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창호기려]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세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본문은 전체 다 열람 가능하며 결제창 아래는 긴 외전과 후기입니다.

퇴고를 안 한 글이라 지속적으로 수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량 약 19000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팔복(八福), 윤동주

잘 짜인 어두운 갈색의 마호가니 책장 앞으로 익숙한 인영이 서 있다. 자연적으로 청잣빛이 된 이 집 주인의 머리칼과 달리 순수하게 인공적인 방식으로 금빛이 된 그의 머리칼, 평소와 달리 한결 풀어진 차림의 남색 잠옷.

김기려는 책장에서 오래된 LP를 집어 들고 그 종이 포장지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이 집 주인의 LP를 마음대로 골라잡아 재생하는 것은 그의 최근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김기려는 LP 표지에 새겨진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아래 꼬부랑글자를 흐린 눈으로 읽어보았다.

"라...체? 마니..높... "

김기려는 영어를 읽는 것은 제 능력 밖임을 깔끔히 인정하고 이 뭔지 모를 정체의 LP를 플레이어에 놓고 바늘을 LP판 위로 조심히 옮겼다.

강창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 너머로 김기려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은 LP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음악이 재생된다.

피아노음이 웅장하게 내려치며 평일 오후의 햇살 따스한 고요를 깨뜨린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멜로디 연주. 혹자는 이 곡을 두고 러시아의 드넓은 설원에서 별을 찾는 것 같은 악상이 떠오른다 했던가. c minor 에서 C Major 로 가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설원에서 별이라는 희망을 찾는 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실제로 작곡가 본인도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처참한 실패 이후 극심한 우울증을 겪다가 가까스로 회복하고 쓴 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그 희망을 향한 절박한 매달림이 더욱 가슴을 울렸다.

2악장의 마무리 즈음, 오케스트라의 뒤에서 머물던 피아노가 앞으로 나오며 클라이막스에 다다른다.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 같이-

하지만 강창호의 감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강창호가 김기려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지는 광경을 언뜻 본 듯했기 때문이다.

강창호가 잘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김기려의 눈물을 깨닫고 그를 다시 제대로 보려고 하니 김기려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노래 좋네요. 제목이 뭐예요? "

"...거기 표지에 써있잖아. "

"못 읽겠어서 그래요. 사람들이 다 댁처럼 영어를 잘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

김기려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강창호에게 가벼운 핀잔을 준다. 그런 김기려의 여상한 태도에 강창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고마워요. "

흥미로운 얼굴로 LP의 표지를 훑어보는 김기려를 보며 강창호는 생각했다.

김기려가 이상하다고.

요즘 들어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해지기는 했지만 오후는 아직 완연한 여름 날씨다. 나무들도 푸릇푸릇하고. 입추는 이미 지난 지 오래건만 때 모르는 태양열의 뜨거운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나는 강창호의 수영장에 둥둥 떠 있었다.

수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헤엄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물이 흐름을 따라 표류하는 것.

한마디로, 시체처럼 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맨 처음에는 나의 이런 행각을 보고 강창호가 기겁해서는 옷을 다 적시면서 수영장에 들어와 나를 건져냈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이제는 이런 내 모습에도 잘 적응해 저기 썬베드에 나른하게 늘어져 태블릿이나 하고 있다. 한 번쯤은 돌아볼 만도 한데. 배은망덕한 포유류.

물과 공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면의 감촉은 꼭 얇은 막을 만지는 것 같았다. 물과 공기는 서로 다른 차원이라도 되는 듯 각기 다른 세계를 품에 안고 있었고, 나는 그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을 즐겼다. 

뭍의 세계에서는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물 아래에서는 뭍에서 들을 수 없는 물의 흐름이 들린다. 수영장을 반쯤 가리는 나무 그늘에 눈부신 햇빛이 조각 나 쏟아지고, 끝 무렵의 여름 바람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나는 뭍과 물, 그 사이의 수면에 누워 흘러가며 자체적으로 내 상태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이거, 우울증이네.

대마법사가 웬 우울증이냐, 하면 우울증이 의지의 문제로 생긴다거나 단순히 우울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닌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우울증은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감소로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러니까, 이 몸이 딱 그 상태가 된 것이다. 각성자가 암도 걸리는 판국에 우울증이라고 걸리지 말란 법이 없었으니.

뇌 쪽은 복잡해서 건드리기 싫었는데...

하여튼, 그런고로 나는 지금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툭하면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죄어오고.

모든 걸 떠나 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든달까.

얼마 전, LP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감정이 북받쳐 무심코 눈물을 흘린 뒤로 강창호의 행동이 평소보다는 몇 배로 조심스러워진 것을 보아하면 그도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챈 듯싶다.

봐라, 지금도 저기 태블릿 뒤에서 나를 힐끔대고 있는 꼴을.

그 강창호가 눈치라니.

여러모로 편리하기는 하지만 또 미안하기도 하다. 안 그래도 얹혀사는 판국에 집주인한테 눈치까지 보게 하고... 나도 내가 답답한 심정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눈가에 닿아온 햇빛에 한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린다. 손 틈새로 비어져나오는 햇빛에 손가락 사이사이가 빨갛게 보인다.

그렇게 나의 질척질척한 검은 우울에 의식을 맡겨 시간을 흘려보내고, 내 몸을 물에 흘려보낼 때에 귓가에 나무 데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창호가 썬베드에서 일어나 수영장 모서리 쪽에 쭈그려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예의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입을 걸고 묻는다. 볼우물이 보기 좋게 파인 채였다.

"김기려, 바다에 갈까. "

웃는 표정의 그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 안에 혼재되어있는 미미한 불안함이. 그는 대체 무엇을 불안해 하는 것일까.

"갑자기요. "

"갑자기 가는 여행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바다 좋아하지 않았어? "

그의 말로는 동해 쪽에 자신 소유의 해수욕장이 하나 있다고 한다. 이곳은 아직도 덥지만 동해는 시원할 거라고.

물에서 몸을 일으켜 물 속에 똑바로 선 채로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의 말이 끝나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으로 그의 작은 불안이 잠재워질 수 있다면-

"그래요. 가죠, 바다 여행. "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자 시야가 맑게 밝아온다. 풀 안에 서 있는 내가 수영장 모서리에 쭈그려 앉은 강창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의 높이차로 강창호의 뒤에서 비춰오는 태양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그날 왜 그렇게 강창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던지, 지금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늘 날씨가 좋아. "

나는 침대 위에서 꿈지럭거리며 게으름을 피웠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남자의 말에 눈꼽을 떼고는 가까스로 눈을 떠 바깥을 바라보았다. 바닷가의 따사로운 햇살이 방바닥을 따끈히 데우고 있었다. 하늘에 조그마한 구름이 간간히 떠 있는 맑은 날이었다. 진짜로 그의 말대로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그렇네요. "

"오늘은 밖에 나가서 놀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

하루는 구름이 너무 많아서, 하루는 구름이 너무 없어서, 하루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하루는 바람이 너무 안 불어서 라는 이유로 그의 제안을 거절해왔던 나날들이었다. 

오늘은 그의 제안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기껏 날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마지막 날이니 한 번쯤은 밖에 나가긴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럴까요. "

강창호가 놀란 듯 일순 동공이 동그래진다.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속으로 살짝 웃으며, 또 조금 미안해하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나가죠. "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밝아진 것 같다면, 그건 너무 자의식 과잉일까.

강창호는 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에 들어가면 축축하고 찝찝해서 기분 나쁘다고. 예민한 그의 천성을 알고 있다면 납득할만한 이유였다.

그 때문에 집에 있는 수영장도, 자신 소유의 해변도 그저 관상용으로만 놔둘 뿐이었는데, 그의 인생에 내가 들이닥쳐 온 순간부터 그는 팔자에도 없는 물가를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변의 커다란 파라솔 아래에 의자를 끌고 와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책을 읽고, 나는 분홍색 홍학 모양 튜브에 몸을 끼워 넣은 채로 바다를 떠다닌다. 바다 위에서 멍하니 본 하늘의 모습은 꼭 소다 맛 아이스크림이 녹은 것처럼 생겼다.

해변은 사유지라는 말이 진짜였는지 사람 하나 돌아다니지 않았고, 그렇게 매일같이 한적한 한 때였다.

저 멀리 물가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느새 의자에 책을 덮어놓고 물가로 온 강창호가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온다. 그의 옷이 물에 젖는 것은 아랑곳 않는 눈치였다. 

분명 그는 물이 싫다고, 축축하고 찝찝하다 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는 빠른 속도이긴 했으나 물의 저항 때문에 강창호가 뭍에서 걷는 속도보다는 현저히 느렸다. 잠시 후, 그가 어느 정도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나는 그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강창호는 내 손목을 잡고 뭍에 닿을 때까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갑자기 물에서 뭍으로 나오자 한기가 일어 몸을 살짝 떨었다. 그가 내게 뒤를 보이고 한숨을 푹 쉬며 마른세수를 하더니 나를 돌아본다. 그러며 대뜸 화를 내는 것이다.

"너 미쳤어? "

"무슨... "

갑자기 날아온 힐난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못 봤다는 변명은 안 했으면 좋겠네. 네 옆에 그만한 해파리를 못 봤다고 하는 건... 변명밖에 안 돼. 너도 알지? "

나는 바다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방금 전까지 내가 떠다니던 바다에는 집채만 한 빨간 해파리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진짜로 못 봤는데.

하지만 그가 이미 그것을 변명으로 규정해버린 이상 내 진심은 모두 변명이 되고 말 테였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를 택했다.

나는 강창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화나는 듯, 짜증 나는 듯, 걱정되는 듯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김기려, 난 이제 네가 지쳐. 대체 언제까지 우울할 건데? 해파리를 봐도 피하기 싫을 만큼 우울해? "

그러면서 기침처럼, 숨기지 못한 진심처럼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난 내가 널 언제까지 맞춰줘야 하는지 모르겠어. "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여태껏 그가 내게 맞춰'준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강창호는 그런 내 반응을 보지도 않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지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말한 건 말실수였어. 난 해변 좀 더 걷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쉬어. 물에 젖어서 추워 보이네. "

본인도 바다에 빠져 온몸이 젖은 주제에 파라솔 아래에 둔 커다란 비치타올을 들고 와 내 몸을 감쌌다. 그가 내게서 뒤를 돌아 해변을 걸어가고, 나는 이 다정한 모습에 감동을 느껴야 할지 방금 전의 말에 서러움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홀로 남겨졌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여행의 마지막 날이 끝이 났다.

모든 걸 떠나 살고 싶다라.

그럼 그렇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라고 해서 강창호의 그 시건방진 태도에 가만히 있을 만큼 우울하지는 않다 이거야.

내 폐병으로 전전긍긍하는 주변인들도, 게이트만 터졌다 하면 나를 불러제끼는 정부도, 싸가지 없는 강창호도 다 떠나고 싶다. 이젠 다 놔버리고 싶어.

생명체란 무릇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기 마련 아닌가.

나는 그 발상에서 착안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은퇴를 치르기로 맘 먹었다.

설마 사람이 죽어있는데 일을 시키진 못하겠지.

그러니까 이 모든 사태는 한 외계인이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한 알파우리와 달리 지구에서 죽음이란 개념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에서 촉발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 사태가 발생시킨 어마어마한 반향에 비하자면 실로 어이없는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내 모습을 본 딴 더미 인형을 만들어서 내가 신세 지고 있는 강창호의 손님방 침대에 눕혀두었다. 진짜 '김기려'와 머리카락 개수, 모공 크기, 심지어 마력량까지 동일하게 구현해낸 정교한 인형이다. 이 정도면 S급이 아니라 S급 할아버지가 와도 이 인형이 '김기려'가 아닌 것을 알아챌 수 없을 터였다.

마침 폐병이라는 적당한 구실이 있으니 인형의 폐를 살짝만 망가뜨려 주면-

짜잔! 폐병 때문에 죽은 김기려 완성이었다.

체온도 적당히 죽은 사람처럼 낮춰두었다. 심장 박동과 동공 반사, 생명 반응에 관련된 다양한 지표들을 잘 조정해두고, 그렇게 나는 이 집을 떠났다.

잘 죽어라 '김기려'!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삶을 산다!

시야를 왜곡하는 아이템을 착용하고서 나는 자유를 맘껏 만끽하고 있었다. 강창호의 집에서 나온 후 처음 내가 향한 곳은 스위스였다. 내 계좌에 든 돈을 스위스에 있는 가상계좌로 빼돌려놓은 탓이다. 간 김에 관광도 좀 하고.

언어가 다른 탓에 관광을 하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다. 듣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픽시사에서 나온 번역기를 끼고 있었으니까. 다만 말하는 것과 읽는 것이 조금 불편했을 뿐이다. 음식점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호프집이고, 분명 퐁듀를 주문했는데 뭔 맥앤치즈 비슷한 게 나온다.

대충 이것도 치즈니까... 하고 맥앤치즈 비슷한 무언가를 씹고 있자니 한국에 버리고 온 누군가가 슬금슬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창호가 있었다면 언어 걱정은 없었을 텐데. '

그는 유럽계 쿼터 혼혈이었으니까. 학창 시절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하고. 그가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는지는 잘 몰라도 영어만 하더라도 나보다는 나으니 둘이 왔더라면 훨씬...

미쳤지. 그런 말을 들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생각을 흐트러뜨리려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한국에 귀국해 렌터카를 빌렸다. 역시 돈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김도원'이라는 명의로 살고 있었으니.

한국에 와 기사를 보니, 이쯤 되면 김기려의 사망 소식이 올라와 있겠거니 했건만 그 비슷한 소식은 찌라시 기사에도 한 건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강창호가 아직 김기려의 사망 신고를 안 했나?

의아한 일이었다.

생각을 다른 데에 팔면서 운전을 하고 있자니 사고가 났다. 신호등 앞에서 앞 차의 뒤 범퍼와 살짝 부딪힌 것이다. 정말 아주 살-짝 부딪힌 것인데, 앞 차에서 옷 위로 맨살 내놓은 부위는 온통 이레즈미 문신으로 떡칠을 해놓은 몸집 좋은 남자가 뒷목을 잡으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기려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돈 뜯어내려고 작정하는 거라고. 저 사람은 좋게 좋게 넘어갈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고.

갑자기 강창호가 그리워졌다.

이전에 강창호와 있었을 때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던 적 있었기에.

그날은 내가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시내 주행을 하던 날이었는데, 앞 차와 살짝 접촉 사고가 있었다. 그날도 저 비슷한 남자가 앞 차에서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내가 강창호한테 뭐랬더라...

"강창호씨. 빨리 소매 걷어요. 저 남자가 운전석으로 나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나가서 상대하라고요. 

"...김기려. 네가 잠깐 잊은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너도 나랑 똑같은 S급이야. "

"당신 인상이 나보다 더 험악하니까 상대하는데 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

"허. "

그러고서 그날은 강창호가 차 밖으로 나가 남자를 상대했었지. 차 안에 있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강창호가 미소 짓는 얼굴로 몇 마디를 하니 남자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주눅이 들더니 강창호가 지갑에서 꺼낸 종이 몇장을 손에 쥐여주자 재빠르게 앞 차 운전석에 다시 타 누구보다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지금은... 상황을 대신 해결해줄 강창호가 없군.

나는 운전석의 창문을 신명 나게 두드리며 "야! 운전자 내리라고!" 하는 남자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강창호의 빈자리가 꽤 큰 것 같다고.

말 좀 밉게 했다고 그렇게 버리는 게 아니었어...

나는 강창호와 맨 마지막으로 갔던 강창호의 사유지라는 해변으로 향했다. 앞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차를 이끌고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걸어 올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묵직한 철문이 길을 가로막고, 그 중앙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재질로 된 경고문이 이 앞으로 이어지는 땅에는 주인이 있는 사유지임을 알린다. 나는 그 글을 무시하고 철문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도둑이라고 오해하기 좋을 모습이군.

철문의 반대편에 착지한 나는 손을 털고 그대로 길을 따라 다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 양옆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이 보인다.

바다였다.

짠내음이 코 끝에 스치고, 기러기가 끼룩거리고,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조금은 쌀쌀해진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이곳에서 강창호를 마주할 확률은...

없지.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강창호 앞에 '김기려'의 시체를 놔둔 게 누군데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파우리인이라서 그런가 양심도 없다고 스스로를 힐난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양심도 없다고 나를 비난해도 좋다. 이 이후에는 이럴 일이 없을 테니. 

나는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시각 교란 장치를 해제했다.

나는 파도가 뭍에 넘실대는 곳까지 내려가 그 경계를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바닷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씨를 보아하니 오늘이 바닷물에서 놀 수 있는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서.

바닷물이 찼다.

구름이 뿌옇게 태양을 가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몸이 오슬오슬 떨려왔다.

날씨가 이래서 해파리도 없겠네.

내 꼴이 짜증 날 정도로 우스웠다.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게 바닷물 속에서 한참을 미친 듯이 웃다가 눈물을 흘렸다.

삶이 뭐 이따위인지.

버리고자 한 것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고, 후회하고, 또 눈물 흘리고...

어느새 바닷물은 허리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다리가 감각이 마비되어 온다.

나는 그만 돌아가야겠다 생각해 몸을 돌리려고 하던 때에 허리에 누군가의 체온이 닿아온다.

"미안해. "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껴안은 탓에 뒤를 돌아 정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 머리 살짝 위쪽쯤에서 들리는 떨리는 호흡과 익숙한 낮은 목소리. 강창호였다.

"가지 마, 제발. "

이 남자에게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들어보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끓어오르는 목소리. 강창호의 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지은 죄가 있었기에 "내가 미안하죠. " 하고 답하려다가 다른 뜻으로 와전이 될까 염려되어 다른 말로 그 답을 대신했다.

"라흐마니노프, 좋아하세요? "

엉뚱한 물음이었다. 이제는 꽤 오래된 이전의 LP판의 이름을 묻고 그가 답해주었던 기억에서 촉발된. '라흐마니노프' 나는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노라며 그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는 이런 내 물음의 뜻을 아는 듯이 다정하게 답한다.

"...응, 좋아하지. "

"그럼 우리 그거 들으러 가요. "

"그래. "

구름이 당장 눈앞의 햇빛을 가려도 태양이 하늘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짓말로 기워낸 진실이 영원히 묻혀있지 않듯.

만고불변의 진리란 그런 것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