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기려] 진실을 탐하다
금기를 훔쳐보는 자
본문은 전체 다 열람 가능하며 결제창 아래는 짧은 외전과 후기입니다.
퇴고를 안 한 글이라 지속적으로 수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량 약 12000자.
○
- 우리 김 헌터님께서 그런 데에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야.
파란 바탕에 노란 말풍선이 하나 떠오른다. 특유의 청잣빛 머리칼과 파충류를 닮은 녹안이 떠오르는 거만한 사내의 말투.
일전에 목적 없이 인터넷 검색을 반복하다 찾은 글이 이 대화의 시발점이었다.
[제목] 나만 이거 궁금해?
아니 ㄱㄱㄹ는 대체 사주팔자가 어떻게 되길래 인생에 사건 사고가 저렇게 빽빽함? 일단 사고수 있는 건 100% 일 것 같은데.
찾아보니 신이 선택한 지구인, 즉 무당이라는 작자들은 처음 보는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엔 예지 스킬을 쓰는 원시 술사를 '무당'이라고 부르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이 무속신앙이란 것은 꽤 전통과 깊이가 있는 문화인 듯싶었다. 인터넷에 쏟아지는 간증 글들을 보아하니 완전히 사기라고 볼 수도 없는 듯했고.
'스킬도 없이 미래를 예지하는 지구인의 문화라니! '
마도학자로서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 김기려 헌터가 갑자기 무속신앙에 흥미가 생긴 건 알겠어. 뭐, 원래 사람이라는 게 궁지에 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거니까.
아무래도 강창호는 내가 건강 때문에 이러는 줄로 안 모양이다.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지.
- 예. 제가 폐암 때문에 언제 죽을까 하루하루가 너무 심란한 상태라서 그러는데 그 아신다는 점집 좀 빨리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메세지 옆의 1표시가 순식간에 없어지고 곧바로 강창호가 답해온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 인망 넓은 거야 이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 많고 많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한테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는? 내가 분명 하루 전에 연락하니 말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유야 많았다. 공사다망한 다른 이들과 달리 강창호는 이런 일로 연락해도 그다지 죄책감이 안 들었고, 또 인터넷에서 점집은 아는 사람이 추천해주는 곳을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으니까. 무엇보다-
- 점집 추천은 나이 많은 사람 말을 듣는 게 맞다고 들어서요. 강창호씨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아, 내가 나이가 많다?
강창호의 메시지에 나는 핸드폰 자판 위에 올려둔 손을 잠시 멈추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뭐지?
포유류들의 호오란 알파우리산 외계인에게는 꽤나 파악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기려의 기억을 통해 도움을 받았었는데, 나이에 대한 정보는... 없군. 그야 김기려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대해 생각해볼 만큼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난관은 순전히 이 대마법사의 머리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건데.
머릿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렸다.
Q. 나이가 많은 것은 나쁜 것인가?
나이가 많을 수록 수명이 짧아지는 거니까 싫어할 수도 있겠지.
반면 이 나라는 연장자 우대라는 유교 사상이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사회였다. 즉, 나이가 많을 수록 혜택이 많다. 그렇다면 나이가 많은 걸 좋아할 포유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Q. 강창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싫어하는가?
사람의 생각이란 행동과 말로 나타나는 법이다.
그럼 강창호의 평소 행동과 언행을 살펴보자.
내게 손아랫사람 운운하는 것이나 존댓말을 신경 쓰는 것을 보았을 때, 강창호는 아마 자신이 나이가 많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니 내게 그렇게 연장자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겠지.
부탁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굳이 미움을 살 필요는 없으니...
- 적다고 말할 순 없는 나이시지 않습니까?
이 제1마도사장이 열등한 포유류에게 이렇게 굽히고 들어갔는데 이쯤 되면 입이 귀에 걸려 점집을 알려주겠지.
- 김기려 헌터한테 내가 이런 이미지일 줄은 몰랐네. 이러다 관 뚜껑까지 덮어주시겠어.
이게 아닌가?
- 이거 점점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하고 싶어지긴 하는데 마침 우리 김헌터한테는 나도 궁금한 부분이 많아서 다행이지. 아주 용한 점집으로 소개해줄게. 대신 나도 동행하는 조건으로.
강창호가 내건 조건에 나는 못마땅한 마음이 들어 답은 않고 노란 말풍선을 쳐다보고만 있자, 강창호는 그런 이쪽의 반응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곧이어 메시지를 하나 더 덧붙였다.
- 싫어?
아무리 내가 지구인의 발화에서 맥락을 잘 못 읽어낸다 해도 이건 무슨 뜻인지 아주 정확히 알겠다.
싫으면 물리적으로 싫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 같은데...
- 언제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건 절대 내가 쫀 게 아니다. 그저 저 포악한 포유류와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다.
- 지금 밑으로 내려와. 내가 마침 우연히 김헌터 집 앞을 지나가던 길이었어서.
왠지 오싹한 마음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벽 한 면을 차지하는 전망 좋은 통창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고, 그 앞으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사장, 또 그 앞으로 보이는 도롯가에 익숙한 검은 세단이 주차되어 있다.
사생활 보호 필름이 부착되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세단에 기대어 있던 남자는 내가 통창 가까이 온 것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인다.
저건...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소름이 돋았다.
○
"그... 보통 점집은 상가 밀집 지구라던가 도시에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왜 점점 산으로... "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목을 올라가자니 창문에 나뭇잎들이 쓸리며 짜부라지는 것이 보인다.
이건 산이라고 해도 너무 인적 없는 산인데.
설마 아까 나이 많다고 그래서 날 묻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거야?
나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침착하게 나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아무리 F급 물 몸에서 벗어났다지만 이 몸은 바로 얼마 전 폐가 터졌다가 갓 새살이 돋은 몸. 고등급의 술식을 전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비교적 쉬운 술식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강창호가 덤벼온다면 이 상태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기껏 2차 각성을 마쳐도 이런 처지라니. 대마법사의 영혼이 울었다.
하지만 다행히 강창호에게는 나를 묻을 계획 따위는 없는 듯했다.
"내가 아는 분이 워낙 전통을 중시하는 분이셔서. 왜, 무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있잖아. 산속 깊은 곳에 한옥 짓고 살고... "
알파우리인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아는 무당은 유튜브를 열심히 하고 상가 밀집 지구에 점집이 있는 신세대 무당 뿐이란 말이다.
"그나저나 김헌터는 참 운도 좋지. "
남자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차창에 팔꿈치를 대어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핸들을 조종한다. 전에 운전할 때에는 용의 눈 전용 선글라스를 쓴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는 듯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다.
참고로 나는 운전에 방해되지 않게 마력량을 C급 정도로 눌러놓은 상태였다.
"내가 전에 우리 집이 철강 사업을 했다고 말했었나? "
"네. "
"그럼 얘기가 쉽겠네. "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강창호가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건다.
"원래 사업하는 사람들한테는 믿을 구석이 필요한 법이거든. 그게 사이비가 됐든 무속신앙이 됐든. "
"... "
"특히나 바닷일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그 믿음에 집착하지. "
강창호가 나를 흘끗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인간은 물을 파악할 방법이랄게 없어서. "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강창호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냥 그런 거에라도 매달리는 거야. 이렇게라도 하면 알 수 있을까 싶어서. "
차가 다 쓰러져가는 듯한 우중충한 기운의 한옥 앞에서 멈추고, 강창호가 차의 시동을 껐다.
"그러니까 내 말은... "
길쭉한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용하다고, 이 집. "
버릇처럼 씩 웃는 입꼬리 끝엔 보조개가 걸려있었다.
○
빨간 조명 아래 커다란 황금색 부처상과 험악한 얼굴의 이름 모를 신상神像. 방 안에는 향냄새가 은은히 나고, 작은 반상 앞 나란히 놓인 검은 방석 두 개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부처상 앞 양옆에 나란히 놓인 초 두 개는 반쯤 녹아 촛농이 울퉁불퉁하게 굳어있었다.
강창호가 이곳에 올 때 영 수상쩍게 굴길래 뭔가 함정이라도 설치해놨나 긴장했는데 그런 건 없는 모양이었다. 이 대마법사의 마나 감지 능력에도 걸리는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긴장을 풀 수는 없지. 여차하면 폐를 다시 터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 놈은 꼭 저승길로 끌고 간다.
대마법사의 제 2의 삶을 방해하는 건 그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하는 일인 것이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 살벌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즈음에 방문을 열고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의 지구인이 방에 들어왔다.
"아이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
화려한 원색의 한복을 입은 지구인이 강창호와 내가 앉아있는 책상 맞은편으로 가 앉는다. 아마도 무당인 듯 한 그 지구인은 강창호와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흠칫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당은 '희한하네... ' 하고 중얼거리며 이내 내게 눈을 떼고는 물었다.
"그래, 뭐가 궁금해서 왔어요? "
내가 강창호에게 말해두었던 사유를 의식해 건강 운이 궁금하다 말하자 무당은 다시 내게 생년월일시와 이름자를 묻고는 노트에 이것저것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많이 힘들었겠어? 가족 운도 안 좋고. 교우관계도 그닥... 귀인은 하나 있긴 했는데 스쳐 지나갔고. "
무당이 앞에 말했던 것들은 이미 미디어에 공개된 기려의 과거사와 같은 내용이었다. 뒤에 말한 귀인이라는 건 서형을 뜻하는 듯해 좀 놀라긴 했는데, 스쳐 지나갔다니. 다시 만난 지가 언젠데...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당이 말을 이어갔다.
"재물 운이 그동안 안 좋았네. 돈이 없어서 힘들어. 20대 중반까지 계속 일이 안 풀리다가 그것만 넘으면 일도 좀 풀리고 돈도 들어오는데, 아이고... 안타깝네. "
운수가 풀린다면서 왜 안타깝다 하는 거지?
무당은 '인생이 참 기구해, 젊은 나이에... 쯧쯧. ' 하고 의미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운세는 안 봐주십니까? "
옆에 앉아있던 강창호가 끼어들었다. 본인이 폭행한 피해자의 기구한 사연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살짝 짜증이 나 보였다.
강창호의 말에 무당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운세? 운세를 어떻게 봐. "
그리고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이건 죽은 사람 사주인데. "
"무슨... "
세로로 찢어진 동공의 눈이 무당에게서 내게로 향한다. 사람을 꿰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
한편 내 마음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원시인들의 무속신앙이라는 게 이렇게 정확하다고는 안 했잖아!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라서 저 무당의 입을 막을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그럼 내가 여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는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보고 죽었다니 불쾌하네요.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갑자기 책상 맞은 편에 앉은 무당이 째진 듯 한 음성으로 박장대소한다. 방금 전 옆집 할머니처럼 '김기려'를 위로하던 다정한 음성은 어디 가고 혼이 바뀌기라도 한 듯 무당은 어린 아이의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이봐, 당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히 살아있다'고는 말 못하지. 봐봐. 지금도 그렇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으면서. "
나는 밖으로 나가려 했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소름이 난 탓이다.
내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고?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컴컴한 지붕 깊이 먼지 같은 거미줄이 흩어져있는 낡은 서까래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나가듯이 본 글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당 눈에는 곧 죽을 사람, 죽은 사람의 모습이 거꾸로 보인다고.
저 무당은 죽은 김기려의 혼이 줄곧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그래서 처음에 날 보자마자 희한하다는 소리를 했던 거고.
마도학의 정수를 깨친 나는 영혼이란 죽음 이후에 잡을 새 없이 흩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무당이라는 지구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무당이 한 말은 모두 옳은 이야기이니까.
처음에 무당이 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가 틀린 줄 알았으나, 생각해보니 내가 전달한 사주의 주인은 '김기려'이다. '김기려'를 기준으로 생각해봤을 때 귀인이 서형이라고 가정하면 서형은... 스쳐 지나간 게 맞지. '김기려'는 서형을 다시 만나기 전에 죽었으니까.
생각하면 할 수록 저 무당이라는 작자를 피해야겠다는 결론만이 나온다. 내 비밀이 어디까지 파헤쳐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문을 향해 멈춰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강창호가 나를 붙잡기 전까진.
"김기려 앉아. "
내가 뒤를 돌아 강창호를 향해 눈썹을 살풋 찌푸리며 답한다.
"강창호씨는 저딴 허무맹랑한 말을 믿습니까? "
"믿음과는 별개로 흥미롭긴 하잖아. 난 지금 되게 재밌는데 넌 아닌가 봐? "
"... "
"그렇게 과민 반응하면 진짜 의심스럽잖아. "
점집의 붉은 불빛에 언뜻 검게 보이는 찢어진 동공의 눈이 번들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네가 진짜 죽었는데 살아있는 척을 하는 건지.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먹잇감을 안심시키듯 눈꼬리가 휘어지며 습관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난 그 허무맹랑한 점사 좀 더 들어야겠는데 김기려 헌터는 어떻게 생각하나? "
○
나는 왜 아직도 강창호와 한 공간에 있는가.
점사를 다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이었다. 맘 같아서는 태워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홀로 서울에 올라오고 싶었지만 강창호의 차 외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갈 만한 교통수단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런 점사를 들은 것 치고는 강창호의 반응이 온건하기도 했고.
또다시 유스티티아 앞에 놓여 파란 가시 고슴도치가 되는 건가 했는데.
말 없이 운전하는 강창호를 힐끔 바라보며 아까 들었던 점사를 떠올렸다.
뭐랬더라. 무당의 말로는 이 몸의 주인이 아사로 죽었다고 했다.
사람이 고프고 음식이 고파서 죽었다고.
다시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나는 눈꺼풀 위를 살짝 문질렀다.
뭐 이리 쓸데없이 정확한 건지.
남의 개인정보를 멋대로 까발린 그 '신'이란 작자와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열렬하게 쳐다보셔서 운전에 집중이 안 되는데. "
강창호의 말에 나는 무심코 강창호에게로 붙박였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의외인가? 내가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한 게. "
그럼 당연히 의외지.
지금까지 수상하단 이유로 내게 해왔던 짓들을 떠올려봐라. 안와 골절부터 목에 푸른 송곳을 박아댄 것까지.
참 골고루도 해 먹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저딴 놈 하나 상대하자고 김기려의 몸에는 내가 신세를 많이 졌군.
"전에 약속했다시피 네가 인간을 해칠 의향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한 나는 널 건드릴 생각이 없어. "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다니까. 대체 왜 날 사람 피보는 걸 좋아하는 사이코로 생각하는 건지를 모르겠네.
강창호의 말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진심으로 그걸 왜 모르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아무튼,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무당이라도 점사가 100% 맞는 게 아닌 건 나도 알고 있고 그걸로 널 트집 잡을 생각은 없어. 그런데도 그 점사를 들어주고 있었던 건 나도 궁금은 하니까. "
기러기의 끼룩거리는 울음소리,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아, 집이다.
익숙한 바다 풍경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강창호는 바닷가 앞에 차를 대고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그냥 한 사람 호기심 해결에 도움 좀 줬다, 그렇게 생각해. 이런 웃기지도 않을 방법을 쓰게 만든 것도 자기 얘기는 일절 않는 누구씨 때문이잖아. "
그게 왜 내 탓이냐고 말하고 싶은 게 아주 굴뚝같은 심정이었지만 참았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으니.
"내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어요? "
내 물음에 의아한 감정을 띤 강창호의 눈이 나를 향하자, 강창호와 나의 시선이 맞물린다.
"그럼 알게 해드려야지. "
나의 눈꼬리가 즐거운 기색을 담고 드물게 휘어졌다.
나라고 조수석에 대책 없이 멍하니 앉아있던 건 아니라서.
차안의 마나가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강창호가 그걸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
벽 하나 없이 흰 바닥만이 끝을 모르고 뻗어있는 곳. 이곳은 나의 심상 세계였다.
이전에 안윤승과 함께 아쿠아리움에 가서 습격을 당했을 때에 습격자 중 한 사람이 나를 그의 심상 세계에 끌어들였지 않았는가.
그것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내 심상 세계에 강창호를 불러들인 것 뿐.
물론 심상 세계란 까딱했다간 그 주인이 되레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지만, 심상 세계에서는 내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위험해질 일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밖은 신체적 한계로 인해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고로 강창호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거였다.
겸사겸사 그 잘난 호기심도 충족시켜드릴 겸.
[안녕, 강창호.]
"...김기려? "
[응.]
강창호의 길쭉한 동공이 경외로 둥글어진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를 마주하면 어떻게 되는가.
강창호는 그 답을 지금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투명한 막으로 감싸진 초록색 점액질 몸체에 그 속을 떠다니는 세 개의 붉은 눈알.
강창호는 그 몸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늘 여유롭던 남자에게 여유가 눈 녹듯 사라지고, 식은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자신감에 차 있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몸에는 힘이 풀린다.
거대한 포식자 앞에 선 나약한 피식자의 꼴이었다.
이런 감각을 받았던 것이 얼마 만이더라.
강창호는 기억을 헤집다 문득 자신의 초라한 꼴에 헛웃음을 흘렸다.
감당 못할 답을 찾아 헤매인 인간의 결말이었다.
[이게 내 본 모습이야. 외계인이지. 어때 궁금증이 좀 해결됐나?]
인간이란 종은 항상 같은 실수를 했다.
진실을 탐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무릎을 꿇는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탐하듯.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인류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던가.
강창호는, 도대체 어떤 답을 찾아서 헤맸던 것인가.
"외계인... 외계인이라고. 난 기껏해야 던전 제작자 정도가 내 상상력의 끝이었는데 이거 한 방 먹었네? "
그의 촉수 끄트머리를 본 것 만으로도 뇌가 익을 듯이 아려왔다. 강창호는 심상 세계 안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아니니 그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창호야. 그럼 이제 네 궁금증은 해소가 된 거지?]
감히 사람의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외계인의 이질적인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강창호는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앞에 똑바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를 느꼈기에.
[그럼 이제 다 잊어버리자. 너는 오늘 너 혼자서 집에 있었던거야. 항상 그래왔듯이, 오늘도.]
외계인의 말을 끝으로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내렸다.
암전이었다.
○
며칠 후, 한적하고 아늑한 내 집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띵동, 띵동, 띵동-
벨이 울리다 못해 이제는 거의 띵띵띵- 이 수준으로 들린다. 누가 자꾸...
짜증스러운 마음에 체인을 걸고 문을 열자 밖에는 익숙한 거구의 남자가 서 있다. 청자색 체모와 위아래로 찢어진 동공을 지닌 돌연변이 각성자. 강창호.
"이거 열지? 할 말이 있는데. "
"거기서 하시죠. "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진심으로 이런 게 날 막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
강창호가 문 사이에 걸린 체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긴다. 웃는 표정으로 애써 감췄다고는 하지만 눈에 살기가 등등한 게 왠지 불안해서 열어주기 싫은데... 하지만 그 말대로 체인이 저 남자를 막을 수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수리비라도 아끼기 위해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잠시 닫고, 체인을 풀고, 다시 연다.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강창호가 문을 홱 잡아채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몸이 힘없이 끌려 나오고, 강창호가 내 손목을 그 커다란 손안에 쥐었다. 손목이 그의 손아귀에 아프도록 죄어온다.
"저번 주에 나는 계속 집에 혼자 있었는데, 너랑 어디를 갔다 온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자꾸 발견이 되네? 이 기분 나쁜 상황은 뭘까. 너라면 알 것 같은데. "
그 습관적인 비즈니스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남자는 짜증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분노가 높은 체온을 지닌 그의 손을 타고 내 손목에 오롯이 느껴진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
'김기려'를 바라보는 강창호의 녹빛 눈에 혼란이 일렁였다. 진실을 탐하는 자는 거짓에 굴하지 않으니-
인간이란 종은 항상 같은 실수를 했다.
진실을 탐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무릎을 꿇는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탐하듯.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인류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던가.
강창호는, 도대체 어떤 답을 찾아서 헤매는 것인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