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끓이는 그림자
이착헌 전력 <소나기>
논커플링
알파우리 날조, 최신 에피소드 이후의 일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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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안다. 내가 가까이 두고 친하게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쯤은.
-저기 ▒▒, 혹시 많이 바쁘지 않으면 저희랑 표층 수역에 햇볕 쬐러 다녀오지 않으실래요?
-바빠.
-아, 죄송해요…….
바로 이렇게.
하지만 세상 법칙이란 것은 때때로 참 쓸데없을 만큼 공평한 법이라. 한쪽 끝에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꼭 반대쪽 끝도 있더란 말이다.
-야야, 비켜 봐. ▒▒! 모자랑 지느러미 외투는 어디 뒀어요?
-난 그딴 거 안…….
연파랑색 기다란 촉수가 무려 네 가닥이나 달라붙는다. 그것들은 믿을 수 없는 물리력을 행사해 내 몸을 골렘 부품과 술식들 사이에서 끌어낸다.
-저기 저 친구가 이번에 새로 조개지느러미부리고래를 장만했는데 엄청나게 크고 귀여워요. 근데 세상에 그 귀염둥이가 양식장 출생이라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해면 호흡을 못 해봤다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그래서 오늘은 우리 다 같이 새 탈것의 환영식을 치러주기로 했어요.
-안 궁금한 사정 설명은 됐고, 이 예의 없는 촉수들부터 좀 치워주었으면 좋겠는데.
-근데 말이죠, 얘기하다 보니까 세상에, 우리 귀염둥이 뿌뿌 말고도 태어나 표층 수역에 한 번도 안 가본 심해 출신 연구자가 우리 학술당에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 소문 들어봤어요?
-아니.
내 얘기 같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건 완전히 와전된 소문이었다. 나는 표층 수역에 물론 다녀왔다. 베타성인 시체로 해면이 뒤덮여 한낮에도 컴컴했던 표층을 기억한다. 피로 혼탁해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그 물의 시큼한 비린내와 미지근한 감촉. 그래,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런 걸 알고 가만히 두면 안 되겠죠?
-난 표층수역에 가 봤어. 그리고 가능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아. 특히 지금은. 방금 술식이…….
-에이, 놀러 가본 적은 없잖아요~~~ 얘들아, 영웅님 잡아 왔다! 가자!
그놈은-미안한 일이지만 도저히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다. 생전에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본 일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마도학자가 아니라 군인이나 성채건조가가 되었더라면 크게 성공했을 재목이었다. 당시 내 몸체는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어지간한 성인 알파우리인을 가뿐히 넘을 만큼 건장했는데 녀석은 그런 나를 무슨 어린 해파리처럼 덜렁 집어 들고 부리고래 등판을 향해 내달렸다. 내 살아전생 그토록 무력감을 느껴본 일이 다시 없었다.
양식장 출신이라던 부리고래는 과연 컸다. 부리고래라기보다 거의 향유고래만 했다. 탈것 목적으로 교배되고 키워졌으니 어련할까. 거대한 뿌뿌는 알파우리인 여섯을 태우고도 힘에 부친 기색 없이 너끈했다. 그리고 ‘뿌뿌’하고 울었다, 정말로.
녀석들은 나를 저희 한가운데에 끼워 앉히고 양옆에서 촉수를 붙들고 있기까지 했다. 내가 헤엄치는 부리고래 등짝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라도 할까 불신하는 듯이. 어리석은 의심이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학술당 연구실까지 자력으로 헤엄쳐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왜 그런 수고를 들인단 말인가.
학술당에서 표층 수역까지 이르는 길은 사소하고 번잡스러운 일들로 다사다난했다. 해역 경계를 순찰하던 치안관에게 무려 세 번을 붙들렸는데, 한 번은 우리가 탈것을 소유하고 조종할 만큼 성숙함을 해명해야 했고 (치안관은 이 가운데 유일한 미성체였던 나를 중앙에 태운 것을 칭찬했다), 두 번째에는 주취 운전이 아니라 표층 수역으로 놀러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한 멍청이들일 뿐임을 증명해야 했고, 세 번째에는 우리의 부리고래가 아직 초보 탈것인지라 상층 항로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것을 사과해야 했다. 우리가 모르는 새 상층 부촌 어귀를 수상쩍게 빙글빙글 헤매고 있었던 탓이다.
이 천진난만한 굽쇠물림들에게는 그조차도 부레가 뻐근하게 부푸는 모험이었다.
시시한 모험 끝에, 바다가 푸르스름한 여명으로 차오른다. 부리고래의 기다란 주둥이가 높이 더 높이 솟구칠수록 바다는 더더욱 푸르게 빛을 발한다. 누군가가 제 모자를 내 위에 씌웠다.
-심해종에게는 눈이 부실 테니까 쓰고 계세요.
-너는?
그는 기포를 가득 머금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작은 공기 방울들은 모자를 대신하여 그의 분홍빛 정수리를 빼곡히 채웠다. 해면이 가까워지자 그가 머금은 기포는 빛을 받아 진주 장식처럼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부셨다. 멍청이.
어린 부리고래가 해면 밖으로 콧구멍을 내밀고 뿌어어어엉 하는 괴성을 내지른다. 그동안 색색의 알파우리인들은 빛나는 바다에서 자아 없는 자포동물들처럼 흐느적거렸다. 물은 알맞게 따스했고 넘쳐나는 빛으로 눈앞이 새하얬다. 우리는 색이 다 바래어 거의 투명해질 때까지 일광욕을 했다. 평생 쬐었던 햇빛의 90%는 이때 다 누렸던 것 같다.
-저기 봐. 그림자가 움직인다.
누군가가 외쳤다. 나는 모자를 고쳐 쓰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곧장 ‘그림자’라는 것에는 소리가 없다는 정보를 상기해 냈다. 부옇고 멍한 시야에 무언가 검고 거대한 것이 해면을 타고 느릿느릿 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위에 뭐가 있는 거야?
-어떡해! 이쪽으로 와!
노느라 정신없는 부리고래를 부랴부랴 붙잡아 올라타고 옆구리를 두들겨댔다. 정체 모를 그림자가 우리를 덮쳐들기 전에 깊은 바다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우리의 뿌엉-부리고래의 주인은 그것이 부리고래 말로 ‘야호!’라고 확신하는 듯했고 개명을 결정하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은 그 큰 덩치로 그저 즐겁게 표층을 쏘다닐 뿐이었다. 그림자가 다가온다. 점점 더, 점점 더. 부리고래는 그림자의 주둥이로 과감하게 뛰어든다. 연구자들은 서로서로 촉수를 꽁꽁 얽고서 비명을 내질렀다. 몇 가닥의 촉수가 내 위로도 거칠게 엉켜 든다. 방해 돼. 이 순진한 바보들은 아무도 방어 요술을 시전할 생각조차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굽쇠물림들이란.
푸른 보호막은 삽시간에 여섯 알파우리인과 부리고래를 휘감는다. 부리고래의 기다란 주둥이 끝까지 꼼꼼하게. 다섯 겹의 비명이 더욱 요란해진다. 그들은 시퍼런 빛을 내는 그림자가 저희를 한입에 꿀꺽 삼킨 줄로만 알았다. 나는 색색의 촉수들에 엉키고 짓눌려 온몸이 거의 구겨지고 있었다. 아프다 멍청이들아, 아파.
초저주파의 비명 사이로 기묘한 소음이 끼어들어 반향반을 간지럽게 두들겨댔다.
퐁, 퐁당, 퐁당퐁당, 퐁퐁퐁, 차박차박차박, 치지지지-
머리 위를 한가득 메우는 무수하고 무수한 공기 방울들. 아니다, 그건 공기 방울이 아니라 물방울이다.
바글바글하는 섬찟한 소음과 함께 바다가 맹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한 명이 기절한다. 나는 그 노란 멍청이가 고래 등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연파랑색 촉수를 끌어다가 묶었다. 그 녀석은 남다르게 힘이 센 녀석이니 등딱지에 잘 붙어 있으리라 여기면서.
끓는 바다를 식히려면 어떤 술식을 써야 하지? 냉각?
하지만, 뜨겁지 않았다.
그림자로 덮인 바다는 도리어 기분 좋게 서늘했고, 끓어오르는 해면은 찬란한 무늬를 흐트러뜨리며 그저 요란하게 일렁거릴 뿐이었다.
나는 뒤엉킨 덩어리 사이로 힘겹게 촉수를 뻗어 끓는 바다에 담갔다. 누군가 내게 촉수를 마구 얽으며 필사적으로 말렸으나 그게 누구였는지는 분간할 수도 없었다.
-차가워.
그리고 간지러웠다. 산호가 보글보글 내뿜는 숨 방울을 쐬는 것처럼.
바다 바깥은 촉촉하고, 저 멀리에서부터 쏘아진 물줄기가 촉수 끝을 장난스럽게 핥아댔다.
-아 생각났다. 이거, 비다.
-피????
-비. 멍청이. 햇볕에 증발한 바닷물이 차가운 상공에서 응결해 다시 바다로 돌아오는 현상.
-비…….
심해 출신보다도 아는 게 없으면 어쩌잔 말이야.
-이 그림자는 구름 그림자였나. 이렇게 짙은 그림자도 드리울 수 있는 거였구나, 구름이란 거.
-구름…….
멍청이들은 참으로 그들다운 꼴로 널브러져 놀란 폐를 뉘었다. 저희가 잡아먹힌 것이 아니란 사실만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연구자들이라는 것들이 빠져가지고. 온몸을 아프게 옥죄던 예절머리 없는 촉수들이 맥없이 떨어져 나간다.
나는 모자 너머로 불규칙하고도 아름답게 이지러지는 해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층을 넘어 표층까지 올라올 일도 다시 있을까 의심스러운데, 때마침 짙은 비구름을 만나는 일이 내 생에 두 번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바다를 끓이는 그림자가 멀리멀리 흘러가고, 되돌아온 햇빛에 눈이 멀 것 같아지도록.
—
감각은 의식보다 먼저 깨어난다.
기분이 아늑해지는 소음. 시원하고 상쾌한 물. 그리운 박자로 나긋하게 흔들며 얼러주는 바다의 손길.
김기려는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것들을 게워 내며 눈을 뜬다. 호흡기로 막대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가미가 없는 몸은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수중 호흡을 성공시킨다.
물을 흐리며 흩어지는 피의 색은 붉었다. 김기려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도로 몸에서 힘을 뺀다.
‘아, 지구구나.’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잠시 혼란스럽다. 왜 바다에 빠진 건지, 어쩌다 폐가 또…….
포유류 하나가 혼비백산한 낯으로 엉망진창 허우적거리며 김기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물속에서 숨도 쉴 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용기로 물에 뛰어드는지, 김기려는 아직도 이들의 무모한 습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포유류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김기려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이내 그 몸뚱어리를 끌어안는다. 그것의 허둥거리는 몸짓과 조야한 힘에서 필사적인 절박함이 느껴졌다. 김기려는 이것이 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건져주려 했다. 다만 그건 포유류 쪽도 마찬가지였다.
“커헉, 쿨럭, 콜록콜록.”
조용히 피 섞인 물을 토해 내는 김기려를 부둥켜안고 포유류는 거칠게 기침한다. 그때야 김기려는 이것이 저를 구하려고 뛰어든 것임을 깨닫는다.
‘날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었다고? 내가 수속성 각성자인데? 대체 왜?’
이쪽이나 저쪽이나, 세상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멍청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김기려는 이 멍청하고 착한 것이 실망하지 않도록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그것은 참으로 미련스럽게 허우적대며 해면동물도 비웃을 속도로 헤엄쳐 나아갔다.
바다가 거칠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장대비라니.
‘아아 나 때문이군.’
그가 물을 끌어당긴 탓이다. 바닷물을 쓰려던 것이었으나 광대한 힘은 사방으로 영향을 발했다. 저 먼 창공의 구름이라고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 없다.
빗줄기는 거세게 일렁이는 해수면을 연신 쏘아대었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아름다웠다.
“위에서 보는 것도 꽤 보기 좋네.”
대답할 여유는커녕 들을 정신도 없는 포유류는 그저 김기려의 몸을 놓치지 않으려 옭아맨 팔에 힘을 더 줄 뿐이었다. 아이고, 아파라. 김기려는 속으로만 불평했다.
뒤뚱뒤뚱 헤엄치는 포유류에게 몸을 실은 채. 김기려는 해면 아래 손바닥을 펼쳐 보글보글 끓는 바다의 간지럼질을 즐겼다. 그의 젖은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이는, 아쉽게도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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