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누구나 이상한 사랑을 한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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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포터 드림: 여캐 C, 남캐 R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나의 마녀> AU 인간 R X 마녀 C]
마녀는 누구나 이상한 사랑을 한다 下
: 인간 R X 마녀 C
C과 R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R에게서 기세등등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의 주변으로 사나운 마력이 해일처럼 넘실거렸다.
C은 그가 당장이라도 도약해 이쪽을 공격해 올까봐 조마조마했지만, R은 의외로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기만 할 뿐 저와 로잘로테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단지 제가 더는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서서 이쪽을 노려만 보았다.
제가 아는 R이라면 당연히 불같이 화를 내면서 곧장 마법 공격을 퍼붓고, 로잘로테를 날려버리고, 분풀이로 저까지 죽여버리고서, 또 다음 생에도 찾아와 다시 한 번 목숨을 앗아 갈 줄로만 알았다.
얼마를 같이 살았어도, C은 R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매번 알기 어려웠다. 저 성격에 우리를 얌전히 보내줄 리가 없을 텐데. 아니다. 어쩌면, 어차피 이 세상에서 어디를 가든 우리는 또다시 만날 것이고, 불멸과 마력을 쥐게 된 네게 나는 손바닥 안일 터이니. 단지 구태여 지금 추격할 필요가 없어서 유예 기간을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
C은 로잘로테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이제 더는 R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아직도 그녀와 저 모두 그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선득한 안광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휴.”
로잘리테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R에게서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는 투로, 그녀가 C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 쫓아와서 다행이야. 솔직히 저 녀석, 주인님이 없는 동안 엄청 컸거든. 점점 괴물같이 성장하고 있어. 쫓아왔으면 아마 내 마력으로도 맞서기는 간당간당했을 거야.”
바보 주인님. 그러게 왜 R에게 죽어줬어. 저게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 줄 알고. 로잘로테가 나지막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로잘로테.”
하지만 로잘로테가 무어라 더 잔소리를 하든, C은 마냥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평소라면 웃음기는 찾아보기가 힘든 그녀였지만, 반복되는 윤회 끝에 오랜만에 로잘로테를 만나서, 또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 앞섰다.
참 나, 화를 내도 좋다고 웃는 주인님이라니.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제 주인을 내려다보며, 로잘로테가 ‘어이없어….’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웃었다.
오랜 세월 끝에 재회했기로서니, 인간이 된 마녀와 그 사역마는 하늘을 날며 조잘조잘 긴 대화를 나누었다. 나누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그 대화가 끝나갈 무렵, 먼 땅에 있는 바다마을에 도착했다.
“여기, 내가 그간 살던 곳이야.”
로잘로테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을 지나, C을 구석진 절벽에 있는 외딴집으로 이끌었다. C은 로잘로테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조심스레 실내로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저와 취향이 많이 비슷해 보이는 집 구조며 가구들, 오밀조밀한 장식품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가 없어도 이렇듯 번듯하게 살림을 꾸리고 혼자서 잘 살아왔다니, 새삼스레 로잘로테가 기특해졌다. C은 그녀가 소중하게 모아 둔 삶의 흔적들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C에게 충분히 둘러볼 시간을 준 뒤, 로잘로테가 말했다.
“주인님, 앞으로 나랑 여기서 살자.”
그 말을 꺼내면서 모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하는 걸 보아, 다시 함께 생활할 날을 꽤 오랜 시간 고대해 왔던 듯했다. 로잘로테가 뿌듯해하며 C이 좋아할 만한 집의 여러 매력 포인트들을 소개했다.
어차피 어디에서 살아가든 상관없는 몸이었다. 내가 내 사역마의 곁이 아니면 달리 어디서 살아야 할까. 이후 C은 로잘로테의 바람대로 그녀와 함께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로잘로테는 지금까지는 C이 자신을 지켜줬다면 이제는 본인이 C을 지켜줄 차례라면서 사역마 된 권리로 그녀의 보호자가 되기를 원했다. 지금 그녀는 모든 힘이 사라진 영락없는 인간에 불과하니, R에게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같이 살 필요가 있다는 변명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로잘로테의 그런 피력이 없었더라도 C은 몇 번이고 기꺼이 로잘로테와 삶을 영위하고자 했을 것이었다. 그야 로잘로테는 그녀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사역마였고, 다시 말해 둘도 없는 가족이었으니까. 그녀는 R을 사랑하듯이 로잘로테 또한 사랑했다.
바닷가 오막집 생활은 순탄했다.
매일 같이 불어오는 해풍에 가구에는 소금기가 어리고, 하루아침마다 널뛰기를 하는 낮밤 온도 차에 집안은 곧잘 뜨거워지고 또 차갑게 식었지만, 단불편함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로잘로테와 함께여서 모든 나날이 행복했다. 실로 이렇게 둘이서만 사는 것은 꽤 오랜만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다.
R은 뜻밖에도 C과 로잘로테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늘 최고를 탐하고, 어떤 환경에서건 정점만을 바라며 성취욕에 목마른 인물이었으니, 두 사람을 쫓아오는 대신 마법이나 불멸 외 제 손이 닿지 않은 다른 새 분야에 빠져들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로잘로테의 표현을 빌리건대, 자신이 ‘마녀의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혹은 사랑이 맞다고 하여도 C에게 불멸을 되돌려주기는 싫어서 얼굴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고.
지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이따금 집안에 정적이 찾아오면, 로잘로테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어쨌든, 주인님은 반드시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 하고. 그녀는 R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아서 도리어 다행이라고 했다.
C은 그대로 로잘로테와 둘이서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을 보낸 뒤, 금세 임종을 앞둔 노년이 되었다.
C은 병상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좀 전부터 로잘로테가 잠들지 말라며 끝말잇기를 하자고 했는데, 점점 생각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어지고, 몸도 나른하니 힘이 빠졌다. 이번 생의 수명은 슬슬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꾀꼬리.”
“리본.”
“본질.”
“질서.”
“서약.”
연결점이 있는 듯 없는 단어들이 번갈아 튀어나왔다. C은 색색거리며 마른 숨을 내쉬었다. 로잘로테가 다음 답을 내놓았다.
“약속.”
하지만, C의 차례에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숨이 꺼졌다.
“…….”
로잘로테는 더는 맥박이 뛰지 않는 C의 손목에 말없이 이마를 문질렀다. 그녀는 죽음이 점점 앗아가고 있는 C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이 땅에 붙들어 두기라도 하려는 듯, 긴 시간 C의 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로잘로테의 시선이 C의 시신에 붙박였다.
사랑하는 주인, 그리운 주인, 늘 보고 싶은 주인.
C, 나만의 C.
로잘로테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녀에게 C의 죽음은 그것이 마녀의 끝이었든 인간의 끝이었든 간에 변함없이 슬펐지만, 얼마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전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저와의 기억을 가진 C이 다시 눈을 뜨고, 걷고, 뛰고, 독립할 나이가 되어 저를 찾아오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릴 준비를 마쳤다.
“얼른 와, 주인님.”
로잘로테의 작은 다섯 손가락이 C을 향해 펼쳐졌다. 그녀는 C의 시신에 보존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허억……!”
그때, 별안간 섬찟한 기운이 몰아닥쳤다. 로잘로테는 재빨리 재주를 뛰어넘으며 뒤를 돌았다.
커다란 키로 출구를 가로막은 채로, R이 서 있었다.
로잘로테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훅 치솟은 긴장감으로 그녀의 심장이 사납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는 분명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서 느껴지는 이 마력량은, 광활한 중력은 무어란 말인가. R은 로잘로테가 C을 빼돌려 도망친 그날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이 성장해 있었다.
‘괴물같이도 자랐구나, R….’
R의 몸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마구 흘러넘쳤다. 후천적으로 마법사가 되고도 이만한 성장률이라니, 태생부터 타고난 마법사였다면 가히 세상 하나쯤은 거뜬히 멸망에 빠뜨릴 수 있을 만한 재목이었다.
로잘로테는 온몸으로 C을 방어하면서 그를 경계했다. 그의 마력은 꼭 신경이 잔뜩 곤두선 사람처럼 날카로워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에 크게 동요한 사람처럼 마구 울렁거려 보이기도 했다. 로잘로테는 그 기세에 압도당해 반쯤 얼어서 그를 바라만 보았다. 왜 찾아왔냐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R은 말이 없었다. 그는 마력이 한껏 신경질적으로 곤두서 있는 것과 대비되게, 몸가짐만큼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툭하면 소리 지르고, 화내고, 분노로 시끄러웠던 어린 모습은 더는 없었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저벅, C의 시신에 다가섰다. 그의 눈길이 한참 동안 진득하게 C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끝에, 그 자신도 로잘로테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물었다.
“……죽은 거니.”
그제야 로잘로테의 입이 마법에 걸렸다 풀려난 것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날을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그깟 사실쯤은 두 눈이 달려 있다면 한 눈에 알 수 있겠지. R, 네가 이곳엔 왜 찾아왔지?”
로잘로테의 동공이 좁아졌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R을 노려보았다.
겉모습은 평범한 청년이 분명하거늘, 꼭 그 알맹이는 세월에 지치고 피곤에 절어버린 노인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젠장할, 가져가.”
“뭐?”
로잘로테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R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뒤,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빌어먹을 마법이고 불멸이고, 다 가져가라고.”
…….
왜?
로잘로테의 눈이 흔들렸다.
‘그’ 탐욕스러운 R이 기껏 손에 넣은 불멸을 포기한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대체 왜?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포기는 기실 다 거짓부렁이고, 이제는 저마저 어떤 의식의 제물로 바쳐 버리려는 속셈일 수도 있지 않은가. 로잘로테는 잔뜩 미간을 구긴 채 R을 쳐다보았다. R이 어떤 복받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소 격양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지난 50년이 넘는 세월을 다 어디에 꼬라박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50년만 생각하면 아주 울화가 치민다는 듯 두어 번이나 더 숨을 고른 뒤에야, 그가 건조하게 마른 입술 사이로 본심을 흘려보냈다.
“…매번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죽음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삶도, 약해 빠진 몸도, 너희와 월등히 차이 나는 신체 조건도, 그 모든 약점을 짊어진 내 존재 자체도. 내 통제를 벗어난 주변의 모든 것은 죄 짜증이 났는데…….”
“…….”
“……이 거지 같은 증세에 시달리며 기약 없는 세월을 사는 건, 이 여자가 내 손안에 없는 건 더 화가 나.”
지쳤어. 그가 중얼거렸다.
로잘로테는 그런 그에게 숨겨둔 진짜 의중은 없는지 의심하며, 묵묵히 감정 상태를 관찰했다.
그냥, 그가 별안간 이렇게 변해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그 50년이란 세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이 안 됐다. 몇 번, 몇십 번의 생을 거쳐 몇백 년에 이르는 삶을 보내고, 비로소 불멸을 손에 넣고서야 이제 와 그깟 것은 다 필요 없어졌다니.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녀들 특유의 이상한 사랑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아직도 제 감정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것도 셋째 치고, 자기가 C을 수없이 죽였을 때는 괜찮았지만 이렇게 C이 먼저 도망치고 떠나버리는 것은, 못 견디게 싫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C이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이 C을 기다리는 것은 끔찍하게도 싫어서 차라리 다시금 죽음을 맞이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R, 한결같이 이기적인 인간이로구나.’
뭐 이런 자기밖에 모르는 녀석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 당장에라도 그 고약한 심보를 물어뜯고, 너 때문에 C이 대관절 몇 번째 죽는 것인지 아냐며 쏘아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로잘로테는 이를 가는 것으로 욕지거리를 삼켜냈다.
C만 아니었다면 저깟 애송이 진작 죽여버렸겠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차피 지금의 그녀는 R을 이길 수도 없었다. 최소한 C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그와 제 목적이 일치했으니 되었다.
“……그럼 술식을 되돌려라. 네 영혼이 담긴 성물을 파괴해, R.”
로잘로테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반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R을 노려보았다. R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툭 가방을 내던졌다.
와르르. 안에 있던 성물들이 쏟아졌다.
“네 마음대로 해.”
저 성물을 다 파괴한다면 아마, 그 안에 봉인된 자신의 영혼 조각들은 전부 본체를 찾아 제게로 흡수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
저 고양이는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죽도록 증오했으니, 한 번쯤은 그 손에 죽어줘도 되겠지.
R은 저를 파괴하는 일은 로잘로테에게 맡기고, C 때문에 아주 이골이 난다는 듯 애꿎은 미간만 꾹꾹 지압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다크서클이 짙게 깔린 눈이 C의 시신을 훑었다. 이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R은 제가 보낸 모든 세월을 떠올렸다.
***
R은 쑥대밭이 된 숲속에 서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하늘만 응시했다. 저 멀리 그 새끼 고양이에게 이끌려 날아가는 C가 보였다.
감히 이 몸에게 되지도 않는 말들만 지껄이고선 먼저 자리를 뜨려 하다니.
그는 두 사람이 괘씸해져 당장 뒤쫓아가 일격으로 죽음을 선사해 줄까 고민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두 사람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저 뒤늦게나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저 족속들을 쫓아가야 하지?
이대로 둔다면 둘 다 내 눈에 띄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살려 들 텐데, 내가 왜 굳이?
더욱이 로잘로테에게 전혀 납득되지 않는 해괴한 말들을 들은 직후였기 때문에, 이대로 저들을 쫓아간다면 그녀의 말대로 C에게 사랑, 까지는 아니더라도 꼴사납게 집착하는 꼴밖에는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R은 그냥 이번 사건을 기회로 두 사람을 아예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했다. 그리고 C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 병증을 없애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법을 걸고, 그 어떤 마법약을 복용해도 R의 병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로잘로테가 뻔히 사랑이라고 답을 알려줬는데도 그것은 무시하고 애초 증상의 전제를 알 수 없는 ‘병’이니 ‘저주’이니 하는 것들로 상정했으니, 그렇게 틀려먹은 가설을 토대로 제조해 낸 마법약이 무엇이든 통할 리가 없는 것이 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눈먼 R이 알아차릴 리가.
결국, R은 C을 다시 찾아가기까지 약 50년이 넘는 세월을 밤낮으로 저를 괴롭히는 증세를 없애는 데만 몰두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불멸을 연구하던 때와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차라리 C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거나 ‘사랑’을 없애주는 마법약을 복용한다면 성공 확률이 100%에 근접했을 텐데, R은 둘 중 그 무엇에도 직접 손대고 싶지 않아 했다.
사랑 소멸 마법약이야 응당 이 뭐 같은 감정이 사랑일 리 없다고 워낙에 못을 박고 부정하기에만 바빴기 때문이었고, 기억 소멸 마법은 또 자기가 자기 병증 하나를 통제 못 해 머리에까지 손을 대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고 언짢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더욱이 C과 존재값이 뒤바뀌면서 그녀에게 오블리비아테 주문 이전의 기억들이 모두 되살아났듯이, R 또한 모든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기에 기억에는 더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반감 또한 존재하기도 했다. 고작 C 하나 때문에 본래 제 것인 기억을 삭제하는 일만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마법이 성공한다 한들 전생에 그러했듯 어김없이 자신과 그녀는 또 만날 것이었으니.
그렇다 보니 R은 태어나 처음으로 이만큼 지치고, 화가 나고, 소득 하나 없을 수가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고도 지랄맞게 가슴은 뛰어대서,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열불이 나기도 했고.
‘짜증 나…….’
그리하여 아주 긴 부정 끝에, 그나마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 셈이었다.
죽음도 싫고, 환생도 싫고, 약한 것도 싫어. C에게 불멸을 돌려주는 것도 싫어.
그런데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헛세월을 보내버린 나 자신은, 그녀가 내 손이 아닌 타인의 손에, 또 죽음의 손에 사후세계로 도망치고 그동안에도 나는 어김없이 이 빌어먹을 증세에 시달리며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아주 찢어지게 더 싫어.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금쯤 하하 호호 웃으면서 단둘이 살고 있을 C와 그 새끼 고양이 나부랭이를 떠올리면, 훨씬 더 부아가 치밀어오른다고.
…….
그러므로 종국에 R은, 온갖 패악질을 부리면서도 로잘로테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인정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빌어먹게도 이 증세를 없애려면 C에게 불멸을 되돌려주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이 옳아 보였으니까.
그러니 C.
본래 네 것이었던 목숨을 내가 돌려준다면, 너도 내게서 저주를 거두어 줄지 한번 보자고…….
***
“─허억.”
C은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며 갈급히 숨을 들이마시자, 폐에 약간은 뻐근한 느낌이 들더니 산소가 공급되었다. 그녀는 몇 번 더 호흡을 반복하면서 가슴을 움켜쥐고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다. 사락, 흘러내린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회색 머리…….’
C은 조심스레 제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익숙한 질감, 익숙한 색, 익숙한 손목의 지름, 익숙한 체격.
그녀는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온몸에 슬었던 녹이 쨍그랑 깨졌다. 옷 대신 덧입은 마비의 세월이 떨어져 내린 것처럼, 몸에 온기가 돌고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간 제 부드러운 피부를 만져보았다.
“…….”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몸이 확실했다. 신에게 새로 점지받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본래 날 때부터 제 것이었던, 제 첫 번째 몸. 마녀의 육신.
C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폭신하게 쿠션을 깐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언젠가 로잘로테가 보존 마법을 걸어줬던 그대로였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풍경 역시 마지막으로 머무른 로잘로테의 오막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높은 천장이며, 부서진 것을 누군가 서툴게 수복한 듯 얼룩덜룩한 골조, 익숙한 가구와 제가 하나둘 손수 꾸려갔던 살림살이가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꼭 꿈을 꾸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혀, C은 얼마간 제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또 모르는 곳에서 새로이 태어났어야 할 자신이 이번에는 원래 몸으로 되돌아와 삶을 시작하다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하나도 먼지가 쌓이지 않은 관 테두리를 쓸어 만졌다.
‘설마, 이건…….’
비로소 제가 제 몸을 되찾을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C은 긴 옷자락을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설마, R이 술식을 고친 건가?
…….
그 애에게 득 되는 점이 하나도 없을 텐데, 왜?
C은 비록 사랑에 눈먼 마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객관성 하나조차 확보하지 못한 마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R이 제가 만났던 그 어떤 아이보다도 가장 불행하고, 그러므로 탐욕스럽고, 또 그렇기에 사랑스럽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R이 기껏 얻은 불멸을 손수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은 익숙하게 침실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집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로잘로테는…. 로잘로테는, 내가 이렇게 깨어난 건 모르고 있으려나. 관에 먼지는 쌓여있지 않았는데. 누가 관리한 거지? 잠시 외출을 한 건가? 아니면 이 오두막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죽은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C은 제 마력에 기운을 집중해 보았다. 제 예상대로 R이 술식을 고친 게 맞는 것 같았다. 마력이 예전처럼, 아니, 예전 이상으로 많이 돌아와 있었다. 이 정도면 로잘로테가 기다리고 있을 바닷가 외딴집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부스럭.
그때, 갑자기 구석진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로잘로테인가?’
C은 조심스레 그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기울이자, 열린 문 너머로 누군가 발을 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발목이 가느다란 것을 보아 어린아이인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C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문간까지 다가섰다. 소파에 앉은 인영을 내려다보자, 처음 보는 얼굴의 어린아이가 아직껏 제 존재는 눈치도 채지 못하고 독서에 푹 빠져 있었다. 표지에 새겨진 제목을 보니 마법 약초와 관련된 서적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밀려왔다. C은 벙긋거리며 망설이다가, 나긋하게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R.”
그러자 이제야 누군가 지척에 와 있음을 알아차린 듯, R이 바로 C을 돌아보았다. 먼 옛날 처음 봤던 모습처럼 작고 새빨간 눈이 잘게 흔들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방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아무런 말 없이 마녀 C의 모습을 눈에 아로새기던 R은, 못내 입술을 달싹였다. 보아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입안을 차고 넘칠 만큼 많아서, 도리어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모르는 듯했다.
“……하.”
…하하.
그러나 이내 그는, 변변한 문장을 구사하는 대신 헛웃음만을 토해냈다. 그의 손바닥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이맛살을 꾸욱 짓눌렀다. 그대로 다른 손마저 얼굴을 겹쳐 쥐더니, 그가 무너지듯 소파 아래로 상체를 숙이고 바닥을 향해 고개를 털었다. 그의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검은 앞머리가 거칠게 헤집어졌다.
더는 답도 없다는 듯이, R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야, 여전하잖아…….”
쿵, 쿵….
마녀의 고요한 오두막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의 심장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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