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랑석안]반추反芻

인사반파자구계통 외전인 "죽지사"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그는 실로 귀공자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걸음마다 기품이 넘쳤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그의 아름다운 외형에 더해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족 특유의 외모 또한 그러했다. 그처럼 격조 높은 이는 마계와 인세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세상물정 몰라 소석안에게 손 벌릴 때에마저도 저속한 모든 것들과 일절 관계 없는 삶을 살았다.

“나를 비웃으러 온 것이오.”

천랑군은 입을 벌려 웃는다. 듣기 싫게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다. 듣기 좋은 미성은 간데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에서 웃음소리가 울려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멎었다. 황량한 산에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너무나도 익숙한 인영의 발치를 원망스레 응시했다. 엉겨붙은 피, 핏물에 적신 채로 썩어가는 흙, 녹슬어가는 쇠에서 나는 냄새가 한데 섞여 비릿한 악취를 풍겼다.

천랑군은 그 역겨운 악취 속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인영에 입술을 달싹였다. “석안.” 그 호칭은 불과 같다. 입 안에 담을 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호흡할 때마다. 그 때마다 그의 몸 속 깊은 곳부터 성대를 지나, 입 안까지 전부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그런 이름이었다.

소석안. 석안.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

천랑군은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그는 실로 귀공자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소석안은 그를 배신하고, 기어이 그를 이 산 아래에 처박았다. 어쩌면 배신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용하기 위함이었을지도. 어찌 되었건간에 이런 추악한 몰골은 소석안의 마음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한 줌 정마저도 불사를 터였다.

풍류를 즐기고 품격 있던 천랑군은 이제 산 아래에 갇혀서, 배를 밀어 땅을 기는 생물보다도 더 추한 몰골이 되었으므로. 천랑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물한 시선이 소석안의 발치를 향했다.

“나를, 비웃으러 온 것이오…….”

물음은 그리도 부질 없이 흩어진다. 무정히도 대답 한 자락 돌아오지 않았다.

**

그 날 이후로도 소석안은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대충 제 외조카가 노수호의 물을 머금어 와 제 상처를 닦는 의미 없는 짓거리를 대여섯 번 반복할 적 마다 찾아오는 것 같았다.

천랑군은 일흔 두 개의 철끈에 묶이고 마흔 두 개의 부적 아래에 갇힌 채로 노래를 불렀다. 소석안과 함께 있을 때 듣곤 했던 노래였다. 처량하게 이어지는 노래를 어찌 들었는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소석안은 자신을 찾아왔다. 천랑군은 소석안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그대 기억 하시오.”

“…….”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

천랑군은 그저 옛 일을 입에 담았다. 의심 하나 없던 시절이다. 제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천랑군은 소석안과의 과거를 곱씹고, 입에 올리며 제 정인에게 속삭였다. 반응 없이 듣기만 해도 괜찮았다. 천랑군은 그저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이 끔찍한 무력감과 공허함과, 배신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했고, 하고 싶었으므로.

이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원망일까. 그도 아니면…….

천랑군은 제 마음을 헤아려보려 했으나 알 수 없었다. 사랑이기도 했고, 원망이기도 했을 테니까.

그는 자신에게 찾아왔던 봄꽃내음을 상기한다. 무정하던 그녀가 자신을 향해 내보였던 웃음을, 함께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인간 세상은 그의 사랑의 증명이었다. 그는 소석안을 사랑했고, 소석안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허상이었다. 그녀와 그는 사랑을 말하였으나, 그들의 사랑과, 그들이 보냈던 시간은 전부 쓰레기로 전락하여 백로산 안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래. 그렇기에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을 소석안이 짓밟아 부적과 철끈과 함께 이곳에 내던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천랑군은, 그러한 사실보다도 저를 여기까지 처박은 인간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소석안을 죽이고 싶은 것인가? 혹은 그녀와 공모한 다른 모든 인간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것인가.

아니, 그냥,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 그래. 온전히 사랑이었던 것 사이에 지독한 원망이 스몄으므로, 이제는 그것을 그저 애증이라 명명하기로 하자.

“석안.”

잔뜩 쉰 목소리로 천랑군은 묻는다. 벌써 몇 번째 과거를 반추한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였다.

“비웃으러 온 것이 아니면, …사죄라도 하러 온 것이오?”

천랑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노라는 말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물이 떨어질 곳 전혀 없는데, 빗물이 제 뺨에 떨어진 것도 같았다.

천랑군은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오는구나.” 죽지랑이 들었다면 실성했다고 느껴질 법한 목소리였다. “비가 와.” 천랑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게도 제정신이었다. 실성했다고 말하기엔, 그는 너무나도 제정신이어서. 그래서 더욱 미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 미친 척이라도 하고 싶었나.

한 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소석안과 속삭였던 이야기를 그는 곱씹는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그녀와 함께 거닐었던 거리를. 그녀와……. 천랑군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소석안은 언제 왔냐는 듯 흔적조차 없다. 천랑군은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정신이 맑았지만 소석안이 찾아왔다는 것보다는 미쳤다 단정 짓는 쪽이 더 편하여, 그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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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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