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행방

“너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린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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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우네 황혼에 잠기어

별이 우네 한밤을 지새워

태곳적 반짝이던 눈동자

가리는 장막 부디 걷어줘

흉진 손이 흐르는 눈물을

훔칠 테니 거둘 테니

제야의 별과 한 용사

제야의 별과 한 용사

숨을 가득 불어넣어 힘차게 울리는 박자, 현 위에서 거침없이 뛰노는 손짓이 전하는 가락이 거리 가득 울려 퍼졌다. 이름도 모르는 악기들의 향연이 그렇게 좋다고 어린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악단의 행렬 새를 뛰어다녔다. 가장 앞에 선 음유시인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맑은 음으로 후렴구를 반복했다. 제야의 별과 한 용사… 그러면 아이들이 답가하듯 입을 모아 합창한다. 제야의 별과 한 용사…  새파란 하늘에 선율이 흐르자 거리에 웃음이 만발했다. 따스히 흐르는 봄바람조차 지금이 고뇌와 번민과는 가장 먼 순간이라 읊조렸다. 누군가의 경쾌한 말소리가 확언한다. “모두 용사님 덕분이야.” 그러자 인파 속에서 온몸을 로브로 두른 자가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라바니는 계절에 맞지 않는 긴 옷자락을 다시 동여매고, 후드를 눌러쓴 채 걸음을 독촉했다. 

용사가 마룡을 물리쳐 세상을 구한 날로부터 십 년. 대륙 각지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신성제(新星祭)가 한창이었다. 만민이 용사를 칭송하고 우러렀으나 정작 그 이름은 불리지 않고 당사자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고작 열 해만에 그의 존재가 전설로 변모해 역사서의 낡은 페이지 한 쪽으로 화하였으나 누구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축제가 한창인 수도의 술집은 어딜 가나 번잡하여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난 후에야 빈자리를 구해 앉을 수 있었다. 그는 도수가 약한 술 한 잔을 시킨 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주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축제 덕에 장사가 잘되나 봐.”

“아무렴! 이 시기마다 일 년 치 매출이 나온다니까. 용사님 만만세야, 정말로.”

건장한 체격을 가진 부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접시를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넉살 좋게 답했다.

“용사님은 안 오시는 건가?”

“으응?”

“그분의 승리를 기리는 축제잖아.”

“청년, 어디서 왔길래 그런 걸 묻지?” 

주인이 의문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그제야 라바니가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사님은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후로 시골에서 쉬고 계신다잖나. 우리 같은 것들이 영웅의 휴식을 방해하면 안 되지.”

이곳까지 당도하는 도중 골백번은 들었던 이야기다. 그는 후드 아래로 부드러운 입매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정보상에게 소개를 받았다. 왕성에 연이 있다지.”

“허어.”

“진실을 알려줘. 대가라면 얼마든지 내줄 테니.”

“알아서 뭘 하려고?”

“그분께 받은 은혜가 있어. 만나서 꼭 갚고 싶거든.”

“용사님한테 빚진 사람이 한 둘인가? 아무 데나 목 들이밀면 다쳐, 형씨.”

지나가는 이가 들으면 귀를 쫑긋 세울 만한 내용의 담화였으나, 술집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척에서 얘기한데도 자칫 한 눈을 팔면 답을 놓칠 만큼 떠들썩했다. 라바니는 군말 없이 품에서 주먹만 한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짤랑, 익숙한 반향음은 두 사람의 귓가에만 맴돌았다. 그 무게감만으로도 들어있는 금화 양을 어림한 주인의 낯이 일변했다.

“진심이로군.”

“부족하진 않겠지.”

“알겠네, 알겠어. 나 참…… 별난 녀석이 다 있다니까.”

얼굴을 가린 손님은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거래는 신속했으며 두 사람은 부러 주변 눈치를 보지도 않은 채 자연스레 댓거리 했다. 잠시 후 그는 왔을 때와 같이 차분히 소란을 헤치고 가게를 나섰다. 단정한 걸음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주인이 갸웃댔다.

‘방금 로브 밑으로 꼬리 같은 게 보였는데.’

그러나 정체 모를 청년을 따라나서려는 충동에 몸을 맡기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호기심이 들 때마다 일일이 관여했다가는 이제껏 이 가게를 지키지 못했을 테다. 그는 현명하게도 단지 눈앞의 금화 주머니를 덥석 움켜쥐길 택했다. 짤랑, 이번에는 한 명이다.

라바니는 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를 지나 어두운 샛길로 들어섰다. 광장의 노랫소리가 멀어지자 자연스레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용사라는 자, 원래는 왕실의 뒤처리를 전담하는 암살자였다더군.’

‘하필 그런 자가 성루(星淚)의 주인으로 선택받았으니, 왕실에선 얼마나 골칫거리였겠나?’

‘좋을 대로 써먹고, 명예를 안겨줄 순 없으니 적당한 구실을 붙여 변방으로 내쫓은 거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십 년이나 지났잖나.’

‘어쩌면 이미 명을 달리했을지도.’ 그가 무심하게 내뱉은 마지막 말이 묵직하게 머리를 울렸다. 그 말대로, 용사의 일화를 무결한 전설로 남기기 위해 오점이 될 수 있는 본인은 제거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라바니는 도무지 그 가설에 설득당할 수 없었다. 용사가 죽었다면 지금까지의 여정이, 넘볼 수 없도록 높다랗게 쌓아 올린 마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

마왕이 용사에게 퇴패한 후 세간에서 마족의 위협이 잊히기까지 십 년. 인마 전쟁에서 제 명 외의 모든 걸 잃은 라바니는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한 채 폐허와 벽지를 떠돌았다. 차라리 싸우다 죽었다면 이 마음을 명예롭게 여길 수 있었을까 되짚기 또한 수십수백 번. 독이 담긴 비명을 씹어 삼킨 세월이 길어 이제는 스스로가 별에 남겨진 마지막 오염이라 여기고 만다. 그렇기에 용사를 만나야 했다. 세계에 선별된 성스러운 생명은 고여 있는 오상의 근원을 베어내줄 테니. 그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의무가 있을 테다.

하염없이 그늘진 골목을 걷고 있으나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용사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곤 생김새와 이름 세 글자, 왕국에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싸구려 연극의 각본 한 줄이었다. 목적지를 모르고 몇 걸음을 더 나아가자 다시 햇볕이 들어찬 중심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거리에서만 이어지는 길이 무려 다섯 갈래여서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삐 지나는 이들이 멀거니 서 있는 라바니와 어깨를 부딪히며 눈총을 보냈다. 생면부지의 타인과 옷깃이 스치는 찰나 그는 깨달았다. 모습을 감추고 숨어야만 하는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으니 이제는 직감을 따를 차례였다. 결정을 내린 라바니는 곧바로 인적이 가장 드문 가장자리 갈림길로 들어섰다. 양측 건물에서 널브러트린 자재와 쌓여서 구르는 쓰레기 더미가 진로를 방해해 여행객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싼 이방인은 제 자리를 찾아가듯 오물이 흩뿌려진 흙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성문을 넘어 도시를 떠나려 할 때에 등 뒤에서 먹먹한 함성이 울렸다. “용사 만세!” 칭송은 몇 번이고 주창되었으나 말하는 자만이 존재할 뿐 듣는 자는 없었다. 봄바람이 라바니의 뺨을 한 번 쓸고 서둘러 축제의 한바탕으로 향하자, 그는 결국 자조하고 말았다. ‘이런 게 인간들이 구원자에게 보답하는 방식인가.’ 수도를 전부 훑어보지 않아도 용사가 저곳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어디에 있든 결코 업적에 걸맞은 축복을 받고 있지는 않을 테니. 라바니는 지체 없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단서 하나 갖지 못해 막막하게만 생각했던 일이 무색하게도 그를 찾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용사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족적을 남겨두었다.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면 충분했다.

“이 마을을 대가 없이 도와준 사람이 있었나?” 

곤란한 일이 생겨 골머리를 앓고 있자면 지나가던 나그네가 도와주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일화는 크고 작은 마을마다 드물게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청년은 이름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떠나 무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을 사람들의 애를 타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수 년 내로 그가 각 마을에 들른 시기를 따져보면 어디로 향했는지 역산할 수 있었다. 몹시 발품이 팔리는 일이었지만 수고한 보람은 분명히 있었다. 용사는 한없이 인적이 드문 곳을 향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마냥. 그러나 버릇인지 동정인지 모를 선행이 반대로 그 존재를 대륙의 토지에 촘촘히 새겨두고 있었다.

끝내 라바니는 대륙의 끝이라고 불리는 땅에 도착했다. 그곳은 대지가 척박하여 식물이 잘 자라지 못했으며 간간이 보이는 동물들은 오래 굶은 듯 사나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한동안 막막한 광야에서 부족한 식생활과 노숙을 거듭하며 나아갔다. 이 땅에 도달한 후 며칠인지 몇 주인지도 헷갈리는 막막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는 반복되는 풍경 가운데 특이한 양상을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니 한곳에 푸릇한 잔디밭이 피어나 있었다. 고개를 빼들고 그쪽을 바라보자 더 멀리에는 드문드문 꽃이 피어 있기도 했다. 이유 모를 기시감이 라바니를 사로잡았다. 그는 곧장 기이하게 자리한 생명들의 근원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라바니가 난생처음 맡아보는 꽃향기가 은은히 떠돌았다. 이방인을 살피는 것 같기도, 환영의 인사 같기도 한 기척이 낯설어 자꾸만 두리번거렸으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막아서는 보초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초원 끝에서 오두막 한 채를 발견했다. 오는 길에 보았던 꽃송이들이 한가득 피어, 집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근방에서 보기 어려운 경치에 라바니는 잠시 발을 멈추고 마법적인 환상인가 현실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낌새를 살펴보아도 결계가 둘러져 있지는 않은 듯했다. 결국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무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금방 안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건너편에 있을 오두막의 주인은 별 망설임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주었다.

“누구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차가운 인상의 청년과 마주했다. 화사한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잿빛 머리칼이 멋대로 흐트러져 투명한 눈동자를 얼기설기 드리우고 있었다. 라바니는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꾸며낸 낯이 아닌 성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었다. 그는 십 년간 오로지 이날만을 위해 살아냈다. 드디어 기나긴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길손이야. 잠시 쉴 곳을 빌릴 수 있을까 하고.”

“…들어와.”

그는 가타부타 묻지 않고 순순히 문간에서 비켜섰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모를 태도였다. ‘아마 후자겠지.’ 강자의 여유에 저도 몰래 불쾌해진 라바니가 기색을 감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특별할 건 없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오두막의 풍경이었다. 고개를 드니 천정에는 군데군데 화분이 매달려 있었고, 고개를 내리면 불 꺼진 벽난로 앞에 짙은 빛깔의 목재 탁자가 있었다. 언제고 손님맞이를 할 예정은 없었는지 의자는 하나였다. 가장자리에는 용도 모를 항아리와 상자들이 줄을 서서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톱이나 도끼 등의 날붙이가 세워져 있었지만 전혀 무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차 들겠나?”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어. 고맙게 받지.”

그는 라바니를 하나뿐인 의자에 앉힌 채 주방으로 향했다. 곧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가만히 떠올려 보니 오는 길에 보았던 이름 모를 꽃과 같은 종류였다.

“여행자가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찾아다니고 있거든.”

“내가 있어서 도루묵이 됐겠군…….”

“오히려 행운이야.”

주방과 거실을 가르는 짧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실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역시나 라바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바깥에 피어있는 꽃들은 뭐지?”

“자생종이더군…… 이름도 몰라. 나도 이곳에 와서 처음 봤어.”

“정성스레 가꿨나 봐. 이런 곳에서도 잘 자라는걸.”

“…우연히 주변에 피어났길래 물을 줬을 뿐이다.”

단지 물을 몇 번 뿌려준 것만으로는 저렇게 싱싱하게 피어나지 않을 테다. 무뚝뚝한 어투 사이로 감추어진 다정함이 엿보였다. 라바니가 속이 울렁대는 기분에 입가를 가리자 마침 그가 찻잔을 들고 라바니에게로 걸어왔다. 

“상태가 안 좋은가? 아픈 거라면…….”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바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쏜살같은 몸놀림으로 부딪혀 그를 넘어트렸다. 떨어진 찻잔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라바니는 뜨거운 찻물을 그대로 뒤집어썼으나 아랑곳 않고 그를 몸으로 짓눌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일말의 저항조차 없었다.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화상을 입은 손가락으로 곧장 그의 앞머리를 헤치자 찰나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대로였다. 이마에 박힌 자그마한 물방울 형태. 어떤 광물보다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 세계의 눈물, ‘성루’. 거칠게 입술을 짓씹은 라바니가 부르짖었다.

“용사…… 샤이어!”

일시에 샤이어의 눈꺼풀이 넓게 트였다.

“…마룡?”

난리 통에 벗겨진 라바니의 후드 아래, 새카만 뿔이 드러나 있었다.

십 년 전. 폭력으로써 창생을 지배하려는 공포의 군주, ‘마룡’이 있었다. 그는 수백 년에 한 번씩 태어난다 일컬어지는 용의 일족이었다. 용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지도를 바꿔 쓰게 하는 존재였기에 마룡 또한 주어진 운명에 따랐다. 그는 힘을 가진 자가 으레 그렇듯 추종자를 모아 세력을 집결시키곤, 저들의 정의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극악무도한 폭군들은 스스로를 별의 마력에게 선택받은 자, ‘마족’이라 자칭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대륙은 국가 간 연맹을 결성해 그들에게 맞섰으나 하나둘씩 마룡의 막강한 마력 앞에 스러졌다. 자유의 종말이 코앞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던 낡은 구전이 현실로 화했다. ‘별이 흘린 눈물을 그 몸으로 거둔 자, 다시 별을 눈 뜨게 하리라.’ 이대로 영영 아침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느 새벽, 한 청년의 이마에 반짝이는 눈물이 흘러내려 방울졌다. 그는 별의 목소리를 듣고 검을 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광막한 먹구름 사이 한 줄기 볕이 떨어졌다. 그날 용사가 탄생했다.

용사의 출현 이후 마족 측 세력은 크게 뒤처졌다. 그는 마룡과도 견줄 방대한 마력을 검에 담아 가로막는 적을 남김없이 베어냈으며, 그 성스러운 빛을 당면한 마족들은 두 눈을 뜨기도 어려워했다. 몇 달 후. 한때 대륙을 호령하던 군세는 마룡과 소수 측근들만이 남아 간신히 발버둥에 가까운 저항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라바니가 있었다.

라바니는 마룡이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낸 분신이었다. 아직은 약한 힘만을 지녀 어린 외모와 정신을 가진 그를 마족들은 제 주인과 같이 살뜰히 대우했다. 라바니는 자신에 대해, 마족에 대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그들이 제게 상냥하다는 사실만은 명료히 인지하고 있었다. 무지했기에 즐거웠던 나날들. 피와 죽음, 전쟁은 별세계 이야기였다. 

그러나 얄팍한 몽매의 벽은 쉽게도 무너졌다. 

돌연히 나타난 용사는 그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을 깨어내고 라바니의 전부를 앗아갔다.

사투 끝에 마룡의 목을 베어낸 용사는 숨어 있던 라바니를 금세 찾아냈다. 작지만 분명히 돋아난 뿔과 꼬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동토보다 시리게 희어, 라바니는 불타는 폐허 속에서도 얼어붙은 채 추위를 느끼듯 떨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라바니를 잡아들곤 불길에서 꺼낸 후 돌아섰다. 부서진 세계 밖으로 무정히 걸어나갔다. 라바니는 피 흘리는 동료들의 사체와 잔해에 둘러싸여 홀로 남겨졌다.

바야흐로 선량한 사람들은 삶을 되찾았으나 살아남은 아이는 그 삶과 사투해야 했다. 마룡의 조각임을 들켰다가는 분노한 인간들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도망치고 숨어들던 라바니는 어째서 지난한 생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지 번뇌했다. 용사가 왜 재앙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알을 깨트린 자가 어린 새의 원성을 들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의심하여 달려드는 이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으며, 하루의 끼니를 위해 죄 없는 이를 갈취했고,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살아남은 마족의 잔당이자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살육했다. 

비로소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뒤돌아 떠난 그림자를 밟기까지 꼬박 십 년이었다.

“왜 그때 날 죽이지 않았지?”

벗겨진 후드 아래 자리한 앳된 얼굴을 마주한 샤이어는 단박에 깨달았다. 설령 긴 세월이 흐른대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 끝자락에 마침표를 찍었던 아이.

“그런가. 그때 그…….”

“대답해!”

샤이어의 멱살을 움켜쥔 라바니가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샤이어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치 괴로워하는 듯한 낯에 라바니는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증오가 침투해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 때문에 난 모든 걸 잃었어!”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다.

“죽일 가치도 느끼지 못했나? 내가 너무 약해서?”

이어지는 침묵. 고대하던 만남이 이루어졌는데도 라바니는 여전히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끝을 내!”

라바니는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은빛 날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흠집 투성이였다. 전사가 지나온 혈투를 증명하는 데에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샤이어는 단숨에 라바니의 삶을 이해했다. 검이 수직으로 바로섰다.

“당신에겐 쉬웠겠지. 겁에 질린 마족 하나 끌어내는 일쯤은. 그 후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적에게 구해진 내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있기나 해? 패배자가 살아남기 위해 증오 외의 모든 걸 버려야 하는 추악한 삶을 위대하신 용사님께서 겪어본 적이 있기나 해?!”

그때 샤이어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목을 내려칠 기세였던 검이 거꾸로 뒤집혀 그의 손에 쥐여졌다. 

“십 년간……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어?”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보랏빛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라바니의 밭아진 호흡이 잠시 목에 걸렸다가, 힘겹게 터져 나왔다.

“전부 그만두고 싶어…….”

한동안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샤이어는 라바니의 숙원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다만 눈을 피하지 않은 채 흐르는 눈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반짝이는 성루와 마족의 낙루가 뒤섞였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검을 놓고선 팔을 들어 적이었던 아이의 몸에 둘렀다. 라바니는 도리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넌 너무 어렸어.”

라바니가 사납게 앓는 소리를 내며 샤이어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듯이 고꾸라졌다. 자학적인 몸짓이었다.

“단지 그 이유였다고……?”

샤이어는 그를 놓치지 않고 단단한 팔로 지탱했다. 용사는 무상히 떠올렸다. 누군가를 안아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예전에, 나는…… 왕실의 개였다.”

과묵한 영웅이 누군가를 위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였다. 천애 고독한 빈민으로 태어나 생존을 반복하기만 하던 시절의 그는, 별을 구원하고 용사라 칭송받는다 해도 사라지지 않고 심장 깊숙히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그저 내려진 명령에 따랐지. 죽이라고 하면 누구든 죽였어.”

라바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면의 절규가 아닌 타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용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야. 별의 호소에…… 사람들의 부탁에 따랐을 뿐이지.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도 않았어. 할 수 있기에 한 것일 뿐. 그들이 내게 원한 건 마족의 멸절이었고…….”

“그 끝에…… 네가 있었다.” 샤이어가 둘렀던 팔에 힘을 풀자 라바니는 혼란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명 대로라면 나는 눈에 띈 마족을 전부 죽여야 했지. 그런데 널…….”

“너를 보는 순간…… 전부 그만두고 싶어졌어.”

그건 방금 전 라바니가 했던 말이었다.

“내게 의지라는 것이 남아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더군…….”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단정했던 자가, 숨이 닿는 거리에서 우리는 닮은 꼴이라 주창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린 선택이다.”

라바니가 다급히 물었다. 충동이었다.

“후회하지 않아?”

“내 후회는…… 분별 없이 생명을 거두었던 지난날뿐이야.”

“나는 많은 죄를 저질렀어.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지. 그렇다 해도?”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건가.”

“…….”

그는 샤이어를 만난 후의 일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의로운 용사가 악의 불씨를 처단하면 비로소 세계에는 진정한 안온이 찾아올 테였다. 그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행복한 결말이다. 

“당신이 죽여주지 않는다면, 내게 더 살 이유는 없어.”

무심코 내뱉었다. 이 또한 충동이었다. 샤이어를 목전에 두고 이성을 꾸며낼 여유 따위는 가질 수 없었다.

“이름이 뭐지?”

갑작스런 물음에 라바니는 당황했다. 무심코 입을 열고, 오래간 불린 적 없던 호칭을 어설프게 발음했다.

“…라바니.”

“라바니.”

낮은 음성이 따라 이름을 불렀다. 라바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둔한 머리 아래로 목이 메며 가슴은 묵직이 내려앉았다. 낯선 감정이 어지러워 차라리 칼로 살을 갈라 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고통은 충분히 익숙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것에도 이름이 있을까.

샤이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바니는 마치 탈진한 듯 힘이 빠진 몸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밀려났다.

“피부가 상하겠군…… 먼저 치료부터 하자.”

샤이어는 찻물이 엎어졌던 라바니의 팔을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나는…….”

“그다음에는 다시 제대로 차를 끓여주지. 단 맛이 나서 기운이 돌아올 거야.”

원망이 서린 비명을 지른 게 언제였냐는 듯 바싹 마른 입이 물었다. “왜…….”

“왜 상냥하게 대하는 거야?”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대체 왜……!”

“네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죽음을 맞이하러 방문한 세상의 끝에는 찬란한 풍경이 만개했다.

사지에 도달했다 여겼으나 뜻밖에도 라바니가 그리워하던 요람과 닮아 있었다.

대척점에 놓여 있다 생각한 이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이름을 불렀다.

죽일 수 있는 자는 달리 말하면 살릴 수 있는 자였다.

어긋났다 규정했던 두 개의 선이 실은 동그랗게 묶여진 매듭이었다.  

살짝 열려 있던 네모진 창 새로 동풍이 꽃내음을 실어 날랐다. 순간 라바니는 깨달았다. 어째서 그의 주위에서만 화초가 자라고 있는지. 샤이어는 손이 닿는 거리의 생명을 분별 없이 보살피고 있었다. 풀 한 포기조차 살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뿌리를 내렸다. 잊힌 용사가 사는 이 땅에. 이제는 라바니의 차례였다. 용의 본능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했다.

샤이어는 그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도무지 마음을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아이를 살게 했으니 이제는 책임을 질 차례였다. 텅 빈손이어야만 누군가를 끌어안을 수 있다면 마땅히 검을 놓아야 했다. 용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때조차 확신한 적 없던 스스로의 가치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우는 법을 모르는 그의 볼에서 라바니의 눈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함께 살자, 라바니.”

다시 이름이 불렸다. 라바니는 거역할 수 없었다.

“부디…… 거두어 주세요.” 

용사의 이름이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아냈다.

“샤이어 님.”

대륙의 가장자리. 도망자만이 다다르는 척박한 광야 한 자락에 때아닌 화원이 피어났다. 초목 한가운데 별에 선택받은 용사와 용사가 선택한 마룡의 조각이 있었다. 어느 날은 용사가 찻잎을 우리고 어느 날은 마족이 파이를 구웠다.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 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하며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에 맡겨진 미래는 세계의 명운이 아닌 두 사람의 내일이었다. 









작가의 말

동경하는 이를 원망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랑이나 우정은 서로 간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동경은 끝까지 일방향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라바니가 샤이어에게 가진 복잡한 감정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종류일 수 있으나, 그것이 라바니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을 겁니다. 만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요? 영웅의 족적을 쫓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살아내야만 합니다. 감정을 모조리 불태워서라도. 

반면 샤이어는 불타는 감정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세간의 도덕과 규칙에 둔감하고, 무언가에 집착하는 건 꿈에서도 이루기 힘든 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고 허무에 몸을 맡겨 삶을 내던지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정의를 좇아 선을 행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살면서 받아온 마음들에 대한 보답일지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는 다정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삶의 이유로 삼습니다. 샤이어에게 없는 것은 라바니에게 있으며 라바니가 갈구하는 것은 샤이어가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자연스레 느껴질 만큼 꼭 맞는 두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른 세계에서, 명확히 적인 입장으로 만나면 어떨까? 그런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라바니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태생이 악한 존재여도 샤이어는 그를 구했을까요? 샤이어가 더 이상 영웅이 아닐지라도 라바니는 그를 쫓을까요. 제 생각에, 모든 질문의 답은 ‘그렇다’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서로의 입지가 아닌 자신의 신념일 테니까요. 그래서 샤이어는 세상에 버려진 용사가 되고, 라바니는 마왕의 분신이 되었습니다. 본래 두 사람과 닮았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택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세상을 헤쳐나갑니다. 어려움도 있을 테고, 부딪힐 일도 있겠죠. 그래도 누군가의 예정보다는 훨씬 오래 살아갈 겁니다.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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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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