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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착헌] 불쾌한 골짜기 下

괴물은 인간의 이름을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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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약 20000자.

세상을 구원할 히어로. 영웅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주목받는 존재였으니 대중들이 각성자에게 보내는 어마어마한 관심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흥미, 질투, 추앙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각성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그 중 단연 주목받는 일이라고 한다면 응당 '게이트 공략'을 꼽으리라.

세상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대중들이 단순히 흥미본위로 각성자에 대한 관심을 높여갈 때 쯔음에, 한 학자는 이를 두고 '게이트는 21세기의 콜로세움이다' 라고 명명했다. 오늘날에는 각성자, 혹은 헌터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검투사와 몬스터의 대결,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대중들. 헌터와 몬스터의 대결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윤리 의식에 걸릴 것도 없다. 이로써 헌터의 게이트 공략이란 대중들의 새로운 스포츠가 된 것이다.

나는 [러시안룰렛]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내게로 들이밀어진 여러 대의 카메라들과 마이크를 쓱 훑어보았다.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게걸스럽게도 담아내는 저 폭력적인 관심이란 얼마나 추악한가. 알알이 빛나는 카메라의 까만 렌즈는 괴물의 눈동자와 다를 바 없어보였다. 

어찌보면 대중이나 기심체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인간의 공포와 슬픔 따위의 감정을 먹기를 즐겨하니 말이다.

"이번 [러시안룰렛]의 희생자는 누가 될 것이라 예측하십니까? "

"본인이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

"지금 심정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

저열하고도 천박하다, 나는 이 상황을 그렇게 평가했다.

나는 무미건조한 투로 언제나 그렇듯 기계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도록, 공략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카메라에 고개를 한 번 꾸벅여보이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게이트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사람들 설마 강창호한테도 이런 건가? '

만약 그러하다면 그 직업 정신에는 박수를 쳐줘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하며 게이트에 발을 내디뎠다.

"아니. 나한테는 그런 거 안 물어봤는데. "

체모변색증으로 인해 청자빛의 머리칼을 갖게 된 거구의 남자가 오른팔을 왼쪽으로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면서 건성으로 답했다. 

웬일로 성실함을 발휘해 게이트에 나보다 먼저 들어와있던 남자는 내가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줄곧 스트레칭에 열중이었다. 각성자라고 해서 몸이 저절로 유연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스트레칭을 해야한다나 뭐라나. 나는 그의 말이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아까 전부터 그의 동작을 따라하며 함께 스트레칭 중이었다. 

이번에는 팔을 바꿔 왼팔을 오른쪽으로 꺾으며 물었다.

"물어보기도 전에 게이트에 들어오신 건 아니고요? "

이 남자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워낙에 평판에는 신경도 안 쓰고 인터뷰라면 치를 떠는 인간이었으니.

남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특유의 초록색 눈동자를 모로 굴리며 말했다.

"뭐... 그것도 맞긴 한데 애초에 기자들이 다가오지를 않아서 인터뷰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아마? "

에라이. 직업의식이고 뭐고 기자들도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거였군. 나 같으면 평생을 안하무인으로 살던 남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심정이 어떤지 궁금해서라도 물어보겠구만. 기자들이 제 몸을 사린 덕분에 한가지 유희거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 심정은 어떠신데요? "

쭈그려 앉아 왼다리를 펴고 아래로 누르며 툭 물음을 던졌다. 아, 이 자세는 좀 아프네.

"안 가겠다는 사람을 그 사지로 직접 쳐넣으신 분이 물을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

강창호의 말에 나는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슬 피했다. 아니 원칙을 안 지킨 사람이 누군데 내가 이래야 돼?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가 아니었더라면 확실히 강창호가 이 게이트에 들어올 일은 없었을 것이므로 입은 다물고 있기로 했다. 괜히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강창호는 잠시 침묵하며 내 반응을 보더니 "거기 허리 좀 더 세우고. 옳지. " 하고 자세를 조언한 뒤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한 쪽 볼우물이 보기 좋게 폭 파인채였다.

"말해 뭐해. 기분 더럽지. "

아... 기분이 더러우시구나...

나는 괜히 물어봤다는 낭패감을 느끼며 게이트 입구를 절박하게 쳐다보았다. 서에스더, 정하성 아무나 좀 빨리 와라.

내 다음으로 게이트 입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에스더였다. 그 뒤로 따라오는 사람은 아마 마탑 소속이랬던 5위 헌터겠고. 저번 서에스더의 말에 따르면 저 5위 헌터가 울었다는 건데, 서에스더의 거의 2배쯤은 되어보이는 몸집을 봤을 때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등치였다. 지구인의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몸집이 크면 클수록 눈물을 덜 흘리는 것 아니었나? 확실히 일반화된 지식은 믿을 게 못되는 듯 했다.

서에스더는 기려씨! 하고 부르며 이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다가 내 옆의 강창호를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강창호 헌터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출국 금지니까 별 수 있나. "

"밀항이라도 해서 나가있을 줄 알았죠. "

본인 의지만 있으면 수단 방법 안 가리시는 분 아니었나~, 하고 서에스더가 미소지으며 날 선 말을 덧붙였다. 범법자를 혐오하는 평소 성정에 더해 저번 해변에서 있었던 나와의 일로 강창호는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었다.

"나를 너무 나쁘게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이거 서운하네. 국민의 안위를 위해서 여기까지 발걸음 한 사람한테. "

강창호가 짐짓 억울하다는 몸짓을 취하자 나는 그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밀항하려고 하다가 저지당한 게 누군데... 강창호의 뻔뻔함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뒤이어 정하성과 네오시스터즈 소속의 6위 헌터가 합류하고 (이들에게서도 강창호는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취지의 눈빛을 한 번씩 받았다. 이게 다 업보지, 업보.) 우리는 던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새하얀 벽과 바닥, 천장은 이음매가 없어 더욱 현실과 유리되어 보였고, 그렇게 길게 이어진 복도 저 끝에는 열고 들어가라는 듯 문 한 쌍이 닫혀있었다. 문은 워낙 멀리에 있어 거의 점처럼 보였는데 이 정도 거리면 못해도 2-3시간은 걸어야 할 듯 싶었다. 

이 복도 안에는 빛이 어디에서 비춰지는 건지 광원은 보이지를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복도 안은 꽤 밝은 편이었다. 외부 마나를 탐지해보아도 딱히 걸리는 부분은 없고. 그냥 걸어가면 되는 건가?

"함정 같은 건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일단 걸어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

정하성이라는 이름의 살아있는 던전 백과가 그렇게 말하니 모두들 동의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렇게 쭉 이어져있는 구조면 대체 언제 흉내쟁이랑 뒤바뀌는거지... 서로가 서로를 뻔히 다 볼 수 있으니 뒤바뀌는 타이밍을 너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역시 저 문을 넘고 나서 바뀌는 거려나. 생각이 복잡해졌다.

사람들은 이 복도에 별다른 함정이 존재하지 않을거라 생각하면서도 처음 걸을 때 얼마 동안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1시간이 넘어가니 점점 긴장이 풀리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서에스더는 5위 헌터와 일 얘기를 하는 듯 보였고 (던전에 와서까지 일얘기라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저주술사는 무서우니 티는 안 냈지만.) 6위 헌터는 내심 가리온의 직원 복지가 궁금했던지 정하성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고 있었다.

이렇게 둘씩 나눠지다 보니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 건 나와 강창호 뿐이란 건데...

'조용히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

생각도 정리하고 혹시 모를 외부의 위협에도 대비하고 얼마나 좋은가. 나는 강창호를 신경쓰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면서 꿋꿋이 걸어갔다. 강창호가 먼저 말을 걸어 내 노력은 무산되었지만.

"쟤네들한테는 말 안 해? "

"뭘요? "

"그 흉내쟁이 이론 말이야. 난 그게 꽤 설득력있는 가설이라 보는데. "

아 그거. 물론 나도 처음에는 모두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두가 다 알아봤자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분란만 만들어질 뿐이에요. 그럴 바에야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몇이 전체를 조망하는 편이 낫지. "

작은 씨앗에서 비롯된 의심은 커지고 커져 불신을 만든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서로를 흉내쟁이라고 불신하게 된다면 이 파티는 게이트 출구에 가기도 전에 궤멸하고 말 것이다. 가뜩이나 각각의 능력치가 높은 인간들만 모여서 하나만 날뛰어도 그 위력이 어마어마할텐데 분열이라도 나봐라. 난 그거 감당할 자신 없거든.

"알겠어. "

강창호는 의외로 쉽게 납득하고는 다시 침묵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고 다시 한 30분쯤 걸어갔을까. 문까지 걸어서 1시간쯤 걸릴만한 거리를 놔두고 갑자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예고도 없이 복도는 어둠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암전에 사람들이 당황해 웅성거리다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정하성이 불을 피워보겠다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복도가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 되었다, 이 말이다. 저주 종류가 아니라 시각을 왜곡하는 쪽의 상태이상이었던지 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강창호씨 그쪽은 뭐 보이는 거 있어요? "

"아니. 하나도 안 보여. 이런 적은 처음인데. "

당황한 건지 짜증난 건지 아니면 재밌어하는 건지 강창호의 음성이 묘하게 억눌린 듯이 들려왔다. 얼굴이 안 보여서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용의 눈도 하필이면 이럴 때 또 쓸모가 없고.

사람들은 별 수 없이 벽 쪽으로 이동해 벽에 손을 붙이고 일렬로 서 앞으로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긴장해 복도에는 적막만이 흐른다. 앞사람의 침 넘기는 소리, 복도에 울리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 벽을 손으로 훑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질식할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 고요함을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나와 내 앞에 앞서가던 누군가와의 접촉 사고였다. 내 다리에 앞서가던 사람의 다리가 잘못 맞물려 나는 보기 좋게 넘어져버렸다. 함께 가던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던 것을 멈추고 저마다 걱정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넸다.

"괜찮으세요 기려씨? 방금 되게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

서에스더가 우려섞인 말을 건네자 어쩐지 좀 민망해져서 무덤덤하게 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서에스더는 눈도 안 보이는데 넘어진 사람이 김기려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김기려는 머릿속을 지나간 짧은 의혹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저와 접촉 사고가 난 앞사람의 안위를 먼저 챙기기로 했다.

"제 앞에서 가시던 분은 괜찮으신가요? "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가 지금 방금 제 앞에 가시던 분이랑 다리가 걸려서 넘어진 거거든요. 혹시 저랑 다리 부딪히신 분 없어요? "

여전히 사람들은 묵묵부답이다.

김기려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마음에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그 결과 김기려의 앞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중 가장 가까운 곳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정하성의 것이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기려의 바로 앞에 서있던 것은 정하성이라는 뜻인데...

"하성아. 너 나랑 다리 부딪히지 않았어? "

"아니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

정하성도 이 상황이 무언가 꺼림칙했는지 떨떠름한 기색이 남아있는 음성으로 답하자 안 그래도 긴장되어 있던 공기가 이제는 거의 얼어붙는 듯했다. 그럼 김기려의 다리에 닿은 건 뭐지?

"뭐 서로 착각한 걸 수도 있고. 일단 갈까요? 저희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은데. "

서에스더가 떨리는 음성으로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밝게 말했다. 이 분위기가 못 견디겠는 모양이었다.

김기려는 어차피 여기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었으므로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서에스더의 정신건강이 우려되기도 했고.

그렇게 또 한참을 침묵 속에서 나아가다가 별안간 김기려의 뒤에서 따라오던 서에스더가 김기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나요, 사실 이 게이트가 무서웠어요. 그렇잖아요. 우리같은 고등급 헌터들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이 잘 없으니까. "

서에스더가 다 놓아버린 듯 허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음성이 중간중간 작게 떨리는데 실소하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저번에 밖에서 무섭지 않다고 말했던 건... 다 허세였어요. 가식이라고요. 그렇게라도 괜찮은 체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요. 나 진짜 어떡해요? 이대로 1/6의 총구가 제발 나만은 피해가길, 그렇게 비는 수 밖에 없을까요? "

그런 건 너무 무력하잖아요...

서에스더가 절망에 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마 김기려가 답을 주리라고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누군가에게 그렇게라도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지 않으면 본인이 너무 괴로우니 그랬겠지.

어둠이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의 시각을 앗아가고 불확실을 안겨 공포를 증폭시키는. 선사시대의 조상 때부터 DNA에 깊게 뿌리박힌 어둠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도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러니 한 국가를 대표하는 6명의 고위각성자라고 해봤자 시각을 빼앗은 어둠 앞에서는 그저 무력히, 내면의 공포와 불안을 키워갈 수 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어둠 속에서 또다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 벽을 손으로 훑는 소리, 누군가가 터져나온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의 마음 속에서 싹튼 불안은 어둠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가장 앞에서 걸어가던 네오시스터즈의 6위 헌터가 어,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앞에 무슨 일 있습니까? "

정하성이 물었다.

그러자 6위 헌터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눈이, 갑자기 보여서요. "

그러곤 숙련된 헌터답게 현상의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6위 헌터는 잠시 앞 뒤로 공간을 왔다갔다거리며 실험을 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이상은 일정 공간에만 적용되는 효과인 듯 하다고. 갑자기 눈이 보이는 것은 상태이상이 적용되는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했다.

그 말대로 6위 헌터가 가리킨 부분을 넘어서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도 있었고 눈 앞에 보이는 새로운 고비에 긴장하는 이도 있었다. 어느새 문 앞에 다다른 것이다.

어쩐지 저 멀리에서도 보이더라니 과연 사람 키의 4배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문은 다양한 인간 형상의 조각이 화려하게 새겨져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과 절망하는 인간, 원죄를 지은 아담, 남편의 동생과 키스하는 아내.

김기려는 이미 이 문을 알고 있었다. 로뎅의 [지옥의 문]. 문의 저 위에서 지옥의 새로운 손님들을 내려다보는 [생각하는 사람]이 '너희들은 들어가서 절대 온전히 나올 수 없다' 경고하는 듯 보였다.

기심체들 취향하고는.

그들의 질 나쁜 취향이야 김기려는 익히 알던 바였지만,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문의 충격적인 형상에 새삼 섬뜩함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을 때, 단 한 명만은 다른 이들과 달리 이미 지나왔던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기려는 그에게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

강창호가 눈을 떼지 않고 답한다.

"누군가 흉내쟁이와 뒤바뀐다면, 나는 저기에서 뒤바뀌었을 확률이 꽤 높다고 생각하거든. "

그러면서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근데, 뒤바뀌고 난 사람이 어디로 가는 건지는 우리가 아직 생각을 안 해봤지 않나, 싶어서. "

그가 바라보고 있는 복도로 시선을 옮겨보아도 그곳엔 텅 빈 하얀 복도 뿐이다.

"물론 저도 사람들 눈이 안 보일 때 바뀌었을 확률이 높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눈속임일 수도 있죠. 실제로는 저 문을 넘어서 바뀔 수도 있고. 섣불리 단정하기엔 너무 일러요. "

강창호가 김기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뭐, 그것도 맞는 말이지. "

김기려가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출구까지는 아직 남아있으니까. "

강창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생각의 정리가 되었는지 말을 이었다.

"맞네. 출구까지는, 아직 남아있지. "

강창호가 습관처럼 미소지었다. 입매가 살짝 굳은 것도 같고?

약간의 찝찝함을 뒤로하고 곧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사람들은 들어갈 채비를 모두 마쳤는지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때 정하성이 뒤늦게 합류한 김기려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김기려 헌터님은 준비 다 되셨습니까? "

김기려가 문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정하성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응, 준비할 게 따로 있지는 않아서... "

김기려의 답에 정하성의 얼굴이 의아한 듯 바뀐다.

"오늘은 몬스터 공략하기 전에 심호흡 안 하십니까? 매번 하셨잖아요. "

정하성은 자신의 스승이 몬스터를 공략하기 전 으레 하는 습관적인 의식을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눈을 뜬다.

그것이 일반적인 심호흡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의 스승에 비해 둔감한 그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김기려가 그런 의식을 행할 때는 이 세상의 마나가 김기려만을 축복하듯 그의 곁에서 태풍처럼 소용돌이치는데.

김기려, 그의 스승은 마나의 편애를 받는 자였다.

하지만 김기려는 이번엔 그 의식을 행할 마음이 없는 듯 곤란한 투로 말했다.

"...가끔은 생략해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습관을 만드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니까. "

정하성은 스승의 결정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마나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던 탓이다.

사람들은 준비를 다 마치고 문을 밀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육중해보이는 커다란 문은 잘 열리지를 않아서 S급 둘이 달라붙어서야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틈으로 한 명씩 문 안으로 입장하자, 그곳에는 보스 몬스터 하나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의 치마 끝이 끝으로 갈 수록 흐릿해져 경계를 알 수 없는 것 말고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는 소녀 모습의 몬스터. 허리께까지 오는 칠흑같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소녀가 뒤를 돌자, 소녀의 얼굴에는 눈코입이 없었다. 훗날 [저주인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A급 저주 속성 몬스터였다.

소녀는 한 손에 칼을 들고 마탑 소속의 5위 헌터에게로 돌진했다. 같은 A급 이라지만 소녀는 저주 속성이었기에 순수 공격력만으로는 5위 헌터보다 한참을 밑졌다. 그러니 5위 헌터가 소녀의 칼을 막아내고 칼을 든 쪽의 팔을 잘라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소녀는 저주 속성 몬스터면서 왜 저주 스킬을 안 쓰고 자기가 잘 하지도 못하는 육탄전을 벌였는가. 이것은 이 소녀, 아니 몬스터가 훗날 붙여지는 [저주인형]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었다.

5위 헌터가 몬스터의 팔을 잘라내자마자 5위 헌터의 팔도 깊게 베여버렸으니까. 서에스더가 자신의 스킬을 염려해 나눠준 저주내성장비가 아니었더라면 5위 헌터의 팔도 소녀의 팔과 똑같이 뎅강 잘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뭐, 이런 사실도 저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5위 헌터에게는 크게 다가가지 않을테지만.

로뎅의 [지옥의 문]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저런 형상이었던가. 

그것은 우리를 예언한 것이었나.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소녀의 천진한 웃음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피를 지혈하며 포션을 붓고 있는 5위 헌터의 팔과 달리 절단면에서 피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소녀의 팔은 무척이나 대비되어 보였다. 소녀는 남은 손으로 자신의 잘린 팔에 쥐어진 칼을 산뜻한 동작으로 주워들고는 다시 5위 헌터에게로 달려들었다. 5위 헌터를 아예 목표물로 지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에스더가 더 빨랐다. 어느새 정하성의 검을 빌린 서에스더가 소녀의 칼이 5위 헌터에게 닿기 전에 소녀의 가슴팍을 관통한 것이다. 소녀는 그대로 쓰러져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어느 순간 웃음 소리를 뚝 그쳤다.

어딘가 찝찝하고 허망한 결과였다.

이 길고 길었던 복도의 끝에 드디어 출구가 생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출구를 앞에 두고서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야, 출구가 생긴 다음이 [러시안룰렛]의 진정한 시작이니까.

누가 [러시안룰렛]의 희생자가 될 것인가.

흉내쟁이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층 긴장한 낯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제 슬슬 흉내쟁이가 누구일지 추리해야하는 차례라는 건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기려는 서에스더와 정하성을 의심 중이었다.

우선 서에스더는 아까 복도에서 모두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일 때 넘어진 사람이 김기려라고 특정했었다. 그리고 이후에 보여준 심약한 태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러시안룰렛]에 담담한 태도를 보인 이가 맞나 싶은 것이다.

정하성은 복도에서 김기려가 다리가 걸릴 만한 사람이 자신 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확실하게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었던 이유가 껄끄럽다.

둘 중 누구일까.

김기려가 둘을 찬찬히 훑어보아도 외견 상으로는 평소와 차이가 없다.

역시 머리 하나로는 추리하기에 역부족인건가.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지 굳은 표정으로 출구를 향해 나아갈 때 김기려는 그들을 멈춰세웠다.

아니, 멈춰 세우려고 했다. 강창호가 입을 열기 전까진.

"잠깐 나가지 말아보지. 할 얘기가 있는데. "

강창호도 김기려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아까 전에 강창호에게 잠시 물어보았을 때 강창호는 용의 눈에 특별히 걸리는 사람은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흉내쟁이의 존재를 알리고 함께 추리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걸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강창호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자 강창호가 그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뭐, 관객 분들은 다 계신 것 같고. 내가 한 가지 보여줄 게 있어서. "

강창호의 태도에 정하성이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말했다.

"뭐하자는 겁니까, 강창호 헌터.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 멋대로 구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

다른 이들도 정하성의 말에 동의하듯 강창호를 향한 시선이 그닥 곱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창호는 그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줄곧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정하성 헌터는 참 성미도 급하지. 사람이 무언가를 얻을 때는 참을 줄도 알아야 되는데. 이참에 배워둬. "

정하성이 강창호의 가벼운 태도에 한마디 더 던지려는 순간, 정하성은 강창호의 눈에 스쳐지나간 서늘한 눈빛에 말을 삼켰다. 강창호의 저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태도에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강창호가 무언가 말을 하기에 앞서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이걸 안 물어볼 뻔 했네. "

강창호가 김기려를 바라보았다.

"김기려, 당신이 부탁해서 다음 주에 미국에 같이 가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내일 모레로 일정을 바꿔도 괜찮을까? 사정이 생겨서. "

이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인가.

뜬금없이 뭘 보여준다느니 돌발 행동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켜놓고 약속이나 조정하고 앉아있는다고?

강창호의 말에 김기려는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에 부담을 느끼며 답했다.

"네, 뭐... 강창호씨 편한 대로 하세요. "

김기려의 답에 무엇이 그리 웃겼는지 강창호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으로 소리내어 웃고는 묻는다.

"그래? "

그 말과 함께 강창호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는 쏘아지듯 달려들어 김기려의 명치에 주먹을 꽂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인식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S급 신체강화술사의 힘을 정통으로 받아낸 김기려는 날아가듯 밀려나 벽에 부딪히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명치에서부터 올라온 격통이 아릿하게 올라왔다.

"강창호 헌터,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

순식간에 칼을 빼어든 정하성이 강창호의 목에 칼을 가까이 대었다.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칼을 힐끔 내려본 강창호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참는 법을 알아야한다니까... ' 하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저거 김기려 아니야. 그놈의 미국 간 지가 언젠데. 다음주에 가기로 했다고... 우습지도 않지. "

강창호는 얼마 전 있었던 부둣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여긴 내가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저번에 미국에 갔을 때 넌 분명히 비행기를 타고 갔잖아. "

김기려가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닌 이상 '저건' 김기려가 아니었다.

'김@&기려'는 강창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런 과격한 반응이라니. 

'김기₩@려'는 강창호가 흉내쟁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나?

'□기려'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려보이며 미소짓는다.

"어떻게 알았어? "

김기려는 며칠 전 선우연과 만났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미소짓는 법을 몰랐다. 이런 작은 괴리들이 강창호에게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김기려가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출구까지는 아직 남아있으니까. "

'김기려'가 미친 듯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우와 너네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어? 아무도 몰랐는데. 하하하하하! "

평소라면 김기려가 절대 하지 않을 말투와 행동을 김기려와 똑 닮은 얼굴로 보고있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강창호의 목에 드리웠던 칼은 정하성의 팔에 힘이 빠져 목과 멀어진지 오래였고, 서에스더와 5위 헌터, 6위 헌터는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것처럼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강창호만이 '김기€&'에게 질문했다.

"김기려는 어디에 있어. "

'??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는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찾아야지. "

'???'가 다시 미소 짓는다.

"너넨 내가 김기려가 아니라는 걸 알아낼 정도로 각별한 사이잖아. 찾아낼 수 있을거야. 난 너희들을 믿어! "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감정 기복이 가팔랐다. 미친듯이 웃다가 정색하고 다시 미소짓고.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오감이란 매우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작용하기에 평범함이 살짝이라도 뒤틀리면 그 미묘한 차이에서 공포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불쾌한 골짜기였다.

'이것'에게서 더이상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강창호는 옆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정하성의 검을 빼앗아 '???'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어버렸다.

'???'은 죽은 듯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눈은 그대로 뜨고있는 채였다. 눈 깜빡임이 없는 초점 잃은 눈은 인형의 그것과도 같아보였다.

'???'의 시체에서 붉은 피가 꾸물럭대고 비어져나와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마치 김기려의 시체를 보는 것처럼...

존경하는 이의 시신을 보는 듯한 느낌에 정하성은 저 뱃속 깊은 곳에서 구역감이 치밀어올랐다. 

서에스더는 방금까지 김기려라고 믿었던 이가 실은 김기려가 아니고, 지금을 저기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듯이 그저 '???'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5위 헌터와 6위 헌터는 김기려를 미디어로나 접했을 뿐 실질적인 친분은 없었기에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까 전까지 대화하던 사람이 실은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였다는 충격에서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듯 보였다.

개중 이 상황에서 가장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 보이는 강창호는 '???'의 피가 묻어난 자신의 손을 한 번 털어낸 뒤 죽은 '???'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저건' 김기려가 아니다. 그러니 모두의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곳에, 김기려가 있으리라.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구출되었다.

그래, 저 예민한 작자가 내가 바뀌었다는 걸 못 알아챘을리가 없지.

시각을 잃고 복도를 나아가던 때에 무언가가 발목에 걸려 넘어진 나는 그대로 바인딩에 묶여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대마법사의 체면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그렇게 한참을 묶여있다가 무언가가 나를 붙들어매는 듯한 느낌에 발버둥을 쳤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가만히 좀 있어. 버리고 가기 전에. "

예... 그럼 가만히 있어드려야지요...

그렇게 볼품없게 구출되었다는 이야기다.

상태이상이 걸리는 범위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시각을 되찾은 후에 보게 된 것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서에스더의 얼굴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초췌한 정하성의 얼굴이었다.

"진짜... 김기려 헌터님 맞으십니까? "

한참을 목소리가 막혀있었더니 목이 메인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겨우 답했다.

"어, 맞아. 근데 너 못 믿을거잖아. "

정하성이 뜨끔한 듯 시선을 피한다.

"네 탓 안 해. 진짜 어지간히 나랑 비슷하게 생겼나보지? 이쯤되니까 궁금하네... "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나'를 증명할 해법을 찾았다. 이런 술식은 나밖에 못 짜니까!

"서에스더씨. 저번에 에스더씨가 말했듯 저는 당신 저주가 안 통하죠. 내가 나인 걸 증명해야겠으니까 저한테 저주 좀 쎄게 붙여주세요. 기왕이면... 죽어버려! 이런 것도 좋겠네요. "

내 말을 들은 에스더의 동공이 초당 5회 정도로 거세게 흔들린다.

"네? 저... 저, 못해요... 어떻게 기려씨한테... "

마음이 심약한 저주술사는 파업을 선언했다. 저주는 술사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스킬이기에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내가 진짜 김기려면 안 죽을테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

알파우리에서 온 외계인이 인간의 여린 마음에 대한 무지로 극악무도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에 서에스더는 '방금 당신 모습을 한 뭐가 죽는 걸 보고 왔다고요! 난 그거 못해요!'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눈물을 꾹 참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김기려가 김기려임을 증명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진짜... 진짜 기려씨 맞네요... "

서에스더가 지친 듯이 말했다. 그녀의 저주가 먹히지 않았다는 선언이자 눈 앞에 있는 자가 김기려가 맞다는 증명의 선포였다.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진짜 너무하다... 너무해... "

서에스더가 원망과 슬픔과 안도감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서에스더의 원망섞인 투정을 받아주며 사람들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웬 험악하게 생긴 문을 지나자 한 쪽에 죽어있는 '???'의 시체가 보인다.

오... 진짜 김기려랑 똑같이 생겼네.

김기려와 똑같이 생긴 게 피를 질질 흘리면서 눈도 못 감고 죽어있는 꼴을 보자니 미약한 불쾌감이 올라온다.

나는 '???'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런 이상한 거 계속 보고 있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출구로 향했다.

출구에 발을 내딛자 빛무리가 내 몸을 감싼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김기려인가?

나와 이 게이트에 함께 온 정하성, 강창호, 서에스더, 5위 헌터, 6위 헌터는 내가 김기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은 김기려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도 '???'과 다를 바 없는 처지라는 것을. 나도 결국엔 '김기려'의 탈을 둘러쓴 타성에서 온 영혼일 뿐이다.

나는 김기려인가?

존재란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난 아직도 이 지구식 철학적 명제의 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지구인이 아니었기에.

위화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분명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나니, 익숙함 안의 낯섦이란 미지의 공포라.

(맨 마지막 문장 '왜냐하면 난...' 옆에 숨겨진 글귀가 있습니다. 화면 모드를 다크 모드로 설정하고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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