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착헌] 불쾌한 골짜기 上
인간의 탈을 쓴 당신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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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약 17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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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분명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나니, 익숙함 안의 낯섦이란 미지의 공포라.
섬뜩함 내지는 오싹함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게이트 속의 집채만한 괴물도 아니요, 하늘에 떨어지는 거대한 폭탄도 아니다. 그것들은 극심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되 불쾌함이란 감정은 묻히게 만들었으니.
공포와 불쾌함이란 감정이 동시에 들기 위해선 그것보단 좀 더 사소한 것들이 필요했다. 평소와 한 끝 정도 뒤틀린 일상이라거나 그런 것들.
인간의 오감이란 매우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작용하기에 평범함이 살짝이라도 뒤틀리면 그 미묘한 차이에서 공포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는 초상화를 보는 것이라거나 인형의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인간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띤 대상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낀다. 아예 다르거나 아예 똑같으면 모를까 인간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차이에 더욱 집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불쾌한 골짜기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에 정착한 한 외계인은 지금 매우 극심한 불쾌한 골짜기를 겪고있는 중이었다.
워낙 바쁜 탓에 밖에서는 좀처럼 걷는 모습을 보기 힘든 선우연은 오늘도 저 멀리에서부터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B급 헌터임을 증명하듯 그 먼 거리를 수 초만에 달려온 선우연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많이 기다리셨죠. "
"아뇨, 저도 방금 왔습니다. "
실은 30분 전에 와서 기다렸지만 이 정도의 지구식 인사치레는 이제 나도 알았다. 물론 인사는 눈을 보고하는 것이란 기본적인 지식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생략하기로 했다.
선우연은 인사를 건넨 상대가 자신은 안 바라보고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닦은지 오래되었는지 부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창 너머로 선반 위에 일렬종대로 늘어선 인형들이 보인다. 여기가 어린이집이었으니 아마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용도겠거니 싶었는데, 상대가 왜 저걸 저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도통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뭘 그렇게― "
보고계세요, 라는 말은 미처 입 밖에서 완성되지 못했다. 일렬로 늘어선 인형들 가운데에서 외눈박이 초록색 외계인 인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게 아마 몬스터 주식회사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온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설마 저걸 바라보고 있는 건가. 선우연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외계인 인형을 바라보고 있는 진짜 외계인을 불안한 동공으로 쳐다보았다.
"저거요, 좀 기괴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
여상한 투의 물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선우연은 내 물음에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대답이라도 하면 심기가 거슬린 외계인이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물었던 것도 아니기에 말을 이어갔다.
"지구인들은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들 중심이라 외계인도 눈 두개 팔 두개 다리 두개일거라 생각하는 건가 했더니 눈 하나짜리도 있네요? 눈 두개짜리 외계인은 인간같고 귀여워서 괜찮았는데 얘는 나랑 애매하게 닮아서 영 징그럽기만 하고."
제가 생후 30일 쯤에 딱 저만했거든요. 그때는 눈도 하나였고, 라며 선우연이 원하지 않는 정보를 덧붙인다.
"나도 나름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외계인이라고요. 눈알이야 빨간색일 수도 있는거고 하얀색일 수도 있는거고, 다 괜찮은데 입이 저기 달린 건 좀. "
이런 게 어린이집에 있어도 되는건가 애들 정서에 악영향만 끼칠 것 같은데, 하고 내가 중얼거렸더니 선우연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내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당신이다.' 라는 듯이.
지구의 친구를 놀라게 할 만한 발언은 이쯤에서 마치기로 했다. 타향에서 어떻게 얻은 소중한 친구인데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마침 선우연에게 은혜를 갚으려 가는 길이기도 했고. 나는 어린이집 앞에서 걸음을 옮기며 주제를 바꿔 대화를 이어나갔다.
"강남에 A급 레드게이트가 나타났다고 하셨죠. "
그 금싸라기 땅에. 지금쯤 저들 건물이 무너질까 덜덜 떨고있는 대기업이 몇이나 되려나. 기왕이면 게이트 처리 후에 감사비로 포상금이라도 넉넉하니 챙겨주면 좋을텐데.
이런 외계인의 음험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연은 아까 전의 외계인 드립에서 얻은 정신적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간신히 대답했다.
"아, 네. 사실 기려씨가 와줘야 할 만한 등급의 게이트는 아니긴 한데 하필이면 이게 [불꽃나방]이라는 화속성 비행형 몬스터의 게이트인걸로 판단이 되어서요. 인구 밀집 지역인데다 주변에 건물도 많아서 빨리 게이트를 처리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는데, 떠오르는게 기려씨밖에 없더라고요. "
선우연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다가 '사실 기려씨가 협회 요청을 안 들어줬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 하고 작게 덧붙인다.
실은 그간 선우연의 부탁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이 지구인이 생각하듯 그런 선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선우연은 부탁을 잘 해오지 않는 자립적인 성격의 인간인데다가 은혜를 입으면 잊지 않는 이타적인 부류였기에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 이득일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이 지구인에게는 지구 적응과 관련해서 여러모로 빚진 것도 있고, 앞으로도 빚질 생각이니 채무 관리는 주기적으로 해주는 게 낫겠지.
당장 며칠 전만 생각해도 내 앞으로 매겨진 400억이란 세금을 선우연 덕에 알 수 있었지 않았는가. 아, 갑자기 눈에서 누액이 분비될 것 같기도 하고.
일. 일을 열심히 하자.
"게이트 진행 상황은요? "
"제가 마지막으로 보고 왔을 땐 아직 하위급 몬스터들만 몇마리 나오고 있던 상태였어요. 일단 헌협 쪽에서 선제 대응을 하고 있기는 한데, 보스가 나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저도 잘... "
"빨리 가야겠네요. "
이동 아이템이 없는 뚜벅이 각성자는 그저 발을 빠르게 놀리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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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하도록 우뚝 솟은 은색 빌딩들을 가로지르는 왕복 8차선의 도로. 그 가운데에 형형한 붉은 빛을 뿌려대는 레드 게이트가 입을 벌리고 서있다.
이미 대피령이 내려져 텅 빈 도로 위는 무서울 정도로 널찍하고 적막해 한차례 몬스터 웨이브가 지나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로 가득 찬다.
그래도, 조금 뒤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와줄 터이니. 이 사람들은 그 희망만으로 여태까지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게이트가 또다시 공명하듯 우웅- 진동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전운이 맴돌았다. 게이트가 진동하는 양상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로 큰 게 하나 터지려는 것 같은데... 팀장의 지시에 따라 대열을 정리하고, 도구를 가다듬는다. 양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처럼 날 선 긴장감이 도로 위에 내려앉았다.
그때, 그 긴장감을 깨뜨리듯 뒤에서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온다.
"많이 늦었나요? "
흡연으로 인해 상한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대열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만큼 그는 이 상황에서 확실한 구명줄이었던 것이다. 그의 존재만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살았다, 라는 안도감이 퍼졌다.
한편, 나는 거의 사랑에 빠질 듯이 쳐다보는 시선들을 익숙하게 흘려보내며 게이트를 쓱 훑어보았다.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곧 보스가 나올 것 같은데. 딱 타이밍 맞춰서 왔네.
나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협회 직원들을 뒤로 물리고 게이트 앞에 홀로 섰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다. 긴장을 풀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공기와 함께 폐를 순환하는 마나를 느끼는 것이다.
마나가 숨과 함께 들어오고, 내 안에 재정렬하는 그 일련의 흐름들. 난 이 감각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 안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된다라는 확신, 혹은 오만함. 한 학문의 정점에 올라 본 자의 이유있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흉흉한 붉은빛을 내뿜던 게이트가 드디어 꾸물럭 대며 몬스터들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협회의 직원들은 모두 뒤쪽으로 물러나고, 나는 이 널찍한 도로 위에 홀로 남겨져 내 몸의 2, 3배는 될 듯 한 거대한 적과 마주한다. 언뜻 본다면 부당할 정도로 기울어진 싸움.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 사냥의 주도권은 나의 것일테니.
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이 사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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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몬스터가 바닥에 쓰러지고, 게이트가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선우연은 평가했다. 압도적이다 못해 예술적인 사냥이었다, 라고.
그런 생각은 협회 직원들도 마찬가지인지, 평소 같으면 서로의 노고를 도닥이며 수고했다 왁자지껄 떠들었을 타이밍인데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적막이 내려앉은 도로 위,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남성은 결벽적인 손짓으로 사냥할 때 튄 약간의 재와 물기를 털어내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쪽으로 돌아서 다가오는 모습은 뒤에 쌓인 몬스터들의 사체만 아니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를만큼 깔끔한 행색이다.
고독한 천재, 그런 유치한 말이 지독하리만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선우연은 사냥꾼으로서, 또 지구인으로서 그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동시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타적인 사람이었기에.
사냥 중 방출했던 거대한 양의 마나를 다시 내리누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누가 저 사람을 이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끔 엉뚱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게이트 공략 정산금은 책정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
지금처럼.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기예에 가까운 사냥 실력을 뽐내던 사람이 뜬금없이 정산금 타령을 하니 긴장이 확 풀어진다. 저런 허술한 모습 때문에 어쩌면 저 사람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복잡한 머릿속과는 별개로 선우연은 익숙하게 메뉴얼을 읊어주었다.
"다른 게이트 공략과 마찬가지로 정산금은 기여도에 따라서 분배하되 협회 소속 헌터 앞으로 책정되는 정산금은 협회에 귀속되는게 원칙이에요. 근데 아마 이번 같은 경우에는 수고비 겸 해서 100% 다 기려씨 앞으로 책정되지 않을까 싶네요. "
남자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서는 선우연을 향해 씩 웃어보이는데, 웃는 얼굴에 이런 말 하기 참 미안하긴 하지만 선우연은 내심 '앞으로는 좋은 일 있어도 웬만하면 웃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알려드려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두 입꼬리가 양 옆으로 당겨지고 광대가 올라갔으니 확실히 웃는 표정은 맞았는데 뭐랄까... 야비해 보인달까 음흉해 보인달까.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인데 그걸 중화시킨답시고 그런 식으로 웃고 다니면 오해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기 딱 좋을 터였다.
선우연은 어색하게 마주 웃어보이고는 최근 떠오르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얼마 전에 또 [러시안룰렛] 게이트가 중국에서 나타났다던데... "
EX급 게이트 [러시안룰렛].
이 게이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건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 게이트의 생환률은 항상 83퍼센트 였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6명이 들어가서 무조건 5명만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러시안룰렛처럼.
이 게이트의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이게 끝이 아니었다. 보통의 게이트가 출입에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이 게이트는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을 미리 지정해놓는데, 그 게이트가 나타난 곳의 일정 반경 이내에 있는 사람 중 각성치가 가장 높은 6명이 그 대상이었다. 게이트에 의해 지목 당한 사람은 팔에 문양이 나타남으로써 알 수 있고, 지목된 사람이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B급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점점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방출되게 된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아까운 인재를 하나씩 잃는 셈이니 여러모로 골칫거리인 상황. 하지만 '6명이 들어가서 5명이 나온다'라는 명제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자들의 공통된 증언에 의하면 '분명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출구를 넘기 전까지 6명 모두 함께 있었는데 출구를 넘고 나니 5명이었다. ' 라고 했으니까. 인류의 한계를 넘었다던 고위급 각성자들도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게이트는 전염이라도 되듯 처음은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럽 전체를 집어삼키고, 아시아 대륙을 넘어서 이제는 중국에 이르기까지 점점 퍼져나갔다. 그러니까, 다음은 한국이 그 타겟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선우연은 이것을 걱정한 것이리라.
"우리가 항상 가능한 것과만 싸워온 건 아니니까요. 여태까지 그래왔듯 잘 해결할 수 있을거예요.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느 골목 사이로 살려주세요! 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뭐지. 게이트 공략 도중에 빠져나간 몬스터가 있었나?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분명 다 대피를 시켰을텐데...
더이상의 판단은 뒤로 미루고 일단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좁은 골목 새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쭈그려 앉아있는 인간의 검은 형체가 보인다.
"거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위험한 상황이세요? "
선우연이 외치자 검은 형체가 움찔 떨린다.
나는 이상한 낌새가 들어 달려가려던 선우연을 제지했다. 왜냐하면 이건...
'사람의 생체마나가 아닌데? '
굳이 따지자면 몬스터 쪽에 가까운―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저 멀리에 보이는 검은 형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알겠다. 저건 목 잘린 시체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근데 목 잘린 시체에서 대체 어느 곳으로 목소리를 내는 건지 여자의 목소리로 자꾸 무어라 말하고 있다.
"@#₩&? 거기 무슨 일 있□십니까? 위험한 상■이세요? 제발 나 좀 살₩€려줘! 아무도 없어요? 도망쳐! 엄마! "
저건 아까 선우연이 했던 말인데. 하는 말의 내용을 보아하니 이 몬스터는 자기가 들은 말들을 학습하고 그대로 내뱉는 종류의 것인 듯 했다. 아까 들은 여자 울음소리도 학습한거였나.
나야 뭐 속알맹이는 알파우리인이라 인간 모양이야 머리가 없든 다리가 없든 그냥 그렇구나 싶을 뿐이지만 선우연은 거의 패닉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들은 대부분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저런 식으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니까.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목 잘린 시체가 뛰어오면서 말을 하는 게, 음 섬뜩하네. 선우연의 입장은 잘 알겠다.
"눈 감으세요 선우연씨. "
"네? "
"눈. "
선우연이 쭈뼛쭈뼛 눈을 감자 나는 허공에서 물을 응결시켜 만든 창으로 목 잘린 괴물을 단번에 관통시켰다. 괴물은 등급이 높은 종류는 아니었던지 짧은 저항 후에 금방 축 늘어졌다. 저렇게 생겨가지고 저게 죽은건지 산건지도 모르겠고. 대충 보험삼아 창을 몇 개 더 꽂아주었다. 창이 괴물을 꿰뚫을 때 나는 파열음에 선우연의 몸이 움찔움찔 떨린다.
"저... 저 눈 떠도 되나요? "
나는 내 앞에 놓인 괴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거의 넝마가 된 모습이다.
"아니요. "
저번 [13월의 미궁]에서 정하성의 반응으로 보건데 인간은 같은 인간의 신체가 훼손되는 걸 보면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 듯 했거든. 저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싶긴 한데 아무튼 모양은 비슷하니까.
"선우연씨 눈 감은 그대로 뒤로 돌아서 우리 이제 원래 왔던 곳으로 가는거예요. 시체 있는 곳은 돌아보지 말고. "
선우연이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뒤를 돌았다.
"이제 갑시다. "
선우연과 함께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걸어가며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딘가 허술하긴 하지만 저건 분명 인간의 형태가 맞았다. 인간의 모습을 닮은 몬스터라니. 기심체가 벌써 인간을 모방할 정도가 된건가...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기분이다.
○
'연예인 소속사 앞에 서있으면 연예인 볼 수 있나요?' 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말이 '헌협 가면 S급 헌터 볼 수 있나요?' 아니었던가.
오랜만에 볼 일이 있어 협회에 들르니 별 진귀한 구경을 다 한다. 멀리에서도 식별 가능한 자줏빛 머리칼의 여성과 그 옆의 하얀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성.
서에스더와 정하성이다.
이건 대체 무슨 조합이지.
둘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지 대화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정하성이 무언가를 제안하고 서에스더가 그에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아는 사람들이니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예의인가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냥 가는 게 낫겠다. 내가 낄 자리도 아닌 것 같고.
눈치를 슬슬보며 조용히 지나가려고 하는데, 정하성이나 서에스더나 S급이란 칭호를 헛으로 단 것은 아닌지 익숙한 인기척이 들리자 대화를 멈추고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나쁜 짓 하다 걸린 것 같은 느낌이네.
"음... 안녕하세요? "
서에스더가 눈에 띄게 반색하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어머 기려씨. 안 그래도 한 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잘 됐네요. 하성씨도 있겠다 이 문제는 여기서 얼른 해치워버리자고요. "
듣자하니 이 둘은 [러시안룰렛] 게이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곧 있으면 필치않게 S급들끼리 협업해야할 일이 있으니 속성 내성 장비나 그 외 이것저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정하성은 나의 가르침으로 인해 이제 걸어다니는 용광로 꼴은 면하게 되었지만 서에스더는 광범위 마법을 사용할 때 여전히 그 범위가 조절이 안 되는지라 혹시나 모를 피해를 막기 위해 저주 내성 장비를 착용했으면 한다고 권했다.
"물론 저도 최대한 조절해보려고 할 테지만 사람 일이란게 어떻게 될 지 모르는거고... 저번 [13월의 미궁] 게이트처럼요. 그래서 두 분 다 저주 내성 장비는 착용해주셨으면 하는데, 혹시 장비가 없으시면 마탑에서 빌려드릴 수 있으니 말씀해주세요. "
그러고는 서에스더는 마탑에 있는 저주 내성 장비들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길드장이 저주 속성인지라 웬만큼 괜찮은 저주 내성 장비다 하면 거의 다 마탑이 보유중이라고 하면서. 서에스더는 한참 설명을 이어가다가 잠시 멈칫했다.
"아, 그러고보니 기려씨는 저주 내성 장비가 필요 없었죠? "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반응은 정하성한테서 나왔다.
"기려씨한테는 제 저주가 먹히질 않는 모양이더라고요. 하성씨도 그때 같이 보지 않았어요? [13월의 미궁] 때 다들 제 저주 때문에 힘들어했었는데 기려씨만 멀쩡하던 거. "
서에스더는 '그 외에도 여러번 확인해보았는데 전혀 안 먹히는 눈치던걸요'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자기한테 몰래 저주를 내렸다고 하는데 기분 나빠하지 않을 이는 없으니까. 그녀는 김기려라는 사람과 되도록이면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땐 워낙 경황도 없었고... "
그도 그럴 것이 정하성은 알파우리에서 온 모 외계인이 [13월의 미궁]에서 벌인 신체 절단 쇼에 이미 정신적 충격을 입은 바 있었고 신체적으로도 성한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S급이 저주가 전혀 듣질 않는다니.
정하성은 김기려라는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2살이나 더 어리지만 훨씬 어른스럽고, 스킬을 기예에 가깝게 다룰 줄 알았고, 과거가 베일에 싸여있는 사람. 정하성은 문득 자신이 소설 작가라면 이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후 [러시안룰렛] 게이트에 대한 이러저러한 세부사항을 조정하고,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쯔음에 서에스더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졌다.
"A급 상위 헌터들은 지금 거의 다 해외에서 활동 중이라 국내에 있는 A급 헌터 중에 가장 각성치가 높은 헌터는 마탑 소속 헌터 중에 한 명인데 아주 울고불고 난리더라고요. 자기 유언장 써놔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달래는데 애 좀 먹었지 뭐예요. "
울었다던 헌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무리 헌터라는 직종이 위험상황에 많이 놓이게 되는 직업이라 해도 일정 이상의 등급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은 목숨의 위협을 느낄만한 상황을 만나기가 어려웠으니까.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차는 반파될지언정 사람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다짜고짜 놓인 1/6의 목숨 도박 게임에 눈물이 날 만도 하지. 정하성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지만 불안한지 마력이 이따금씩 흔들리고 있고. 오히려 놀라운 건 서에스더의 반응이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에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에스더씨는 안 무서우십니까? "
서에스더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지는 몰랐다는 듯 놀란 눈이다.
"저요? 당연히 무섭죠. 무서워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근데... "
서에스더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나는, 단 하루도 내가 죽지 않을거라 생각한 날이 없어요. "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산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부터가 그랬다. 무언가의 죽음을 빌고, 부상을 기원하고...
"사람은 되게 쉽게 죽고,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러시안룰렛] 게이트보다 당장 오늘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거고. 그런 걸 보면 하루하루가 러시안 룰렛인 셈인데 당장 다가오지도 않은 게이트를 미리 두려워해봐야 뭐하겠어요. "
서에스더가 '저 되게 염세적이죠? ' 하고 웃었다.
"우리 일이 죽어가는 것들을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하고, 제 자체가 이런 성격이기도 하고. 저주라는 속성이 달리 어디에서 나온 게 아니라서요. "
서에스더는 자신의 손으로 보낸 수많은 직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직원들의 가족들을 생각한다. 한때는 그들 모두를 내 손으로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닌가 자책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소모적인 생각에 불과했기에. 대신 그녀는 제 품 안에 들어온 모든 살아가는 것들을 하루하루 더 아껴주기로 했다.
그러니, 이번은 단지 그것이 자신의 차례일 뿐이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럼에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심어야 하는 족속들이니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수 밖에요. "
서에스더는 철학자 두 명의 말을 한꺼번에 인용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6명 중에 1명인데 그게 나일까, 하는 생각도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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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 바람이 시원하게 내달리는 부둣가. 바닷물의 비릿한 향내가 물씬 풍기고, 10년 20년 동안 일한 어선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 이 동네 어르신들은 날이 저물면 일찍부터 집에 들어가 저녁이 되면 길에는 사람 한 명 없이 휑하다. 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수명을 다해 깜빡깜빡거리는, 그야말로 촌동네. 그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 하나가 부둣가에 미끄러지듯이 들어온다.
세단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내가 부둣가에 차를 대고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허, 하는 탄식을 내뱉는다.
사내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부둣가에는 먼저 온 선객이 있었고, 그는 사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지겹도록.
"여긴 내가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저번에 미국에 갔을 때 넌 분명히 비행기를 타고 갔잖아. "
이곳은 그가 밀항용 배를 숨겨놓은 곳이었다.
강창호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
어떻게 알았긴. 시체 조종술로 너한테 미행을 여기저기 붙여놓은 거지.
저번의 다사다난했던 미국행을 끝으로 '앞으론 연락하지 말라' 라는 말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대신 연락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미행을 붙여 동태를 감시했었다) 최근에 강창호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어서 말이다.
[러시안룰렛] 게이트는 앞서 말했듯이 그 게이트가 생긴 곳의 일정 반경 내에 있는 사람 중 각성치 1위부터 6위까지의 사람을 게이트 출입 자격자로 지정한다. 그 말인 즉슨 게이트가 생길만한 곳을 미리 알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나중에 게이트가 생성되었을 때 자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게이트의 다음 생성 국가로 예상되는 곳에선 상위 각성자들의 해외도피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런 한바탕의 대소동을 겪고 나서 각국의 정부가 떠올린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게이트가 생기기 전까지는 각성치 1위부터 6위에 해당하는 헌터의 출국을 막아둬야겠구나!
따라서 나는 물론 저기에 있는 저 강창호씨까지도 이 한반도에 발이 묶인 상태라는 거다.
그런데 최근에 강창호씨가 웬 연고도 없는 바닷가 시골마을을 뻔질나게 드나드시는 통에 여러모로 알아보니, 얼레? 강창호의 밀항용 배라는 게 여기 있었네?
그렇게 강창호의 국외도피계획을 알게 된 것이다.
"되게 비겁하시네요. "
강창호가 간만에 웃긴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말을 잇는다.
"당신이 멋대로 나에 대해 기대한거지 난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머리에 있는 나에 대한 그 되도 않는 착한 사람 프레임 같은 건 좀 지워주셨으면 하네? "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고 강창호가 운을 뗐다.
"그래, 뭐. 여긴 당신이 어떻게 알았다 치자고. 네가 나한테 실망했다는 것도 이해했어. 근데 나를 방해하면 안 되지. 우리 서로 노터치하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
강창호가 예의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숨길 생각 없다는 듯 드러낸 날선 시선.
"김기려 헌터,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그러면 못 써요. "
"저도 처음엔 강창호씨가 해외를 가든 어디로 피하든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요, 최근에 어떤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생각한 게 맞다면 그 게이트는 강창호씨가 있어야지 공략할 수 있어요. "
"그래? 그거 안타깝게 됐네. 난 당분간 한국을 떠나있을 생각이라. 다른 사람 찾아봐. "
강창호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바닷물이 중력을 이기고 꿈틀대다 강창호 앞에 벽을 만들어낸다. 강창호가 잠시 미간을 지푸렸다.
"이거 무슨 뜻이야 김기려? "
"못 지나갑니다, 강창호 헌터. "
바닷물로 만든 벽 너머로 강창호의 눈을 마주했다.
"내가, 아주 적극적으로 당신 인생에 개입해볼까 하거든. 뭣하면 당신이 비싼 돈 주고 만든 밀항용 배라도 엎어볼까 싶은데 어때요? "
바닷물로 만든 벽 너머로 서로의 눈빛을 읽은 두사람은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서로에게로 달려들었다.
아무리 강창호가 뛰어난 신체강화술사라지만 알파우리 제1마도사장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 게다가 환경 또한 내게 유리한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결과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단 것이다.
강창호의 공격을 몇대는 흘려보내고 몇대는 내어주며 겨루기를 몇 합. 강창호는 결국 저 높이까지 쌓인 물기둥에 몸이 눌려 제압되었다. 부피 1m³의 물이 1kg 이었으니까 저 정도면 대략 한 1톤쯤 되나.
"이봐, 김기려. "
"예? "
"나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
"엄살 부리지 마시고요. "
"아니 진짜로. 그리고 저기 가로등 불이 바로 눈 앞에 보여서 눈 뜨기가 좀. "
물로 강창호의 얼굴 위에 지붕을 만들어 주었다.
"친절도 하셔라... "
강창호는 완전히 질린 기색이었다.
그렇게 그는 물기둥에 깔려 누워있고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옆에 앉아있기를 몇 시간. 노란 가로등불이 간헐적으로 깜빡거리고, 하늘에 뜬 보름달이 검은 바다에 반사되어 보인다. 오징어잡이배의 밝은 집어등이 저 멀리 별처럼 총총히 박혀있고, 배를 안내하는 등대의 불빛이 어두운 밤하늘에 기다란 선을 그리는, 저녁밤 어느 시골 마을의 항구.
찌르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와 파도 소리만 들리던 그 가운데, 강창호가 적막을 깨고 별안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생각이란게 뭔데. "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강창호의 물음에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필요하다며. 굳이 나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나는 강창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실거예요? "
"나 하나쯤은 가뿐히 제압하는 어떤 S급 헌터가 붙들고 안 놓아주고 계시는데 무서워서라도 도와드려야지. "
강창호는 그렇게 말하며 왠지 모르게 성격 나빠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알잖아, 나 김기려 헌터 말이면 꼼짝 못 하는거. 기사에도 났을텐데? "
아, 그거...
덕분에 이쪽이 가진 스킬이 뭔지 한없이 부풀려져서 빈수레만 요란하게 되었다. 나는 바다 옆에서 이 정도 힘 쓴 거 가지고도 폐가 남아나질 않는 사람인데. 이것봐라. 말을 하기가 무섭게 피가 기도를 타고 올라와서...
강창호가 있는 곳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막고 기침을 하는 바람에 손에 피가 다 묻었다.
"...남한테 일 해라 뭐 해라 할 처지가 아니라 본인이야말로 요양병원에라도 들어가계셔야하는 상태 같은데. "
"예... 뭐 괜찮습니다. 잠깐 이러다 마는 거라. "
공중에 띄워낸 바닷물로 피가 묻은 손을 닦았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강창호 헌터가 필요한 이유가 뭐냐고 하셨죠. [러시안룰렛] 게이트에서 살아남은 헌터들이 공통적으로 한 증언이 그거였어요. '출구를 나가기 전까지는 분명 6명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5명이었다. ' 전 사실 이 말이 잘못됐다고 보거든요. "
"... "
"출구를 나가기 전에도 5명이었다, 라는 거죠. "
"그러니까 네 말은 S급 헌터들이 환각에라도 당했다고? [러시안룰렛] 게이트에 들어간 헌터 중에는 정신계 스킬을 가지고 있는 헌터도 있었어.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데. "
"환각이 아니라. 음, 뭐라할까요. '흉내쟁이'가 있었다? "
얼마 전 [불꽃나방]의 게이트를 닫은 후에 발견한 인간을 닮은 몬스터. 그건 어쩌면 기심체가 이제는 인간의 모양과 말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물론 내가 봤던 그건 '기심체 회심의 역작! 베타 버전 지구인 인형'이었는지 좀 많이 기괴하긴 했는데, 원래 있는 사람을 똑같이 베껴다가 인형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원래 창작보다는 모작이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까, 원래 사람이랑 그 사람을 따라한 흉내쟁이가 중간에 뒤바뀌었다고요. 흉내쟁이는 기심체가 조종하는 몬스터니까 게이트 밖으로 안 나간거고. "
이런 걸 지구인들 용어로 밑장빼기라고 하던가.
"일리는 있네. "
강창호는 다행히도 내 설명을 납득한 듯 싶었다.
"그럼 내가 필요하다는 건 [용의 눈] 때문이겠고. "
아니. 그것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내가 널 필요로 한 이유는 네 그 지랄맞은 예민함 때문이란다. 워낙 예민하셔서 사람이 흉내쟁이랑 뒤바뀌면 귀신같이 알아낼 게 분명한 사람이니까.
"뭐... 대충 그런 셈이죠. "
강창호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심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도와줄게. "
"정말요? "
"이 헌터가 25년 살면서 속고만 사셨나.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를 않아. "
솔직히 당신 말이라면 못 믿는게 당연하지 않나 싶긴 한데. 유스티티아라도 가져와서 방금 한 진술이 진실이 맞는지 달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근데 말이야. 난 언제까지 이 땅바닥에 누워있어야하는건데? 저기 지금 동 트려고 하는 거 안 보여? 하늘이 파래졌잖아. "
아, 진짜네. 하늘이 조금 파래졌다.
"조금만 기다려봐요. 금방이니까. 느껴지는 거 보니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
"뭐가... "
그때, 강창호와 내 손목에 동시에 문양이 새겨졌다.
[러시안룰렛]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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