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브사이코100

[모브레이] 크리스마스에는 방음을 조심하세요.

KIM1134 by KIM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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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24.06.22)

가위님과 연성교환!

 

 

 

 

 

***

 

 시야가 흐리다. 눈을 비비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니 근육통이 따라온다. 레이겐은 잠시 생각했다. 눈이 왜 이리 부었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어제 일을 떠올리기도 전에 말 못할 고통이 찾아왔다. 차마 입 밖으로 내기 민망한 곳과 허리.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아. 이럴 생각은 정말 없었는데…. 레이겐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의 등 뒤에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자의 숨소리였다. 술 한 모금 들이키지 않았음에도 그는 머리가 쑤셨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단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저 멀리에서 들리는 캐롤소리가 그를 놀리는 듯 했다. 모두 이 망할 크리스마스 때문이야. 그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

 

레이겐 아라타카의 생일이 한 달쯤 지난 날. 늦은 더위가 조미시를 강타했다. 이런 날 이면 그의 상담소는 한가하기 마련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세리자와를 보낸 그는 일찌감치 가게를 닫을 준비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도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손님이 아닌 그의 제자였다. 모브? 대학에 입학한 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제자가 나타나자 그는 의아해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내 생일이었던가. 한 달 만에 만난 제자는 그 짧은 사이 젖살이 더 빠져있었다. 하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근 모습이 이제는 농담으로라도 어린애라는 말을 하기 힘들었다.

 

“오랜만이잖아.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거야?”

 

걱정하는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잠시 머뭇거렸다.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슨 말? 의문을 표하며 제자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다. 마주한 눈동자에서 어렵지 않게 하려는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나 긴데. 제자의 생각 하나 읽어내지 못할까.

 

“그래? 그럼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 할까.”

 

라멘은 어때. 차슈 추가해도 괜찮으니까. 티가 나지 않게 대화주제를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이어진 모브의 말에 가로 막혔다. 지금 들어주셔야해요. 좀처럼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모브는 이따금 고집을 부리곤 한다. 지금처럼. 그럴 때마다 레이겐은 골치가 아팠다.

 

“하아…. 그래. 이야기 해 봐.”

 

“…저 스승님을 좋아해요.”

 

예상했던 말이 들렸다. 마치 저녁메뉴를 정하는 듯 한 가벼운 어조였으나 그 속에 담겨있는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제자는 단 한 번도 감정을 쉬이 다룬 적 없는 아이가 아니던가. 머리가 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저 고집 센 제자가 이해할지. 레이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현명한 대답을 생각하려 머리를 굴리던 그는 제 손에 닿아오는 온기에 숨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제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내 곁에 있어줘. 스승님.”

 

무표정한 얼굴로 뱉는 말. 그 너머에는 긴장을 잔뜩 하고 있는 제자가 보였다. 혹시라도 레이겐이 거절할까 걱정이 되는지 잡힌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잠시만…! 모브. 아파. 반사적으로 뱉은 말에 모브는 황급히 손을 떼며 소리쳤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고백을 하던 순간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더니. 레이겐이 아픔을 표시하자 제자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레이겐은 모브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히 자신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 나도 네가 좋아. 모브.”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레이겐은 당황하며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환하게 웃는 모브의 얼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레이겐은 모든 것이 상관없어졌다. 그래. 네가 웃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그래서 그는 제자와 같이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

 

그렇게 연인이 되었건만 둘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레이겐이 연락을 하면 모브는 상담소에 온다. 가벼운 안부를 물은 뒤 일이 끝나면 단골 라멘 집에 찾아가 조촐한 저녁식사를 한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 서로를 배웅한다. 그 흔한 스킨십 하나 없는 담백한 관계. 이게 연인이 맞는 건지 레이겐은 의구심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이제 스무 살이 된 남자애가 할 만한 연애는 아니었다. 그 나이대 애들은 조금 더 뜨겁고…. 풋풋한…. 그런 연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미적지근한 관계 말고.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기 마련이다.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도 전에 찾아온 추위로 상담소는 자연히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이러다 이번 달은 적자일 거 같은데…. 장부를 쳐다보며 씨름하고 있을 때 였다.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서와. 모브.”

 

“안녕하세요. 스승님.”

 

강의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것 인지 짊어지고 있는 가방이 무거워보였다. 모브는 가방을 자신의 자리에 내려놓은 다음 레이겐 혼자 있는 상담소가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리자와씨는요?”

 

“아. 출장제령이 들어와서 말이야. 일이 끝나면 그 곳에서 퇴근하라고 먼저 보냈어.”

 

“그렇군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제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레이겐은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흘깃 모브를 관찰했다. 밖이 많이 추웠는지 새하얀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레이겐은 히터의 온도를 올리며 생각했다.

 

“스승님. 혹시 내일 뭐 하세요?”

 

“내일?”

 

제자의 말에 그는 달력을 확인했다. 12월 24일.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 였다.

 

“글쎄~. 일단 예약은 없는데 말이야….”

 

레이겐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모브는 책상 앞으로 걸어와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그러면 그 날 상담소 닫고 저랑 같이 영화보러가요. 항상 차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급하게 저의 스승을 설득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어떻게 할까나~.”

 

고민하는 척 미간을 찌푸리자 모브는 허둥지둥 제 외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모브가 올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레이겐은 웃음을 터트렸다. 12월 24일자로 예매가 된 영화표 였다.

 

“푸하하! 모브. 이건 어디서 구한거야?”

 

“…치, 친구한테 받았어요.”

 

“그래?”

 

어색한 제자의 거짓말에 레이겐은 다시 웃음을 참았다. 요즘 누가 영화티켓을 선물로 준다고 그래. 아무리 머리가 크고 덩치가 커져도 제자는 이렇게 어리숙한 면이 있다. 모브가 건넨 영화티켓은 누가 봐도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앞 둔 연인들을 노리고 나온듯한 제목이 적혀있었다. 저 영화를 고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을 제자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좋아. 몇 시에 만날까.”

 

“어…. 정말 보러 가는 거예요?”

 

“뭐야. 보러가자면서. 싫은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손쉬운 승낙에 모브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기뻐했다. 첫 데이트네요. 데이트? 단어를 곱씹은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애를 시작했으면서도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한적 없구나. 우리. 우습게도 그제야 둘의 관계가 달라졌음이 실감이 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감에 레이겐의 얼굴이 모브의 귀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스승님? 얼굴이 빨개요.”

 

“히, 히터 온도를 너무 높였나.”

 

“그러고 보니 좀 덥긴 하네요. 그러면 내일 조미시 영화관 앞에서 만나는 거죠?”

 

 ***

 

평소보다 이른 시간 잠에서 깬 레이겐은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였다. 어제 모브를 보낸 뒤 집에 돌아오면서 산 마스크 팩이었다. 이렇게 까지 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기뻐하던 모브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조금은 오늘 하루 기대가 되었다.

 

데이트라고 하는 것이 레이겐에게 찾아온 것이 얼마만인지. 사실 연애를 하던 자신이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팔자에도 없는 어린 제자가 생긴 뒤로는 금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가. 물론 몇 년 만에 하는 연애가 그 어린 제자와 하는 것 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스레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거울 앞에서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 시간이 보였다. 아. 이러다가 약속시간에 늦겠어. 황급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자 12월답지 않은 따듯한 날씨가 그를 반겼다. 다행이야. 코트를 입길 잘했어. 괜히 멋 부린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레이겐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캐롤을 흥얼거리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그는 안에 가득 들어찬 사람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모브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전화를 거는 게 빠르겠어.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평소 입던 옷들은 다 어디에 갔는지 어두운 색 코트를 차려입은 제자가 보였다. 대학에서 인기 없다더니 순 거짓말인거 아냐? 모브의 멀끔한 모습에 그는 괜스레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좋아. 이정도면 합격. 혹시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마지막까지 체크하고 나서야 그는 모브를 부를 수 있었다.

 

“모브!”

 

소음이 가득한 곳인데도 모브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레이겐과 눈이 마주친 순간 곧장 그를 향해 뛰어왔다. 모브가 뛰어올 때 까지 잠시 기다린 레이겐은 모브가 도착하자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저도 금방 왔어요.”

 

가까이 다가온 모브에게선 익숙지 않은 향이 났다. 딱 백화점에서 날법한 향수 냄새인데 말이야. 어디서 이런 센스를 배운 거지? 자기가 알려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던 와중 모브의 흐트러진 앞머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멋지게 입었으면 머리 정리는 잘해야지. 레이겐이 타박하며 앞머리를 정돈해주자 모브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웃었다.

 

“저 오늘 멋진가요.”

 

“음…. 봐줄만 한 정도지만 말이야.”

 

“다행이에요. 모두가 골라준 옷들이거든요.”

 

“…모두?”

 

“네.”

 

제자의 말에 레이겐은 손을 멈췄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 데이트한다고 이야기 하니 모두가 신경써줬어요. 아. 코트는 리츠가….”

 

“잠깐, 잠깐만! 모브! 우리가 그…. 사귀는 거 친구들이나 가족한테 이야기 했어?”

 

“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골치가 아팠다. 어쩐지 얼마 전 상담소에 찾아온 모브 동생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사실 익숙하게) 넘어간 시선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스승님?”

자신이 말실수라도 했나. 모브는 눈치를 보다 그의 옷깃을 잡았다. 혹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안절부절못해하는 모습에 레이겐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말해도 상관없지. 그것보다 영화 시간이 좀 남았는데 팝콘이나 사고 있을까?”

 

“네. 좋아요.”

 

레이겐이 말을 돌리자 모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까….그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해도, 이미 저질러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레이겐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영화는 레이겐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우연한 타이밍에 주인공 둘이 만나 첫눈에 반하는 이야기. 사소한 오해로 갈등이 생기지만 결국은 사랑으로 이겨내는 이야기. 중반부까지 감상한 레이겐은 평점을 내렸다. 5점 만점에 3.5점. 두 달 정도 있으면 DVD샵에 들어오겠어. 다소 박하게 평가를 내린 그는 모브가 어떤 표정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린 순간 모브와 눈이 마주쳤다.

 

“뭐, 뭐야. 모브. 영화 안 봐?”

 

“보고 있어요.”

 

“그러면 나 말고 화면에 집중해야지.”

 

레이겐의 말에도 모브는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었다. 가끔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돌리나 싶더니 조금이라도 틈이 생긴 순간 모브는 레이겐을 쳐다봤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레이겐은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그의 인내심이 모두 닳아진 순간 입을 열었다.

 

“…모브.”

 

“네.”

 

“네 스승님 얼굴 뚫어지겠다.”

 

“아직 멀쩡한 거 같은데요.”

 

“…그러냐.”

 

맥 빠지는 대답에 레이겐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때 모브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레이겐은 차라리 화면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온갖 고난을 이겨낸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평생을 바치겠노라 맹세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모브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스승님. 손잡아도 돼요?

 

그런걸 일일이 허락 구하지 말라고. 야단치고 싶었으나 레이겐은 예전에 모브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상대방에게 스킨십을 하고싶을땐 꼭 허락을 받아야 해. 알겠냐. 모브. 레이겐은 그런 말을 했던 자신을 때려주고 싶기도, 저의 가르침을 꼬박꼬박 따르는 모브가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겐은 말없이 모브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레이겐의 기억에 남은 것은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손. 그리고 그의 손바닥을 느리게 긁던 제자의 손길. 그 손길에 맞춰 세차게 뛰는 심장소리 같은 것 들이다.

 

둘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도,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맞잡고 가만히 있었다.

 

둘이 상영관을 나온 것은 청소를 위해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머쓱하게 자리를 일어난 레이겐은 아직 잡혀있는 손을 뗐다. 잡고 있으면 안돼요? 안 돼. 

 

“재밌는 영화였어요.”

 

“너 영화 보긴 했어?”

 

“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사실 그때 스승님에게 고백하는 순간이 떠올랐거든요.”

 

레이겐은 다급히 모브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브의 말은 소음에 묻힌 것 인지 다른 사람에게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안도하며 손을 떼어주니 모브는 이상하다는 듯 레이겐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요? 엄청 집중해서 보시던 걸요.”

 

“음….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였어. 평점을 매긴다면 5점 만점에 4.5점 정도일까. 특히 마지막 부분이….”

 

 ***

 

크리스마스이브란 그렇다. 온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외식을 즐기는 날이 아니던가. 이런 날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차라리 일주일 전 쯤 말해줬다면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했을 텐데…. 레이겐은 잠깐 모브를 원망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런 센스를 가지고 있었으면 내 제자 아니었겠지. 

 

"어쩔 수 없네. 식사는 다음에…."

 

"스승님. 차라리 스승님 집에 가면 안돼요?"

 

레이겐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너…. 무어라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모브와 눈이 마주쳤다. 전 아무런 의도도 없어요. 라고 말하는 듯 한 순수한 얼굴. 자신이 과민반응을 한 것 일까. 레이겐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뭐…. 좋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보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눈이 하나 둘 떨어졌다. 점차 거세게 내리는 눈으로 거리는 새하얗게 변했다. 아파트에 도착할 즈음 둘의 어깨에 새하얀 눈들이 쌓였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내내 레이겐은 생각했다. 그래. 딱 영화까진 좋았다고. 아파트 열쇠를 꼽는 손이 떨렸다. 첫 데이트인데, 벌써 집으로 초대해도 되는 건가? 철컥.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요즘 어린애들은 다 이런 연애를 하나? 레이겐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고리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승님?”

 

“어? 어…. 모브. 먼저 들어가.”

 

모브가 부르는 소리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 집은 처음 와보네요. 그러냐. 제자를 뒤따라 집에 들어온 레이겐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자신을 욕했다. 서둘러 나오느라 미처 치우지 못했던 마스크 팩과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만, 모브. 많이 더럽지. 미안하다. 금방 치울 테니까.”

 

모브를 밀치고 방에 들어간 레이겐은 제일 먼저 옷들을 들어올렸다. 평소의 그라면 옷의 종류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세탁기에 넣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 까지 생각할 틈이 없다. 욕실의 불도 키지 않은 채 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은 레이겐은 다음으로 말라붙은 마스크 팩을 주워들었다.

 

“스승님. 마스크 팩도 하세요?”

 

“아…. 가끔. 영업을 하다보면 얼굴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스승님 피부가 그렇게 좋았군요. 항상 신기했어요.”

 

모브가 하는 담백한 말들은 그를 부끄럽게 한다. 사심하나 담기지 않은 감탄에 레이겐은 머쓱해졌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사실을 토해냈다.

 

“사실…. 오늘 처음 해본거야.”

 

“어? 왜요?”

 

“너랑 그….”

 

차마 데이트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쭈뼛거리는 사이 옆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은 이때만큼 이 집의 방음문제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벽 하나를 두고 나는 적나라한 소리에 모브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 이었다. 레이겐은 말을 이어가는 대신 탁자 한쪽에 놓아둔 리모컨을 주워들었다. 삑- 전원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에선 흥겨운 캐롤이 흘러나왔다.

 

적나라한 소리는 캐롤에 묻혔지만 둘 사이 흐르는 적막은 여전했다. 모터라도 단 듯 돌아가는 입은 이럴 때만 말을 듣지 않는다. 레이겐은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고심했다. 이 상황을 수습할 말들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어. 네. 말씀하세요.”

 

꼬르륵.

그때 레이겐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났다. 그는 부끄러워 할 틈도 없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이스 타이밍!

 

"일단 밥부터 먹을까. 집에 컵라멘 밖에 없긴 한데 괜찮아?"

 

"음…. 전 다 좋아요."

 

모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컵라멘이 익는 시간동안 레이겐은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빨리 좀 끝내라고…. 텔레비전이 잠깐 조용해질 때면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모브가 저 소리를 또 들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옆방은 금방 조용해졌다. 레이겐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다가 집에 바래다주면 되겠지. 지옥 같은 시간 이였어. 모브를 집까지 보내주고 돌아오는 길 소화제를 사야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스승님 집은 방음이 안 되는군요."

"응?"

 

모브의 말로 레이겐의 피땀 어린 노력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끼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기를 정리하는 모브가 보였다. 옆집에서 자주 저러나요? 이어진 말에 레이겐은 결국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귓가에서 카게야마 시게오 군! 홈런! 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주 그러진 않는데, 오늘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잖냐."

 

"크리스마스가 왜요?"

 

레이겐의 말이 뜬금없었는지 모브는 반문했다. 

 

***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레이겐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한번 기억을 해내니 잊고 싶은 기억도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자신은 진심으로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브에게 일장연성을 했더랬다. 크리스마스란 건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당황했을 때 아무 말이나 뱉는 버릇이 있다. 할 말 못할 말 모두 뱉어낸 뒤 집에 돌아와 이불을 차며 후회하는 버릇.

 

그래. 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불을 찬 게 제일 큰 문제긴 하지만. 레이겐은 머리를 쥐어뜯다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환기부터 해야겠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미니 치우지 못한 휴지조각이 그의 발에 밟혔다. 젠장.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주인이 확실치 않은 액체들이 들러붙는다. 이 상황을 빨리 수습해야 했다. 청소를 하기위해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그는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레이겐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확실히 살필 수 있었다. 햇빛에 비춰 확인한 그의 몸은 심각했다. 모브. 유치가 덜 빠진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 몸이 붉었다. 그리고…. 제 하반신을 본 순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승님?"

 

그의 등 뒤에서 아직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모브 일어났냐. 조금 더 자도 되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큼…. 크흠…. 목소리를 내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 사이 침대에서 나온 모브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괜찮으세요?"

 

"…일단 옷부터 입어라. 옷부터."

 

아침부터 제자의 아랫도리를 마주할 만큼 그의 정신은 멀쩡하지 않았다.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군말 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들어올렸다. 모브가 옷을 입는 것을 확인한 레이겐은 다리에 힘을 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한번 힘이 빠진 다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레이겐이 일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사이 모브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섰다. 제가 일으켜드릴께요. 거절하려는 틈도 주지 않고 모브는 그의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그를 침대에 앉힌 모브는 천천히 레이겐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만요."

 

처참한 그의 상태를 확인한 모브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약간의 소음이 들리더니 모브는 곧 젖은 수건과 물을 들고 나왔다. 스승님. 어서 드세요. 레이겐은 건네받은 물을 달게 마셨다. 찬물이 마른 식도를 타고 들어가니 한결 괜찮아진 느낌이 들었다.

 

고맙다고 말을 하려던 레이겐은 쇳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다. 모브?! 그의 제자가 하반신을 닦으려 하고 있었다. 근거리에서 큰소리를 들은 모브는 귀가 아픈지 얼굴을 찌푸렸다. 스승님.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목에 더 안 좋아요. 

 

아니. 이건 내가…. 모브의 손길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무거운 몸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요. 스승님. 어제 아프다고 그렇게 우셨잖아요. 모브의 말에 레이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기분 이었다.

 

결국 레이겐은 모브의 손에 의해 뽀송해졌다. 그 과정은 딱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그의 몸을 모두 닦은 모브는 곧이어 쓰레기봉투를 들고 와 청소하기 시작했다. 레이겐 역시 도우려 몇 번인가 일어났지만 모두 모브에게 저지당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뿐 이었다.

 

마지막으로 쓰레기봉투를 묶어 현관에 내놓은 모브는 레이겐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제가 어제 무리시켰나요?"

 

걱정하는 표정을 하는 모브를 보고 레이겐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사실 아프지 않은 부분보다 아픈 부분이 많긴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레이겐은 올라가지 않는 팔까지 억지로 들어 올려 손사래 쳤다. 이 정도는 멀쩡하다고 모브!

 

"그럼 다행이구요.... 음. 스승님."

 

모브는 잠시 머뭇거렸다. 귓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말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차라리 귀를 막을까. 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레이겐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왜? 

 

"전 어제 너무 좋았어요. 사실 예전에 에쿠보랑 말하신 것 때문에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거든요."

 

"…."

 

우리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 네 스승님 딱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쯤 되니 레이겐은 차라리 울고 싶었다. 물론 그가 섹스를 해본 적 없는 동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와 자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14살 어린 연인이 제 앞에서 볼을 붉히며 어젯밤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는 지금 같은 상황 말이다.

 

"…던게 좋았어요. 그리고 스승님이…. 듣고 계세요?"

 

"그래…. 나도 좋았어…."

 

옆집에서 캐롤소리가 들렸다. 마치 레이겐을 비웃는 것 같았다. 젠장…. 크리스마스 때문이야…. 레이겐은 또다시 절규했다. 

 

 

*여기서 부터는 잘라낸 부분! 레이겐이 뭔 말을 했나 ^^... 정도 입니다...*

 

언젠가 흘려들었던 말이 있다. 음담패설이라고 하기엔 밍밍하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저속적인. 아마 직장동료가 했던 말 같은데…. 레이겐 군. 9월생이 왜 많은 줄 알아? 글쎄요. 사회적인 표정을 짓는 레이겐에게 직장동료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거든. 그거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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