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창호기려] 수중호흡

뭍에 사는 인간과 물에 사는 왹져의 이야기

본문은 전체 다 열람 가능하며 결제창 아래는 짧은 외전입니다.

기려(in왹져)가 자의로 자신의 손목을 베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열람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분량 약 10000자.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문득 폐호흡을 하는 내 모습에 새삼스럽게 서럽다는 생각이 드는 날.

그날은 아침부터 장맛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대기 중의 축축한 습기가 나를 더더욱이나 그런 생각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사무치게 서럽다고.

날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뭍 위의 지구인의 몸은 하여튼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몸을 조종하는 이 대마법사도 이런 꿉꿉한 생각에 속절없이 말려드니 말이다. 알파우리의 푸르른 물 속에서는 이런 감상에 젖어들 필요가 없었는데... 어쩐지 물 속이 더더욱 그리워지는 기분이다.

사계절의 변화와 푸른 물, 생명력이 충만한 대지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이곳에 별다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간들도 으레 그러하듯 자기의 고향 땅이 아닌 곳은 여행으로나 가끔 보아야 아름다운 법이니까. 고향 땅을 떠나와 이국에 정착한 자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도 끊임없이 자신이 이방인임을 확인받을 뿐이었다.

그래, 이 이질적인 폐호흡과 저 파도가 부서지는 포말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

파도란 뭍에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

나는 검은색 장우산을 받치고 서 파도가 바로 아래에서 부서지는 데크의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빗방울이 세차게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냥, 가끔은 이러고 싶을 때도 있는 거니까.

생산적이지 못한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한때의 나의 신조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건데 가끔은 낭비하듯 흘려보내는 생각도 필요한 것 같았다.

이런 내 생각을 안다면 내가 업신여겼던 수많은 친구들이 들고 일어나려나. 하지만 알파우리의 그 빛나는 역사는 이제 내 기억속에만 찬란히 존재했다.

조금 울적해지는군.

간만에 나의 고향, 알파우리를 떠올려보았다.

종래엔 이기적인 개체들만 가득 찬 악의 소굴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지만 원래 그곳은 꽤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러 개의 위성이 행성 주위를 맴돌고, 눈부신 빛이 수면을 넘실대던 곳. 조금 모자라지만 이타적인 개체들이 마음껏 유영하던...

아무리 진절머리가 나서 고향을 떠나온 자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그게 지구인이든 6개의 촉수를 가진 초록색 외계인이든.

지구에서는 이런 걸 두고 디아스포라의 슬픔이라 부르는 모양이던데, 이걸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디아스포라라는 건 집단으로 이주해온 이주민에게 붙는 명칭인 듯 싶어서.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똑 떨어진 외계인에게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할까.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떠오르는 단어는 없었다.

우산을 거세게 두드려대던 빗방울이 점점 멎어들어가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바다를 보자고 강원도까지 온 것은 아니었기에.

내가 외계인이란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상 고향의 상실이라는 공허함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었다. 때문에 어디 사람 없는 한적한 물에 몸이나 담그며 생각을 비워볼까 했는데, 내가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물이라면 지구인들도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이었다.

지구인들은 수중호흡도 불가능한 포유류 주제에 바닷가 근처라면 펜션이고 카페고 다닥다닥 세워서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런 고로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했는데, 마침 C급 몬스터인 [검은호수악어]의 게이트가 처치 곤란이라는 소식이 들려와서 냉큼 예까지 행차하게 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검은호수악어]의 게이트 내에는 그 이름답게 큰 호수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즉, 알파우리산 외계인이 이 한 몸 여유롭게 적시고도 남은 곳이란 뜻이다.

내가 게이트 공략 의사를 내비쳤을 때 C급 게이트를 처리하는데 S급(대외적으로는)이 나선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잡음이 불거졌었다. 아무래도 겉보기엔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갖다쓰는 격이니 이래도 되나 싶었겠지.

하지만 그것 외에 공략이 시급한 다른 고등급 게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 이 부분엔 정하성과 서에스더가 큰 공헌을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이렇든 저렇든 처리가 시급한 일에 S급 헌터가 자원해준다면야 황송할 지경이었기에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내 10년 후의 목숨을 저당잡고 계신 계약자분께 허락을 구하는 일 뿐이었는데. 나는 강창호와 얼마 전 가장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메시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 내가 싱가포르에 일이 좀 있어서 한 나흘정도 한국을 비울 예정이거든. 그때까진 좀 얌전히 계셔주셨으면 하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정성스런 협박문.

요는 나흘 뒤 -그러니까 이 메시지가 온 것이 나흘 전이니 오늘-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올 예정이니 그때까지 일치지 말고 있어라, 이 말이었다. 자기가 싱가포르에 있을 때 한국 신문에 '김기려' 세 글자가 오르내리는 걸 보는 순간 재밌는 꼴 보게 될 줄 알라면서.

지금 시각은 오후 2시였다.

강창호는 지금쯤 저 하늘 위 어딘가에 떠있겠군.

나는 핸드폰을 들어 강창호에게로 전화했다. 핸드폰에서는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 하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참 다행이지. 요즘 비행기들은 통화가 가능한 것도 있다던데, 강창호가 탄 비행기에는 해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통화가 가능했어도 내 쪽에서 통화가 연결되기 전에 얼른 끊어버렸겠지만.

그럼 일전의 약속에 따라 통화도 했고, 이제 메시지만 남겨놓으면 됐다.

- 통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신 듯 해 부재중 남겨놓습니다. 정부에서 강원도 쪽 C급 게이트의 처리를 긴급하게 요청해와서요. 아무래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중요한 일이니만큼 양해 부탁드립니다.

'긴급'도 '신속'도 아니긴 했지만 이 정도의 양념은 괜찮겠지. 

만일 이 게이트로 인해 뉴스가 나더라도 강창호가 그걸 받아볼 시점은 잘 쳐줘봐야 비행기 안이다. 싱가포르는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그런데 사실 이건 어느정도 강창호가 자초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요즘 들어서 자신이 동행한다는 조건이 아니고서는 통 게이트 입장을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다. 등급이 낮은 게이트는 이상 변이가 일어날지 모르니 안 된다 그래, 등급이 높은 게이트는 또 높은대로 위험해서 안 된다 그래.

정하성이나 서에스더가 동행한다 해도

- 그래서, 네가 걔네들이랑 동행해서 어디 하나 안 다치고 돌아온 적은 있고? 그냥 얌전히 있지.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더군다나 이번 게이트는 혼자 갔다 올 생각인데 절대 허락 안 해주겠지.

그러니 이건 모두 강창호 탓이다.

게이트 근처에 다다르니 노란색 폴리스라인이 눈에 띈다.게이트 주변엔 협회에 요청한 대로 기자나 협회 직원 한 명 없이 적막한 상태였다.

덕분에 프라이빗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겠군.

나는 폴리스라인을 넘으며 핸드폰으로 게이트 입장을 신청했다. 간만의 물놀이에 들떠 모 회사의 CM송을 흥얼거렸다.

[검은호수악어]의 명칭은 왜 [검은호수악어]인가.

호수의 물이 검어서?

악어가 검은색이라?

모두 아니었다. 

호수의 물을 먹고 자란 호수 주변의 식물이 모두 검어서 '검은 호수'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검은호수악어]는 검은 호수에 살아서 검은호수악어인거고.

식물을 까맣게 만든다니, 지구인의 상식으로는 '검은 식물=죽은 식물' 인지라 호수의 물이 생명체에게 해로운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고, 다만 그 물을 먹고 자란 검은 식물의 열매에는 한가지 독특한 효과가 있었다.

바로 수중호흡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검은 호수의 물에만 적용되는 효과인데다 지속시간도 반나절 정도 뿐이라 실용성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수중호흡의 향수를 느끼는 어느 알파우리산 외계인에게는 이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이 먹이상자를 만든 기심체가 향수병에 젖은 어느 외계인을 콕 집어서 노린 건가 의심까지 들 정도로.

이제는 지난한 향수병에 눈이 돌아 아무렴 어떠냐 싶긴 한데.

갈대 따위의 풀들이 바람에 쏴아- 스치우는 소리에 잠념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어쩐지 아까 듣고 온 바다의 파도 소리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생명력으로 일구어낸 대지의 파도 소리. 머리 위의 뜨거운 태양이 이 대지의 초록빛 너울을 환히 비췄다.

나는 허벅지께에 스치는 수풀을 헤치며 호수 근처의 검은 식물 군집으로 다가갔다. 식물 군집 사이로 블루베리를 닮은 까맣고 동글동글한 열매 몇 알이 보였다.

나는 열매 두 알 정도를 뜯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열매가 입 안에서 톡 터지며 시고 떫떠름한 맛이 올라온다. 이 맛에 대해서 한 줄 평을 하자면, '효과만 아니었으면 누가 돈 주고 먹으라 해도 안 먹을 맛' 정도 되겠다. (물론 그 금액에 따라 마음을 바꿀 의향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실용성이 없더라도 게이트에서 난 열매 같은 것들은 맛만 어느 정도 보장되면 상품화가 되는 일이 잦았는데 그마저 안 된 걸 보면 말 다했지.

손으로 호수의 물을 한 입 퍼마셨다. 열매의 잔향이 아직까지 남아 입 안을 괴롭혔다. 

이따 저녁밥 먹기는 글렀군.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리니 효과를 기다릴 겸 해서 미리 사냥을 할 생각이었다. 

저 멀리에 물 속을 헤엄치는 악어떼가 보인다.

원래 물가에 이만큼 가까이 오면 악어떼가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남아야할텐데 악어떼가 저기서 여유롭게 유영하는 까닭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마나량이 이토록 쥐꼬리만하니까 누가 온 건지 만 건지도 모르는 거지. 지구인의 집 안에 쥐가 하나 숨어들어도 모르듯이 말이다. 

왠지 슬퍼지는 비유네.

아무튼, 집주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드려야겠는데, 악어떼를 불러모으는 걸로는 또 이만한 게 없었다.

혈향.

나는 [히드라]를 꺼내들어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었다. 손 끝에 맺힌 선혈이 수면 위로 방울져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악어떼가 점점 확대되어 보였다. 악어떼가 혈향을 맡고 이곳으로 헤엄쳐오는 것이다. 나는 악어떼가 뭍에 다다르기 전 얼른 호수와 멀리있는 뭍으로 뛰어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다가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달리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악어떼는 벌써 지척에 있었다.

음, 소름이 다 돋네.

암만 악어가 잘 다니기 힘든 뭍이라도 F와 C라는 등급 차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악어떼가 하나 둘씩 모여들어 내 주위를 둘러싸고, 공기 중에는 첨예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언제 악어떼가 덮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주변을 빙 둘러 다른 개체보다 1.5배 쯤은 커 보이는 이 방의 보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주머니 안의 손을 움직인다.

주머니 속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악어떼의 몸이 하나 둘씩 허물어졌다.

[깜짝상자] 만만세였다.

보스는 그래도 좀 버티는가 싶더니 그래봐야 저것도 C급 게이트의 보스에 불과했다. 마지막 보스까지 쿵하고 쓰러지자 세상엔 고요만 남았다.

음, 쉽군.

나는 풍년을 맞이한 농부가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듯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의 숨통을 끊어냈다. 보스는 죽이면 출구가 생길테니 대충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만 처리해두고.

처음에 들어왔던 게이트 입구로 잠깐 다시 나가서 핸드폰을 켰다. 게이트 안에서는 핸드폰이 작동하지 않는 탓이었다. 

게이트 클리어를 협회에 무사히 신고하고는 다시 게이트로 쏙 들어갔다. 이렇게 하면 게이트 클리어가 늦어진다고 누군가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였다.

이제 처리할 건 다 처리했고... 드디어 물놀이 시간이다!

본래의 주인들을 말끔하게 치워낸 호수는 어느 예의없는 손님 마음에 쏙 들었다.

헤엄치는데 불편한 정장 구두와 물에 빠지면 안 되는 전자기기, 무거운 아이템들은 수풀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발부터 물에 들어갔다. 물의 기분좋은 시원함이 온몸으로 찌르르 퍼졌다.

점점 수심이 깊은 호수의 중앙으로 걸어가 종아리, 허벅지, 허리가 물에 차례로 잠겼다. 몸이 점점 물에 잠기자 저항 때문에 움직이는데 힘이 들었다. 물 속으로 걸어가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가슴, 어깨, 목... 호흡기가 잠기자 잠시 멈추어섰다.

폐에 남아있는 공기들을 밀어내고 물이 새롭게 들어찬다.처음에는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물로 숨을 쉬는 것은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느껴지는 환희.

나는 원래 대기가 아닌 물에 숨을 빌려 살아갔던 사람이었으므로.

곧 머리꼭지까지 물에 완전히 잠기고, 나는 물 속에서 찬찬히 눈을 떴다.

깊은 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이다. 

한 줌 손에 쥔 투명한 물은 이렇게 모이면 푸르르게 빛날 줄을 알았다. 그 속을 훤히 내어 무언가를 넉넉하게 안아낼 줄을 알았다. 나는 그 차디찬 품 속에서 역설적으로 따스함을 느꼈다.

귀에 들려오는 먹먹한 물의 심장 고동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폐를 선명하게 훑고 지나가는 찬 물결이 느껴졌다. 

물 아래서 바라보는 햇살 내리쬐는 수면은 빛을 받은 푸른 비단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아, 나는 많은 것을 잊지 않고 살았으되 많은 것을 잊고 살았구나.

아득함에 숨이 턱 막혔다.

물이 주는 안온함이 좋았다. 가는 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로.

태초부터 물 아래에서 태어난 것들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뭍에서 난 자들이 뭍에서 가장 자유로움을 느끼듯 물에서 난 자들은 물에서 가장 자유로움을 느낀다. 

나는 뭍에서 난 몸을 가지고 물에서 난 사람인 양 자유롭게 헤엄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헤엄치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잠시만 이 안온함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눈꺼풀이 내려앉고, 몸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풍덩.

음, 풍덩?

물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빠질 때 나는 소리다. 여기엔 이제 나 말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없을텐데.

이상 변이인가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물 속에 있어 흐릿한 눈에 누군가의 검은 인영이 보였다. 역광이라서 잘 안 보이긴 하는데, 누군지는 알 듯 싶었다.그야 이 지구에서 저렇게 큰 마나가 체내에 잘 갈무리되어 있는 건 지금까지 딱 한 번 봤으니까.

강창호.

체모변색증으로 청자색이 된 긴 머리칼을 물 속에 흐트러뜨리며 내게로 헤엄쳐왔다. 

신체강화계열이라 그런지 수영도 잘 하네.

그나저나 쟤가 왜 여기에 있을까. 

통보하듯 메시지만 보내놓고 게이트에 들어간게 괘씸해서? 직접 날 잡으러 온 건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죽기 살기로 튀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쯔음에 강창호를 보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까 잠깐 시험해봤을 때 김기려는 수영할 줄을 모르는 듯 했거든. 반면 쟤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강창호를 바라보고 체념했다. 튀어도 바로잡히나 15초 뒤에 잡히나 그 정도 차이일 것 같은데 괜히 튀어서 심기 거스르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자.

눈 깜빡할 사이에 강창호는 나와 1m 정도 거리를 놔두고 있었다. 강창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고?

나는 내 앞에 들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마디가 굵고 커다란 손. 저 손을 잡으면 내가 다시 물 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칠 날이 올 수 있을까.

잠시 시선을 돌려 물 속의 풍경을 눈에 하나씩 새겨나갔다. 그리고 다시 강창호를 바라본다.

물 속 풍경과 그 속에 있는 강창호의 조합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꼭 강창호가 알파우리에 똑 떨어진 것 같은 광경. 어쩐지 지구에 똑 떨어진 나와 강창호의 신세가 역전된 것처럼 보여 조금 웃겼다.

이곳에서 수면까지는 대략 20m 남짓.

어차피 돌아가야한다면 강창호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머뭇거리다 김기려의 마르고 투박한 손을 그 손 위에 올렸다.

그러자 강창호는 내 손이 도망갈 새라 억센 힘으로 손을 잡아채고는 수면 위로 올라간다.

뭍으로의 귀환이었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나는 한참을 기침했다. 물로 채워진 폐에 다시 공기가 들어찬 탓이다.

대충 숨을 고르고, 바닥에 철푸덕 드러누워버렸다. 뭍에 사는 생명체에게 물놀이란 너무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이었다. 벌써 노을이 지는 걸 보아하니 한 5시간 물에 있었나.

반면 옆에 선 강창호는 성인 남성을 붙들고 헤엄쳐 다녔으면서 지치지도 않은 기색이다.

S급이 좋긴 좋아?

누군 이렇게 바닥과 합체되기 직전인데 말이다.

강창호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 어딘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물에 젖지 않은 가죽점퍼를 든 채였다. 가죽점퍼는 뭍에 벗어두고 물에 들어왔었던 모양이다.

강창호는 그 가죽점퍼를 내게로 던졌다.

"입어. "

나는 내 몸 위로 떨어진 가죽점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혼나야 할 상황에 이게 웬 호의인가. 통보식으로 연락해놓고는 게이트에 멋대로 입장한 것에 대해서 털릴 타이밍 아니었느냔 말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호의에 왠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

"사양하지 말고 그냥 입어. 내가 지금 네가 저체온증으로죽기 전에 향상심을 켜야하나, 그런 생각이 들고 있거든. "

"...네. "

안 입으면 죽이겠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말한다.

나는 상체만 일으켜 가죽점퍼를 걸쳤다. 젖은 정장 때문에 팔이 들어갈까 했는데 원래 주인이 워낙 체격이 남다르신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입을 수 있었다.

나는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발치에는 호수의 잔물결이 밀려와 부서지고, 노을이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여가던 차였다.

강창호가 나와 얼마간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호수를 바라보고 앉은 둘 사이의 침묵에 호수의 물소리와 바람결에 스치는 풀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창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기려 헌터는 참 사람이 예측이 안 된단 말이야. "

변수가 너무 많지, 하고 강창호가 잠시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그 머릿속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고. "

"... "

"그런 김기려 헌터께서 오늘은 무슨 생각이셨는지 궁금한데. "

파충류의 눈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평이한 어조의 물음.    

"죽을 생각이었어? "

"예? 그게 무슨... "

강창호는 왜 저런 오해를 하게 되었는가.    

나는 나의 행적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허위로 게이트 클리어 신고 후 그 게이트 안 호수에 눈을 감고 잠겨있었다라... 이거 오해할 만 하네.

"그런 거 아닙니다. "

"아니긴 무슨. 손목에 그런 상처까지 달고 있으면서. 아, 혹시 몬스터한테 다친 거라는 헛소리를 할 생각이면 집어치우고. 딱 봐도 칼에 베인 상처인 거 보이니까. "

강창호가 가리킨 왼팔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더이상 피도 나지 않길래 수복을 미루고 있었더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렇다고 [검은호수악어]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해명하기에도 애매하고. 정상적인 S급이라면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없이 어그로가 붙는 게 당연한거니까. 내가 S급인 척을 하고 있는 이상 이건 못 말한다.

...답이 없네.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오늘 내 행동은 다 해명이 안 됐다. 

게이트 클리어를 허위로 신고하고 그 게이트에 5시간을 더 머물렀던 것이나 호수에 빠져있었던 것, 손목의 상처, 그 외 등등.

그냥 죽으려 그랬다고 말하는 게 낫겠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강창호가 '그래? 그럼 내가 지금 죽여줄까? ' 하고 나올까 봐 말을 못하겠다.

지구의 옛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지. 

침묵이 금이다. 

나는 지구든 알파우리든 옛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데에는 응당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묵비권을 행사했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강창호는 내가 입을 다문 것에 대해서 추궁할 마음은 없었던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네가 왜 죽으려 했고, 그런 거엔 별 관심 없어. 뭐 어련히 이유가 있으셔서 그런 선택을 내린 거겠지. 자살은 나쁜거라느니 하면서 남의 인생에 일일이 참견할 생각도 없고. "

강창호가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이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예의 그 비즈니스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다만 우리 계약자님이 계약을 좀 소홀히 하는 듯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심기가 좀 불편하긴 한데, S급 헌터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람을 가둬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죽겠다는 사람한테 목숨 가지고 협박을 해봤자 들어먹지도 않을거고. "

"... "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도 기회를 좀 줬으면 해. "

무슨 기회? 

강창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이어갔다.

"나한테 화나서 죽으려는 게 아닌 이상에야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일 한다는 셈치고 나한테 목숨을 맡길 수도 있는거잖아. "

그러니까 강창호의 말은 '죽고싶은 마음이 들면 내게 연락해라. 내가 대신 죽여주겠다. ' 이 말이었다.

뭐 이런 포유류가 다 있지?

강창호의 저 세상 가버린 윤리 의식에 눈 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내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강창호가 어깨를 으쓱인다.

"홀로 죽어가는 건 너무 비참하잖아. 안 그래? "

강창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나를 일으킨다.

저 옆에는 강창호가 자신의 가죽 점퍼를 가져오며 같이 들고 왔는지 나의 정장구두와 핸드폰, 아이템들이 늘어놓아져 있었다.

보스 몬스터는 강창호가 처리했다고 하니 물건들을 챙겨 강창호의 안내에 따라 출구로 향했다. 

바닥에 물에 젖은 발자국이 점점이 새겨진다.

출구로 나가기 직전, 잠시 뒤를 돌아 게이트 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붉은 빛이 되어버린 노을에 온 세상이 물들어 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사르륵 부딪혀오는 풀소리.

어쩌면 이 이질적인 폐호흡에도 익숙해질 날이 올지도 모르지.

나는 서러움, 그리움, 애틋함 따위의 감정들을 이곳에 놓아두고 나의 지난했던 향수에 안녕을 고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