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X

러브레터

배룡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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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처음 고백했던 날이 떠오른다. 좋아해. 그 한 마디에 싱그럽던 얼굴이 겨울 흙처럼 차가워졌었다. 용희는 그 슬픈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그 때의 나는 그것이 거절인 줄로만 알았으나 지금은 어떤 감정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용희의 사과를 받아 줄 마음이 없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사건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는 도대체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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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씻어냈다. 또 다시 땀이 맺히는 계절이다. 발에 채이는 모든 풀들이 짙은 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첫 날, 담임 교사는 학생들에게 상추와 배추와 순무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면 교실 뒤켠에 텃밭을 마련하여 함께 심자고 했다. 식물을 직접 키우고 그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느끼는 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나온 채소들로는 한 달에 한 번 삼겹살 파티를 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아이들도 날이 갈수록 네 배추알보다 내 배추알이 더 크니 내 상추잎은 벌레가 먹었는데 네 상추잎은 멀쩡하니 하며 승부욕을 가지기 시작했다. 용희가 돌보던 순무는 다른 순무들에 비해 유난히 파랗고 실했다. 초록은 용희의 색이었다.

하얗고 붉은 벚꽃보다는 꽃이 지고 난 후의 푸르른 벚나무가 더 잘 어울리는 이였다. 벚꽃이 한창일 시기를 용희와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온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연둣빛 단풍나무 아래의 용희를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용희를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학교 운동장 구석에 있던 단풍나무 아래로 돌아간다. 그물 같은 나무 그림자 아래 서서 매미의 울음소리를 함께 듣던 그 시절. 용희는 나무 껍질을 타고 오르는 매미를 발견할 때면 깜짝 놀라곤 했다. 나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로 모래바닥을 쑤시면서도 용희의 말에 귀를 기울였었다. 그러나 그 때 나누던 대화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날이 흐려 밤하늘엔 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습한 공기에 연필을 얼마 쥐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이 끈적거린다. 곧 큰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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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미친 듯한 습기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비가 내렸다. 장마였다. 우산으로 다 피할 수 없던 비를 맞으며 학교에 다녀왔다. 시험은 한 과목 남았고 내일이면 종강이다. 전공 개론서를 펼치고도 나는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책상이 아닌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방금까지도 창밖을, 창밖의 무심한 밤하늘을 바라보다 연필을 들었다. 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용희는 비를 싫어하면서도 일기예보에는 무심했던 것 같다. 우산을 깜빡 잊었다는 말에 함께 우산을 쓰고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용희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자취를 했는데, 우리는 걸어서 십 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였다.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날이면 뛰어서 오 분만에 주파했고, 바람을 쐬고 싶은 날이면 느릿하게 삼십 분은 걸었다.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나는 용희를 내 우산 아래 들였고 우리는 사이좋게 한 쪽 어깨를 흠뻑 적신 채 빗길을 거닐었다. 손등과 팔뚝이 스칠 때의 온도는 낮았던가, 높았던가. 다만 기억에 남은 것은 맞붙는 살갗이 젖어 있었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의 1학기가 정식으로 시작되던 날, 용희가 전학을 왔다. 고삼에 전학이라니 독특한 이력이었으나 나는 용희에게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더 갇혀 있었으니까. 낯선 이에게 기어코 말을 붙일 만큼 사교적이지도, 절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김용희라는 사람을 마음에 들였던 그 순간 이전의 기억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후회는 없지만 종종 그 과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인생을 살아가며 단 한 순간도 알아본 적 없던 순간을 평생 그리워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지각을 했던가, 아니면 그저 눈에 띄었을 뿐이던가. 원인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나는 어느 아침 중앙 계단을 청소하게 되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맡은 청소 구역에 가 보니 용희가 있었다. 2층과 3층을 잇는 층계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선 채로. 대강 역할을 나눈 다음 비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마구 뛰어내려 오다 용희와 부딪혔다. 용희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나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부리나케 용희에게 다가갔다. 양 손바닥과 무릎에 상처가 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가 나는 것 같아 자세히 보려 하니 용희는 내 손길을 피하며 등을 돌렸었다.

평범하게 넘어진 게 쪽팔리는구나, 하며 넘어갔으면 될 일인데 나는 이상하게 오기를 부렸다. 기어코 용희의 앞에 앉아 피가 흐르는 무릎을 살펴본 것이다. 왼쪽 무릎이 오른쪽에 비해 출혈이 심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서 보건실에 가자며 일어나려는 찰나,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아났다. 용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평소와 같은 투로 말했다. 뭐 해, 청소 안 하고. 용희에 대한 기억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 날의 말투를 평소와 같다고 회상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초능력을 쓰는 전학생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나는 용희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종례가 끝난 뒤 가방을 메고 뒷문으로 나오자 용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용희는 또 아무렇지 않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버스 정류장 앞까지 함께 걸으며 용희는 차분하게 말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의 계절은 봄임에도 여름처럼 쨍했다.

온 하늘에 떠 있는 별의 개수만큼 신이 존재한다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됐다. 세상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노력으로 움직인다고, 신들은 별 위에 앉아 언제나 지구를 내려다본다고 했다. 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인 만큼 신들도 별 일을 다 맡아야 했는데, 용희는 식물을 건강하게 돌보는 신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전 지구 중에서도 아시아라는 작은 대륙의,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서울이라는 작은 시의 나무와 풀을 책임지는 신이라고. 세상이 워낙 넓다 보니 일이 많이 세분화되어 있다고 했다.

화분을 창가에 올려 둬야 하는 이유는 햇볕에서 영양분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신은 언제나 하늘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폐쇄된 공간 안의 식물은 미처 못 보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화분은 반드시 창가에, 위에서 봐도 보일 법한 장소에 놓아야 한다고 용희는 약간 화난 사람처럼 거듭 강조했다.

매일같이 지구를 관찰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겪어 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기에, 신이라면 누구나 백 년에 한 번씩 인간으로 분하여 지구에 내려온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같은 신끼리도 알아보지 못한 채 평범한 날들을 살다 훌쩍 별로 돌아간다고, 다시 원래 살던 별에서 예전에 하던 일을 맡아 수행한다고도 했다. 신은 영생을 사는 존재이기에 다치지도 늙지도 않는다고, 자신의 상처가 금방 나은 이유도 신이기 때문이라고 용희는 말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으나 꾸며낸 투가 아니었기에, 두 눈으로 직접 본 광경이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는 이가 용희였기에 나는 그것을 모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비밀 이야기를 함부로 말 하면 안 되지 않느냐 물었고, 용희는 웃으며 어디 한 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이란 그렇게 돌아가는 거라고도 했다. 관성의 법칙은 진짜 존재하는 거라고. 잔잔한 눈빛으로 용희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여름이 가까워져 해가 오래토록 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먼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달도 뜨지 않은 시각이었으나 용희는 어딘가에 존재할 자신의 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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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을 망쳤다. 종강임에도 마냥 기쁘지 않고 찝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센 바람에 우산이 망가졌다. 찢어진 틈 사이로 두꺼운 빗물이 들이쳤다. 새카만 하늘에 하얗고 노란 번개가 빗금을 그었다. 나는 우산을 지탱하던 손을 내리고 하늘이 쪼개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천둥소리가 그칠 때쯤 되어서야 귀가했다. 뜨거운 물로 대강 씻고 잠에 들었다 깨니 바깥이 여전히 캄캄하여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창밖을, 창밖의 묵묵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나는 때마다 캐물을 만큼 어리지 않았었다. 종례가 끝나고 나면 종종 용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리고 또 내가 종종 용희를 기다리기도 했다. 몇 차례의 동행이 반복되며 나의 하굣길은 용희의 집 앞에 들른 뒤 그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나눴던 대화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너무도 평범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하기에 소중하다는 것도 모르고 바보같은 뇌는 아무것도 저장해 두지 않았다.

6월 모의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이 가까워지자 같은 반 친구들은 나름 수험생이라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어차피 이곳을 떠날 용희와 실용음악과 지망이기에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던 나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숨 막히는 교실에서 벗어나 용희와 함께 운동장 스탠드 옆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났다. 태양은 강렬했고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아이스크림이 녹는 속도가 빨라졌다. 때로는 모래바람이 날리는 운동장을 바라보다 용희의 이마에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도 하고, 풀잎이 내려앉은 어깨를 털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용희는 가만히 숨을 마셨다.

시험이 끝난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는 체육대회가 열렸다. 나는 기마전과 단체 줄넘기에, 용희는 피구에 나가게 되었다. 옆 반과의 피구 예선전이 펼쳐지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용희는 정체 때문에 몸을 사리는 편이었으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무난하게 옆 반에게서 승리를 쟁취하리라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날아와 경기를 방해했다. 대부분의 기억이 안개에 뒤덮인 듯 단편적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용희는 경기에 집중하려다 축구공을 밟고 넘어졌다. 훤히 드러난 무릎이 바닥에 미끄러지는 광경을 본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용희에게 달려갔다. 걸치고 있던 체육복 상의로 용희의 한 쪽 무릎을 감싸고 보건실에 데려다 주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용희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다는 정의감보다는 그것을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독점욕 비슷한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인적이 드문 뒷문 옆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용희의 무릎을 확인했다. 피부에는 모래와 핏물이 조금 묻어 있을 뿐 상처는 이미 말끔히 나아 있었다. 나는 손에 물을 모아 조심스레 무릎을 닦아 냈다. 물은 종아리를 타고 흘러 용희의 양말로 스며들었고, 용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흙이 묻었던 무릎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용희는 진영아, 하고 나를 불렀다. 나도 그제야 용희의 얼굴을 확인했다. 복잡미묘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의문을 품은 것 치고는 담담한 말이 용희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눈을 맞추다 나는 상처가 나은 것이 들키면 곤란하니 나와 바지를 바꿔 입자고 했다. 내가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바지를 문에 걸치니 용희가 그것을 받아 들고 입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체육복 바지를 문 위로 건네주었다.

그 날은 하루 온종일 용희를 생각했다. 아니, 용희를 생각하는 나에 대해 생각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왜 그랬을까, 나는. 넋이 나간 채 하루를 보내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을 때가 되어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점심시간, 초록빛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물고 있던 용희에게 깨달은 바를 말했다.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했다고.

고백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그 말에는 어떠한 목적성도 없었다. 연인이 되어 달라는 구애도 아니었고, 날 좀 좋아해 달라는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마음이 목구멍에서 보글보글 끓어 삼킬 수 없었을 뿐이다.

그에 대한 용희의 대답은 미안해, 였다.

이제 와 나도 말 해 본다. 미안해. 그 때의 용희처럼 입술을 한참 깨물고,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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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자 불볕더위가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나는 선배의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언제까지나 남의 이야기만 부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 나는 대학에 들어와 다섯 학기를 보낸 현재까지 제대로 된 노래를 한 곡도 완성하지 못했다. 전공 과제로 끄적인 것들은 있지만 그것들은 완전한 내 노래로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는 가사 쓰는 스킬이 부쩍 늘었다며 칭찬했다.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기억과 기록은 분명 너의 일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그간 적어 둔 것들을 찬찬히 훑었다. 여전히 온전한 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이파리에서 작은 물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어설픈 고백과 애매한 사과 이후에도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용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내가 그곳을 찾아가기만 하면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뒤엎을 결심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학에도 보충수업으로 인해 학교에 나와야 했다. 아침에는 오지 않던 비가 점심쯤부터 무척이나 내렸고 하루 종일 수업 대신 빗소리를 들으며 용희를 생각했다. 용희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도 용희도 좋아했기에 빗소리가 들려올 때면 비를 싫어하는 용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용희가 또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아 한 우산을 나누어 쓴 채 장마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팔꿈치가 부딪히고 어깨가 스치며 시선이 마주쳤다. 습한 공기에 숨 쉬기가 어려웠음에도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용희도 마저 웃었다. 가슴에 바람이 가득 찬 것 같았다.

미리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용희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먼저 어색하게 웃자 용희가 따라 웃었다. 조금만 있다가 가,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 이럴 때 버스 타면 위험해. 첫 입맞춤은 그런 평범한 말들에 이어졌다. 시작은 용희였으나 조심스레 입술을 떨어뜨린 용희에게 한 번 더 다가간 건 나였다.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니 짠 맛이 느껴졌다. 용희는 서둘러 눈가를 훔쳤다.

왜, 왜 울어.

미안해서.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데.

울음을 참으려는 듯 용희는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길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용희는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신은 인간계의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을 건드려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인간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게 해서도 안 된다. 금기는 그 수가 적은 만큼 엄중했다.

인간을 사랑한 신은 벌을 받는다. 인간이 아닌 오직 신에게만 주어지는 벌임에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사랑했기에 그 사실 자체로도 신에게는 벌이 된다. 인간을 사랑한 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신의 자격을 박탈당해 인간이 되는 벌을 받는다. 인간은 홀로 남아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견뎌야 한다.

이 사실을 말하던 용희는 괴로워 보였으나 망설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이 날을 상상해 온 사람 같았다.

그러면 모르는 척하지,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으면 나 혼자 마음 접고 너도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용희는 참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

내가 용희를 한 때의 장마처럼 잊어버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영원히 용희를 잊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버렸다고. 용희는 미안하다고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잊으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교복 셔츠 끝에서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했다.

지금 바라본 창밖은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한 방향을 바라봤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꺾고 시선은 왼쪽 위를 향하면 밝은 별의 무리가 보였다. 그 중 하나가 용희의 별일 것이다. 수 년 전 내 방에 들렀던 용희가 직접 알려 주었다. 나는 천문학적 지식도 무엇도 없기에 별의 위치를 찾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기에 이사도 가지 않고 방의 구조도 바꾸지 않은 채 수년간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나의 별이 생겨나면 하나의 별이 사라진다. 하나의 별이 사라지면 하나의 별이 생겨난다. 이제는 어느 것이 용희의 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별이 없어졌기를 바라면서도 때로는 아직 남아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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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과거의 집합체다.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나 지구의 공전 따위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나다.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한 순간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거짓을 무시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를 향한 속죄를 늘어놓던 용희에게 나는 다 괜찮다고 말했다. 언젠가 끝이 나더라도 지금을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간직하자고 했다. 벌써부터 포기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했다. 눈앞의 행복을 좇자고 했다. 순수한 판단력으로 치자면 나보다 뛰어날 것이 분명한 용희는 어렸던 나의 궤변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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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용희와 여행을 떠난 날이 있다. 좀처럼 등교 시간이 맞지 않았고 일부러 맞추려 노력한 적도 없는데,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교문에 들어서기 직전 용희를 만났다. 용희가 이렇게 밖에서 만나니 재미있다고 말하자 나는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용희의 손을 붙든 채 그 길로 지하철역으로 갔다. 노선을 세 번이나 갈아탄 후에야 춘천에 도착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착한 낯선 곳에서 우리는 그 곳 기준으로 낯설 교복을 입고 산책을 했다. 막국수를 먹고 나오니 날이 너무 더워 맥도날드에 앉아 한참동안 시간을 죽였고, 해가 조금 잠잠해진 뒤에는 숲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용희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용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딱딱한 몸이 서툴게 자리를 맞추었다. 덜컹이는 지하철 안에서 새하얀 모래사장에 서 있는 용희를 상상했다. 타오르는 햇살에 용희가 조각나 파도 너머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제대로 된 확답을 하지 못한 이유는 고작 그 말도 안 되는 상상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용희와 함께 바다에 갈 것이다. 손을 단단히 붙잡으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사라지더라도 그 촉감을 지도 삼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슬쩍 눈을 떠 바라본 반대편 차창에는 풍경이 비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지라 지하철 내부는 한산했고 바깥의 캄캄한 색을 배경으로 단정히 앉은 용희와 흐트러진 내 모습이 그려졌다. 용희는 잠자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지하철에 탈 때면 그 때의 용희처럼 꼿꼿이 앉아 본다. 반대편에 펼쳐진 내 얼굴은 의외로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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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2학기에 들어서며 학원에 가는 날이 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용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지고 다니는 악보 뭉치가 조금 무거워졌을 뿐이다. 때로는 학교 근처 분식집이나 카페에 잠시 들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용희는 내 손때가 묻은 악보들을 하나씩 넘기며 세심히 살펴봤다. 여전히 용희가 눈길을 준 식물들은 파릇하게 자랐고 그래서인지 나는 악보에 용희의 손길이 닿을 때면 악보가 깨끗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빳빳한 종이 뭉치들을 나란히 정리하다 용희가 손을 벤 적도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악보에 의한 상처는 더 깊고 날카로웠다. 상처는 내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다 나았지만 순식간에 그어지던 빨간 선은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수능을 준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의 축제는 1학년과 2학년만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었다. 후배들이 왁자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동안 3학년은 자습을 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교사들이 축제를 주시하고 있었고,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교실 안에 갇힌 3학년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가끔씩 학년부장 교사가 올라와 떠드는 학생이 있는지 확인할 뿐이었다. 용희와 나는 쉬는 시간을 틈타 몰래 교실을 빠져나왔다. 쿡 찌르면 터져 버릴 것 같은 운동장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사람이 없는 학교 건물 안을 파고들었다.

4층과 5층은 각종 특별교실과 동아리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축제 당일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여유롭게 계단을 한 칸, 두 칸 밟아도 보고 빈 음악실에 들어가 긴 의자에 드러눕기도 했다. 도서실은 혹시 사서 교사가 있을까 싶어 건너뛰었고 과학실 안에서는 찬장에 정리된 실험 용품들을 구경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는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오래된 책상과 의자가 가득 놓여 있었는데, 급하게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교내 행사 날에는 문이 내내 열려 있었다.

하늘이 높았으나 뜨겁지 않은 계절이었다. 용희는 난간을 짚고 눈을 감았다. 바람에 얇은 머리카락이 날렸다. 기껏해야 5층짜리 건물이었음에도 옥상에서 바라본 학교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정겨웠다. 용희와 나는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용희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늘 그랬다. 쭉 곱씹고 곱씹다 겨우 입 밖에 낸 것이면서도 방금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노래 부른 적 있지 않아?

아마 그랬을 걸? 어떻게 알았어?

들은 건 아니고, 일 하다가 언뜻 봤던 것 같아서. 학교에는 항상 나무가 많아서 내가 할 일이 많거든.

아아.

뭐 불렀던 거야?

크리스마스 캐롤이었나?

그거 나 불러 주면 안 돼?

뭘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법이 없던 용희였기에 나는 조금 놀랐던 것 같다. 곧바로 답을 하지 않자 용희는 금세 괜찮다고, 그냥 한 번 해 본 말이라고 손사레를 쳤다. 나는 머릿속을 뒤져 그 때의 노래를 되살렸다. 라스트 크리스마스였던가.

운동장 아래에서는 청소년기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려 왔고, 깔고 앉은 시멘트 바닥 아래에서는 한 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차갑지도 눈이 내리지도 않았으나 그 날의 들뜬 분위기는 나에게 오래토록 남았다. 건조하여 손끝이 갈라지는 날들이 찾아올 때면 어쩐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곁눈질로 몰래 훔쳐 본 용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상 서랍 깊은 곳에는 때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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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덥게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매년 여름이 찾아올 때면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무언가를 한없이 그리워하느라 더위도 느끼지 못하곤 했었는데. 무심하게 흘러가는 구름처럼 세월도 흘러가고 있다. 수능이 가까워졌는지 거리를 거닐 때면 편의점과 베이커리에 수능 응원 상품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용희는 수능을 치르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용희는 나에게서 떠나갔다.

쓸 수 있는 시간을 모두 소비했다고 했다. 이별은 하굣길에서 이루어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으나 마지막이 되어 버린 하굣길이었다. 용희는 그날 밤 별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복귀가 급하게 정해져 미리 예고할 수 없게 된 점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미안한 게 정말 그게 다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이 날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폭우가 눈물처럼 내리던 날 처음 용희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나는 먼 후일을 걱정하는 용희에게 현재를 살아보자고 애원했었다. 용희가 옳았다. 현재를 어떻게 살든 미래는 반드시 다가왔고 현재가 즐거움으로 가득 찰수록 미래는 괴로웠다. 용희는 내가 철없이 웃고 있는 사이에 무수히 차오르는 이별을 간신히 삼켜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회가 되지 않는 것은 나의 이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고집 때문일까.

다시 올 거지.

그 말을 내가 정말로 내뱉었던가. 결국 말하지 못한 내가 늦은 깨달음을 진실로 믿어버린 것인가. 용희는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들이 흐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자신이 봐 온 인간들은 모두 그렇게 살다 죽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너는 또 뭐라고 말을 했었을까.

이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등교를 위해 집 밖에 나와 보니 현관 옆에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모든 생명이 기지개를 펴는 계절이 다 지나고 나서야 자라날 생명을 선물하는 이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명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이가 보내 온 것일 테다. 나는 그 화분을 집 안으로 들여다 놓았다. 학교에 가니 조회 시간에 담임 교사가 용희의 전학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의 사업으로 인해 먼 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나는 용희의 책걸상을 옥상으로 들어 옮겼다. 힘이 부쳐 옥상까지 가는 도중 몇 번이고 쉬어야 했다. 여름의 한 가운데처럼 땀이 흘렀다. 책걸상은 난간과 가까운 곳에 두었다. 담임 교사에게서 받은 열쇠로 옥상의 문을 잠그자 내 인생에 있어 어떤 한 시절이 막을 내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네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더라.

그 말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나는 왜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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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처럼 너와 함께다. 너를 떠올리게 하고 마는 것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들면 머리가 새하얘지며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몇 날이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네가 남기고 간 화분을 들여다봤다. 한때는 이 화분이 거슬려 집 안 그늘진 구석에 처박아 둔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름 모를 풀은 잘만 자랐다. 정말, 속도 모르고 파랗게도 자라났다.

너를 기록하는 몇 달간 나에게 추억은 기록의 매개였다. 그러나 한동안은 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온전히 너를 생각하기만 했다. 오늘은 한 곡을 완성했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극복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약간의 허탈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옆집에 사는 고등학생을 마주쳤다.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는 것을 보니 막 졸업을 한 모양이었다.

분명 남들처럼 졸업을 하고, 꽃다발을 받고, 짜장면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야, 졸업식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졸업을 해낸 기분이 들었다.

너를 떠올릴 때면 지겹게도 울리던 매미 울음소리의 환청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그 대신 귓가에는 너를 닮은 멜로디가 맴돌았다. 여전히 우리가 나눈 날들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그런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억과 기록은 너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너처럼 너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살아가고 있다. 창문을 열어 두면 소름이 돋을 만큼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지만 봄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푹푹 찌는 여름도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던 너에게 현재에 충실하자 말했던 내가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너와 함께하고 싶은 미래를.

이 기록은 네가 돌아왔을 때 너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네가 돌아온다면 나는 이 기록을 장롱 깊은 곳에 묻어둘 것이다. 그 때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나가면 되니까. 나만의 시절을 강요하기보다는 너와의 날들을 일구어 나가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쓸 것이다. 적어도 네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대신 쓰고 또 쓰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떠오른다. 그 가을, 나는 너와의 끝에 서서 너에게 말했었다. 돌아오라고.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으니 돌아오기만 하라고.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언젠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너의 말에 애매하게 답했던 나처럼. 그러나 나는 지금 너와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지금 어디쯤 서 있을까.

나는 오늘도 창밖의 별을 바라본다. 같은 자리에서, 같지만 조금은 달라진 마음으로.

저 멀리 아득한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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