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준비
끈적하게 흘러내릴 듯한 짙은 꿀색의 술은 그 달콤한 색과 달리 홧홧한 알코올향을 남기며 목구멍을 훌렁 넘어가버렸다. 폐점시간이 다가오는 늦은 새벽. 마지막 손님의 무모한 원샷 장면을 눈 앞에서 지켜보던 마스터가 호두턱을 만들며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몸도 안좋으면서. 전에 피를 토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요."
"그건 지병이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그건 술이랑 아-무 상관 없는걸?"
빈 잔에 담겨있던 술의 색과 꼭 닮은 둥근 눈동자가 휘어 웃는 눈매에 한웅큼 베어먹혔다. 마스터는 달게도 웃는 레파르시아를 아니꼽게 바라보다가 결국 뒤늦게 컵에 얼음을 넣어주었다. 술병을 거의 품에 끼다시피 갖고 있던 레파르시아가 직접 술을 다시 채워넣자 얼음이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매몰차기야? 응? 마스터-."
"저야 이런 진상 안보고 좋죠."
마스터는 새침을 떨며 잔을 한 번 뽀득 닦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요?"
"휴가 끝났거든..."
"저런. 백수인 줄 알았는데 직장이 있긴 있었군요."
"그럼, 그럼, 그럼."
레파르시아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세 번 끄덕이곤 잔을 집어들었다. 마스터의 눈총이 효과가 있긴 했는지 이번엔 조금씩 홀짝여 나누어 마셨다.
"좋은 직장이긴 한데 편하다고는 못할 곳이지."
"그럼 퇴사하세요. 다른데서도 잘 할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유능한 인재라 놓아주질 않는 걸 어떡하니."
에이 몰라! 툭 뱉으며 손을 휘휘 내젓는 손님은 퍽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가끔씩 언뜻 드러나는 몸의 흉터는 근무지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케 했으나 도통 예상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깊게 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니 특이한 직장의 정체에 대해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넘기기로 한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요."
"으음..."
레파르시아는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려 고민했다.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라는 민간인에겐 허무맹랑할 말을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눈을 좌우로 느리게 굴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그렇게 먹지 말라고요!" / "얼음 녹았어! 이정도면 물이지!") 말했다.
"역시 직장동료들 덕분이겠지? ...대략 몇 명은 좀 애매하고 몇 명은 건강이 나빠서 걱정시키는데다 몇 명은 거짓말하기 일쑤고 몇 명은 자꾸 신경을 건드려대지만 어쨌든 좋은 사람들이야."
"보통 그런 사람들을 좋다고 말하진 않을걸요?"
"역시 겪어 봐야 아는게 사람이라고."
속을 끓이는 더운 숨을 푹 내쉬고는 키득거렸다.
"그래도 걔들 만날 생각하면 휴가 좀 끝나면 어때- 싶게 된단 말이지."
랜처를 상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능력 부대가 다시 소집될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었지만. 무기한 중단되었던 임무가 다시 시작되는 걸까. 레파르시아는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괜히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송별 기념으로 한 병 더 마실래."
"어련하시겠습니까. 어떤 거요?"
"음... 바카디?"
"송장 치우는 꼴 보기 싫으니까 다른 거 드릴게요."
"에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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