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즈레레

대련

케이카OC by 케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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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파르시아의 능력은 공격계라 하기엔 단박에 큰 화력을 낼 수 없었으나 다양한 패턴의 공격수단이 있었고, 방어계라 하기엔 조잡하다 할 수 있으나 여러 위협에서 몸을 지킬만한 정도는 되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내거나, 허공에 발판을 만들어 몸을 띄우는 등의 보조역할도 수행하였으니 잡탕이라 하여도 할 말은 없다.

만능이라 하면 만능이라 할 수 있었고, 애매하다 하면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레파르시아의 속삭임이다.

"즉, 잘못 걸리면 골치아프다는 소리지."

결론이 지나온 길에서 꽤 멀어진 듯하였으나 지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치 벌떼처럼 레파르시아의 몸을 휘감아 도는 문장들이 사나운 소리를 내었다. 인티즈는 눈을 굴려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단어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레파르시아와 눈을 마주쳤다. 인티즈는 변함없이 여유로운 낯을 한 채 느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걸리지 않으면 된단 소리잖아?"

정답이야.

레파르시아는 금세 긍정하며 미소지었다.

"시작한다? 오늘은 좀 만만치 않을거야."

레파르시아가 지휘자처럼 검지를 가볍게 들어올리자 멈출줄 모르고 날아다니던 문장들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분리되어 허공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회색빛의 두꺼운 글자는 모두 [벽]이었다. 그 뒤로 '빠른' 것과 관련된 의성어들이 달라붙어 그것을 움직이는 듯했다.

모든 글자가 제자리에 멈추자, 인티즈는 구슬을 손에 쥐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레파르시아가 불시에 손가락을 접어 굽힘과 동시에 [벽]들은 다시금 빠르게 날아다니며 인티즈의 주위를 맴돌아 위협했다. 아니, 위협으로는 모자랐을까. 인티즈의 앞에서 이정도로 속도를 논해서는 비웃음만 사는 꼴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대련 주제는 스피드가 아닌 컨트롤이었다. 시간 내에 [벽]을 전부 파괴하면 인티즈의 승리, 그 반대는 당연히 레파르시아의 승리다.

쾅-!

첫번째 단어가 폭발하듯 산산조각나는 것을 시작으로 인티즈가 빠르게 구슬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사실 단순하게 보면 인티즈가 매우 유리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인티즈 앞에서 타인의 속도란 거의 무의미했으니. 그러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이었으므로, 그 스스로 약간의 패널티를 부과한 상태였다.

레파르시아가 만들어낸 [벽]들의 강도는 각각 달랐다. 어떤 것은 손톱으로 꾹 찍어누르기만 해도 부서질 정도로 약했고, 어떤 것은 꽤 힘들여 쏘아내야 부서질만큼 단단하다. 인티즈는 각각 쏘아내는 구슬의 속력을 조절하여 최소한의 힘으로 [벽]을 부수는 것에 집중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벽]들이 레파르시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터였다.

"10초."

그들의 싸움은 짧은 순간에 결정된다. 1초가 지나는 와중에도 십수개의 [벽]이 부서져나갔다. 레파르시아는 스톱워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을 재었다. 발포소리만 나지 않는 것 뿐, 총알에 버금가는 물질이 허공을 가르는 와중에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한눈을 판다는 것이 무모해보이기까지 했으나 걱정할 필요없는 부분이었다.

"조심."

인티즈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레파르시아의 코앞으로 날아든 눈 먼 구슬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대로 부스러졌다. 색을 감추고 있던 방어벽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시 사라진다.

금 간 흔적 하나 없이 멀쩡히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인티즈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떨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한 바 있었다. 오늘 당장 만들어낸 벽과 며칠씩 걸려 쌓아올린 벽은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30초."

그리고 남은 시간 10초. 남은 [벽] 31개. 5초가 지나는 동안 24개가 부서졌고, 레파르시아는 입술을 달싹여 마지막 초를 세었다.

5, 4, 3, 2, 1.

퍽!

마지막 [벽]에 구슬이 들이박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글자가 부서지며 난 검은 분진에 가려졌던 것이 드러나자, 레파르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벽]을 읽을 수 없을만큼 손상시켜야 부쉈다고 치자 하긴 했지만. 이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허공에 남은 것은 [ㄱ]이 날아가고 남은 [벼]였다. 읽을 수는 있었으나 온전히 [벽]이라는 의미를 수행할 수 없게 된 단어로 서로 승리를 주장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고민하다가 서로 짠 것처럼 등돌려 걷기 시작했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쓸데없는 것에 기운을 빼기엔 그들은 현명한 편이었다. 즐거움이 남았다면 그걸로 충분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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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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