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맞이
그는 불현듯 소매가 긴 교복이 썩 텁텁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늘가를 떠난 후에야 여름이 찾아왔음을 실감하듯.
입하. 슬슬 춘추복에 대한 불평이 터져 나오며, 봄부터 마음이 맞던 아이들이 재재대며 서로를 알아가고, 그중 몇은 친밀하게 이름을 부르며 이른 여름 방학을 꿈꾸는 때.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이토하라한테.”
“문 잠갔다고 했잖아!”
“잠갔어요! 잠갔다고요. 하~ 씨.”
“옥상 못 쓰게 되면 네 탓이다.”
‘이토하라.’
4월에 전학 온 이자요이 아게하 또한 친구를 사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친구'는 또래이기도, 나이가 적기도, 모범생이거나 이른바 양키이기도 했으며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와 가림 없이 어울리는 이는 달리 말하면 다소 무작스러운 사태도 방관하는 이다. 어느 한 쪽에 관여하게 되면 유락이 아닌 주재가 되기 십상이고, 모든 간섭은 공정할지언정 으레 원망을 사기 마련이기에.
“아직 1학긴데 벌점이….”
“그러니까 너 때문에….”
그는 저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펜스에 몸을 기댔다. 볕을 받아 살짝 달아오른 쇠그물이 찬 목에 닿았다. 여즉 불씨가 꺼지지 않은 담뱃불을 대강 그 주변에 지지며 주재자를 떠올린다.
“다음 이자요이 선배, 학번 불러주세요.”
내 이름을 알고 있군. 기실, 옥상 문을 열어둔 건 아게하의 단순 변덕이었다. 입소문을 타 보았자 양아치들이 순진한 모범생을 현혹했다는 얘기일 테다. 되려 연민하는 아이들도 있겠지. 이 정도의 작은 흠집이 필요할 때였다. 손 닿지 않는 별이 되고 싶진 않았다.
마침 불시 단속 중이었는지 학생회인 듯한 소년은 곧바로 필기구를 꺼내들어, 자리에 있는 문제아들의 이름을 죄다 써내린 후에야 성이 풀린 듯 작게 숨을 뱉었다.
“한 번 더 적발되면 등교 정지, 두 번이면 퇴학입니다. 아시겠어요?”
“네.”
마지막이 아게하였기에 대답하는 것도 자연히 그가 되었다. 뒤편에서는 짜증 난다느니,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투덜거림이 새 나왔지만 소년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주명의 태양이 내리쬐어 훤칠한 뒷모습을 비추었다. 자세가 곧고 걸음이 떳떳해 절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선명한 개나리빛 머리칼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서류 뭉치를 아슬한 높이까지 쌓아 든 뒤통수는 아니나 다를까 찾지 않아도 복도 저편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도와줄까요?”
“우왓!”
부러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예상보다 질겁한 반응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직한 웃음과 지물이 날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는 솜씨 좋게 받아내어 서류 뭉치의 반절을 멋대로 가져갔다.
“어?”
이토하라는 어벙한 소릴 내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채 소화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아게하는 짓궂게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름이?”
“네?”
“내 이름을 알잖아요. 그런데 난 모르면 불공평하죠.”
“어, 네? 아… 이, 이토하라 나나세요.”
“나나세. 한자는 어떻게 쓰죠?”
“아, 그러니까….”
방과 후의 복도는 얼추 주홍빛으로 물들어, 나나세의 푸른 눈도 따라 오묘한 빛깔이 되었다. 창살이 만든 그림자를 지날 때마다 다른 깊이로 바래고 찰랑이는 바닷방울이 그곳에 있었다. 자못 초연한 담화가 얼마간 이어지고, 고개를 드니 학생회실이 금방이었다. 성실히(혹은 얼떨떨하게) 답하기만 하던 나나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왜 도와주는 거예요?”
저는 선배 벌점 줬잖아요. 살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산들한 바람이 고개를 내밀더니 곧 방실대며 두 사람의 눈가를 스친다.
“이름을 묻고 싶었거든요.”
솜씨 좋게 한 팔로 서류를 받치고 문을 열어준 아게하가 먼저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뿐입니다.”
아게하는 서류 정리를 도운 후 짧은 인사와 함께 곧장 떠났다.
나나세는 홀로 남아 길게 늘어지다 문이 닫히며 뚝 떨어지는 그림자를 본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부실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다. 향과 색이 없는 사람이어서 방금까지 같이 있었음에도 회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불현듯 소매가 긴 교복이 썩 텁텁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늘가를 떠난 후에야 여름이 찾아왔음을 실감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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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
닦고 광내도 열없는 태도가 여전했다. 그의 앞에서는 늘 그랬다.
이형(異形)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다음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알았듯 떠난 후에야 나도 그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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