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신고 말고 가족 신고는 없나요? 샘플
전국 먹이 상자 경연 대회에 제출할 먹이의 맛보기용 샘플입니다.
1. 외계인과 첫 만남
바닥에 깔린 얇은 이불 위에 누워있던 남자가 가늘게 눈을 떴다.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이불 사이로 손을 빼낸 남자가 주위를 더듬었다. 무언가를 찾듯 방황하던 손에 잡힌 건 머리맡에 놓여있던 남자의 핸드폰이었다.
‘지금…. 몇 시지.’
따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켠 핸드폰에 눈부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은 남자가 눈을 억지로 떴다. 시간을 확인하고 툭, 핸드폰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아 둔탁한 소리가 난다.
‘몇 시였지….’
방금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가 베개에 얼굴을 꾹 눌렀다. 답답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니 먼지 맛이 났다. 몸을 뒤척이니 다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였는지 찌릿한 고통이 신경을 타고 느껴져 남자의 몸이 일순 경직됐다.
‘다리 아프네… 진통제가 있던가.’
고통 덕분에 몽롱하던 정신이 깬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음식 배달 알바를 하다가 재수 없게 F급 몬스터를 만나 사고를 당한 이후로 열심히 재활했음에도 후유증이 남아버린 다리를 주무르며 남자가 생각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불에서 벗어난 건지도 가물가물한 남자가 화장실로 걸어갔다. 몸이 움직이자 그제야 몸이 생리현상을 해결해달라고 아우성쳤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본 거울 안에는 삼백안에 성격이 나빠 보이는 수척한 남자가 비췄다.
‘이제 염색만 남았는데….’
이리저리 거울을 보니 피곤하고 예민해 보이는 자기 얼굴과 불편한 다리 때문에 위태로운 자세 등 전반적인 자기 모습이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고파. 집에 뭐가 있던가.’
생리현상을 해결하니 이제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몸을 억지로 끌고 싱크대로 향했다. 찬장을 열어보니 휑하게 빈 찬장 공간에 라면 한 봉지가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슈퍼에서 파는 김치 한 봉지가 개봉된 상태로 쉬어가고 있었다.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자극적인 냄새에 남자가 곧장 냉장고 문을 닫았다.
‘라면 먹고 염색하러 가자.’
남자는 가스레인지에서 냄비를 내리지 않고 불만 끄고 그 자리에 서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라면을 먹으면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알람을 못 들은 건지 걱정했는데 아직 시간이 안 된 걸 안 남자가 안심했다.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 벌써 두 번이나 예약 시간을 놓쳤으니까 이번엔 꼭 가야지.’
라면은 사람을 유혹할 만큼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 맛은 시큼했다. 기계적으로 국물까지 모두 먹은 남자가 더부룩해진 속에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간부터는 억지로 먹은 탓에 얹힌 게 분명했다.
남자는 외출을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수가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돌리며 이번 달까지 밀린 수도세와 가스비를 생각했다.
철퍽
‘아, 핸드폰 충전해야지. 얼마나 남았더라.’
연락을 할 곳도 받을 곳도 없으면서 세상과의 끈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조소하기도 했다.
찌 꾹, 찌이익, 찌걱, 쩍
시간을 확인할 수 없고 핸드폰이 밖에 있어 혹시라도 알람이 울리는데 못 들은 게 아닌지, 사실 화장실에 아주 오랜 시간 있어서 또 늦어버린 건 아닐지 불안하기도 했다.
‘머리가 망가진 거 같아.‘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따뜻한 물 아래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적어도 죽기 전에 모두 해보고 싶은 일들. 그 소소하고 남들은 일상이라고 말할 목표를 생각하면서 남자는 물을 잠갔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를 털며 화장실 밖으로 나간 남자가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눈에 들어온 건,
“헉…!”
남자의 눈에 반투명한, 젤리 같은 모양에 눈알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몬스터가 보였다. 방바닥에서 촉수를 늘어뜨리고 사방을 둘러보느라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괴물에 남자가 헛숨을 들이켜며 무심코 뒷걸음질 치다 발이 꼬여서 뒤로 넘어졌다.
“으, 으아…!”
쿵!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충격으로 숨을 헐떡였다. 아팠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몬스터에 남자가 정신없이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제대로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는 다리가 허공에 허우적댄다. 그러나 그런 남자의 발악에도 녹빛의 몬스터가 허공에 떠올라 다가오는 속도가 남자가 뒤로 기어가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오지, 오지마…! 아아악!“
결국 남자는 자기 머리로 다가오는 초록색 촉수를 응시하다 공포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어어 뭐야 왜 갑자기 쓰러져?“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불법 침입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생각이었던 외계인의 첫 만남이었다.
*
결국 남자가 깨어난 건 하루가 지나서였다. 그동안 지구에 방문한 외계인은 상당히 많은 걸 알아가고 있었다.
‘이 포유류의 집에 도착해서 다행이군. 알파우리의 환경과는 많이 달라. 적응하고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이런 이유로 외계인은 남자에게 일단 기생해야겠다는 속셈을 가졌다. 나름의 적응 기간에 몸을 숨기겠다는 말이었는데 꿈에서도 내내 정체불명의 몬스터들에게 쫓기는 꿈을 꾸며 시달린 가엾은 남자는 깨어났을 때도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있는 외계인을 보며 호들호들 몸을 떨었다.
“큼, 이제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지?”
“컥, 콜록콜록…”
하다 하다 몬스터가 말을 하는 상황에 남자가 헛숨을 들이키다 사레가 들렸다. 과잉 반응하는 남자를 성가시다는 듯 보던 외계인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여기서는 제대로 발음하기 어렵겠군. 제일 비슷한 발음이, 그래 ‘레밍’이라고 불러.“
”레, 레밍이요?“
살아생전 몬스터와 통성명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하자 레밍이 촉수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게 여기서 긍정의 의미인 거 맞지? 네 기억을 보긴 했는데 한 번에 너무 양이 많아서 정리가 좀 덜 됐어.”
“제 기억을 봤다고요?”
남자의 반응에 레밍이 다시 한번 촉수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따로 얼굴과 몸통이 구분되지 않는 레밍의 짧고 동그란 몸으로는 인간처럼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등의 반응을 보이기에 어려워서 찾은 대안이었다.
물론 알파우리에서도 비언어적인 소통은 많이 썼다. 색을 바꾼다거나 발광 횟수 같은 걸로 드러내서 그렇지. 그리고 이런 문화는 이곳에서 다르고 저곳에서 다른 경우가 있어서 되도록 정착지에 맞추는 게 좋았다.
“그래, 김기려 맞지?”
“….”
몬스터와 통성명을 하는 게 정말 괜찮은지 확신하지 못한 남자, 기려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레밍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기려의 뇌를 탈탈 털어 흡수한 레밍에게 그 질문은 아는 걸 재확인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최근 기억은 좀 군데군데 빈 곳이 많아서 이상하긴 한데….”
기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살펴보니 여기엔 게이트와 헌터라는 게 있더라고. 그런데 내가 지구에선 몬스터로 취급당하기 딱 좋은 거 같아.”
“몬스터… 아니에요?”
지성을 가지고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기려는 레밍이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누가 봐도 지구산 동물은 아니었다. 레밍의 촉수가 자신의 동그란 머리를 문질렀다. 뽀득뽀득하는 소리가 난다.
“글쎄, 몬스터의 정의를 내가 좀 정리를 해봐야 확실할 거 같긴 한데.”
“역시 몬스터…”
“일단 나는 따지자면 외계인이야.”
이제 지구에 몬스터에 이어 외계인까지 출몰했다는, 알고 싶지 않은 소식에 기려는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던 기려는 곧 태연해졌다. 해탈, 혹은 체념한 거였지만 포유류의 심리 변화를 알 리 없는 레밍은 드디어 기려가 이야기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에 정착하려면 가능하면 인류 종으로 의태를 해야 할 거 같단 결론을 내렸어.”
“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시체 하나를 구하는 건데…”
“네??”
“근데 네가 일찍 죽을 거 같네.”
“…”
며칠 동안 굶다가 라면 한 봉지 먹은 게 얹히기까지 한 기려는 더는 놀랄 기력이 없었다. 레밍이 보기엔 그건 무언의 긍정으로 보였기에 신나서 촉수를 흔들었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의 단생종 기준으로 젊은 청년의 시체를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있다니. 아무래도 마법이 과하게 잘 성공한 거 같았다.
‘역시 나야!’
한 외계인 대마법사의 자존감이 끝을 모르고 높아지다 기분이 즉각적으로 촉수에 반영된 걸 깨닫고 나잇값을 못 했다며 레밍이 수치스러워하는 사이, 예비 신체 제공자가 되라는 제안을 받은 기려의 생각은 이랬다.
‘나쁘지 않나?’
그동안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 정도면 시력도 나쁘지 않고 장기도 쓸만할 텐데 장기 기증을 하려면 무슨 서약을 해야 했었던 거 같았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절차 없이 이 자칭 외계인이 잘 써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지만 걸리는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좀 많았다.
“제가… 당신의 뭘 믿고요?”
“응?”
”지구에 왜 온 건데요? 뭐… 뭐 하려고.“
선량한 기려는 레밍이 인류에 해가 될까 걱정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인간들에게 적대적인데 레밍이 인간에게 호의적일 거란 기대를 하기엔 근거가 너무나 빈약했다.
아직 외계인이라는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외계인이어도 문제였다. 소설이니 영화이니 하는 곳에서 외계인들은 모두 지구의 자원을 노리고 강제로 침략해서 끝없는 전쟁을 치르지 않던가. 끔찍하게 인간의 몸에 기생해서 사람을 죽이는 외계인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와중에 자칭 외계인이라고 하는 레밍이 어떤 유형인지 기려는 무지에서 오는 공포를 느꼈다.
“목적? 나는 사표 던지고 쉬러 온 건데?”
“지구가 외계인들의 휴양지였어요…?”
“아니 난 직장 동료 안 보려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온 거야. 아무도 나 따라서 못 올걸?“
그러면서 찢어지듯이 죽 길게 좌우로 찢어지는 레밍의 입을 보며 기려는 이걸 안심해야 하는지 긴가민가했다. 기려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자신을 의심할 즈음 혼자서 자신의 천재성을 다시 크게 칭찬하고 있던 레밍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죽으면 네 시체 나 줄래?”
“… 아직이요. 생각해볼게요….”
기려는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레밍은 생각보다 물렁물렁해 보이는 기려의 태도에 살짝 흥분했다.
‘아직 해야 하는 것도 있고.’
“헉, 예약!”
“응?”
그제야 미용실 예약이 떠오른 기려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들었지만,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다 됐다고 생각한 기려가 허둥대며 충전기를 찾는데, 슬그머니 레밍이 옆으로 다가와 핸드폰을 잡은 손의 손목을 촉수가 감긴다.
“히익!”
이질적으로 차갑고 축축한 감촉에 화드득 몸을 털은 기려의 반응에 레밍은 불쾌한 티를 감추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지구인이라 레밍의 감정은 전달되지 못했다. 레밍은 순간의 감정보다 좀 더 중요한 걸 먼저 말하기로 했다.
“기려야.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뭐, 뭔데요?”
레밍의 촉수가 스륵 핸드폰으로 내려간다. 레밍의 촉수가 핸드폰을 한 바퀴 감아 들어 올리자 손을 펴 레밍이 들기 편하게 해준 기려가 레밍을 힐끗거렸다. 도록 구른 레밍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친 기려가 눈을 질끈 감았다.
"... 뭐 하셨어요?“
"좀 만지작거리니까 화면이 꺼지더라고. 그래서 살펴보니까 동력원이 전기인 거까지 내가 알았거든?“
"네.“
"그래서 네가 말한 충전기란 걸 찾아서 꽂았는데 충전 속도가 너무 느린 거 같더라고.“
"그렇군요….“
기려가 눈을 떠 핸드폰을 내려봤다. 이 짧은 대화로 이 핸드폰이 운명했다는 것 정도는 기려도 눈치챌 수 있었다. 레밍이 아닌 척 기려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정신없이 굴러다녀 기려는 그런 레밍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신뢰 관계를 쌓기도 전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래도 김기려가 상황 파악하기 전에 선수 쳐서 다행이야. 먼저 솔직하게 말했으니 화도 좀 덜 내겠지?‘
양심 없는 알파우리인, 레밍은 이 와중에도 자신의 똑똑함을 칭찬하고 있었다. 몇 번 까만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리던 기려가 체념하고 레밍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더 관대한 기려의 반응에 레밍은 놀라웠다. 기억을 읽어 이타적인 개체인 건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이타심이 외계 종족인 자신에게도 발휘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레밍은 더 자신의 예비 계약자가 마음에 들었다.
미용실 예약을 이번에는 말도 없이 그대로 날려버린 기려는 그대로 사라진 예약금을 생각하며 한숨을 애써 삼켰다. 레밍은 기려가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시체를 양도해줄지 고민했다. 알파우리에서 지구로 온 지 만 하루밖에 안 됐지만 이런 건 빨리빨리 기반을 닦아놔야 오래 놀고먹을 수 있었다.
’솔직히 쓸만한 신체는 아니야. 흡연가라서 폐도 엉망이고, 다리에도 장애가 있고. 그래도 위험도가 낮으니 지구 마나에 적응할 때까지만 적당히 지낼까.
신체의 불편이야 마법으로 순식간에 고쳐낼 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레밍이 필요한 건 의태가 가능한 신분 그 자체였기에 김기려의 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해도 될 것이다.
‘있으면 좋고, 아님 말고.’
그런 레밍의 태도는 기려에게도 전해졌기에 기려는 생각보다 덜 의욕적인 레밍에 오히려 안심했다. 공중에 떠 있던 레밍이 바닥에 챱 소리를 내며 붙었다. 멀뚱히 구경하는 기려를 내버려 두고 레밍은 술식을 이리저리 짜며 연구를 시작했다. 알파우리에서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쓰던 술식들을 뜯어고쳐 지구식으로 바꾸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기려는 레밍을 구경하다가 저금통에 있던 돈을 꺼내 들었다. 아끼며 채워뒀던 저금통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에 염색하면 밥도 못 먹겠네.’
예약하지 않고 바로 염색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핸드폰이 망가지는 바람에 검색도 할 수 없게 됐지만 기려는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기려의 움직임을 레밍이 보고 있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기려가 원룸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촉감 놀이를 하고 있던 레밍이 그런 기려를 반겼다.
”어서 와!“
”윽!“
레밍의 존재를 잊은 적도, 잊어버릴 수도 없던 기려였지만 레밍을 보자 몸이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다. 격렬하게 보인 부정적인 반응에 레밍의 기분이 안 좋아졌지만 기려는 알파우리인의 기분을 읽을 줄 몰랐으므로 기려가 더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기려가 작은 목소리로 레밍의 인사에 답했다. 레밍은 그걸 듣지도 않고 만지작거리던 냄비나 더 만지러 갔다. 말이 촉감 놀이지 레밍은 지금 이 지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의 성분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바쁘게 좁은 원룸을 돌아다니는 레밍을 흘깃대면서 기려가 구석에 앉았다. 그리고 염색이 끝난 미용실에서 거울을 보았을 때부터 걸어오는 동안 내내 고민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밍, 제 시체가 필요하다고 했죠?“
”응? 있으면 좋지.“
레밍이 방에 굴러다니던 볼펜 한 자루를 들고 관찰하다가 답했다. 레밍의 몸에 있는 눈동자가 기려 쪽을 바라봤다. 기려가 애써 그런 레밍의 눈동자를 외면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저를 죽일 건가요?“
”아니? 내가 시체가 필요하다고 막 죽이는 알파우리인으로 보여?“
알파우리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기려가 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기려가 애써 부정의 답을 했다. 삶에 지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기려가 내민 조건은 하나였다.
‘인류를 배반하지 말 것. 단, 선공을 당하거나 인류 종의 관점에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대상은 제외한다. 윤리의 기준은 김기려를 기준으로 한다.’
예외 조항은 레밍의 주장으로 추가된 사항이었다. 그 대가로 레밍이 기려에게 주기로 한 건 이랬다.
‘다리 기능의 복구, 삶이 이어질 동안의 보호.’
그로 인해 레밍이 받는 대가는 이랬다.
‘김기려의 시신과 신분의 양도.’
각자의 마나에 녹아 사라지는 계약 내용은 기억력이 나빠진 기려도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도록 각인 되었다.
몇 번이고 짧다면 짧은 계약을 곱씹던 기려가 레밍에게 물었다.
“왜 제가 윤리 기준이에요?”
“신체 제공자 특혜지.”
“그렇구나…”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레밍이 제시한 조건은 추후 자신이 사용할 신체를 잘 관리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지만, 평생을 타인의 보호 아래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던 기려는 자신을 치료해주고 보호해주겠다는 레밍과의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도 날 버렸는데 외계인이 주워주네.‘
기려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레밍은 기려가 자신과의 계약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웃는 줄 알고 이 착하고 포유류에게 좀 잘 대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리를 고쳐도 폐가 썩어서 금방 죽을 텐데…. 별로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건가?‘
한 지구인과 외계인의 동거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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