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착헌,NCP] 고독하되 외롭지 않은

당신의 노스텔지어는 어디에 있습니까?

커미션 신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커미션 신청자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

분량 약 6000자.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향한다.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아도 모두 당연하다 여길 현상이지만 일상에서는 잘 체감할 수 없었던 이 현상이 요즘처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동해 바다의 수위가 높아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일주일 새에 무려 1cm나 그 높이가 높아졌는데, 모르는 사람은 '겨우 1cm 가지고 그 난리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다란 얼마나 넓은 곳인가. 그 넓은 곳이 무려 '1cm'나 높아진 것이었다. 동해 바다에 나타난 모종의 사유로 인해서.

그 모종의 사유라는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정체가 밝혀졌다. 바다 밑에 있어서 잘 몰랐지만, 동해 바다 속에서 게이트 입구가 발견된 것이다. 그 많디 많은 바닷물은 그곳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게이트에 들어가면 이 바다보다도 깊은 심해에 바로 입수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 게이트에 만일 평범한 인간이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압력으로 짜부라져서 죽을 것이라는 뜻도 되고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마법사'를 자처하는 김기려라는 이가 있었다면 훨씬 빨리 발견될 종류의 사실이었지만, 그 게이트가 발견됨과 동시에 수속성 헌터를 호출하려던 정부에 의해서 그의 부재가 밝혀졌으니 게이트가 다른 이에 의해 발견되었다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게이트가 정부에 의해서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는 사실과 그 게이트가 발견된 장소에서 김기려의 집은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도. 추정상 김기려는 동해 바다 속에서 발견된 그 게이트, 그러니까 훗날 붙여질 이름에 따르면 [노스텔지어]라는 게이트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다른 국가에서 생겨난 [노스텔지어] 게이트에 따르면 [노스텔지어]는 붙여진 그 이름답게 처음 들어온 방문객이 가장 그리워하는 곳을 보여주는 게이트라고 판명이 되었다. 언뜻 본다면 [행복하세요?] 게이트와 결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노스텔지어]는 처음 들어온 단 한 사람의 소원만을 들어준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노스텔지어]은 김기려의 향수로 구성되어있다는 소리인데...

'왜 하필 심해? '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 긴급한 상황에서 그런 부차적인 물음은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나중에 당사자를 구하고서 물어도 되는 것이었고. 일단은 한국의 S급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거니까.

위험스러운 붉은빛을 일렁이는 게이트에 파견 인원은 빠르게 결정되었다. 김기려를 제외한 세 명의 S급이 그 대상이었다. 애초에 A급 이하는 심해의 압력을 버티질 못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버틸 수 있는 S급이 그 대상이 된 것이다. 

강창호도 웬일로 정부의 부름에 선뜻 응해주었다. 한국의 인재가 위험에 빠진 이 사태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나 뭐라나. 정하성과 서에스더는 강창호의 참여에 영 껄끄러운 기색이었지만, 김기려를 구하는 데에 손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더 시급했으므로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김기려라면 손짓 한 번으로 해냈을 일을 나라의 온갖 수속성 헌터들이란 헌터들은 다 동해에 들러붙어 겨우 바닷길을 열고, 드디어 한국의 세 S급들이 게이트에 입장했다. 수중호흡 아이템을 목에 건 채였다.

게이트 안, 심해는 아름답지도 기괴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이곳은 너무 깊어 만물을 비춘다는 햇빛조차도 닿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었으니. 눈앞이 아예 보이지를 않아 김기려를 찾든지 말든지 할 것도 없었다.

그때 나선 것이 정하성이었다. 물 안에 불을 피워올리겠노라 한 것이다. 저보다 어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그 스승을 구하러 온 제자의 불꽃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물 속에서 피어올랐다.

태초에 창세신이 세상을 만들 때 빛을 먼저 이 땅에 틔우듯, 버려진 땅에서 피어오른 일렁이는 빛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그제야 비로소 심해는 버림받은 땅이 아닌 경이의 땅이 되었다. 바다눈이 서리처럼 내려앉고, 온갖 촉수 가진 것들이 하늘거리며 심해를 부유한다. 태어나서 빛 한 번 보지 못한 생명체들은 쓸모없는 눈을 퇴화시키고, 심해의 압력에서 살아남으려 지상의 미와는 아주 다른 저들만의 심해의 미를 구축했다.

셋은 목적을 잃고 그 경이로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렁이는 불을 다시 바라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이곳은 방심하면 안 되는 이계異界의 보금자리였다.

이번에는 강창호가 나섰다. 제 용의 눈으로 김기려를 찾겠다 한 것이다.

어둠 속에 각성치를 나타내는 빛이 왜 이리도 많은지 수많은 빛들 사이에서 김기려를 찾느라, 강창호는 한참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들 사이에서 눈이 멀도록 밝은 백색 왜성 같은 한 거대한 빛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김기려였다.

달디단 그 옛날의 향수와 지독하도록 비슷한 꿈을 꾼다면, 그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김기려는 감히 말하건대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저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해 버렸으니.

오랫동안 꿈꾸지 못했던 아늑하도록 어두운 심해에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포근함을 느꼈다. 촉수를 살랑이는 잔잔한 물결이 간지러웠다. 주변엔 자신보다 지능이 모자라지만 이타적인 개체들이 헤엄치고, 그들의 반짝이는 마나가 별처럼 깊은 심해를 수놓는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처음엔 거금을 들여 산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웬 바닷속에 자리 잡은 게이트 하나로 인해 무너질 위협에 처하자 이 '대마법사'가 손수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정신을 교란하는 게이트니 자신에게는 별것 아니라고 여겼고. 

하지만 기심체들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게이트는 나에게도 그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 뿐. 처음 게이트에 입장하고, 알파우리를 얼기설기 닮은 심해를 보았을 때 나는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런 걸 앞에 보여주고 속으라고... 속으려 해도 힘들겠다.  '

그 판단이 오산이었다는 것은 얼마 안 가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렇게 조금만, 조금만 이곳에 머무르려 하다가 결국 이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손님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그 달콤한 꿈은 갈수록 정교함을 더해갔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을 듯이 어두워지고, 잔잔한 물살이 흐르고, 내 머릿속에 있던 몇몇 개체들이 구현되어 내 주변을 맴돈다. 결국 내 몸이 이전 그 어느 때의 '레밍'의 것처럼 변하고, 포근한 수마에 몸을 맡기려 할 때에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색 머리칼의 여성 하나와 청잣빛 긴 머리칼의 남성, 새치가 있는 젊은 얼굴의 남성, 그렇게 셋.

나는 처음에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기라도 하는 듯이 나를 두고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러면 질문은 다시 반복된다.

달디단 그 옛날의 향수와 지독하도록 비슷한 꿈을 꾼다면, 그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제 그 답을 알았다.

교실 풍경을 떠올리던 꿈에 갑자기 좀비 떼가 닥쳐오는 상황을 맞닥뜨리듯 꿈의 맥락을 부숴버리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으면 되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서에스더, 강창호, 정하성이었고.

이젠,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저게... 김기려 헌터라고요? "

투명한 점액질 막 안의 투명한 초록빛 물이 가득 찬 몸체, 6개의 촉수, 거대한 몸집, 그 몸 안을 떠다니는 빨간 세 개의 눈알. 이리 보고 모로 보아도 김기려가 아니라 해치워야 할 몬스터의 모습이 아니던가. 서에스더는 강창호의 "저게 김기려인데."하는 말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정하성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정 의심되면 확인해 보던가. "

"어떻게... "

"김기려는 S급 저주술사의 저주가 안 통했지 아마? "

"아. "

보랏빛 머리의 각성자가 그제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한다. 

서에스더가 저주를 걸기 위해 그 초록색 촉수 괴물을 돌아보자 아까의 그 나른한 듯 느릿한 움직임은 어디 가고 괴물이 불안한 듯 빨간 세 개의 눈알을 떨어대며 몸체의 색깔을 바꾸어댔다. 세 개의 눈알이 서에스더를 향했다. 그 괴물은 정말 강창호의 저 허무맹랑한 주장이 맞기라도 하는 지 아무런 공격도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서에스더는 심호흡을 하고,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눈앞의 괴물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리 S급이라고는 해도 이 이상 심해에 있는다면 위험할 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게이트 밖으로 나가 브레이크가 터진 밖을 수습하는 수밖에. 김기려는... 못 찾는 거고.

서에스더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제발 저 괴물이 김기려가 맞기를.

그 간절한 판정의 결과는, 다행히도 성공이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김기려의 몸은 자연스럽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기려의 목에 걸린 수중호흡 장치는 뭍에 나오기가 무섭게 빛을 잃고 깨져버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 달콤한 꿈속에 익사하고 말았을 테였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나를 향해 들이밀어진 질문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많고도 많았다.

Q1. 게이트 속은 왜 심해였는가?

이 질문은 내 고향 알파우리와 이어져 있는 부분이라 곤란하기는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게이트에 들어온 세 S급들이 수면 위 알파우리를 주위로 공전하는 여러 개의 위성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이들은 게이트 속의 그곳이 지구의 심해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니.

여기에서 생각나는 변명이랄 것은 어렵지 않았다.

A1. 내가 해양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것을 알지 않느냐. 나의 노스텔지어는 심해에 있기 때문이다.

이 답에 저기 서 있는 세 명의 포유류가 왠지 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Q2. 당신은 왜 촉수 괴물로 변했는가?

A2. 남들 속에 섞여서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이 그렇게 구현된 듯싶다. 배경이 심해 속이니 거기에선 그 모습이 평범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왔다.

그외에도 몇 가지 질문들을 답해주고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서에스더가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까 괴물의 모습일 때에 나를 바라보던 그 두려움에 빠진 눈과는 굉장히 판이해 조금 새삼스럽다.

"수고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이 뭍에 하나쯤은 애착을 가질만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 "

서에스더가 어딘가 아픈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도 예전에는 가지 못할 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거든요. 나한테는 그게 컴퓨터 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게 참 아프더라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 땅에 애착을 가졌으면 싶어요. 내가 응원할게요. "

서에스더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는 일정이 있어 먼저 가본다고 양해를 구했다.

다음은 정하성이었다.

정하성은 한껏 울상을 해가지고는 내게 다가왔다.

"헌터님이 제게 좀 더 기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못 미더우신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런 위험한 게이트를 가셔야겠다면 적어도 혼자 가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나도 우리 집 바로 앞에 있어서 혼자 갔던 거 뿐이야. 너 못 미덥지 않아. 그래도... 미안하다. "

커다란 덩치를 구겨오며 내게 안기는 것을 토닥여주고 있자 강창호가 뒤에서 한 마디 던진다.

"아까 조사에서 했던 말 말인데, 미안하지만 너 절대 평범하게 못 살아. 알지? "

평범하게 살지 못한다라...

진심으로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기보다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변명으로 쓴 말이었지만, 전면으로 부정하는 강창호의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괘씸했다. 하지만 약 오르되 아주 밉지는 않은 것은 그 말을 어쩐지 다정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평범함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같이 비슷하게 사랑받고,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그래. 그렇다면 나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가 보았을 이 내면의 거대한 힘-마나-은 나를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대신 그가 심해에서 보았듯 무수히 많은 빛 속에 단 하나 북극성처럼 반짝이는 이 힘은 주변인들의 이정표가 되어줄테지.

무수히 반짝이는 별 사이의 하나 평범한 별이 되지는 않더라도 주변인들을 이끌 북극성이 되리라. 그것이라면 평범함은 가지지 못해도 좋았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나의 노스텔지어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그 답이 바뀐 지 오래였다. 나의 노스텔지어는 심해 그 어딘가가 아닌 바로 지금, 이곳에 있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온기를 알았다. 지구라는 땅에서 '애정'을 배웠다.

그러므로-

오늘도 평범하지 않은 하루를 마무리 짓기를, 그렇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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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No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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