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기려] 파리스의 황금사과
불행한 행운아의 비극적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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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평소와 같던 어느 날.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아스팔트를 끓이고, 거리에는 녹음이 푸르르며, 언제와 같이 정해진 던전을 돌고, 도시락을 까먹고, 누군가를 생각하던 어느 날.
던전의 클리어 보상으로 엘릭서가 나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런 건 꿈에서나 상상했지 실제로 내 손에 떨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처음엔 기쁨 뿐이었던 것 같다. 이걸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눈 앞의 확실한 희망. 헌터 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내가 S급 헌터라서 다행이다, 내가 이 던전에 들어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이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하지만 그 '다행이다' 끝에는 결국 이런 물음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이건 누구에게 줄 건데?
마력중독증에 빠진 어머니 혹은 김기려 헌터.
나는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내 손에 쥔 엘릭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치료제이자 나를 나락으로 인도할 독약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저울질해야하는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그러니 지금부터 적어내려가는 이것은 나의 비극 신화이다.
파리스의 황금사과
○
처음엔 어머니를 살리는 쪽이 맞다고 생각했다.
김기려 헌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같은 심성이라면 오히려 어머니를 살린다는 내 결정이 옳다며 지지해주리라 여겼고.
김기려 헌터는 아직 살 날이 남아있지만, 우리 어머니는 저렇게 병원 침상에서 늙어가 그대로 당신이 낳은 잘난 아들 얼굴 한 번 못보고, 당신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 못보고 돌아가실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어머니께 엘릭서를 쓰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해왔던 것 같다.
어느 한 선택이 완전한 선택이라 믿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기에.
불완전한 인간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고, 그것은 항상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파리스가 불러일으킨 결과는 어떠했던가.
이 어리석은 이야기는 수 세기를 지나 다시 어린 후손의 손에 쥐어져버렸다.
파리스는,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인가.
○
어머니의 병실에 들렀다.
품에 내 심장보다 무거운 엘릭서 병을 품은 채였다.
병원 밖은 여름이라 만물이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환자와 보호자가 나란히 산책을 하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병원 안은 어느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무균실이다. 그저 아픈 환자들과 바쁜 간호사들과 피곤한 의사들이 뒤엉켜있는 하얀 상자일 뿐.
어머니가 이 상자의 어디에 계셨더라.
몇 달 전엔가 병원 사정상 어머니의 병실을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되겠느냐 해서 알았다고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일이 바빠 온 적이 없어서 위치는 모르겠다. 불효막심한 아들은 벽에 붙어있는 병원 배치도를 손끝으로 훑으며 어머니의 병실을 찾았다.
혹자들은 나를 두고 던전 브레이크가 만들어낸 행운아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불리는 입장에서는 글쎄. 어떻게 보면 던전 브레이크는 어머니의 건강과 내 인생의 입신양명을 맞바꾼 셈이라 나도 나를 행운아라고 불러야할지 불운아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어서.
가족 하나 병수발 드느라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곳도 많은데 그런 걸 생각해보라고 하면 '아,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인건가' 싶다가도 정말 운이 좋으면 어머니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돈이 많아서 다행이다, 라고 위안 삼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을 잃어버린 탓이다. 이런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기만으로 들릴 테지만, 남들보다 덜 아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1인실로 되어있는 병실 문 앞 아크릴 네임택에 끼워진 종이 위 어머니의 이름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쩐지 병실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어머니의 몸에 연결된 이런저런 장치들을 볼 때면 꼭 내 욕심으로 어머니를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병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병실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온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문 앞에 서 있는 웬 키 큰 남자의 인영에 움찔 놀라더니 이내 나인 것을 확인하고 인사한다. 나도 얼떨결에 마주 인사하자 아주머니가 내게 묻는다.
"어머니 뵈러 오셨어요? 잠깐 자리 비워드릴까요? "
이대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싶은 모순된 마음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하지만 이미 간병인 아주머니를 마주친 이상, 병실 문 앞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다 하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1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
간병인 아주머니가 물수건이 든 바구니를 가지고 어딘가로 향하고, 열린 문 앞에 홀로 남겨진 나는 병실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잠든 자의 병실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과 수액이 꼭지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찬다. 병실의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오고 여름날의 햇살이 창가에 따스히 맺힌다.
잠시만 서있어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바깥 날씨와는 달리 연중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쾌적한 병실 한 가운데, 어머니가 잠든 듯이 고요한 얼굴로 누워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나도 모르는 주름들이 몇 개 늘어나 있었다. 어머니의 시절은 던전 브레이크 그 이전에 멈춰 있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늘 그렇듯 흘러간다는 증빙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하성이. "
눈물은 나지 않았다. 마음에 흉터처럼 새겨진 상처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나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고는 돌아오는 답 없는 대화를 어머니와 몇 마디 나누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죠. 죄송해요. 일이 바빠서.
...사실 이건 변명이고, 무서워서 그랬어요. 내가 못 본 사이에 어머니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걸 보는 게 두려워서.
밖은 벌써 한여름이에요. 오후 시간대에는 밖에 잠깐만 서있어도 푹푹 찌더라고요. 매미 소리도 이제 여기저기에서 슬슬 들려오는 것 같고. 폭염 특보가 너무 자주 내려져서 조금 걱정이에요.
어머니와 살았던 그 동네도 오후에는 30도를 훌쩍 넘어가더라고요. 예전에 한 번 여름에 에어컨이 고장났을 때 너무 더워서 물 얼린 페트병을 안고 자고 그러기도 했는데 기억나요? 전 요즘 그때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땐 진짜 더웠는데 여긴 항상 시원하니까... 그래도 여기보다는 거기가 더 좋죠? "
침대에 누워있는 잠든 자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는, 일어나서 제게 잘했다고 안아주실까요. "
어머니가 알던 세계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해버린 세상이다. 툭하면 몬스터라는 알 수 없는 이계의 생명체가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은 마나라는 새로운 힘을 이용해 마법을 부리듯 허공에서 불을 만들고, 비를 뿌리고, 바람을 일으킨다. 이런 세계에서 의식을 되찾은 어머니는 과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해나갈 수 있을까. 의식을 되찾게 만든 나를 원망하지는 않으실까.
세상이 만들어 준 답을 좇아 공부를 하고, 내신에 맞춰 수의대에 진학하고, 그렇게 평범한 삶을 꿈꿔왔던 어린 내게 던전 브레이크 이후의 세계는 이정표 없는 갈림길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어머니라는 등불마저 잃어버린 채로 어찌저찌 살아온 내게 엘릭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질문이었다. 이럴때는 누구에게 물어야하는건지, 그런 건 배운 적이 없는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가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가 마른 세수를 한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엘릭서 병이 어쩐지 날 구속할 족쇄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를 살릴 치료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뤄두기로 했다. 어머니는 내일도, 모레도 같은 모습으로 병실 침상에 누워 나를 기다려주실테니까. 생을 저울질하는 어려운 질문이 어리석은 내게 던져졌으니, 이런 망설임쯤은 어머니께서도 용서하시지 않을까. 그 언젠가는 '하성아, 잘했다.' 라는 말을 들으며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어머니께 "나중에 또 올게요. " 하고 인사하며 가슴팍에 엘릭서를 품은 그 채로 병실을 나섰다.
○
"하성아, 정하성! "
저 먼 곳을 유영하던 의식이 눈 앞의 노란 염색모의 남성의 부름에 명정해진다.
"...네. "
"무슨 일 있어? 통 집중을 못하네 얘가. "
한때 눈코뜰새 없이 던전을 돌았던 경험 덕에 이제는 정신을 다른데에 두고서도 A급 이하의 던전들은 수월하게 클리어가 가능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몬스터들은 불에 바싹 구워져 검은 재 상태로 내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기계적으로 몬스터를 해치운 덕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처리에도 옆사람까지 챙겨가며 던전을 돌았던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 김기려에게로 간 몬스터까지는 잡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김기려의 앞에도 몬스터 사체로 이루어진 작은 산이 쌓여있었다.
아,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시다고 던전 공략은 내게 맡긴다 하셨었는데.
그제서야 든 생각에 김기려의 안색을 급하게 돌아보니 그는 평소보다 두 배는 창백해보이는 낯빛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
"어어 괜찮- "
그렇게 말하며 괜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던 남자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로 피를 울컥 토해버렸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무죽죽한 핏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핏물이 역류하며 어딘가에 잘못 걸렸는지 남자는 한참을 사레들린 듯 기침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기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걱정만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 나는 그의 생명을 저울질해야한다.
그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안녕을 위해 그를 모른 척하는 내 자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뱃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듯 했다.
나는 피를 토하는 남자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의 안위를 챙겼다. 정작 피를 토한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도 내 걱정을 했지만.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거냐고 따져묻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픈 사람에게 화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의 걱정을 온 몸으로 받으며 함께 출구로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김기려는 게이트 밖으로 나와 피 묻은 정장을 갈아입고서는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회색빛의 우중충한 건물 가운데 핑크빛으로 물든 화사한 가게 하나.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그는 내게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서는 가게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키오스크를 붙잡고 쩔쩔매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그를 돕고싶지만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으니 밖에서 그저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 곧 핑크빛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남자에게로 다가와 키오스크 사용을 돕는다.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저 남자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희안하게 전자기기를 잘 못 다뤘다. 그 모습이 못내 웃겨서...
"... "
그래, 김기려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젊은 나이였다.
아니, 젊다기보단 어린 나이였다.
그런 어린 나이에, 김기려는 불치병에 걸렸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김기려를 바라보며 미소짓던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물에 녹은 소금처럼 스르르 지워졌다. 미소 대신 얼굴에 남은 것은 내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얼룩덜룩한 죄책감이었다. 어쩐지 김기려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져 바깥 그 어드메로 시선을 옮겼다.
가로수는 녹음이 푸르르게 우거지고 매미 소리는 우레처럼 쏟아진다. 정수리에 내리쬐는 여름날의 태양이 서럽도록 찬란했다.
만물이 생명력을 꽃피우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등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김기려가 가게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왠지 그와는 안 어울리는 핑크색 쇼핑백이 들린 채였다. 그는 그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단 거 먹고 기분 풀라고. "
나는 머뭇거리다 김기려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쇼핑백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왔다.
"저번에 여기 아이스크림 가게 지나갈 때, 네가 아빠는 외계인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거랑 이거저거 담아봤는데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다. "
그러면서 '내 주변 사람들은 희안하지... 다들 외계인을 좋아한단 말이야. ' 하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내가 이런 질문을 건넨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제가, 안 답답하세요? "
내 말에 김기려의 몸이 작게 멈칫하는 것이 보인다. 김기려의 표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오랜기간 그와 함께한 경험으로 그의 감정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건 그가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김기려가 팔짱을 끼고 눈동자를 모로 굴리며 "으음... " 하고 침음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답한다.
"...여름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
그래, 여름이었다.
꽃들이 폭죽처럼 만개하고 벌들이 웅웅거리고 그 짙은 꽃내에 머리가 잠깐 이상해지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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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와 핑크색 쇼핑백 안의 커다란 아이스크림 컵 뚜껑을 열었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내용물을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 뒤섞여있었다.
그럴 수 밖에. 쇼핑백에는 그 흔한 드라이아이스도, 보냉백도 없었으니. 키오스크 사용이 서투른 김기려가 그만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가져와 액체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었다. 다 녹아 뒤섞여버린 아이스크림의 맛은 달고 새콤하고 민트향이 났다.
"이게 뭐야... 바보같아... "
미지근한 아이스크림의 맛에 나는 그만 웃는 듯이, 우는 듯이 흐느낀다.
죄책감, 미안함, 설움 따위의 감정들이 눈에서 방울져 흘렀다.
그날 내 눈물의 맛은 달고 새콤하고 민트향이 났던가.
○
감기에 걸렸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S급 헌터인 내가 걸렸다.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몸이 아프나 정신은 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뇌가 익어가는 듯 했다. 약을 먹어 몽롱한 머리에 침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침대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밥을, 먹어야하는데...
밥 때가 한참 지난 오후 3시였다. 뱃속에서도 밥을 달라 아우성이지만 침대 밖으로 발을 디딜 기력조차 없었다. 식욕과 수면욕의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수면욕이 승리를 차지했다.
오랜만의 휴식이라는 자각을 할 새도 없이 또 그렇게 수마에 빠져들려 할 때였다.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길드 직원인가. 내가 또 처리해야하는 서류가 있나.
어차피 지금은 게이트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몸, 서류 작업이나 해놓자 싶은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문을 여니 그곳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김기려였다.
"헌터님이 여기는 어떻게... "
"감기 걸렸다며. 너 또 그렇게 밥 안 챙겨먹고 있을까봐. "
김기려가 제 손에 든 죽 봉지를 들어보였다.
"나도 죽은 만들 줄 알긴 한데 만들어 먹는 죽보다 사먹는 죽이 더 맛있더라고. 괜히 대기업이 아니라니까. 그래서- "
죽을 좀 사왔는데, 라는 김기려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 눈물을 본 탓이다. 자신보다 큰 멀대같은 남성이 고작 눈물 몇 방울 흘렸다고 그 무표정한 얼굴에 파문이 인다.
"많이 아파, 하성아? "
좋게 말해도 다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차갑게도 들릴 평소와 같은 음성에 담긴 다정한 말에 나는 무너져내렸다.
현관 앞에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물었다.
"헌터님은, 왜 저한테 잘 해주세요? "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기려의 손이 내 등에 닿아온다. 토닥이는 것이었다.
"저 흔들지 말아주세요, 제발. "
애원하는 목소리로 김기려에게 말했다.
얼굴에서 손을 떼고, 눈 앞에 보이는 김기려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눈물에 젖고 열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김기려를 마주했다.
신음하듯 끓는 목소리로 절절하게 부탁했다.
"내가 당신을 선택할까 봐, 너무 두려워. "
내가 어머니가 아닌 당신을 살리려고 할까 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새어나온 진심이었다.
지혜도, 권력도 아닌 사랑을 택했던 파리스의 말로는 어떠했던가.
이 어리석은 후손은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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