조바심이 났다. 나에게 다음을 기약한 놈들의 특징은 저는 빠진 채 나만 혼자 달랑 ‘다음’에 떠밀어버린다는 것이다.
"미츠이 상."
"이번엔 또 뭐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말 많다."
"시끄러워요."
"그래서 뭐냐고."
말하기 전에, 숨을 들이켰다. 잔소리가 많은 놈은 잠자코 기다렸다. 짧게 들이마신 숨과 함께, 말을 뱉는다.
"또, 한 판 하실래요. 원온원."
"이 시간에?!"
그래, 그냥 가라.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다. 그냥 가버렸으면. 진짜로 그냥 가길 바라면 그냥 해본 소리예요, 하고 수습하면 될 텐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사실은 그냥 대답이 듣고 싶었다.
미츠이 히사시는 소매를 걷어 빈 손목을 보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편의점에 들어갔다. 뭘 하나 지켜봤더니 편의점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다. 그리고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사서 나왔다. 삼각김밥은 두 개, 음료수는 2L짜리 페트병 하나.
"가자."
"이 시간에요?!"
"하자며."
"아니……."
"언제든지 상대해 준다며. 해. 약속 지켜."
이 씨발, 약속은 지나 지킬 것이지. 뱉는 말마다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든다. 진짜 안 맞아.
나도 항상 그래. 심장 쿵쾅쿵쾅.
그러니까, 힘껏 괜찮은 척을 해.
⇒ 1996년 5월 16일
"그러고 보니까, 그게 머리 민 거?"
날짜가 바뀐 걸 보고 하던 승부를 미루고 집에 가기로 했다. 코트를 나서는데 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이 시간까지 뭘 하는거냐며 붙잡혀, 학생증을 꺼내야 했지만 다행히 들고 있는 농구공과 농구화가 도움이 됐는지 별 탈 없이 풀려났다. 그래도 일찍 다니라며 괜한 잔소리는 들어야 했다. 미츠이 히사시는 의외로 정중했다. 경찰들은 꽤나 고압적이라서 함부로 대하면 당장에 서까지 끌려갈 수도 있다면서. 경험담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냥 참았다.
학생증을 내밀 때 흘끔 훔쳐보니 사진 속 머리 스타일이 지금과 또 다른 걸 보고 떠오른 머리 얘길 꺼냈다.
"시끄러, 너랑 원온원을 한 것도 아니고 머리를 왜 밀어."
"아 그쵸, 나 뿐이었으니까. 한 명이었던 건."
"야."
"그럼 나한테 지면 진짜로 뭐 할래요? 머린 안 밀거니까 안 지킬 약속 빼고."
"하긴 뭘 해. 반성하고 더 열심히 하는거지."
"오. 나쁘지 않네."
"넌? 지면 뭐 할거야."
웃기는 새끼네. 지는 당연한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할 거면서 나한텐 왜 물어봐.
"하긴 뭘 해요. 반성하고 더 열심히 하는거지."
"웃기는 새끼네."
똑같이 돌려주자 다시 똑같이 돌아온다. 뭐 하나 안 맞는 주제에 이런 건 또 왜…… 짜증이 나서 그냥 웃었다.
오늘은 수요, 목요일. 주말에는 첫 경기. 2년이나 늦어져서 할 일이 많다. 빨리 가서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헤어지기 전에 미츠이 상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침 연습 때 진짜 죽인다면서 성질내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잘 된 것 같아.
잘 된 것 같아, 소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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