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집

성령의 불

코코아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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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시대였다. 공장지대에서는 매캐한 스모그가 끊임없이 솟아났다. 노동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꽉 채워 걸어 다녔다. 씻지 않은 아이들이 때를 묻히고 시궁쥐처럼 골목을 지배하고 있었다. 끼니를 챙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신이 없는 시대였다. 일요일에 교회의 종이 울리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이 기차역은 어느 허름한 성당을 허물고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로로 긴 기차역의 중앙에는 갈 곳 없는 성모마리아 상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성모 마리아 상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검표원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줄지어 열차에 탑승하는 승객들의 티켓을 확인하고 있었다. 입석 칸에는 사람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팔리지 않는 재고처럼 칸의 끝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쌓여갔다. 신기한 것은 이제 갓난아기 한 명도 더 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행렬도 거짓말처럼 알아서 끊기는 것이었다.

출발을 예고하는 경적이 울렸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기장이 문을 닫을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을 높이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려던 검표원은 문득 멈췄다. 코트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쓴 두 사람이 열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자 안으로 숨긴 탓에 그들이 청년인지, 노인인지, 혹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검표원은 한 팔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표가 없었고, 표가 있다고 해도 이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선 한 명이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 검표원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여 장갑 낀 손을 말아 쥐었다. 쥐색 헌팅캡의 모자챙 아래로 건조하고 투명한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영혼을 관통하는 듯한 시린 백색이었다. 어떠한 특징이나 표정, 흠집조차 없는 얼굴은 대리석을 조각해 만든 것처럼 창백했다.

검표원은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차례로 열차의 발판을 딛고 올라탔다. 그러자 마치 그곳이 열차가 아니라 대로변인 것처럼 발 디딜 틈 없던 인파 사이로 길이 하나 생겼다. 그 좁다란 길을 따라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검표원은 열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두어 걸음 물러나자 열차는 길고 무거운 쇳소리 끝에 새까만 연기를 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짙은 날이었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검표원은 고개를 돌려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석탄 가루와 먼지가 성모상의 얼굴 위에 아주 얇은 베일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왜인지 그것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은 스무 살짜리 남자애가 선로에 뛰어들었다. 그의 영혼을 세상에 구속해 두던 몸뚱이는 거대한 쇳덩이 앞에서 너무나 쉽게 산산조각이 났다. 한숨도 자지 못한 기관사는 운전실에서 나와 그 파편들을 선로 바깥으로 치우면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엘리아와 파베는 레일 위에 나란히 서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가 기계적으로 소년의 잔해를 옮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두 번째네요.

 

파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냥요. 다들 사는 게 힘든가 싶어서.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 됐으니까.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네요. 비슷한 처지로서…….

그런 말은 삼가는 게 좋을걸.

 

그러자 엘리아는 네, 네, 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는지 그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파베는 일부러 엘리아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소년의 피가 선로가 깔린 자갈 위에 묻어 있었다. 열차의 바퀴가 걸리는 일이 없도록 마지막 한 조각까지 치워놓은 기관사는 비틀거리며 운전실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로 자리로 복귀하지 않고 차체에 기대어 섰다. 주머니를 뒤져 꺼낸 것은 구겨진 담뱃갑이다. 엘리아와 파베의 시선은 이제 소년의 흔적에서 기관사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이제 겨우 서른이었지만 고된 노동과 삶에 지친 얼굴은 제 나이를 훌쩍 넘어 보였다. 한때 햇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을 금색 머리카락은 이제 그 빛을 잃고 듬성듬성 뽑혀 나가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거친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엘리아는 파베를 바라보았다. 파베는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아는 레일에서 뛰어내렸다. 자갈 위를 걷는데도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관사는 엘리아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눈앞에 서서 손을 내밀 때쯤에야 젖은 손으로 부싯돌을 튕기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관사는 처음엔 그가 누구인지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눈이 마주치자 불현듯 입을 닫았다. 그가 내민 라이터를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아는 그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대신 그냥 심지에 작은 불이 피어오르도록 했다. 기관사가 간신히 불씨를 담배에 옮겨 붙이고 나서야 엘리아는 그의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어주었다. 그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했지만 소리를 내 엉엉 울지도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담배 한 대를 완전히 태운 기관사는 곧 눈물을 닦고 운전석에 들어가 앉았다.

다시 경적이 울렸다. 마치 간이 기차역에서 잠시 정차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엘리, 이리 와.

 

엘리아는 선로를 가로질러 걸어왔다. 그러나 열차는 엘리아와 파베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속하기 시작한 열차가 엘리아와 파베를 통과해 지나갔다. 그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열차를 통과했다가, 맨 마지막 칸이 돌풍을 일으키며 지나갈 때 다시 나타났다. 몸을 빈틈없이 가리던 헌팅캡과 코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엘리아가 고개를 흔들자 그의 머리카락이 열차가 남기고 간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뒷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턴 엘리아가 입을 열었다.

 

라이터가 군용이던데요.

저 애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껏해야 15살이었어. 아버지나 형이 준 거겠지.

그런데 저 애 아버지도 죽었잖아요?

그럼 형 거겠네.

그렇겠네요. 그나저나 일이 끝났으니까 식사라도 하는 거 어때요?

어디서?

이 선로를 쭉 따라가면 좋은 마을이 나와요. 거긴 갓 잡은 생선으로 만든 피시 앤 칩스를 팔고요.

그런 건 또 언제 봤어?

 

엘리아는 대답 대신 눈을 굴렸다. 파베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인간 세상에 재미 붙이지 마. 좋을 거 없는 거 알잖아.

누가 지상에 관심 있대요. 거기서만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러죠.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식사 같은 건 필요하지 않지만, 갓 내어놓은 음식의 냄새나 오래된 잔반의 냄새나 엘리아와 파베에게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만.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아마포 셔츠를 가르고 두 쌍의 날개가 기지개를 켰다. 먼저 눈을 마주친 것은 엘리아였다. 여전히 눈을 마주칠 때면 여전히 엘리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생각은 지긋지긋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선로는 조용했다. 사방에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둘은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변에 있는 마을을 향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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