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창호기려] 화양연화(花樣年華)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본문은 전체 다 열람 가능하며 결제창 아래는 짧은 외전입니다.

퇴고를 안 한 글이라 지속적으로 수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량 약 9000자.

현재의 모든 것에는 과거의 발자취가 묻어있다.

그러니까, 정하성의 검술이 교과서로 검수한 듯 정확하게 떨어지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서에스더의 저주가 게임창에서 튀어나오듯 화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면, 강창호의 전투 스타일은 그의 과거를 대변하듯 어떤 운동의 영향을 깊숙히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리다.

그게 뭐였더라... 복싱? 무슨 복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검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커다란 TV 화면에 중계되고 있는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강창호의 집으로, 얼마전 나의 작고 소중한 보금자리를 무참하게 부숴버린 보상금으로 400억을 받은 것과 더불어 지구문물에 밝지 않은 외계인의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강창호의 집에 기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공원 벤치에 앉아 비를 맞고 있는 나를 보고 강창호가 뭐랬더라.

'시위하는 건가. 왜 여기서 청승이신지? '

당신이 내 집을 부숴먹어서 갈 곳이 없어졌다는 구구절절한 사정을 설명하고 그 후로 얼마간 강창호의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이제 얹혀산지도 두 달이 넘어가는데 나가란 소리 한 번을 안하는 게 의외이긴 한데...

잡념은 잠시 치워두고, 다시 눈 앞의 경기에 집중했다.

방금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의 턱에 주먹을 힘껏 꽂아넣었다.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링 위에서 휘청이고, 중계를 맡은 전 복싱 선수라는 사람이 감탄을 터트린다.

"아! 한다인 선수 지금 어퍼컷 정확하게 들어갔어요. 이대로 조금만 더 힘내주면 됩니다! "

해설은 우리나라 선수가 잘 하고 있다는데 복싱은 전혀 문외한인 나로서는 저게 잘하고 있는건지 못하고 있는건지를 모르겠다. 양궁같은 건 점수가 직관적으로 보여서 좋던데 이런 건 점수가 어디서 나는거지?

잘 알지도 못하는 경기를 보고 있는 것은 내 의도는 아니었다.

올림픽. 전 세계인의 축제라고 불리는 거대한 스포츠의 장이 4년만에 막을 올린 것이다.

던전 브레이크 이후, 평생을 운동에 바쳐온 사람보다 어제 각성한 사람이 운동 수행 능력에 더욱 두각을 보이게 되며 스포츠의 인기는 이전만 못해졌다 말할 수 있었지만 올림픽은 올림픽이었다. 일반인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운동인들의 운동 수행능력은 여전히 경탄할만한 것이었고, 올림픽 진행위원회는 시대의 흐름을 뒤쫓아 각성자 올림픽 부문을 따로 신설했다. 이에 따라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라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인의 축제라는 말답게 TV채널들은 죄다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렸다. 덕분에 채널을 돌리다가 하는 수 없이 이 외계인도 복싱 경기를 보게 된 것이고. 

그나마 복싱은 그와도 연관이 있지 않았는가. 이 집의 집주인이 전에 저런 비슷한 무언가를 했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던 것 같으니까.

빨간색 파란색 옷을 입은 인간들이 뒤엉켜 싸우는 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창 밖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인간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으아아악!! "

뭔 일이지 싶어 인터넷 창을 여니 메인 화면에 큰 창이 하나 뜬다.

축구는 역시 CBS!   한국  2 : 1  중국

방금 한국이 골을 하나 넣은 모양이었다. 그치, 아무래도 이곳 한국은 어느 나라와의 경기에도 모두 진심이지만 특히 동아시아끼리의 싸움은 무조건 이기고 봐야한다는 인식이 강하니 저렇게 격한 반응도 이해는 된다. 강창호의 집은 방음이 꽤 우수한 걸로 알고있는데, 동점 상황에서 한 골을 넣은 게 여간 감격적인 일이 아니었나보군.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점수가 표기된 창 아래로 보이는 채팅창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빠르게 올라간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ㅜㅜㅜㅜ'나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 채팅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남자의 묵직한 인기척이 들려온다. 곧 물을 따르는 소리, 종이를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내 눈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머그컵 하나가 들이밀어진다.

"뭐예요? "

"캐모마일. 누구씨가 밤중에 집을 돌아다니시는 바람에 내가 잠을 못 자겠어서 잠 좀 잘 주무시라고. "

베게를 품에 품고서 소파에 기대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소파 등받이 뒤에 서 있는 강창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커피 마시고도 잘만 자는 사람이 내 발소리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튼...

"고맙습니다. "

나는 내용물을 쏟지 않게 컵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그래. 오늘은 잠 좀 빨리 자고. "

그러더니 강창호가 제 몫의 컵에 든 내용물을 한 입 마신다. 냄새로 봐서는 내 것과 같은 캐모마일인 듯 했다.

그러고보니 이 집에는 커피머신이 있는 걸로 아는데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는 강창호가 커피를 내려마시는 걸 본 기억이 없네?

나는 의아한 마음에 강창호에게 질문했다.

"커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왜 그건 안 드시고... "

강창호가 미소짓는 얼굴 그대로 한쪽 눈썹을 살풋 찌푸린다. 그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어이없는 표정이다.

"네가 싫어하잖아. "

그거야 '커피'라는게 알파우리산 공업용 접착제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좋아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먹는 거에서 못 먹는 것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데 비위가 안 상할 수가 있겠냐고.

그런데 그건 그렇고...

"어떻게- "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말고. 내가 카페에서 커피 먹을 때마다 눈치란 눈치는 한껏 줘놓고서. "

아. 내가 그랬나?

뻘쭘한 기분에 시선을 내려 머그컵으로 고정한다. 머그컵에서 김이 아직도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지금 마셨다가는 입이 제대로 델 것 같았다.

머그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TV로 시선을 옮기자 강창호도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복싱? 아... 올림픽이랬나. "

"네. 몇 년만의 메달이라고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더라고요. 지금 하는 건 준결승전. "

강창호가 소파를 빙 돌아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소파 위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슬그머니 내려 다소곳이 앉았다. 자리도 많은데 왜 이렇게 붙어 앉는담.

"전에 강창호씨가 했다던 운동이 복싱이었던가요? "

"킥복싱. 김헌터,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기억력이 왜 그모양이야. "

강창호가 TV에서 시선을 떼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내게 핀잔을 준다. 후... 어쩌겠어. 얹혀사는 내가 참는 수 밖에. 한국에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강창호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겨 물었다.

"킥복싱이랑 복싱은 많이 다른건가요? "

"킥복싱은 주로 하체를 쓰고 복싱은 주로 상체를 쓰지. 그거 말고는 비슷해. 둘 다 링에서 하는 거고. 

"그럼 저거 점수를 어떻게 계산하는 건지도 아시겠네요. "

"뭐 대충은... "

강창호가 말 끝을 흐리더니 시선을 옮겨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룰도 모르고 보던거였어? "

"강창호씨가 했다니까 궁금해서요. "

강창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TV로 고개를 돌린다.

"점수는 명중률이랑 공격의 품질, 타격의 힘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부여해. 저기 지금 빨간 옷 입은 선수가 공격을 깔끔하게 넣고 있잖아. 저렇게 되면 판정은 저쪽으로 기울게 되는거지. "

그렇게 강창호는 복싱 문외한인 나를 데리고 한참을 룰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것저것 물어봐도 다 알려주고. 그런 강창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모르는 소년의 눈을 보는 것 같아서-

"많이 좋아하셨나봐요. 그 킥복싱이라는 운동. "

내 물음에 강창호가 침묵하면서 우리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TV에서 흘러나오는 해설의 목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고 관중들의 환호성이 스피커를 타로 전해진다. 그 공간의 열기, 쾌감, 흥분이 강창호의 녹색 눈동자 안에 아른거린다.

잠시후, 남자가 무거운 입을 뗐다.

"좋아했지. 관둔지 오래지만. "

"왜 그만뒀는지 물어도 돼요? "

남자가 컵에 든 캐모마일을 홀짝였다.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재미없는 이야기인데. "

"그 재미없는 이야기 해봐요. 나는 궁금하니까. "

강창호가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눈을 감고 고개를 위로 향했다가 다시 눈을 뜨고 TV로 시선을 옮긴다. 고민하듯 실내용 슬리퍼 신은 발을 까딱까딱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재능이 애매했어. 운동부 분위기도 나랑 안 맞았고. 집안에서도 운동하는 걸 안 좋아해서. "

강창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엘리트 체육의 한계 상 한국에서 체육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10%, 아니 1% 안에 들어도 모자랐다. 강창호는 킥복싱을 잘하긴 했지만 그것도 그저 그 뿐. 킥복싱을 자신의 업으로 삼기에는 재능이 애매했던 탓이다. 나리철강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로서 운동은 취미에만 족해야하는 것이기도 했고.

거기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운동부 문화. 선배들이 쓴 수건을 왜 후배들이 세탁해와야하는지, 선배들이 링을 차지하며 연습하고 있는 동안 후배들은 왜 줄넘기만 만개, 이만개씩 하고 있어야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겹쳐 결국 킥복싱은 취미로 남겨놓게 되었는데,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며 S급으로 각성하고 난 이후 자신의 힘을 견딜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고.

"운동을 취미로만 삼아야한다는 건 나도 납득했어. 원래 좋아하는 건 취미로만 해야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운동을 업으로 삼는 걸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예 못하게 된 건 좀... 아쉽긴 하네. "

강창호의 말이 끝나자 스피커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며 심판이 빨간 옷을 입은 한국측 선수의 손을 들어올리는 것이 화면에 잡힌다. 한국 선수가 결승에 진출한 것이었다.

과거의 편린들은 현재에 묻어난다.

강창호가 보여줬던 전투 스타일, 자신은 싫다고 말했지만 운동부 문화가 배어든 듯 은근하게 나이를 언급하던 모습이나 지금 저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

자신의 과거를 되짚듯 그리움을 느끼는 저 눈.

그것들에서 나는 강창호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다.

일전에 내가 무명굴에 들어가려 할 때에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번 던전은 좀 그런데. 음, 정 거길 가야겠거든 우선 내가 주소 찍어주는 체육관부터 잠깐 좀 들러줘.

“갑자기 체육관이라고요?”

-원래 스트레스 해소에 스포츠만큼 건전한 게 또 없잖아. 내가 사실 학창 시절부터 킥복싱을 꽤 오래 배웠어. 이왕 말 나온 김에 김기려 헌터한테도 전수해 줄게.

라고 했던 것은 아주 작은 진심의 조각이 포함되어 있던 건 아닐까.

어둑한 거실에 켜진 TV의 요란한 불빛이 남자의 얼굴에 드리운다. 형광색 녹안이 그늘져 언뜻 검은색으로 보이며 던전 브레이크 그 이전, 평범하게 운동을 하던 학생 강창호의 모습을 어림하게 한다.

예전에 보았던 화양연화라는 옛날 영화가 떠올랐다.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은유하는 말이라고 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내포하는 말이라고.

당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지금이 아니라 그 이전 언젠가였던 것인지 그게 궁금해져서...

당신은 사실 세간이 떠들듯 던전 브레이크의 수혜자가 아니라 그 이전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나를 만난 것도 후회하고 있을까.

목이 타는 느낌에 캐모마일 차로 손을 뻗는다.

그러다 손을 잘못 놀려 차를 엎어 버렸다. 여전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물이 팔뚝에 엎질러졌다.

뜨겁고, 아프고, 쓰라렸다.

차단할 수 있는 고통의 역치를 넘지 못한 얕은 화상의 고통은 나를 갉아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처치해야하는지 몰랐기에 그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때 머그컵이 나동그라지는 소리에 이쪽을 바라본 강창호가 내 손을 잡아채고 황급히 나를 화장실로 끌어갔다.

화장실 불을 켜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강창호의 손에 든 샤워기 헤드에서 나온 물이 내 팔뚝을 차게 식혔다. 갑자기 들어온 밝은 곳에 잠시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명순응을 마치고 그제서야 제대로 바라본 내 팔뚝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뜨거운 찻물이 닿은 팔뚝이 찬 샤워기 물 속에서도 화끈거리는 듯 했다.

강창호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마른세수를 한다.

"너는, 왜 늘 나를 신경쓰이게 해? "

무언가를 내리눌러 참듯이 억눌린 목소리였다.

"네가 신경쓰여. 기분 나빠. "

진심이란 손 안에 가둔 물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듯 그 주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불쑥 비어져나오는 것이었다. 강창호는 자신의 진심을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툭 내뱉었다. 중얼거리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시간이 지나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어느정도 진정되자 강창호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문을 열고 화장실을 나서려는 그를 내가 붙잡았다. 화장실에는 습기가 가득 차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여름밤의 공기는 따스하기만 하다. 나는 그의 젖어있는 잠옷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그와 눈을 맞췄다.

"강창호씨, 소매가 젖었어요. "

같은 감정을 품고있는 두 눈동자가 열기를 품고 나란히 서로를 바라본다. 강창호가 문을 뒤로하고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며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나도 알아. "

누구의 것일지 모를 캐모마일 향이 화장실을 덥혔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