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겨우살이의 겨울
아이소 샘플
0. 뱀
충절이 잊혀지고 너도 나도 패권을 쥐고 싶어하는 전란의 시대.
노란 머리들이 일으킨 전란의 틈바구니에 살아남아 최후의 왕을 옹립한 검은 머리 용병 신해량의 말로는 유배였다.
“내가 장군의 덕을 잊은 건 아닐세. 개선장군의 공을 어떻게 잊겠는가. 하지만 신 장군이 내 곁에 있으면 불안하단 사람도 많아. 그러니 잠깐만, 치세가 안정될 때까지만 쉬고 오는 걸세. 간 김에 딱 하나만 더 공을 세워오면 돌아왔을 때 직위를 주기 쉬울지도 모르지.”
완벽한 토사구팽. 왕위쟁탈전이 끝나자 그의 개였던 신해량은 버려졌다. 용병 신분으로 여러 사람을 섬겼으니 그의 충심이 의심된단 것도 유배를 가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사람만을 섬기지 않는 게 중요했던 시기가 지나니 한 사람만을 따랐던 게 중요한 시대가 와 버렸다.
그가 이끈 용병단이 어느 세력에 붙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지는 일도 잦아서 견제가 더 심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주변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신해량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 번 전쟁에 가담한 인간이 두 번은 못할 건 없다는 논리였다.
이국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여러 전쟁에 파견됐던 신해량은 그들의 말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았단 걸 내심 인정했다.
힘들게 살아온 만큼 목숨 달린 일에는 기감이 발달한 그는, 자길 따르는 인간들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기 전에 이곳저곳으로 보내놓았다.
그들이 떠나자 신해량은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았다.
현왕도 가장 큰 공을 세운 검은 머리 인종인 신해량에게 어떤 직위를 줄지 골치 아픈 티를 냈다. 그러다가 그의 팀원이 와해되자마자 그를 불러 북부로 가 달라 부탁했다.
“공이라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신해량은 이권에 휘둘리는 멍청이마냥 굴기로 했다.
그 혼자서도 왕과 그 신하의 목 정도는 쉽게 꺾어버릴 수 있는데도.
그러나 사실을 모르는 왕은 신해량의 반응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쉬러 간다고 생각하게. 북부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 조용하다니 좋지. 공이라면, 글쎄. 간 김에 북부의 충성서약을 받아오면 좋겠지.”
북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누구에게도 지지 의사를 보내지 않았다.
다만 전란이 휩싸인 동안 내륙으로 외세가 들어오지 않도록 땅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한시의 영예가 아니라 영원한 존속이었다.
척박한 땅에 얻을 게 없으니 딱히 중립 의사를 건드는 자도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은 판도가 바뀌었다.
땅이 가장 크고, 온전하게 공작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랜 기간 전란에 휘말리지 않은 도시.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지는 북부가 되어버렸다. 내부에서도 나라를 재건하려면 북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왕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북부로 사절단을 보냈으나 우직하고 태산처럼 흔들림이 없다던 북부의 성주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그저 사절단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공물만 그득히 쥐어줬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갔을 때 전쟁의 주역이었던 신해량에게 문을 열어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목숨 부지하는 게 제일 중요하단 걸 아는 신해량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왕이 된 자는 신해량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노쇠하지 않고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속에는 총기와 비열함이 골고루 섞인 자의 머리는 나이가 들어 회빛을 띄었다. 노랗든 붉든 까맣든 나이가 들면 결국 회색이 되건만, 젊은 시절의 머리색에 그리 연연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신해량은 왕의 머리에 올려진 왕관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 왕관이 검은 머리를 지닌 자의 머리통 위에 오르면 안 되는 이유도 떠올려봤다. 짧은 고민 끝에 낸 결론은, 없다.
“정 안 된다면……, 북부의 권좌에 새 사람을 올리는 건 어떤가? 마침 신 장군도 직위 하나가 필요할 듯한데.”
북부 성주의 멱을 따고 그 자리에 신해량이 올라가란 왕의 말에 신해량의 입매가 비아냥거리듯이 한쪽이 씰룩거렸다.
눈 앞에 있는 자의 머리를 따면 북부의 권좌가 아니라 왕좌에 오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불경한 생각을 들키기 전에 신해량은 왕이 된 자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왕의 그림자는 그 형태가 꼭 뱀이 왕관을 쓴 듯해 불쾌했다.
‘이무기는 될 줄 알았더니만.’
신해량은 그제야 자신이 용이 아니라 뱀을 왕좌에 앉혔단 걸 실감했다.
“아, 이걸 가져가게. 자네와 나의 진정한 우정의 징표가 되겠군. 우리 가문의 문장인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네가 대리할 수 있을 걸세.”
새 왕가의 문장이 생기면 하등 쓸모없어질 가문의 팔찌를 채워준 왕은 그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감사합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뱀 문양을 보며 신해량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팔찌는 마치 원래부터 신해량에게 매여야 했듯 팔목에 꼭 맞았다.
그는 그보다 더한 능구렁이가 될 자신이 있었다.
1. 북부
북부의 성주인 박무현에 대한 소문은 아주 많았다.
키가 2M를 훌쩍 넘는다느니, 생김새가 야수를 닮아 성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느니, 눈을 보면 사람이 얼어붙는다느니, 몸에는 큰 상처가 있는데 곰을 맨손으로 잡아 생긴 거라느니, 대화를 하다 보면 그에게 홀려 어느새 북부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둥.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 사실인 양 나열되는 사람이었다.
사실 신해량이 박무현에게 제일 신기한 점을 꼽으라면 하나였다.
“동양인 이름을 지닌 성주라니.”
생사고락 함께하며 왕까지 만들어놔도 검은 머리 짐승이라며 기사 작위 하나 못 주겠다고 할 만큼 폐쇄적인 집단이다.
동양인이 성을 하사받고 그 일대의 땅을 소유지로 인정받으려면 대체 무슨 일을 해내야 할지, 그의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북부로 가는 시간이 얼마 쥐어지지 않은 신해량은 결국 박무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이 북부로 가야 했다.
떠나는 날, 왕이 노잣돈이라고 쥐어준 거라곤 직접 쓴 칙서 하나, 여비, 얼어 죽지 않게 도착할 정도의 가죽옷, 식량, 그리고 준마 하나가 다였다.
하사한 군마조차도 따뜻한 지방에서만 다닐 수 있는 종이라 중간쯤에 돌려보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말을 달리고 또 15일을 걸어 도착한 곳은 겨울이었다.
“제대로 먹어두길 잘했군. 죽을 뻔했어.”
기력이 떨어지지 않게 추가로 사냥을 해 배를 채웠음에도 북부에 당도했을 때는 많이 살이 빠졌다. 열량을 제대로 보충하지 못한 탓에 최대 15kg은 빠졌을 듯했다.
중앙 도시는 햇발이 강해지는 초여름에 가까웠다. 어떻게 같은 나라에 이렇게 다른 날씨가 공존하는지 놀랍기도 했다.
차가운 입김을 내뱉은 신해량은 눈 앞에 펼쳐진 설산과 검은빛 성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산비탈은 뒤에서 몰래 사람이 침입하기 어렵고, 성을 둘러싼 어두운 성벽은 높고 거친데다 얼음이 얼어 쉽게 올라갈 수 없었다. 수십 년의 전쟁으로 부서지고 고쳐지며 군데군데 팬 자국과 따뜻한 색의 돌로 메워진 중앙의 성벽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다음!”
앞에서 성문을 검사하는 사람들도 군기가 들어있었다. 신해량이 직접 키운 사람들만큼의 예리함은 없었지만, 잘만 다듬는다면 자신의 사람만큼 클 훌륭한 새싹들이 많았다.
“신해량입니다. 왕의 칙서가 있습니다.”
북부로 들어가는 추천서와 왕의 칙서를 수문장에게 보여주었다.
“왕이라니, 어느 왕을 말하는 거지?”
“자기들을 왕이라 칭하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어서 말이지.”
“오다 뿐인가, 자기가 높으신 분이니 알아뫼시라고 소리도 질러댔지.”
비아냥 조로 말은 하지만 군인들의 눈은 살벌했다. 성에 위험한 인간은 하나도 들이지 않겠단 의지가 가득했다.
“선왕의 사람들 중 아무나 불러오십시오. 저를 알아볼 겁니다.”
“왕의 자리를 노리고 전쟁을 치른 놈들도 다 왕의 사람들이지 않았나. 알아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놈도 그 중에 하나인 건 아닌가? 우린 배신자는 들이지 않아.”
고급스런 양피지와 왕의 날인을 보고도 군인은 재차 그의 앞을 막았다.
“선왕의 마지막을 지킨 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신해량은 옷 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푸른 보석 목걸이를 보자 군인들도 태도를 바꿨다.
“……신의를 아는 자를 뵙습니다. 직전의 불경한 태도를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확인이 필요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음껏 하십시오.”
신해량을 문 앞에 붙들어 두고 다른 사람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내 성으로 들어갔던 사람 뒤로 한 사람이 따라왔다. 신해량도 아는 얼굴이었다. 전란을 피하라고 신해량이 피신시킨 선왕의 시식시종이었다.
“신해량, 자네였군. 설마 했지만 살아 있었어. 그래, 자네 무위라면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
“예, 살아남았습니다. 어르신께서 절 생각해주신 덕인가 봅니다.”
노인은 직접 신해량에게 다가가 껴안았다.
“고맙네. 자네 덕에 어르신이 마지막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어.”
선왕은 나라가 전란에 휩쓸리기 직전에 신해량을 고용했다.
슬하에 자식 하나 없었던 왕은 나라에 전운이 감돌고 있는 걸 알았다. 그는 방계의 혈족을 후계로 삼았으나 후계자는 왕가의 피가 옅고, 사교계 소문조차 버티지 못할 만큼 심약했다. 도리어 왕보다 먼저 죽어버린 탓에 대가 완전히 끊겼다. 뒤늦게 피가 섞이지 않은 자를 후계로 삼고자 했으나 그런 식이라면 자신들도 왕이 될 수 있을 거란 자들이 늘었다.
그가 후계로 정하는 사람마다 죽임을 당하니 그는 끝내 누구도 자신의 뒤를 이을 거라고 정하지 않았다. 병석에서 오늘내일하는 왕의 꿈이라곤 누구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숨을 거두는 게 다였다.
늙은 왕의 목숨을 거둬봐야 전쟁을 당기는 꼴밖에 되지 않지만, 경험상 어차피 터질 전쟁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개전하길 바라는 인간이 많았다. 방어보단 공격으로 시작하는 게 초반 기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신해량은 선왕이 숨을 거둘 때까지 서른이 넘는 자객의 목숨을 거뒀다.
독이 든 끼니를 엎은 건 100번 남짓이었다. 왕의 입에 들어간 끼니를 허투루 검사하지 않은 건 오로지 그의 식사를 관리하는 사람의 양심에 따른 것이었다. 죽어가는 왕의 입에 건강에 좋은 진상품을 넣어드리겠다며 온갖 지역에서 용을 쓰고 독이 든 음식을 올리고 있었다.
“어르신께서도 신의를 지키셨지요. 저 혼자 할 순 없는 일이었습니다.”
북부에서 왔다는 사람은 왕의 수저가 거뭇해질 때마다 신해량과 그의 측근에게 알렸다. 진상품을 한 번만 탈 없는 척 넘겨달라는 청탁은 왕의 입에 들어간 끼니 수보다도 많았을 텐데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개인의 영달을 탐하지 않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신해량은 그를 고향인 북부로 안전히 돌아갈 수 있게 힘을 썼다.
“그래. 우리에게 무슨 말이 중요하겠는가. 입장 전에 밟는 절차만 마저 하고 들어가도록 하지.”
군인들은 신해량의 소지품을 싹 다 확인했다. 그들은 신해량에게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단 걸 확인하고 몸까지 수색한 뒤에야 안으로 들여보냈다.
성 밖과 안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덕에 벽은 그나마 바람 때문에 춥진 않았다.
그리고 바닥이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눈이 많이 내렸나 봅니다.”
“그래. 아주 지긋지긋하지. 녹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어제도 내렸다네. 이걸 언제 다 치울지 골치가 아파.”
어릴 적부터 용병으로 일해 온 신해량은 쌓인 눈을 본 적이 없었다.
험지에서 일은 해봤지만, 북부나 눈 쌓인 곳으로는 나가볼 일이 없었다. 이따금 전장에서 눈이 내리기도 하지만, 쌓이기 전에 치우는 게 일이었다. 눈이 얼면 말도 사람도 미끄러지고, 녹으면 질퍽해지니까.
언제나 골칫덩이였던 눈은 전장이 아닌 곳에서 보니 아름다웠다.
“눈이 쌓인다는 건 이런 거군요.”
“어허, 이 사람. 눈을 자주 못 봤나 보구만! 백전노장인 줄만 알았는데, 자네도 처음 하는 전투가 있었어! 그래,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눈을 쓰는 일은 자네가 해보는 건 어떤가? 여기 사람들은 늘 해야 하는 일이니 새로 온 자네가 해준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과 섞이기도 쉬울 거야.”
신해량은 자신의 발목까지 차오른 눈을 보며 감회에 빠졌다.
“좋습니다.”
“자네는 언제쯤 질린단 소리를 할지 기대되는군.”
성에 사는 아이들인지 모두 뛰쳐나와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니 사람만한 눈사람이 줄을 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마음도 녹아내렸다. 비명만 지르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비탄에 잠긴 목소리, 화에 북받친 목소리만 듣다가 걱정 없는 아이의 웃음 소리를 들으니 속에 얹힌 게 풀린 기분이었다.
“성주님도 같이 놀아요!”
“요녀석들! 성주님은 바쁘시다니까! 저리 가서 너희끼리 놀거라!”
“아하하, 괜찮습니다.”
“성주님께서 요놈들이랑 놀아주시다가 빙판에서 미끄러져서 2달을 못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넘어지지 않으면 되지요. 이번에야말로 우리 사람들이 제대로 비질을 해놨는지 확인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군요.”
신해량은 어린 성주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성주님께서 이미 나와 계셨군.”
저와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양쪽의 눈 색이 다른 성주는 얼핏 봐도 어린 모습이었다.
담비와 곰가죽을 제 몸이 감싸질 만큼 두른 성주는 키가 2M를 넘기는커녕 다른 북부인보다도 왜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고, 눈은 한색을 띄는 푸른색이지만 그의 시선이 따뜻했다. 머리가 까맣지 않았다면 이국의 인간들과 같은 인종이래도 믿을 판이었다.
“성주님은 비질을 제대로 안 해놨어도 혼내지 않을 거잖습니까. 다른 곳 성주였으면 비질을 한 시종부터 빙판에 미끄러지는 신발을 제작한 구두공, 놀자고 한 아이와 그 부모까지 싹 다 감옥에 가뒀을 겁니다.”
“그들을 가둔다고 비질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눈 한 번 잘못 치웠다고 감옥에 가두는 성주를 누가 모시고 싶어 하겠습니까.”
청년으로 보이는 성주가 웃었다. 부드러운 입과 가지런한 치아에서 나온 목소리는 햇빛에 녹아내린 만년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입에 담는 단어는 하나하나가 신중하고 솔직해 아이도 어른도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다.
“……성주님 방은 비질을 할 필요가 없습니까?”
신해량이 사랑에 빠진 총각처럼 굴자 그를 안내해주던 노인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아! 성주님 방은 눈이 쌓이면 안 되지! 성주님께선 언제나 제일 따뜻한 곳에 계셔야 한다네. 성 사람들 삶을 안팎으로 꾸려나가는 분이니 그분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나. 보필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건강보다 성주님의 건강이 먼저야. 그분께서 기침 한 번만 해도 잘릴 각오로 일하고 있지. 아, 이건 성주님께 말씀드리지 말게. 아직 이런 사실은 모르시니.”
“그렇군요.”
그의 입에서 기침이라도 나왔다간 마음이 미어져버릴 게 분명했다.
“성주님 계신 성의 문도 마찬가지이네. 그곳은 항상 모든 사람들이 먼저 와서 쓸어서 늘 누런 흙색만 보이지. 이곳에서 성주님을 흠모하는 게 자네뿐일 것 같은가.”
신해량은 모두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에 대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용병으로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죽여 달라고 부탁받은 대상에겐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쯤은 있다는 것이다. 신해량은 북부의 성주를 죽일 이유가 있다면 충분히 제거할 마음이 있었다.
개인의 명예나 삶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리저리 전장을 구르던 자신의 용병단을 규합해 이제는 어디 한 곳에 박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북부의 성주라는 박무현의 모습을 본 순간 신해량은 직감했다.
자신은 그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단 걸.
머리로는 박무현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죽이지 못할 얼굴을 한 이들이 냉혹한 암살자일 때도 있었고, 진실만 말할 거라고 믿었던 성직자가 적군의 나팔수였던 일도 있다.
하지만 ‘박무현이 직접 찌르는 검이라면 기꺼이 맞아줄 법하지 않나’란 마음과 ‘저 목소리로 하는 선동이라면 믿어주겠다’란 마음이 혼재했다.
“성주님이 계신 곳을 제일 먼저 일어나서 비질을 하면 알아주실까요?”
“북부 겨울보다 찬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런 순정이 있었구만.”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박무현의 목소리만 들렸다. 박무현의 시선이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신해량에게 닿았다. 크게 뜨인 눈에 신해량도 놀라 심장을 부여잡을 뻔했다.
“방금 성주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엄청 놀라신 모양입니다. 제 몰골이 그렇게 추레합니까?”
신해량은 자신의 모습을 급하게 확인했다. 오는 동안 틈틈이 씻었지만 입은 옷이 헤지고 더러워진 건 숨길 수 없었다.
성주를 알현하기 전에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신해량은 자신의 안이함을 탓했다.
신해량은 오는 길에 추위를 버티게 할 고열량 식량을 구하려고 사냥을 한 게 화근이었다. 수사슴을 사냥하며 생긴 외투의 작은 구멍 하나가 새삼 거슬렸다. 고이 빗질된 박무현의 털가죽 옷과 비교하면 제가 입은 건 거렁뱅이 옷과 다를 게 없었다.
“추레하다니. 자네 얼굴은 그런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네.”
신해량의 얼굴을 본 노인은 위로하듯이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얼굴이 아닙니다. 제 옷에 구멍이 있지 않습니까. 오는 길에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옷도 낡아버렸군요. 성주님을 바로 만날 줄 알았다면 평소에 입던 판금갑옷을 입고 올 걸 그랬습니다.”
“이 사람아, 여기서 판금갑옷을 입었다간 살점이 달라붙어 벗을 때 큰 곤욕을 치를 걸세. 성주님께 잠깐 잘 보이고 싶다고 영구한 상처를 입으려 하는 건가.”
신해량은 영구한 상처는 방금 제 마음에 입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네 얼굴은 옷이든 시간이든 구애받지 않는 화려함이지 않은가. 자네가 거적데기를 입고 남들이 다 쓸고 간 흙바닥을 쓸고 있어도 성주님께선 자네를 기억하실 걸세.”
“성주님께서 얼굴 잘생긴 걸 좋아하십니까?”
“흥미는 가지시지 않겠는가. 보기 좋은 걸 마다할 이는 없지.”
흥미라니. 신해량은 출발이 괜찮다며 안도했다. 전장에서 표적이 되는 외형이라 가리기 바빴는데, 이번만큼은 신이 내려준 안배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아리따운 귀족 아씨도 총명한 영예들도 우리 성주님의 마음을 녹이진 못했단 걸 알아두게. 따뜻한 분이시지만 성주님 품으로 들어가는 건 한겨울에 북부의 빙벽을 넘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하지.”
“알아두겠습니다.”
박무현이 신해량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은 마음에 들어 할 거란 말을 되뇌면서 신해량은 떨림을 숨겼다. 이제 첫 마디만 잘하면 된다. 첫인상이 반은 좌우한다.
“안녕하세요. 북부의 성주인 박무현입니다. 못 뵈었던 얼굴이군요. 새로 오신 분인가 봅니다.”
순하디 순하게 생긴 외양과 어울리는 이름이 조화가 좋았다. 신해량은 박무현의 입에서 뱉어진 이름을 곱씹었다.
“박무현입니다.”
때문에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박무현이요. 저와 같은 이름 가진 사람은 처음 만납니다.”
“아, 신해량입니다.”
첫인상이 반을 가른다. 그런고로 신해량은 벌써 반은 망해버렸다.
상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뒷목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신해량이 푹 고개를 숙였다. 박무현은 그 초라한 모습조차 감싸려는 듯이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해량 씨군요. 혹시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엔피어스 공국 연합에서 세운 국가입니다.”
“아, 거기군요.”
박무현의 목소리가 살짝 차가워졌다. 일전에 사절단을 물린 국가에서 또 찾아왔으니 반겨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무현에게 반해버린 신해량은 그의 냉대가 마치 저를 향하기라도 한 것마냥 슬퍼졌다.
“이전에는 동양에서 지냈습니다.”
“동양! 한국입니까?”
박무현이 다시 들뜬 아이처럼 되물었다.
“예.”
좋은 꼴로 떠나온 나라가 아니라서 출신을 숨기는 게 나았지만, 신해량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희 조부와 조모께서도 그곳에서 건너오셨답니다. 반갑군요.”
“그렇군요. 저도 이곳에서 한국인을 만날지는 몰랐습니다.”
유창하게 외국어로 말하던 박무현이 능숙하게 한국어로 말을 했다.
“한국어도 좀 할 줄 압니까?”
“예.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요.”
“저는 여기서 태어났지만, 부모님께서 꾸준히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뿌리를 잊으면 안 된다면서요. 이제 제게 언어를 가르쳐주실 강사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해량 씨가 여기에 머무르면서 가르쳐주시면 좋겠군요. 물론 대금은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박무현의 한국어 실력은 상당해서 가르칠 게 없었다. 하지만 박무현의 성 앞에서 비질을 하지 않아도 따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신해량은 기쁜 마음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참, 오늘 저녁에 사절단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있습니다. 해량 씨도 참가해주실 거지요? 한국 대표로요.”
박무현이 엔피어스와 관계되는 걸 꺼리는 듯해 신해량은 자신의 소속을 기꺼이 버리기로 했다. 자신을 버린 국가의 이름을 달고 대표라고 말해도 누가 신경 쓰지도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좋습니다. 이런 옷을 입고 참여해도 괜찮다면요.”
“음, 연회에는 다른 사절단도 오니 다른 옷을 입는 게 더 좋겠습니다. 물론 제 눈에는 그 옷도 예뻐 보이지만요. 해량 씨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할 만한 옷이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박무현이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한단 사실에 확신이 들자 신해량도 거리낄 게 없어졌다.
“추천해주실 만한 옷이나 남는 옷이 있을까요?”
“혹시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재단사에게 들러줄 수 있습니까? 저한테 맞지 않을 만큼 커다랗게 지어진 옷들을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예.”
망해버린 첫인상을 쇄신하기 위해 신해량은 재단사가 있는 위치를 듣고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2. 연회장
신해량이 재단사에게 갔다가 모든 시간을 전부 소요했다.
추위를 잘 안 탄다고 하니 재단사는 그를 붙잡고 평소 아무에게도 입혀 보지 못했던 옷을 전부 끌어와 입혔다.
갑옷만 입고 지냈던 신해량은 졸지에 목까지 덮는 상아색 셔츠를 입고 러플이 가득한 크라밧까지 매게 됐다. 그 위에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진한 노란색의 베스트와 진파랑색의 코트가 덧입혀졌다. 바지는 연한 올리브 색이 도는 팬츠를 입히고 그의 커다란 발엔 검은 구두가 신겨졌다.
살이 빠져서 망정이지, 그의 몸무게 그대로 도착했었다간 아마 팔이든 허벅지든 피가 안 통해서 쓰러졌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유, 성주님 주려고 지어놓은 게 이렇게 빛을 발하네요.”
신해량은 180cm도 안 될 것 같은 박무현의 외양을 떠올렸다.
“전 성주님께서 풍채가 좋으셨거든요. 우리 성주님도 그만큼 클 줄 알고 옷을 이렇게 큼지막하게 지어놨답니다.”
옷이 제 자리를 찾아간 것 같다며 재단사는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냈다.
“이제 가면 될까요?”
“네? 무슨 소리세요. 머리를 하셔야지요.”
용병이었던 신해량조차 눈치 못챌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붙든 투마나코라는 사람은 자신을 머리 단장하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녀는 신해량이 연신 사양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최신 유행 머리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어찌나 그 의지가 강한지, 평소에 사람 다섯 정도가 매달려도 움직이는 신해량이 꼼짝 못 할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신해량도 그녀에게 자신의 용병단에 들어오라고 입단 제의를 할까 고민했다.
투마나코의 마음에 들 때까지 신해량의 머리에 얹어진 흰 가발이 십수 개였다. 빗질이나 해서 가르마를 낼 줄 알았던 신해량은 허옇게 씌워진 가발에 분을 뿌릴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좋았어요! 이 정도는 입어야 성주님께서 댄스를 신청하지 않겠어요?”
“댄스요? 그건 남자랑 여자가 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교댄스에도 종류가 여럿 있잖아요? 마지막엔 레이디들에게 댄스를 권하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그 전에는 사내들끼리 자신의 춤을 과시하는 시간이 있고요. 그때 춤을 추자고 하려고 성주님께서 당신을 여기로 보낸 거고요.”
“그렇습니까?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냥 거지꼴을 면하라고 보낸 줄 알았는데 그런 심오한 의미가 담겼을 줄은 몰랐다.
“아유! 이런 줄 알았으면 저희가 춤을 알려드렸을 텐데! 이제 연회장에 가셔야 하니 더 붙들어놓을 수도 없으니 어쩐담! 가서 레이디들이랑 추는 춤이라도 추자고 하셔요. 성주님께서 춤을 추자고 권유하러 오기 전까진 자리에 앉아 계셔야 합니다. 그 정도는 알겠죠?”
“예.”
“그럼 늦지 않게 빨리 가요! 성주님보다 늦으실 건 아니죠?”
파티 참석에 주인공보다 늦어 눈총을 받는 건 안된단 건 알았다.
신해량은 불편한 옷을 입고 삐걱거리며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을 할 때마다 가슴에 달린 하얀 러플이 펄럭거렸다.
투마나코는 이게 요즘 유행하는 복식이라는데, 신해량은 그저 이 모습이 비둘기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그것도 박무현한테 구애하는 비둘기.
⁂
“한국의 사절단 대표, 신해량 입장합니다!”
‘한국’이란 단어를 퍽 원어민스럽게 발음하는 사람에게 내심 놀라며 당당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머리를 숨긴 덕인지, 모든 사절단이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흘끔거렸다. 신해량은 자신이 아는 얼굴이 있을까 하며 마주 훑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해량은 아무 빈자리나 가서 앉았다. 하인들은 홀 안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음료를 날랐다. 신해량에게도 한 잔이 쥐어졌다. 하얀 음료를 보며 백포도주나 모스카토일 거라고 믿었던 신해량은 입 안에 머금어지는 사과향에 당황했다. 알코올이 하나도 없는 순수한 사과주스였다.
“북부에서는 알코올이 있는 음료나 붉은 음료를 주지 않는답니다.”
신해량의 건너편에 앉은 여성이 먼저 신해량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도 비둘기색 드레스를 입은 걸 보고 그는 ‘저기도 비둘기군’ 따위의 생각을 했다.
“왜 그렇습니까.”
“북부에서 있었던 잔혹한 일 때문이지요.”
여인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옷 안까지 훤히 보였다. 여인의 가슴을 보는 취미는 없는 신해량은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을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여인들 모두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성들은 꽁꽁 싸매고 옷을 몇 겹씩 둘렀는데, 여성들은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실용성은 제쳐두고 오로지 누군가를 꼬시기 위해서나 유행을 따르기 위해 형태만 바꾼 옷을 보며 신해량은 쓸데없는 짓이라 판단했다.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나면 당장 남자들만 있는 자리로 떠나리라 결심한 신해량은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승기를 잡은 엔피어스 공국을 아십니까?”
“예, 압니다.”
“거기서 예전에 북부 성주님의 가족분들을 해치려고 했답니다.”
“예?”
그건 신해량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해량이 엔피어스에 들어간 건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왕이 숨을 거둔 것도 10년 전 이야기였다.
신해량은 왕이 죽기 이전의 이야기는 제대로 알아두지 않았다.
“12년 전이었지요? 선왕께서 살아계실 적의 이야기였답니다. 이미 왕의 후계자로 점해진 자가 2번쯤 죽었을 때일 겁니다. 현 성주님께선 갓 스물을 넘긴 때였을 겁니다. 그때 선왕을 지지하던 세력 중에 가장 큰 곳이 이 북부였는데, 엔피어스에서 북부를 처리하려고 암살자를 보냈답니다. 사절단을 보내 연회를 열고, 와인을 잔뜩 마시게 하곤 부부 내외와 경비들이 취했을 때 암기로 죽이려 한 거지요. 그때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어린 둘째 아들만 온전한 모습으로 살았고, 부부 내외와 현 성주님께선 큰 상처를 입었지요. 성주 가족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북부에서는 사방에 의료진을 요청했지만, 당시에 의료진을 보내준 건 선왕 뿐이었답니다. 비록 전 성주 내외는 목숨을 잃었지만, 성주님께서는 앉은뱅이가 될 뻔한 걸 면했지요. 그래도 그때 맞은 칼 때문에 눈 하나가 안 보이게 된 얘기는 유명합니다.”
“……그랬습니까.”
엔피어스에서 사절단을 보냈을 때 박무현이 그들의 목을 그대로 붙여서 돌려보낸 걸 장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신해량이 왕으로 만든 인간이 자신을 사지로 보내려고 했단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이제 그는 새 주인을 찾아 섬겨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북부의 연회장에는 붉은색 음료나 술이 나오지 않아요. 현 성주께서 그것들을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시거든요.”
여인의 말이 끝났을 때, 박무현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북부의 바람과 얼음벽의 주인인 박무현 성주님 입장하십니다!”
신해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셔츠와 한 톤 짙은 베스트, 그보다 짙은 코트. 상아색 바지와 흰 토끼털로 만든 신발을 신은 박무현은 북부에서 전설로 전해질 법한 요정 처럼 보였다. 신해량에겐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던 하얀 가발도 박무현이 쓰고 나오니 원래 제 머리인 양 잘 어울렸다.
신해량은 저런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도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 배신감을 만인에게 돌리지 않고 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그의 윗사람이었으면 했다.
신해량은 배신을 당하면 만인에게 표출해야 하는 인간이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배반당하면 누구보다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람은 주변에서 충분히 겪어봤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사람을 모시고 싶었다.
박무현 같은 사람을. 박무현 같은 사람이 없다면 박무현을. 사실 생을 통틀어 그와 같은 사람은 없을 테니, 박무현만을 모시고 싶었다.
신해량의 열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박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부부 내외가 죽고 십 년이 넘도록 성주로 일을 했을 박무현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가볍게 축사를 했다.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성주 박무현입니다.”
박무현이 가볍게 인사를 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산지가 험하고 날이 궂어 특산품이랄 게 없던 시절부터 북부와 거래를 트기 위해 찾아주셨던 분들께도, 새로 북부로 찾아주신 분들께도 모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북부에서는 충분한 짐승을 키워 질 좋은 가죽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2년 전부터는 가죽으로 덮은 온실에서 작물 재배에도 성공하였지요. 저희 가문의 문장을 딴 겨우살이와 북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설잎차가 그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군요. 참석을 기념하여 회장에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저희 북부에서 만든 특제 토끼 가죽신과 겨우살이 나뭇가지, 소량의 찻잎을 제공하겠습니다. 북부까지 먼 걸음 해주셨는데 약소한 선물일까 걱정됩니다만, 부디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찻잎으로 우린 차맛은 하인들에게 말하면 언제든 시음이 가능하오니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박무현의 간단한 연설이 끝나자마자 하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거대한 트레이가 있었는데, 안에는 발 크기에 맞춰 줄이고 늘릴 수 있는 토끼 가죽신과 끈, 겨우살이 나뭇가지와 잎차가 들어간 꾸러미가 있었다.
박무현은 사람 하나하나에게 직접 물건들을 전해주었다.
직접 신을 신어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겐 친히 무릎을 구부려 발모양대로 조이는 법을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다. 박무현의 온화한 안내가 이어지고 그가 끝에 다다른 건 신해량의 앞이었다.
“해량 씨.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정말 멋있군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가죽신을 신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신고 오신 신이 정말 아름답지만, 오래 신고 있으면 발이 얼 겁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박무현이 무릎을 꿇으려는 걸 보고 신해량은 바로 몸을 수그리려 했다. 공교롭게도 터질 것 같던 바지가 당겨서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야 했다.
주군으로 섬기고자 하던 이의 무릎을 꿇렸단 사실이 퍽 불편했다.
신해량의 신발에 가죽신을 덧대는 박무현의 손은 작지 않았다. 심지어 꽤 거칠기도 해서 신해량은 박무현의 손을 살폈다.
“성주님께선 검을 쓸 줄 아시는군요.”
신해량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
신해량의 발을 실수로 세게 죈 박무현이 화들짝 놀라 끈을 풀었다.
“해량 씨, 괜찮습니까?”
“예. 제가 놀라게 했나 봅니다.”
“……그 내용은 비밀이라서요.”
암살 대상이 무위가 대단하다고 하면 암살자들을 보낼 때 실력이 강한 놈을 고르게 된다. 신해량은 목소리를 더 낮추고 박무현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만큼 작게 말했다.
“실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어디 드러낼 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제 옆 사람이나 지키면 다행이죠.”
박무현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신해량은 박무현이 유사시에 지키려는 대상이 동생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충분히 강하시군요.”
“……다른 곳에는 얘기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검 좀 잡아본 놈들이면 전부 알 텐데요.”
“다들 제가 가벼운 체력 단련 정도나 하는 줄 압니다.”
말이 길어지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해량 씨, 춤을 출 줄 아십니까?”
“부끄럽게도 검만 잡고 살던 놈이라 여인과 추는 춤만 압니다.”
“그럼 제가 여인의 춤을 추겠습니다.”
박무현은 신해량을 일으켰다.
그가 여인의 역을 하겠단 소리에 놀란 건 신해량 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집안 남자들이 춤에 영 소질이 없었거든요. 어머니께서 여인이 어떻게 추는지 알면 나아질 거란 희망으로 여인이 추는 춤도 가르치셨답니다. 자, 저를 향해 손을 뻗어주시겠습니까?”
신해량이 손을 내밀자 박무현이 그 위로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본 악단은 왈츠를 연주했다. 박무현이 여인의 춤을 추는 게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춤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신해량의 어깨에 손을 얹은 박무현이 그의 흉곽에 밀착했다. 신해량은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박무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여기로 넘어올 때 배웠습니다.”
오래전, 용병단을 이국으로 끌고 올 때였다. 단원 중 하나가 ‘이 동네는 잠입을 위해선 여인네들과 춤을 추는 법만큼은 제대로 알아둬야 한다.’고 신해량을 닦달했었다. 그때 배워둔 사교댄스를 여인과 춘 적은 있어도 남자와 춰본 적은 처음인 신해량이었다.
박무현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스텝과 선을 복기했다. 허리를 잡히고 턴을 돌 때마다 박무현의 코트가 여인의 치마처럼 활짝 펼쳐졌다.
“잘 추시는 군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분을 매혹하셨나요?”
“딱히 없을 겁니다. 저는 재미없는 놈이거든요.”
“당신의 건너편 자리에 있던 분이 제가 성주인 걸 잊으실 만큼 굉장한 질투심을 담아 절 보고 있으신데요.”
“성주님과 춤을 추지 못해 화가 난 게 아닐까요?”
그를 시선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신해량은 다른 자리로 이끌었다.
“그럴리가요. 제가 성주만 아니었다면 저를 제치고 당신의 에스코트를 받고 싶어 할 사람들이 차고 넘쳤을 겁니다.”
“저는 성주님의 에스코트를 받고 싶었는데요.”
“장난이시지요? 아리따우신 영예들께서 들었다면 오늘 연회장의 만찬에 올라올 메인 구이는 제가 됐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영예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수없이 받고 있다고요.”
“진심입니다. 저는 성주님이 좋습니다.”
“허울뿐인 말이란 걸 아는데도 참 설레는 말이군요. 해량 씨같은 분께 들어서 그럴까요? 한평생 이런 말 듣는다고 설레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습니다.”
사교계에 능숙한 박무현이 기름칠 된 말을 했다.
신해량의 오른쪽 가슴에 느껴지는 박무현의 맥박은 참 고요했다. 차디찬 빙벽을 가슴에 대고 있으면 이렇게 고요할까 싶었다.
신해량은 씁쓸하게 박무현의 허리를 돌려 멀리 보냈다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오랜만에 다시 춰보니 왈츠는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신해량은 떠난 주인을 기다리며 돌아오길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찾으러 가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말 말고 성주님을 설레게 할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신을 붙들고 있어도 성주님의 마음을 녹일만한 거요.”
“설레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곡이 마지막을 향해갈수록 조급해지는 건 신해량이었다.
“가장 기분이 좋은 때는 언제였습니까?”
“여름에 들창을 열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밖에는 처음으로 키우는 걸 성공한 겨우살이 꽃향기가 풍기고 있었지요. 아시다시피 북부는 추워서 겨우내 들창을 여는 것도, 식량을 재배하기도 힘들거든요.”
“들창을 늘 열 수 있는 곳에 가서 살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제 터전이 좋습니다.”
박무현과 알쏭달쏭한 문답 끝에 신해량은 답을 도출해냈다.
“겨울 동안 가끔 다닐만한 따스한 교류지가 있는 건요?”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지요.”
신해량은 고민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엔피어스의 중앙 도시는 어떠십니까.”
“곡이 끝났군요.”
박무현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신해량의 손을 놓았다.
코트를 치맛자락처럼 들어올린 박무현은 그에게서 떠나갔다.
신해량은 박무현의 손이 닿았던 곳을 아쉽게 문질렀다. 따뜻한 체온이 남은 손바닥에 코를 박으며 귀끝을 붉혔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떠나가는 박무현의 모습에 신해량은 아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박무현은 연회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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