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만이 외로움을 안다
이착헌 전력 <악몽>
논커플링
주요 등장인물 : 이화영, 김기려.
이화영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생각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멍하고 얼떨떨하다. 그에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종종 이화영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흘러가 버리곤 했고, 그럴 때면 삶의 신변잡기가 마치 다른 이의 것을 지켜보는 듯 둔하고 멀게 느껴지기 십상이었으니까.
손안의 것을 만지작대며 뭘 할 예정이었는지를 다시 떠올려 보려 했다. 빳빳하고 힘 있는 종이붙이의 둥근 모서리가 이화영의 손끝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휘었다.
맞다. 저녁 장을 보러 갈 참이었다.
이화영에게는 아들의 명의로 만든 가족 카드가 있었으나 지난주에 벌써 한도가 다 되어 버렸다. 김기려의 월급일까지는 나흘, 카드 한도가 리셋되기까지는 닷새가 남았다. 닷새.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이에게는 참으로 까마득한 시간이다.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일생 누군가의 가족 노릇을 해본 일이 없는 이화영은 데면데면한 김기려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한 주 치의 생활비는 현금 몇 푼을 인출해 조용히 쓰고 채워둘 작정이었다.
잔액 : 27,381,307원
이런 것을 견물생심이라 하던가. 하다못해 앞자리가 아주 모자라거나 아주 넘쳤더라면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을.
이화영은 자신의 대출 빚 이천칠백만 원을 떠올렸다. 속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고 무언가가 뱃속을 휘젓는 듯하다. 희뿌연 머릿속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익숙해진 불안감이었다. 목구멍에서 위액이 솟구치는 것 같다.
이대로 통장을 들고 일어서면 현금인출기 앞에서 또 한 번 어지럼증을 느낄 것만 같았다.
이화영은 두 번째 서랍 바닥 깊숙이 다시 통장을 찔러넣는다. 그것이 양심이나 정 때문인지, 혹은 나흘만 더 기다리면 이천칠백만 원이 이천구백만 원이 될 것이란 사실 때문인지는 이화영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찬장에 아직 라면이 한 봉지 남아 있었다. 찬밥을 말면 둘이 한 끼니 요기할 만큼은 될 터였다.
이화영은 그 라면 국물이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곧잘 먹는 것 같아 내킬 때면 한 번들씩 사다 넣어두고는 했다. 그것은 이화영이 아는 거의 유일한 엄마 노릇이었다. 자식의 입맛을 우선 생각해 먹거리를 고르는 것이. 찬장에서 그 라면이 줄어들어 있는 것을 볼 때면 조금쯤 속이 뿌듯하고 든든해져서 좋았다.
이화영이 면을 건져 먹고, 김기려가 국물을 먹으면 되겠지.
그 식탁에서 카드가 다 되었단 것을 알려주고 김기려가 가진 체크카드를 받으면 된다. 김기려는 며칠간 바깥에서 돈 쓸 방법이 없을 테지만 그쯤이야 집밥을 먹으면 될 일이고, 교통카드는 휴대폰으로 찍으면 될 테니까. 아무렴 집안일을 꾸리는 사람이 생활비를 쥐고 있어야 살림이 돌아갈 것이 아닌가.
반찬으로 먹을 김치 한 종지 없는지 냉장고를 뒤적거리면서 이화영은 문득 이 생활이 지긋지긋하다 느꼈다. 그도 다른 모든 감정들처럼 질리도록 익숙해져, 어렵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화영은 냉장고 구석에서 시들시들한 오이 한 줄기를 찾아내 생으로 씹어 먹었다. 오이에선 기분 나쁜 찌든 맛이 났다.
조용한 인기척. 천천히, 꾹꾹 누르는 비밀번호 소리.
‘엄마, 다녀왔어.’
이화영이 기대한 인사말은 없었다.
김기려는 얼굴색이 하얘져서 굳은 표정으로 이화영을 보았다.
이화영은 덜컥 겁이 나고 어지러워졌다. 제가 통장을 본 것을 알았을까 봐, 애먼 생각을 아주 잠깐 떠올렸던 것을 추궁해 올까 봐, 그리하여 김기려가 이화영을 맨몸으로 내쫓아 버릴까 봐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어, 엄마. 나… 나, 각성했대. S급.”
이화영은 시든 오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돈에는 으레 따라오는 불행이 있다. 시기 어린 따돌림,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기꾼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심하는 가족이나 제 사생활에 관해 수군대는 낯 모르는 이들 같은 것 말이다.
그것들은 이화영에게도 찾아왔으나, 이화영은 자신이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가난해 본 적 없는 이들의 배부른 투정일 뿐이다.
수중에 당장 돈이 없는데 각종 변제 기한이 닥쳐오는 그 현실적 공포와 불안에 감히 비할 수가 있을까.
‘저 여자가 김기려의 생모래요.’
‘아, 제 자식 버렸던 주제에 아들이 각성했다니까 면도 없이 빌붙었다는 그 사람?’
‘세상에,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징그럽다, 징그러워.’
그러니 이런 모함들은 이화영에게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는 떳떳했다. 가난하여 애라도 살려 보자고 보육원에 보낸 것이 뭐 그리 큰 죄란 말인가. 찢어지게 가난해본 이들은 다 안다, 이화영이 영리했음을, 그것이 옳은 선택임을.
‘게다가 난 기려가 각성해서 빌붙은 게 아니야. 각성하기 전부터도, 가난해서 라면 한 봉지를 나눠 먹으면서도 그거를 옆에 꼭 끼고 살았다고. 기려가 S등급으로 각성한 것도 다 주님께서 그 고난을 인내해 낸 내게 주는 보상인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이화영은 백화점 지하 식품관까지 내려온 것을 후회했다. 한 번 귀가 간지럽다고 생각하자 사방의 눈이 온통 저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껄끄러웠다. 그저 간만에 단 도넛이 하나 먹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이화영은 3+1 프로모션 이벤트 중이라는 도넛을 네 상자나 사고—그것을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화영은 당장 단 게 먹고 싶었고, 도넛 네 상자가 아니라 매대에 있는 모든 도넛을 다 사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 있었으니까—냉장 쇼케이스 속에서 새빨갛게 윤이 나는 닭강정도 샀다. 그 브랜드의 닭강정은 가슴살이라 이화영은 입도 대지 않았지만, 이화영이 알기로 김기려는 순살 치킨을 제법 좋아했다. 이화영은 거만하게 웃었다.
양념 남은 거 다 싸주세요. 네, 그럼요, 많아도 괜찮아요. 헌터란 게 겉보기로는 번드르르해 보여도 결국에는 몸 쓰는 일이라서. 잘 먹어줘야지 힘을 쓰더라고요. 우리 애가 한창때 여기 닭강정을 좋아했거든요. 난 퍽퍽살은 안 넘어가서 좀 그렇던데, 애는 이걸 어찌나 잘 먹던지.
직원은 닭강정과 도넛 상자까지 쌓아 들고서 이화영의 차까지 바래다주었다. 이화영은 기분이 퍽 나아져 직원에게 만 원짜리 팁을 주었다.
이화영은 직접 운전했다. 고용한 운전기사가 이화영을 납치할 뻔한 이후로 김기려는 가정부들조차도 이화영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처했다. 그는 이화영의 안전에 관해서는 다소 강박적으로 구는 구석이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들이 그에게서 이화영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불쌍한 것.”
이화영은 진심으로 김기려를 불쌍하다 여겼다. 엄마 정을 못 받고 큰 것이 이렇게 오는 거라고.
‘이게 내 업보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게. 에휴, 불쌍한 내 새끼.’
한때는 도통 정이 붙지 않는 애라고 생각했건만. 이러나저러나 새끼는 새끼인지, 끼고 살다 보니 이따금 그것이 하는 양이 애타고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밤낮도 휴일도 없이 일, 일, 오로지 일만 하면서도, 쑥쑥 커가는 잔고에 한이 다 녹는 것 같고 마음이 든든하단 화영의 말 한마디가 좋아서 짜증 한 번 부리지 않는 애다. 영영 사랑스럽지는 않아도—김기려가 서운할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김기려는 제 아비를 너무 닮은 면이 있었다. 이화영은 그에게 앙금이 깊이 남아 있는 탓에 김기려를 온전히 김기려로만 사랑해 주기가 버거웠다. 애들은 이해 못 할, 제 자식을 낳아본 이만이 느끼는 복잡함이다—못 견디게 애틋해지기는 했다.
김기려는 12일이나 귀가하지 않았다. 길드에서 씻고 자고 그대로 도로 일하러 나가는 날들이 종종 있어서 이화영은 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헌터란 직종이 워낙에 11월이나 1월에는 으레 바쁘기도 했고, 이화영이 느끼기로는 다른 때라고 그리 다르지도 않았던 탓이다.
그리하여 한 손에는 도넛 한 상자, 다른 손에는 닭강정 한 상자만을 챙겨 든 채로 현관에 다다른 때. 김기려의 비서인지라던 낯익은 이가 장승처럼 지키고 선 것이 새삼 의아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김기려 헌터님이 중태…….”
일전의 어느 날과는 달리, 이화영은 손안의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전에는 가진 것을 놓쳐버리는 것이 아쉽지 않았으나 이제는 쥐고 있는 것만이 그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김기려는 사흘을 더 누워있다 깨어났다.
그동안 이화영은 이틀을 아들 곁에 우두커니 있었고, 셋째 날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갔더랬다. 그러니 김기려가 깨어났을 때 그 곁을 지키지 못했던 일에는 다소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기려야, 엄마 계속 곁에 있었어. 정말로 계속 네 옆에…….”
“알아, 괜찮아.”
김기려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낯으로 낮게 속삭여 답했다. 기운 없는 목소리에 이화영은 또 한 번 바닥이 꺼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기려야, 엄마 정말 무서웠어. 네가 영영 못 일어나면 어떡하나 싶어서. 우리 아들, 이대로…….”
“엄마.”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화영을 보는 김기려의 눈에는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시선은 어딘지 낯설었고, 무서웠다.
“나를 걱정한 거 맞기는 해?”
무서웠다.
“내가 죽어서, 이제 돈 벌어다 주는 호구가 없어지는 게 걱정이었던 건 아니고?”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너는! 엄마가 너를 얼마나……!”
“그런데 내 통장은 왜 뒤져 봤어?”
이화영은 말을 잃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부풀어 넘치는 억울함을 타고 뚝 떨어졌다.
셋째 날. 집에 오자마자 씻을 생각도 못 한 채, 이화영은 김기려의 통장을 먼저 찾았다. 잔액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김기려는 은행 어플로 모든 걸 처리하곤 해서 통장 정리를 영 잊어버린 모양이었지만. 이화영은 통장을 꼬박꼬박 챙겨 두었다가 한 번씩 정리해 오곤 했다. 은행에 한 번 갈 때마다 통장이 대여섯 개씩 새로 쓰였다. 마지막으로 통장 정리한 것이 두 달 전이라 정확한 잔액은 아닐 테지만…….
“엄마, 좀 믿어볼 만하게 행동을 해야지. 우리 기려는 엄마 믿어줄 마음 만만인데, 손도 마주쳐야 손뼉을 치는 거 아니야?”
이화영은 김기려에게서 끔찍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당장은 해명이 더욱 급해서 그 위화감은 곧바로 잊혔다.
“그래, 통장 봤어! 너 연명 치료 얼마나 오랫동안 할 수 있는지, 회복제랑 치료사인지 뭐시깽인지를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넌 엄마를 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억측을 하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통장을 펼쳐 들고 기나긴 숫자를 뒤에서부터 일십백천만 세던 마음에 오로지 그뿐이었느냐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하여튼 그 말도 순수하게 진심이기는 했다. 이화영은 가슴을 퍽퍽 쳤다. 너무도 억울했다.
김기려는 우는 이화영을 한참 물끄러미 올려보다 말했다.
“그런가. 그래…….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김기려가 손을 뻗어 이화영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서 도저히 산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이화영은 섬뜩한 냉기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으나 아들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도리어 김기려보다 더욱 힘 주어 꼭 잡고 매달렸다. 손안의 것은 이화영이 가진 전부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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