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time sadness

00

그해 여름은 쪄 죽을 것 같이 더웠다. 한낮 최고 기온이 35도까지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씨가 아니었다. 타버릴 것 같은 햇빛이 쏟아지는 점심엔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에 신발 밑창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착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나루카미 쿠즈오는 그 땡볕 아래서 달리고, 또 달렸다. 별다른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최대한 멀리, 멀리 나가기만 하면 된다. 얼마 안 가 주차장에 도착해 차키를 꽂는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열기에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켜며 핸들을 붙잡는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나 뜨겁게 달궈진 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피렌체…. 어디든 상관없다. 아니 어디든 상관없지는 않다. 파리는 싫어. 보르도, 에트르타, 마르세유. 그것들도 전부 싫어. 결정했어. 일단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뉴욕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끊는 거야. 영어는 할 수 있고 지갑도 챙겼고, 환전은 거기서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마저 갈무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동을 건다. 엔진이 몸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쿵쿵,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01

벚꽃이 다 지고 있는 계절이었다. 바닥에는 다 진 벚꽃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날 비가 내렸지. 전날 내린 비는 봄비치곤 요란했다. 제대로 된 여름이 오려면 앞으로 두 달은 더 남았는데, 벌써 여름비가 내렸다. 온 바닥에 꽃잎들이 들러붙은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상기후가 실감했다. 기후 위기 모금 금액을 더 늘리는 게 좋을까…. 잡생각을 하며 거리를 걸으면 누군가 쿠즈오의 앞에 전단을 내민다.

"신종 모델 출시 기념 20% 행사 중입니다!"

눈썹이 짙고 눈꼬리가 내려간 시원한 인상의 남자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받아 든 전단엔 사람 몇 명이 한 줄로 줄서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옆엔 커다란 글씨로 'HE-3553 모델 신종 출시! 더 자연스러워진 모델링을 만끽해보세요!'라고 적혀있었다. 고개를 들어 남자가 서 있던 가게를 응시한다.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02

누가 21세기를 보고 인간의 시대라고 칭하던가. 나루카미는 지금의 시대가 기계의 시대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인간이 번성했다고 하기엔 주변엔 기계가 너무 많았다. 식당에 가면 서빙 로봇이 음식을 갖다주었으며 백화점에 가면 안내 로봇이 길을 잃은 노인들을 도왔다. 카페에 가면 팔다리밖에 없는 기계가 커피를 타 주곤 했다. 그야말로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인간이 이뤄낸 두 번째 창조.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으나 그것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제아무리 사람이 만들어냈고 사람이 지배하는 기계라곤 하지만 결국엔 인간을 대체하고 있지 않은가? 식당에서 바삐 서빙하던 직원들이나 유니폼을 입고 백화점을 쏘다니던 이들을 떠올려본다. 많은 기계들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했다. 그렇담 대체된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나루카미는 고개를 들어 높은 고층 건물을 응시한다. 건물 안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들 전부가 아주 작은 부품이 되어 바삐 굴러다닐테지.

언제부터였던가. 그들은 사람을 대체하는 로봇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는 기계는 차고 넘친다. 허나 H사가 내는 건 단순히 인간의 일을 돕는 로봇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꺼내놓은 것은 이랬다. 친구, 연인, 가족.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 (누군가는 이걸 안드로이드라고 칭했다.) 실존하는 인간의 성격을 자그마치 200만 명분을 채취해 메모리 칩에 삽입했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마케터는 자신이 원하는 성격으로 커스텀이 가능하며 학습을 통해 자아를 (어느 군의관은 이 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형성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고 주장했다. 여자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저희 H사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는 인간 친화적으로 (그럼, 기계가 인간에게 친화적이지 않으면 어쩔 건데?) 사람과 쉽게 친해집니다. (개, 고양이도 할 줄 아는 걸 기계가 못하면 어쩌자는 건데?) 또한 이 메모리 칩은 그저 단순히 샘플들을 기억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습니다! (쿠즈오는 이 대목에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한때 너무나 사랑했으나 이젠 볼 수 없는 과거의 연인, 하늘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만 했던 가족! 생전에 살아있던 그들의 데이터만 있다면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정확히 3초 뒤 입을 닫은 나루카미 쿠즈오는 이 말을 듣고 TV를 꺼버렸다.)

03

광고가 나온 지 얼마 안 가 거리엔 로봇들이 차고 넘쳤다. 동그란 몸통에 바퀴가 달린 저가형 모델부터 진짜 인간의 형태와 똑같이 만들어낸 고가형 모델까지. 다양한 기계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카페에 앉아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질색하는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사야 젠이었다. 젠은 얼마 남지도 않은 휘핑크림을 빨대로 쪼아대며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거지 같은 종이 빨대는 젠의 힘에 의해 엉망으로 망가져 갔다.

"나루카미 씨는 괜찮으세요?"

"뭐가?“

"안드로이드들 말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별로거든요. 사람을 흉내 내는 건 사람에서 그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스튜디오에선 배우를 쓰는 것보단 기계를 쓰는 게 장기적인 측면에서 훨씬 싸니까 그렇게 하자고 벌써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저 그거 듣고 진짜 어이없어했거든요. 업계 관계자들 진짜 제정신인가 싶어요. 물론 제 위치에선 항의해 봤자 죽도 밥도 안되니 가만히 있지만…."

젠은 테이블 옆을 지나가는 서빙 로봇조차 거슬리는지 그것에게서 고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옆에 있던 엘린이 소리 없이 웃는다. 그렇게까지 싫어해야 하나. 엘린 씨는 제 편 들어주세요. 쓸데없는 말 따위가 오간다. 한참 뒤에야 나루카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네?"

"그거 네가 해도 되는 말인가?"

"또 술병으로 머리 깨지고 싶으세요?"

04

H사가 출시한 로봇에 관해선 다양한 의견이 나돌았다. 어떻게 죽은 사람을 고스란히 따온 로봇을 작동시킬 수가 있느냐. 그런 건 고인 모독이라는 것과 같은 의견도 있었고, 애도의 방식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죽은 이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든 그것은 유족의 마음 아니냐…. 와 같은 의견도 있었다. 뭐 어느 물밑 커뮤니티에선 이것은 정부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내놓은 새로운 수법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으나 이 많은 의견은 나루카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나루카미는 수많은 의견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굳이 입장을 내자면 누구에게나 후회가 되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니 애진작에 관두란 쪽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늘 제 3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나루카미에게도 포함되는 말이었다. H사가 신모델을 내놓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옆집 사람은 전 애인을 지나치게 그리워하는군, 건넛집에 있는 이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아직 잊지 못했군. 따위의 정보 값들이 새로 입력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루카미 쿠즈오가 HE-3553을 구입한 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05

상가 구석에 있는 골목으론 가지 말고 웬만해선 큰길로 가. 자식이 딸린 부모들 사이에선 위와 같은 말이 유행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사람이 죽은 탓이었다. 원래 작은 동네보단 큰 동네에서 소문이 더 빠르게 도는 법이다. 사람이 많고, 그만큼 유동 인구가 많으니 확산되는 건 순식간이다. 죽은 사람은 30대 여성으로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여자가 죽은 골목은 상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이었고 그로 인해 앰뷸런스가 진입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앰뷸런스가 여자를 태웠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여자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어떤 남자가 함께 있었는데 남자는 끝까지 여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죽지 마, 정신 차려, 죽으면 안 돼. 그런 말이 허공 위로 흩어졌다.

골목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있었고 범인은 그 자리에서 즉시 잡혔다. 현행범이었기 때문에 현장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나 소문은 얼마 안가 빠르게 묻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부르주아 새끼들이 사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아스팔트 바닥에 스며든 핏자국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사건은 그저 기사가 몇 번 나고 조용히 묻혔다. 애가 사는 집에서나 간간히 큰길로 가라는 꾸중이 들려올 뿐이다.

06

나루카미 쿠즈오는 이번 생에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셈을 세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언제부터, 뭣 때문에 잘못된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인류학 쪽으로 빠졌지만 드물게 수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다. 의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숫자를 다루는 것에 능숙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아무리 계산해 봐도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건지 납득하지 못했다.

골목으로 가자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문제였을까, 그 골목에 고양이가 살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님 엘린이 길에 있는 동물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밥을 주는 성정을 가진 게 문제였을까. 몇 번이나 생각해 봐도 엘린 베르트랑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려다가 변을 당했다는 결론밖에 내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게, 왜 지저분한 고양이에게 굳이 밥을 챙겨주려고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골목 쪽으로 걸었냐는 답 따위가 아니라, 하필 죽은 사람이 엘린 베르트랑이었냐만 했는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그중에 엘린이 포함되어야만 했는지. 그런 것들의 답을 알고 싶었다.

장례식은 놀랍게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엘린의 지인들이, 그리고 자신의 지인들이 엘린을 추모했다. 개중엔 나루카미의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으며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가 놓아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엘린의 묘비가 세워질 때까지 함께했다.

엘린 베르트랑이 누워있는 관짝은 자그마치 350만 엔으로 엘린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비싼 거였다. 생전 엘린 베르트랑은 빙수기를 갖고 싶어 했다. 여름이 완전히 오기 전에 집에서 직접 해 먹자며 전자제품 코너를 한참 서성거렸다. 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자, 주변인들이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얼마 안 가 시선은 들려오는 소리가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불쾌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죽은 부인의 앞에서 입을 막은 채 웃는 남편이라니. 조문객들이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웃기잖아. 죽어서야 빙수기를 10대를 사고도 남을 관짝을 얻게 됐는데. 너넨 이게 안 웃겨? 웃는 사람은 나루카미 하나였다.

07

HE-3553이 집에 도착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가게에 발을 들이기까지 약 삼 초, 안내를 절차 받고 계약서를 쓰기까지 두 시간, 가게에서부터 집까지 배송되기까지 겨우 사흘. 도합 사흘하고도 두 시간 삼 초가 걸렸으니, 세상을 창조하는 데 엿새가 걸린 신을 이긴 셈이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본인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자 살면 말이 많아진다니 진짜인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제 몸만 한 박스를 뜯어내자, HE-3553이 드러났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 정확히는 엘린 베르트랑과 -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루카미는 가장 먼저 설명서를 집어 들었다.

HE-3553을 구매해 주신 고객님에게 무궁한 발전이 있길 응원합니다. HE-3553은 고객님의 요구사항에 맞춰 생전 '엘린 베르트랑님'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왔습니다. 고객님께서 전달해 주신 생전 엘린 베르트랑 님의 목소리와 행동, 말투가 담긴 영상을 기반으로 4,600여 가지의 패턴을 분석해 냈으며 해당 데이터는 HE-3553의 메모리 칩에 들어가 있습니다. HE-3553은 기동한 순간부터 고객님을 이전에 알던 대로 인지할 것이며 때로는 이상적인 친구가, 때로는 이상적인 가족이 되어줄 겁니다. 작동 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목뒤에 있는 버튼을 3초 이상 길게 눌러주시면 됩니다. (끄는 법 역시 동일.) 충전은 한 번 하면 최대 72시간까지 작동하나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충전하시는 걸 권고드립니다. 배터리기 완전히 바닥난 채로 기기가 꺼지면 내부 배터리 수명에 영향이 갈 수도 있습니다. 후략….

설명서를 빠르게 읽어내린 나루카미는 잠들어있던 HE-3553을 기동시켰다. 그것은 정확히 세 번 눈을 깜빡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 HE-3553 나루카미의 손을 잡았다. 기계의 손 치곤 따듯했다. 마침내 그것은 나루카미에게 말을 걸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쿠즈오, 내가 얼마나 길게 잠들어 있었지?”

08

HE-3553과 하루를 보내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HE-3553는 엘린 베르트랑처럼 굴었고 그가 했던 모든 일을 대신했다. 어느 날은 나루카미를 따라 청소기를 밀었으며 어느날은 나루카미를 따라 요리를 했다.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기계의 왼손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그것을 빼는 일은 없었다. 건너편 주택에는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결혼한지 얼마 안된 신혼부부라고 했다. 같은 젊은 부부끼리 잘 지내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진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가끔 어느 군의관이 전화를 걸어 자네 아직도 그 쇳덩이와 사는가? 길게 가는군. 그러다 언젠가 후회할걸세. 와 같은 말을 건넬 때만 빼면 모든 게 다 좋았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다. 어떤 생물도 인간만큼 바뀐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순 없을 것이다. 나루카미는 이제 HE-3553이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HE-3553이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엔 접시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있었다. 동거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엘린이 마음에 든다며 들고왔던 접시 중 하나였다. 이게 어떤 접시인 줄 알고 그렇게 막 다뤄! 생각을 거치고 나온 말은 아니었다. HE-3553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인간이 만든 기계치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고무장갑을 타고 흐른 거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기계가 한 말은 이랬다. 쿠즈오, 접시는 새로 사면 되잖나…. 너무 소리치지 말게.

헛숨을 들이켰다.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원래 저런 억양이었나? 처음 본 타인과 한 공간에 있는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나루카미는 HE-3553을 더 이상 엘린 베르트랑으로 볼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HE-3553은 단 한 번도 엘린 베르트랑이 된 적이 없으며 그건 단순히 자신의 세뇌에 불과하다고. 아주 견고하게 이룬 자기 세뇌가 풀리면 언제든지 이전과 같은 지옥에 처박히리라는 것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일상을 영위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 번 일어난 균열은 외면한다고 메꿔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부터 HE-3553의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나루카미는 아시모프의 3원칙을 기억한다. 첫째, 로봇은 인간을 지켜야 한다. 둘째, 로봇은 인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셋째, 위 사항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기계는 인간에게 호의적이다. 그 어떤 기계도 인간의 의지에 반할 수 없으며 부정할 수 없다. 나루카미는 이 원칙이 지금만큼 엿같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HE-3553은 모든 상황에서 먼저 물러났다. 덕분에 나루카미는 엘린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호의가 같잖게 느껴졌다. 엘린이었다면 분명 이 상황에선 고집을 부렸을 텐데, 엘린이었다면 방금 상황에선 서운해했을 텐데. 엘린이었다면….

그 순간, HE-3553과 눈이 마주쳤다. 엘린의 눈이 저렇게나 진한 노란색이었던가?

나루카미 쿠즈오는 HE-3553과 한순간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09

그해 여름은 쪄 죽을 것 같이 더웠다. 한낮 최고 기온이 35도까지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씨가 아니었다. 타버릴 것 같은 햇빛이 쏟아지는 점심엔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에 신발 밑창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착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나루카미 쿠즈오는 그 땡볕 아래서 달리고, 또 달렸다. 별다른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최대한 멀리, 멀리 나가기만 하면 된다. 얼마 안 가 주차장에 도착해 차키를 꽂는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열기에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켜며 핸들을 붙잡는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나 뜨겁게 달궈진 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피렌체…. 어디든 상관없다. 아니 어디든 상관없지는 않다. 파리는 싫어. 보르도, 에트르타, 마르세유. 그것들도 전부 싫어. 결정했어. 일단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뉴욕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끊는 거야. 영어는 할 수 있고 지갑도 챙겼고, 환전은 거기서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마저 갈무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동을 건다. 엔진이 몸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쿵쿵,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HE-3553이 창문을 두들겼다. 나와보게, 쿠즈오. 여름에 차 안에 있으면 위험하네. 일단 나와서 얘기를 해보세. 지금 내 말 듣고 있나 쿠즈오? HE-3553은 엘린 베르트랑이 아니다. 엘린 베르트랑은 절대로 HE-3553이 될 수 없다. 엘린 베르트랑은 이미 3개월 전에 죽었으며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HE-3553은 나루카미 쿠즈오의 아내가 되어주지 못한다. 확정된 명제가 느린 테이프를 감듯 머릿속에 흘러간다. 나루카미는 핸들에 고개를 처박는다.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피렌체…. 가보지도 않은 도시들을 중얼거린다. 나의 만들어진 엘린 베르트랑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그렇기에 비행기를 타고 물을 건너도 달라붙은 망령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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