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구는 돈다
배룡
2022.09.12.
1.
운동화 밑창이 마찰되는 소리, 공이 바닥에 꽂혀 튀기는 소리, 선수들이 기합을 넣는 소리, 그리고 코치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
“너 집중 안 해, 임마?”
그제야 진영은 멀리 날아간 공을 주우러 달려갔다. K배 전국대회와 대학 입시를 앞둔 열아홉의 복판, 진영은 명백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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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3 유망주 탑10 정리해봄(스압주의)]
틀릴시 니가 맞음
지적 환영
1) 박성식 (덕은고 OH)
레전드 세터 임경실 아들. 명실상부 덕은고 에이스고 덕은고가 우승한 대회는 다 박성식이 캐리함. 고졸 얼리도 가능할지도? 스윙 빠르고 군더더기 없음. 블로킹도 괜찮고 기본기 좋음. 적극적이고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코트에서의 장악력이 돋보임. 리시브는 엄청 좋은 건 아닌데 지가 싼 똥은 지가 치움. 서브 강하고 백어택 정석으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교 선수임. 왼손잡이라 아포짓도 가끔 보는데 효율이 엄청 좋지는 않음. 초딩때부터 유망주라 존나 굴렀는데 내구성 문제도 없음. 고2땐가 성인국대 발탁된 적 있음.
2) 김찬혁 (벽산남고 MB)
배구 인생 시작할 때부터 미들만 파온 정통 센터. 속공이랑 이동 장착 완료고 볼 터치 감각이 좋음. 벽산남고 들어오고 1학년 때부터 주전 먹었고 연령별 청대 매번 뽑혔음. 스텝이나 이단연결 보면 기본기 괜찮아 보이고 어이없는 잔범실도 거의 안 함. 단점이 있다면 반응이 조금 느리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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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배진영 (청연고 S)
1학년 때까진 윙토스 원툴이었는데 작년부터 급성장함.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몰라서 긁어볼만 한 것 같음. U20 국대였고 선발이 강두진이라 몇 번 못 나오긴 함. 그래도 잠깐 나올 때 보면 파워도 좋고 운영도 과감함. 최근에 춘계 우승 견인해 놓고 대통령배 꼴아박았는데 리시브가 터져서 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는 했음. 좀 얼타던데 쨌든 최근 폼이 워낙 좋았으니까 이겨낼 거라 봄 ㅇㅇ 근데 청연고 감독 누구냐? 우리팀 세터코치로 데려왔음 좋겠다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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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송현(선남상고 MB) 김도혁(선남상고 S) 김용희(청연고 OH) 정도 긁어볼만 한 듯. 송현은 구력이 짧은데 높이가 워낙 좋고 김도혁은 선남상고 선수풀이 안 좋아서 그렇지 기본기 자체는 괜찮아 보임. 김용희는 단신이어도 서브랑 수비는 좋던데 부상인지 뭔지 대통령배 안 나왔더라 얘 없으니까 리시브 다털림.
얼마 전 후배가 한 익명 사이트의 게시글 링크를 보내 왔다. 진영이 그 글을 읽은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아주 설렁설렁이었으나 진영은 매일 밤 잠들기 전 그 링크를 눌렀다. 댓글창을 눌러 무언가를 적다 지우고, 또 무언가를 적다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않고 휴대폰을 덮는 날들이 반복됐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남은 빛의 잔상이 진영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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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가 배구를 그만둔 지 두 달이 지났다. 수능을 치러 대학에 갈 거라고 했다. 청연고등학교가 춘계연맹전에서 우승한 다음날, 용희는 연습이 끝난 뒤 진영을 불러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배구를 하지 않을 거라고. 진영은 용희를 붙잡을 수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니 이미 용희의 짐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진영은 잠들기 직전까지 용희가 지금쯤 어디에 누워 있을지 생각했다. 이 주변은 산이랑 밭밖에 없는데, 마땅히 머물 만한 장소가 없을 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진짜 그만둔 거구나. 김용희.
선수 한 명이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특별한 자의식의 개입 없이 루틴에 몸을 맡기는 삶이었으므로. 운동에 집중하여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쉴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한숨을 돌리며 물을 마실 때, 운동화 끈을 묶을 때, 락커룸을 정리할 때에는 용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적으로라도 연습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막상 실전 게임에 투입되니 예전과는 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던 무렵, 인근 고등학교의 배구부가 폐지되어 두 명의 선수가 청연고로 전학을 왔다. 그 중 한 명이 김용희였다. 나머지 한 명은 진영보다 한 살이 많았으나 금방 자퇴했다. 듣기로는 어디 식당의 주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고 한 것 같다. 그 시절의 진영은 뒤집힌 유리컵 안에 갇힌 느낌으로 매일을 살았다. 구부러진 유리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왜곡되었고 진영은 인지와 성과 간의 괴리를 실감하며 그저 전진할 뿐이었다.
스피드와 파워는 좋지만 VQ와 센스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항상 들었다. 타고난 신체 능력은 좋지만 세터로서의 운영 능력은 미달이라는 뜻이었다. 레프트나 라이트로의 전향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진영은 자신이 세터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지금의 혹평은 그저 과정일 뿐이리라 여겼다. 그 왜, 그런 이야기들 있지 않은가. 반대와 저항 속에서도 신념을 밀어붙여 세계적인 인정을 얻은 위인들의 이야기. 진영은 신화를 들으며 자랐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세터의 기본은 공격수가 공격하기 편한 환경을 만들어 득점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진영의 토스는 공격수가 ‘때리기 편한 공’을 만들어 주는 데까지는 성공이었지만 ‘득점하기 쉬운 상황’을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토스 자체의 질은 나쁘지 않았으나 다양한 공격 옵션을 이용하지 못하고 플레이가 극히 단순하여 공격수의 개인 기량에 부담이 크게 작용했다. 블로킹과 맞서 싸울 능력이 되는 선수와는 궁합이 좋았으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해결 능력이 부족한 선수와는 잘 맞지 않았다.
강한 공격수와 함께할 땐 강하지만 약한 공격수와 함께할 땐 약한 세터였다. 윙 공격수가 반복적으로 블로킹에 막혀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면 진영의 토스로는 경기 감각을 회복시킬 수 없었다. 진영은 교체되어 나가는 일이 잦았고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쉽게 고치지 못했다. 수많은 영상을 보고 다양한 운영법을 공부했음에도 막상 코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양 날개에 공을 쏴 주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특징과 문제가 명확했으나 무색무취인 것보다는 나았다. 단점이야 어찌 되었든 강한 윙과 함께할 때 강한 것만은 확실했다. 흔들릴 땐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몇 상위 고등학교에서 진영을 원하기도 했으나 진영이 선택한 것은 수년째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청연고등학교였다. 진영은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고 싶었다. 상위 학교에 가 봐야 기계처럼 윙 공격수에게 공을 패스하는 상황만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영영 성장의 기회를 잃은 채 미완성 세터로 남게 될 뿐이었다.
세터는 경험이 중요하니 상위팀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팀으로 와 주전을 맡아서 하는 게 좋다며 꼬드긴 정수현 감독은 막상 진영이 청연고에 진학하자 1학년 내내 단 한 번의 경기에도 내보내 주지 않았다. 2, 3학년의 선배들이 있으니 1학년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으나 다른 동기들이 원 포인트로라도 코트를 밟아 본 것에 비하면 진영의 0회라는 출장 기록은 턱없이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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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진영과 같은 기숙사에 배정되었다. 비어 있던 진영의 침대 2층을 용희가 썼다. 진영은 새로 합류한 용희에게 학교의 시설이나 운동 공간을 안내했다. 용희의 포지션은 따지자면 수비형 레프트로 분류할 수 있었다. 신장과 블로킹에 메리트는 없었으나 그만큼 수비와 조직력에 기여했다. 용희는 금세 주전 멤버의 코트로 옮겨졌고, 2진 코트에서 훈련을 하던 진영은 종종 곁눈질로 용희를 바라봤다. 부상이 두렵지도 않은지 연습임에도 공 하나, 찬스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끈기가 용희에게 있었다.
정주공고와의 연습 경기를 며칠 앞둔 학기 초의 어느 날, 3학년 주전 세터 선배가 연습 중 착지 미스로 발목을 접질렸다. 큰 부상은 아니었으나 몇 주는 안정을 취해야 했다. 얼떨결에 진영은 연습 경기에 선발로 나섰다. 백업이 세터로 포지션을 변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학년 후배였기에, 진영은 교체가 불가하다는 부담을 안고 경기에 임했다. 2학년이 되며 올해는 기필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겠노라 다짐했으나 막상 실전이 닥치니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리시브가 잘 되면 레프트로 퀵오픈, 리시브가 흐트러지면 레프트로 오픈, 그러다 가끔씩 라이트로 오픈. 진영의 뻔한 토스는 상대 블로커들을 속이지 못했고 자연히 청연고의 공격수들은 쓰리블록의 부담을 안은 채 스파이크를 때려내야 했다. 그 중 가장 부담에 가장 심하게 짓눌린 것은 용희였다. 비교적 단신인 용희는 블로킹을 빗겨 때리거나 터치아웃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기술로 응수했으나 상대의 수비가 집중되자 범실을 많이 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리시브 범위까지 넓게 가져가고 어택커버와 디그에 참여하는 비율도 높아 체력 소모가 심했다.
청연고는 1세트를 23-25로, 2세트를 18-25로 패배했다. 정주공고가 흐름을 가져가자 청연고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3세트의 마지막, 15-24 상황에서 진영은 또 다시 리시브가 흔들린 공을 용희에게 올렸다. 지쳤는지 용희의 점프 높이가 낮아져 있었고 공은 상대 블로커를 맞고 튕겨나갔다. 진영은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몸을 날렸으나 역부족이었다.
휘슬이 불리고 경기는 셧아웃 패배로 처참하게 끝났다. 마지막 공이 떨어질 때 진영은 공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용희의 땀방울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다가와 진영의 엉덩이를 치며 일어나라고 이끌 때까지 진영은 바닥에 엎드려 그 작디작은 물방울의 의미를 곱씹었다. 진영이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집중력을 잃은 최초의 순간이었다.
경기에서 패배했으나 진영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감독마저 진영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진영은 오히려 분했다.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는 뜻 같았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용희는 진영에게 웃어 보였다. 다음엔 더 열심히 하자고 했다.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세터 포지션을 고집한 수년간의 세월이 무상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으나 그저 아집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연습경기가 있던 다음날도 평소와 같이 훈련이 이루어졌다. 애초에 청연고는 강팀이 아니었기에 한 번의 패배가 팀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모두들 여느 때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훈련에 임했으나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 씻고 방으로 돌아오니 용희가 사라져 있었다. 주변 동료들에게 용희의 행방을 물으니 연습복 차림으로 다시 나갔다고 했다. 진영은 온 몸의 물기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 학교였기에 용희가 갈 만한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체육관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가운데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곳에 용희가 있었다. 용희는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이 이리저리 부딪히는 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진영은 말없이 코트 너머로 가 바닥을 구르던 공들을 주워 모았다. 품 안에 가득 공을 들고 용희의 옆에 쏟아 놓으니 용희가 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너도 할래?”
제 앞으로 내밀어진 공을 진영은 다시 용희의 앞으로 밀어냈다.
“오늘은 너 하는 거 볼래.”
용희가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자 진영이 자신의 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맨발에 낡은 슬리퍼 차림이었다. 용희는 어색하게 웃곤 다시 서브를 쳤다. 공이 라인 끄트머리에 완벽하게 걸렸다. 진영은 벽에 기대어 앉아 용희가 공을 집고, 멀리서부터 달려와 공을 던지고, 타이밍을 맞추어 그것을 강하게 때리고, 그 공이 넘어가는 궤적을 지켜보는 장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공이 부족해지면 상대편 코트로 넘어가 다시 볼보이 역할을 했다.
공을 와르르 쏟아내며 진영이 말했다.
“몇 개나 하려고?”
그 말에 용희는 다시 멋쩍게 웃어보이며,
“그냥, 하는 데까지 하는 거지.”
라고 답했다.
개인 야간 훈련이 끝난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 용희가 잠든 사이 진영은 밤을 새워 용희의 중고등학교 시절 시합 영상을 봤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어떻게든 공을 살리려 애쓰는 화면 속 선수를, 자신의 천장 위에서 자고 있는 용희를 돕고 싶었다. 그 어떤 선수보다도 용희가 많은 점수를 내고 주목받길 바랐다. 용희가 가진 특별함이 더 돋보이길 원했다. 낡아 가던 목표를 에워싸며 몰아친 인생 두 번째 동기부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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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 한 명을 살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최대한 다양한 득점원을 사용하여 상대 블로킹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때리게 해서 블로킹이 이리로 가야 하나 저리로 가야 하나 갈팡질팡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말은 쉽지. 그게 되면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진천 선수촌에 가 있겠다. 동기인 우빈이 식판을 들고 먼저 일어섰다. 진영은 마저 국을 떠 먹으며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청연고는 중하위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은근히 괜찮은 공격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역 대학에서 매년 청연고 졸업생을 일정 비율 지명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센터진은 다소 느리지만 높이가 괜찮았고, 윙의 경우 공격이나 수비 둘 중 하나가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대신 나머지 하나가 준수한 경우가 많았다.
결심이 선 후 밤이면 밤마다 진영은 공격 자원을 한 명씩 불러 연습을 함께 하고 호흡을 맞추었다. 동료들은 농담 삼아 진영과의 야간 연습을 개인 면담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1학년 센터를 불러 속공 연습을 하고, 또 하루는 2학년 라이트를 불러 백어택 연습을 했다. 제법 손발이 맞게 된 이후로는 여러 명을 함께 불러 세트 플레이를 익혔다. 이즈음의 야간 연습은 집단 면담이라고 불리곤 했으나 이내 그 명칭은 사라졌다. 모든 선수가 밤까지 모여 나머지 훈련을 하는 분위기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2학년의 진영은 총 다섯 번의 대회에서 팀이 뒤처지는 순간에 교체되어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했고, 3학년 선배들의 거취가 정해진 이후 치러진 마지막 경기에서는 스타팅으로 나가 코트를 지휘했다. 머나먼 어린 시절로부터 이어진 맹목적 믿음이 세계에 증거를 남기기 시작했다. 겨우 예선전만을 이기고 곧바로 탈락하던 청연고는 두 번의 준결승 진출과 세 번의 4강 진출, 한 번의 8강 진출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진영이 비로소 주전으로 발탁된 3학년의 첫 대회에서 청연고는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3.
야간 훈련이 끝나고 나면 종종 용희와 산책을 했다. 이름만 산책이지 사실상 학교 주변을 한참동안 돌다 숙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마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드넓은 지구에 단 둘만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달빛 아래에 은은하게 비치는 용희의 얼굴을 볼 때면 진영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를 느꼈다. 귀가하여 이층 침대에 눕고 나면 천장 너머의 용희도 같은 것을 느꼈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 날도 평범한 그런 날들 중 하나일 줄 알았다.
춘계 연맹전 결승의 마지막 득점은 용희의 오픈 공격이었다. 1세트 초반부터 청연고는 과감한 센터 사용과 빠른 플레이로 덕은고의 수비진을 혼란스럽게 했다. 기세에 말린 덕은고는 제대로 손도 못 써본 채 25-15라는 처참한 스코어로 1세트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2세트는 덕은고의 강서브가 몰아쳐 청연고의 리시브라인이 흐트러졌고, 이에 따라 연결이 불안정한 오픈 공격이 이어졌다. 흔들리는 상황에서 공은 대부분 레프트로 향했다. 용희는 직선과 대각, 강타와 연타를 교묘히 섞어 가며 영리하게 볼을 처리했고 2세트에만 8득점을 올렸다. 덕분에 청연고는 25-20의 스코어로 좋은 분위기를 3세트로 가져갔다.
마지막 3세트는 제법 접전의 양상이 펼쳐졌는데, 주전 세터로 나선 진영은 안정된 리시브를 바탕으로 팀의 모든 득점원을 고르게 이용하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상대 블로킹을 속이거나 분산시키는 다양한 세트 플레이가 돋보였고 코트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다는 것을 자랑하는 양 2단 패스 페인팅도 잊을 만하면 사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듯 토스의 길이가 짧아지기는 했으나 매일 밤 맞춰 온 팀원 간 호흡이 그것을 상쇄했다.
24-23, 듀스 직전의 매치포인트 상황에 랠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미 양 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덕은고의 에이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친 스파이크가 블로커의 손끝을 스치고 멀리 날아갔다. 청연고의 리베로가 전력으로 뛰어가 겨우 디그한 공이 진영의 언더 토스로 연결되어 레프트로 날아갔다. 공을 살리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미처 코트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앞뒤 따지지 않고 레프트로 공을 올렸다. 그곳에 용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었다.
용아, 때려! 여기저기서 용희에게 외치는 소리들이 0.5배속 설정을 한 것처럼 느리게 들렸다. 뒤를 돌아 공의 궤적을 보니 힘을 너무 실었는지 상대 코트로 넘어갈 것도 같았다. 전위에 위치해 있던 용희는 제대로 스텝도 밟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점프하여 그 공을 쳐냈다. 공은 힘없이 날아갔으나 상대 코트의 한가운데로 사뿐히 떨어졌다. 연결이 불안정했기에 오히려 상대 수비진이 흐트러졌던 것이다. 덕은고의 리베로가 뒤늦게 몸을 던졌으나 공에 닿지는 못했다. 25-23으로 청연고의 셧아웃 승리이자 첫 우승이 확정되었다.
찰나의 정적이 지난 뒤 웜업존에 있던 청연고의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이 모두 뛰쳐나와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진영의 어깨로 용희의 손이 닿았다. 진영은 몸을 돌려 용희의 몸을 끌어안았다. 온몸이 땀투성이였으나 상관없었다. 축축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용희의 팔이 진영을 마주 안아 왔다. 주변에서는 환호성 소리가 들렸고, 흥분이 정수리 끝까지 올라와 마냥 신이 났다. 진영은 주장의 자격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고 시상대를 올랐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꿈은 용희가 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대로, 용희가 함께해 준다면 어디든지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봄의 춘계연맹전에서 진영은 베스트 세터상을, 용희는 베스트 레프트상을 받았다. 용희는 결승전에서 서브에이스 5득점 포함 21득점 공격 성공률 62.5% 리시브 효율 48.8%로 팀의 승리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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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끝난 당일은 상금으로 성대한 뒤풀이를 했고 다음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훈련을 했다. 감독과 코치들은 최대한 들뜬 분위기를 억누르고 평소의 루틴을 찾으려 애썼으나 체육관 한 켠을 차지한 우승 트로피의 존재감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부푼 마음을 가득 끌어안은 채 정규 훈련이 진행되었고 결국 야간 훈련에 나온 사람은 용희와 진영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텅 빈 체육관 안에서 마주보고는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 체육관에서 서로를 마주했던 그 날처럼 용희는 서브 연습을 했다.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진영이 옆에 서서 함께 서브를 치고 있다는 것일 테다. 용희는 최대한 끄트머리에서 달려와 공을 높이 띄우고 그 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타이밍이 맞은 순간 공은 용희의 손바닥에서 코트 너머로 총알처럼 날아갔고 언제나처럼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밟았다. 거리감을 완벽히 조절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진영이 공을 한가득 주워 오며 물었다.
“몇 개나 할 건데?”
용희는 집어 들고 있던 공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여기까지만 할래.”
둘은 나란히 체육관 내부를 정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밤은 여전히 봄처럼 선선했다. 진영이 체육관을 열쇠로 잠그고 멀찍하게 서 있던 용희에게로 다가갔고, 용희는 진영이 가까워지자 언제나와 같은 산책 루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육관 뒤뜰을 시작으로 같은 재단 중학교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통과하고 뒷산과 등을 붙이고 세워진 수돗가를 지났다.
비 소식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구름이 가득 낀 날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구간에 접어들자 달이 그림자 뒤로 숨어 서로의 표정을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다. 용희가 어둠 속에서 진영의 손을 잡아 왔다. 방금 전까지 공과 마찰되어서인지 따뜻하고 거친 손이었다. 진영은 그것을 힘을 주어 붙잡았다. 용희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소나기처럼 그 말을 내보였다.
“나 배구 그만하려고.”
놀란 진영이 용희를 바라보려 했으나 주변에는 빛 한 줄기 없어 용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용희는 진정하라는 듯 엄지로 진영의 손등을 문질렀다.
“너는 어떻게 배구 시작하게 됐어?”
“나는... 모르겠네. 국가대표 되면 돈 많이 벌수 있다고 해서 시작했나.”
“코치님이 너무하네. 애를 그런 걸로 꼬시고.”
“너는?”
“나도 별 거 없어. 맨날 애들이랑 공놀이할 수 있다고 해서 시작했던 것 같아.”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용희가 살짝 웃었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맨날 공 튀기고. 체육대회 때 반 대항으로 피구를 했었는데 그 때 우리 반이 1등 했다? 난 그때 배구부라고 참여는 못 했는데, 연습할 땐 애들이랑 같이 했었거든. 그렇게 섞여서 노는데 내가 제일 잘 하고 그러니까 재미있더라고.”
“유치하네.”
“그럼, 어렸으니까. 근데 배구를 하면 할수록 그런 감정들이 사라지더라. 사람이 좀 무덤덤해지더라구. 그냥... 시키니까 하게 됐어. 말 그대로 그냥, 로봇처럼. 가끔 힘들 때도 있기는 있었는데, 다들 그러잖아. 운동이 원래 힘들다고. 그래서 그냥, 힘든가 보다~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이러다 말겠지. 다 지나가겠지. 그러고 말았어. 차라리 엄청 열심히 했으면 식었을 때 바로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어서 이렇게 계속 어영부영, 끝내지도 못하고 해 왔어.”
진영은 용희의 말이 흘러갈 방향을 예감했으나 이미 터져 버린 물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근데, 작년이랑 올해, 너 덕분에 오랜만에 배구가 재미있었어. 그래서 이제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아.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걸 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너한테는. 나는 내가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금 배구를 그만두고 싶어. 이 용기는 네가 준 거야.”
용희는 진영이 아는 이들 중 가장 성실하고 꾸준한 선수였다. 덕분에 원점을 되찾을 수 있었고 목표를 정립할 수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에 따른 성과를 시작의 상징이라 여겼으나 용희에게는 지나온 길이 모두 끝을 향한 여정이었다. 꿈은 깨어졌고 진영은 용희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굳은 살이 박인 용희의 손은 여전히 진영의 손을 감싸고 있었고 그렇기에 진영은 용희의 다짐을 두드릴 주먹을 쥐지 못했다. 진영은 당장 떠오르는 생각을 내뱉었다. 말이 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난, 너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네가 있어서, 너를 위해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데, 넌...”
비로소 달빛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의 사이에 드리워진 선을 비추었다.
“너는 나 없이도 꼭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용희는 답했다.
“힘내, 진영아. 응원하러 갈게.”
건조했던 손이 매끄럽게 진영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용희는 천천히 나무그늘 사이를 가로질러 갔고 진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순간 마주했던 용희의 얼굴은 단정했고 진영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용희의 기억 속에 자신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지에 관해 생각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여도 죽을 때까지 운동을 계속할 수는 없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선수는 일생에 한 번 은퇴를 하고 새 삶을 찾아 나간다. 진영도 지금까지 배구를 놓은 동료들을 많이 봐 왔다. 스포츠 업계에 몸을 담는다는 것은 수많은 이별을 겪는다는 것이고 그 이별은 대개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닥쳤다. 그러나 용희는 달랐다. 진영은 모래바닥을 박차고 용희에게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듯 서자 용희는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언제부턴가 진영은 용희의 미소를 해석할 수 없었다.
“앞으로 뭐 할 건데.”
“모르겠어, 이제 찾아봐야지. 공부라도 해 보려고.”
“...”
“뭐든 할 수 있겠지.”
용희가 있었기에 진영은 자신의 목표를 고집의 번데기에서 꺼낼 수 있었고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옳음이 용희를 꺾을 수는 없었다. 기나긴 고난 끝에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은 순간, 진영은 노력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의 존재를 깨달았다.
4.
배구를 그만뒀다고 해서 친구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용희는 진영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간혹 교실에 찾아가 봐도 아예 자리에 없거나 책에 열중하고 있어 섣불리 부를 수 없었다. 한때는 하루의 시작과 끝이 용희였다.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같은 일정을 소화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이제는 진영의 하루에 용희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찾아가 물으니 감독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라며 말을 꺼냈다. 용희는 처음 전학을 왔을 때부터 운동을 그만둘 작정이었다고 했다. 리시브라인의 보강을 위해 감독은 용희에게 조금만 더 뛰어줄 것을 부탁했고, 용희는 방금 전까지 그만둘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치고 순순히 응했다. 이후로 한동안 감독과 용희가 그에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춘계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용희가 감독에게 명확한 의사를 표했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만둘 것이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감독은 용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수용은 감성적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것에 가까웠다.
용희가 이탈한 직후의 대회에서 청연고는 예선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진영은 그간의 노력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한 듯 1학년 시절의 실력으로 회귀했다. 뻔히 보이는 높은 블로킹 앞으로 계속해서 공을 올리는 진영을 두고 보던 감독은 1세트를 14-25로 내주고 나서야 진영을 불러들였다. 그 후로 2세트와 3세트는 모두 2학년 후배 세터가 스타팅으로 나섰고 경기는 셧아웃으로 패배했다.
벤치에 앉아 타월을 몸에 두르고 코트를 멍하니 바라보는 진영의 옆으로 코치가 붙어 앉았다. 평소 진영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던 코치였다.
“진영아.”
“네.”
“많이 힘드냐?”
“아닙니다.”
“내가 너를 모르겠냐, 임마. 지금부터 하는 말 너무 고깝게 듣지 말고.”
의식적으로 진영은 목을 뻣뻣하게 굳히고 코트로 시선을 고정했다. 기합 소리와 공이 튀는 소리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용희 걘 어차피 프로 못 가. 지금 그만두고 살 길 찾는 게 걔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고 본다. 냉정하지만 승부의 세계가 그런 거야. 아쉽지만 네 할 일에 집중해. 앞으로 이런 일 많을 텐데 일일이 슬퍼할 거야?”
차가운 말투였으나 진영은 그 안에 담긴 애정을 알았다. 그러나 틀린 사실이 있었다. 이런 일이 많을 리 없었다. 진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쌤, 그런 거 아니에요.”
양 손에 가로막힌 어둠 속에서 진영은 눈을 떴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진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친구 하나가 그만뒀다고 해서 슬퍼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진영은 등대를 잃고 떠도는 배처럼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파도를 타고 울렁였으나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몰라 해류를 타고 먼 바다를 하염없이 떠돌았다.
-
오전 훈련 중 진영은 멍하니 서 있다 머리에 공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몸에 이상은 없었으나 코피가 조금 났다. 하루 종일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몇몇 후배들이 과거의 진영처럼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신 밤공기는 그리 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서브는 배구라는 팀플레이에서 개인의 기량으로 팀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진영은 용희를 생각하며 공을 집어들었다. 서브는 용희의 것과 다르게 라인을 멀리 벗어났다. 진영은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공이 높이 떴다가 진영의 손바닥에 부딪혀 코트 바닥으로 꽂혔다. 그러나 공이 라인을 스치는 일은 없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시 반이었다. 진영은 주변을 정리하고 후배들에게 문단속을 잘 하라는 인사를 건넨 뒤 바깥으로 나왔다. 여름을 통과하는 계절이었음에도 공기가 맑았다. 여전히 봄인 것만 같았다. 발걸음이 쉽게 향하지 않던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학교 건물이 나왔다. 밤인데도 교실은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는 학생들로 인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진영은 교문 옆에 주저앉았다. 조금 기다리자 익숙하지만 낯선 종소리가 울렸고 학생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학생들이 재잘대며 빠져나가고 나서야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진영은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은 교복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진영아.”
그 날처럼 진영은 용희의 앞에 섰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용희는 함께 거닐던 학교 뒤뜰로 향했고 진영은 발맞춰 함께 걸었다.
배구부로 돌아오라거나,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라거나, 그런 구질구질한 말로 매달리기 위해 용희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용희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의 이유조차 찾을 수 없어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다만 용희를 보면, 그 멀건 얼굴을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희는 가방끈을 쥔 채 진영을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진영은 지금껏 용희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학교는 뒤로 산을 끼고 있었고 산과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철조망을 세웠다. 용희는 그 철조망에 다가가 섰다. 진영은 경계선 너머의 산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지내?”
“그럭저럭. 너는?”
“별로. 너 없어서.”
그 말에 용희는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꼭 믿지 못하겠다는 뜻 같아서 진영이 고개를 돌렸다. 진영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용희가 말했다.
“나도 별로. 공부 힘들더라. 새벽 훈련보다 더.”
“당연하지.”
“그래도 재밌어.”
홀가분한 표정의 용희를 향해 진영은 성급하게 말했다. 어쩌면 용희를 잡지 않는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일지도 몰랐다.
“후회 안 해?”
“응. 내가 정한 거니까.”
“그래. 그럼 됐다.”
사실은 아무것도 된 것이 없었지만 진영은 그렇게 말했다. 관성적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용희가 진영의 팔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진영아, 나는 여기 그대로 있어.”
준비도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그 마음은 성급하게 진영을 관통했다.
“나는 너 진짜 좋아해, 그러니까 힘내.”
막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을 무렵 진영이 처음 한 말은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괜히 참다가 다치지 말고, 괜찮으니까 직접 말하라고. 그럼에도 용희는 진영의 토스에 대해 가타부타 지적하는 일이 드물었고 공을 때린 직후 바닥에 넘어져도 군말을 하지 않았다. 진영은 그런 용희를 다그치기보다는 관찰하기를 택했다.
지금은 용희를 아무리 들여다보고 말을 곱씹어도 용희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그 떨림이 제게 일으킨 파동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뜻인지 묻지 않은 채 진영은 용희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용희가 진영의 등을 감싸고 힘주어 끌어당기자 진영은 용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체중을 실었다. 그제야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부드러운 교복에서는 코를 찌르는 새 옷감의 냄새 대신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났다. 목덜미는 땀이 흐르지 않아 보드랍게 말라 있었다. 살결에는 열감이 올라오지 않았고 숨은 몰아쉬는 법 없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심장박동의 속도가 느릿했다.
용희는 여전히 곁에 있다 말했지만 진영은 용희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갔음을 느꼈다. 순간 진영의 인생에 있어 어떤 시기가 영원히 한 롤의 필름으로 고정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진영은 비로소 용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즐거웠기에 포기할 수 있었다던 그 말을. 하나의 시간이 완전히 끝을 맺으면 그 자리에서 다음 시간이 눈을 뜬다. 용희의 부재를 절감한 순간 진영의 마음 한구석에는 새로운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모닥불로, 횃불로, 등불로 서서히 옮겨 갈 것이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웠고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술렁대는 심장이 나쁘지 않게 뛰었기에 진영은 용희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용희가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기를 바라지 않았다.
둘은 마지막으로 함께 걷던 길을 되짚었다. 그 길을 다시 걸을 수는 있어도 그 길 위에서 다시는 같은 의미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영은 언젠가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용희는 그 경이로운 과정의 근원에 언제나 서 있을 것이다.
철조망 너머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울었고 달빛은 자맥질을 하듯 구름들 사이를 오갔으며 진영은 용희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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