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점

닦고 광내도 열없는 태도가 여전했다. 그의 앞에서는 늘 그랬다.

클로 by 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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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도 서 있지 않은 등 뒤로 해가 떠올라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는데도 싫지 않았다. 매미 우는소리가 유난히 길고 우렁차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뭇 학생들이 꺼려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만 안취할 수 있었다. 종례 후엔 빈번히 교사 뒷편의 조그맣고 새카만 두 눈을 마주하며 다음 날 등교에 대한 다짐을 굳혔다.

담당 학생들은 구석진 사육장에서 살아가는 동물 따윈 잊은 지 오래다. 선생들은 으레 그렇듯 학생에게 당부한 일은 그 이상으로 참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만이 작은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동급생들은 분변 냄새가 난다며 놀리고 꺼려 했으나 부당한 처우는 그만둘 이유가 되지 못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살아가야 한다. 노력할 이유는 하나로 충분했다.

가방에 넣어둔 매점 빵 한 봉지를 꺼내 부스럭대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닌데.’

 

“토끼한테는 빵 주면 안 돼.”

 

쭈그려 앉아 있던 그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손과 바지는 단숨에 흙투성이가 되어 먼지가 폴폴 날렸다.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긴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학생이었다.

 

“어, 아. 응…?”

“탄수화물은 토끼에게 안 좋아.”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근래에 빵 쪼가리를 찢어서 먹인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진솔한 얼굴색이 대답을 대신했다 여겼는지 학생이 이어 말했다.

 

“죽을 수도 있어.”

“주, 죽….”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를 툭 뱉은 학생이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손에 들려 나오는 것을 보고 그가 입을 떡 벌렸다. 그야 누구라도 세일러복 안에서 상추가 줄줄 달려 나오는 장면을 보면 기이하게 여길 테다. 당초 저 작은 공간에 저만큼 들어갈 수가 있는지부터 의문이었다.

 

“자.”

“응…?”

“먹이라고.”

“아, 응.”

 

내밀어지는 상추를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상당히 기묘했다. 끝부분이 불그스름한 이파리를 받아 까만 토끼에게 내밀자 손끝에서 아삭이는 흔들림이 닿아왔다.

 

“그래도 죽진 않을 거야.”

 

그가 다시 망연히 학생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살아있으니까.”

“그, 그런 거야?”

“운이 좋았어.”

 

그는 영문을 모르는 낯이 되었다가 황급히 일어서 허리를 숙였다. 선도부 선생님에게나 향할 깍듯한 인사였다.

 

“고마워, 운자 양.”

“날 알고 있네.”

“그야 넌….”

 

‘유명하니까’라고 말하려던 그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실례되는 말이었다. 운자 사란은 교내에 이름난 기인이었다. 폭주족이라든가, 주먹질하는 양키라는 소문은 예사고 밤에 몰래 강령술을 한다거나 분필을 씹어 먹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어느 것이고 일관성이 없어 설득력도 적었지만, 곧 하나의 결론으로 좁혀졌다. 그 애는 이상해. 청소년 무리에서 배척하기엔 안성맞춤인 연유였다.

에이지는 예의 소문들을 듣고 생각했다. ‘정말 귀신을 만났을까?’, ‘분필은 어떤 맛이 날까?’

침묵하는 그를 본 사란은 알만 하다는 듯 가늘게 눈을 좁힌 채 되물었다.

 

“너는?”

“으, 응?”

“네 이름.”

“아… 모리야 에이지.”

“한 호흡이네.”

“응?”

“이름 말이야.”

 

도무지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어 에이지는 금세 혀가 굳어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듯 갑작스레 바지에 손바닥을 부딪혀 털어내자, 사란 쪽으로 흙 안개가 퍼져나갔다. 무심하게도 풍향이 그를 돕지 않았다.

 

“미, 미안!”

“갈게.”

 

그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화가 난 걸까 싶어 에이지는 안절부절해졌다. 뭐라도 말을 걸어 그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사, 상추는 어디서 났어?!”

 

용서를 빌기엔 형편없는 말꼬임을 깨닫는 건 한참 후의 일이다.

예상외로 돌아본 사란은 그다지 화가 나 있지 않았다. 그보단 지루한 기색이 짙었다.

 

“타케루의 밭.”

 

타케루가 누구였더라. 에이지가 멀뚱히 서 있자 사란이 말했다.

 

“코바야시 타케루.”

 

에이지의 눈꺼풀이 동그랗게 열렸다. 오늘만 해도 이 바보 같은 표정을 몇 번이나 지었는지 세어보면 자신이 싫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선생님이잖아! 괜찮은 거야? 그 텃밭 엄청 아끼시는데.”

 

그보다 선생님을 이름으로 불러? 친한 사이였나? 그건 서리 아냐? 하고자 하면 한 문장에 물음표를 다섯 개 쯤 붙일 수 있었다.

 

“어차피 관리는 전부 학생들한테 맡겨. 뭐가 하나 사라졌는지 아닌지도 모를걸.”

“그래도 들키면….”

 

그는 이제 간다는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어, 어딜 가려고?”

 

어디긴 어디야, 집에 가겠지. 에이지는 사란과 말을 섞을수록 자신이 초라해졌다.

 

“산에.”

“산?”

 

학교의 옆쪽에는 높지 않은 작은 산이 솟아 있었다. 끝까지 오르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되묻자 사란은 지금껏 내리고 있던 다른 손을 들어 보였다. 손안에는 작은 새끼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축축하고 여기저기 떼가 타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맨손으로는 만지지 않을 모양새였다.

에이지는 금방 눈치챘다. 놀랐지만 무서워하진 않았다.

 

“죽었,네….”

“하수구 근처에 있었어. 병약해서 버려졌나 보지.”

“묻어주려고? 산에?”

 

사란이 끄덕였다. “해가 잘 보이는 곳에.” 마치 죽은 고양이가 햇볕을 받고 싶어 한다는 투였다. 때마침 시야가 어두워졌다. 해의 방향이 바뀌어 학교의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음영 속 사란의 보랏빛 눈동자가 유독 형형했다. 그의 주변에만 밤이 찾아온 듯했다. 낮은 바람은 여전히 그에게로 불고 있었고, 앞머리가 날리자 그는 정리할 생각도 없이 눈을 한 번 깜빡이기만 했다.

 

에이지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두 사람은 해가 저무는 여름녘에 수풀을 헤치고 산을 올랐다. 오르는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에이지는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후 에이지는 끈질기게 사란을 따라다녔다. 사란은 가끔 번거롭다는 티를 냈지만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동안 에이지는 떠도는 소문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그가 말하길 분필은 두 번 먹어볼 맛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진짜였다니. 그럼 폭주족인 것도 정말인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지만 바이크는 타 본 적이 없다고 말을 이었다. “운자 양은 독심술사인가 봐.” 그가 코웃음 쳤다. “네가 알기 쉬운 거야.” 잠시였지만 사란이 웃었기에 에이지는 마냥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졸업식에 고백했다. 교복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머리를 다듬고, 꽃다발을 양손에 든 채 내밀며 밤새도록 연습한 한 마디를 건넸다. “널 좋아해.”

사란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가 돌아섰다. 멀끔한 버전의 에이지가 말했다.

 

“어, 어딜 가려고?”

 

닦고 광내도 열없는 태도가 여전했다. 사란의 앞에서는 늘 그랬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수근대는 말들은 일절 귀에 머물지 못했다.

 

“천체관측소.”

 

에이지는 또,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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