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브레이] 첨밀밀+홍콩 느와르+구룡성채 썰
백업 (24.06.22)
썰체 주의, 레이겐의 약혼녀 언급,동갑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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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기의 공항은 한적했음. 출발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레이겐은 약혼녀에게 전화를 걸었음. 응. 미토씨, 곧 비행기 탈 거 같아. 가방 고마워. 통화를 끝내고 전화부스를 나온 레이겐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한숨을 쉬었음. ...좋아, 다섯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서점에서 산 책으로 공부하면 되겠지. 공항에서 비행기 안내 소리가 나오고, 레이겐은 캐리어와 선물받은 회색가방을 챙겨 들어갔음.
홍콩에 도착한 레이겐은 잠시 머뭇거렸음. 어디를 먼저 가야 하지? 충동적으로 짠 여행은 숙소 말고 정한 것이 없었음. 꼬르륵, 우선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번화가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맥도날드가 보였음. 후덥지근한 바깥과 달리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자 레이겐은 한껏 웃었음. 카운터가 자신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눈치채기 전까지, 뒤에서 손님들이 채근하기 시작하자 레이겐은 당황했음. 나름대로 자신 있던 영어조차 떠오르지 않았음. 어, 어떡하지? 자리를 비켜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이 일본어로 주문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을 검. 반가운 언어에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머리를 한 키 큰 남자가 서 있음.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음. 어어... 그러면, 이거로... 상품을 말하자 남자가 유창한 광둥어로 주문을 도와줬음.
어렵게 계산을 마치고, 그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던 레이겐은 뒤를 돌아봤지만 남자는 사라지고 없음. 음식을 받고 가게를 나오니, 그 남자는 맥도날드 맞은 편 후미진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음. 골목으로 다가가니 특이한 냄새가 났음. 이런 냄새가 나는 담배가 있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다가간 레이겐은 중국어로 서툴게 감사 인사를 함.
아니에요. 일본 분이신 거 같아서, 오랜만에 고향 생각도 났거든요.
아! 일본 사람이시군요! 타지에서 만난 일본인이 반가워 더 근처로 다가가려는데, 남자가 한 손을 들어 레이겐을 제지하고 피고 있던 담배를 끔. 아, 제가 담배를 피워서. 냄새가 독할까 봐요. 어어... 저도 흡연자긴 한데, 거리를 유지하는 남자에게 레이겐은 왼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음. 이런 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전 레이겐 아라타카입니다. 남자는 레이겐의 왼손을 빤히 보더니, 저는 카게야마 시게오 입니다. 라고 통성명을 함. 그와 동시에 사방이 막힌 골목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옴.
레이겐이 잠깐 주춤하자 시게오는 레이겐의 어깨를 한번 치며 다시 만날 일이 있다면 또 만나죠. 그럼 수고하세요. 라고 말한 뒤 인파속으로 사라짐. 잠시 멍하니 있던 레이겐이 코를 킁- 하고 훔쳤음. 아까까지만 해도 골목에 진동을 했던 담배 냄새가 사라져있었음.
홍콩에서 중국어를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안 레이겐은 이후로 영어를 사용했음. 다행히도 홍콩 사람들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해서, 레이겐은 쉽게 예약한 숙소를 찾았음.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 온 레이겐은 숙소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음. 화려한 간판들이 줄 서 있는 도시를 보며 담배를 꺼내 물어 한 대 피우던 레이겐은, 갑자기 들리는 찢어지는 비행기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음. 아,젠장. 싼 이유가 있었구만. 투덜거리며 창문을 보니 거대한 건물더미와 닿을 정도로 낮게 비행하는 게 보였음. 저게 그 말로만 듣던 구룡성 인가? 와,진짜 저러다 사고 나는 거 아냐? 반쯤 피운 담배를 비벼 끈 레이겐은 다 식은 햄버거를 꺼내 한입 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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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겐은 수많은 인파를 헤쳐 뛰었음. 거기 멈추라고!!! 일본어로 아무리 소리를 쳐봐도 상대는 알아듣지 못했음. 물론 광둥어나 영어로 이야기했어도 멈추진 않았겠지만, 기념품 가게에 눈이 팔린 자신을 욕하며, 레이겐은 뛰고 또 뛰었음. 소매치기는 점점 더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고, 어디서 본 건물들인데? 라는 생각이 든 순간 소매치기가 멈췄음.
몸을 돌려 광둥어로 소리치는 소매치기를 보면서 레이겐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었음. 헉,헉, 임마- 내가 소림사 초록 띠야. 어서 그거 내놓고... 문득 어둡고 습기 찬 골목을 인식한 레이겐은 식은땀이 흘렀음. 아, 회사 사람들이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뒤쪽에 있던 건물들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낀 레이겐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음.
우선 말로 합시다. 그러니까 일본어 가능하신 분?
아니면 영어라던가... 레이겐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소매치기 일당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음. 자, 빠르게 생각하자. 앞쪽에 내 가방이 있고, 출구는 뒤 쪽이였지. 차라리 여권만 돌려달라고 할까? 여권이 중국어로 뭐지. 책 볼 시간은 안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레이겐에게 다가왔음. 멀리서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음.
여기서 또 만나네요. 그러니까, ...레이겐 씨?
옆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맡았던 묘한 담배 냄새가 났음. 옆을 보니 며칠 전 봤던 시게오가 서 있었음. 단정한 셔츠를 입은 그는 지저분한 골목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음. 옆에 있던 막대를 들어 간판의 불을 켠 시게오는 얼어있던 레이겐을 쳐다봤음. 이번에도 말이 안 통하시는 거예요? 유창한 일본어에 레이겐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음.
시게오는 서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다, 레이겐의 가방을 들고 있는 소매치기를 봤음. 아. 저거 때문이죠?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건지 미동도 없는 사람들을 지나쳐, 소매치기에게 가방을 꺼내 레이겐에게 건네줬음. 자, 여기요. 아직 주저앉아 있던 레이겐을 본 시게오는 가게 문을 열며 말했음.
많이 놀란 거 같은데, 들어오세요. 차 좋아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겐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몇몇이 주저 앉는 소리가 들렸음. 이윽고 빠르게 달아나는 소리가 들리며 가게 문이 닫혔음. 이 쪽에 앉으면 되요. 아니, 지금 제가 옷이...지저분 해서. 아까 주저앉았던 여파로 레이겐의 옷가지가 온갖 오물에 젖어 더러워져 있었음. 짧게 고개를 끄덕인 시게오가 책상 뒤편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음. 가게 내부를 둘러보니, 바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타일과 회색벽이 눈에 띄었음. 창문은 없었지만 바깥처럼 공기가 탁하다는 느낌은 없었고, 벽 쪽에 놓여진 책장에는 화분이 두 어개 있었음.그리고 중간에는 소파와 탁자가 놓여있었음.
왼쪽에 화장실이 있으니 갈아입고 와요.
깨끗한 옷가지를 레이겐에게 건네주며 말했음. 얼떨떨하게 옷가지를 받아 든 레이겐은 화장실로 들어갔음. 이제 두 번 만났는데, 이렇게 잘해줄 수가 있나? 레이겐이 바지를 벗기위해 벨트를 푼 순간, 밖에서 바람 소리가 났음. 옷을 다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시게오가 탁자에 찻 잔을 내려놓고 있었음. 아까까지만 해도 가게에 진동했던 묘한 담배냄새가 나지 않았음.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카게야마 씨. 볼때마다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소파에 앉은 레이겐이 감사인사를 하자 시게오가 작게 웃었음. 아니에요.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죠. 차를 마시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음. 옷도 너무 감사하고요. 돌려드릴 겸 밥이라도 한 끼 사고싶은데, 괜찮은 시간 있으세요? 레이겐의 말에 시게오가 살짝 멈칫했음. 시간이요... 말끝을 흐리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이 다급하게 한마디 더 얹었음. 불편하시다면 옷을 세탁해서 여기로 가져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레이겐 씨.
예?
여기는 여행객들이 오면 안 되는 곳이예요.
...
아, 가게의 풍경이 너무 평범해서 레이겐은 아까 있던 일을, 이 곳이 어떤 곳 인지를 잊고 있었음. 문득 장기 출장으로 홍콩에 다녀왔던 회사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음. 구룡성 근처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면, 그냥 포기하는 게 좋아. 그리고 또 제일 중요한 건... 그 다음말이 뭐였더라?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본 시게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음.
...그러면 삼일 후 저녁 일곱시에 이 문 앞에서 볼까요?
문이요?
시게오를 따라 책장 옆을 보니, 파란 문이 하나 있었음. 책장에 가려서 안 보였던 건가... 의문점을 가지고 다가가자 시게오가 문을 열어줬음. 문 밖을 보니, 아까 구경을 하던 번화가의 거리가 보였음. 뭐야...이거 어떻게 한거야? 문 밖으로 걸어가는 레이겐의 등에 무게감이 느껴지더니 시게오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음. 그럼 삼일 후에 여기서 봐요. 문이 닫히고, 레이겐은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멍하니 서 있었음.
아! 가방!
미처 챙기지 못한 가방과 옷가지가 생각나 급히 고개를 돌리자, 굳게 닫힌 문고리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음. 가방과 옷을 들어올리자 틈에 껴 있던 종이 쪽지가 떨어졌음. 삼일 후 저녁 일곱 시. 파란문. 당황했던 것도 잠시 레이겐은 글씨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음. 와, 진짜 글씨 못쓰네. 초등학생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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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앞 의자에 앉아 레이겐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음. 어제 얻은 교훈으로, 가방은 무릎위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음. 지루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세던 레이겐은 미토에게 몇일 간 전화를 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음. 해외요금은 자기가 내 줄 테니, 짧게라도 전화 하라고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공중전화를 찾던 레이겐은 곧 포기하고 다시 앉았음. 전화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담배를 비벼 끈 레이겐은 아까보다 무거워 진 것 같은 가방을 끌어 안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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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온 레이겐은 공중전화를 찾았음. 몇번의 신호음이 가고 미토의 목소리가 들리자 짧게 사과했음. 미안해. 소매치기한테 가방을 도둑 맞아서 정신이 없었거든.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걱정하는 목소리에 레이겐은 흐물하게 웃었음. 당연히 괜찮지. 여행 중에 좋은 사람...친구를 만났어. 그 친구가 가방 찾는것도 도와줬고, 응. 응. 알겠어. 미토씨. 미안해. 전화를 끊고 나온 레이겐은 담배를 하나 꺼냈음. 문득 시게오의 담배냄새가 나는 것 같아 주의를 둘러봤지만 착각인 듯 했음. 담배를 다 핀 레이겐은 시게오의 옷을 담을 종이봉투를 사기 위해 시장으로 들어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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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당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레이겐은 숙소 근처에서 쌀죽으로 식사를 떼우고 다시 올라왔음. 캐리어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 고민하던 레이겐은 곧 머리를 잡고 소리쳤음. 아니!! 아니!! 무슨 첫 데이트 하는 사람이냐!! 옆 방에서 쾅쾅하는 소리가 들려지자 레이겐은 짧게 사과했음. 아. 쏘리합니다. 쏘리. 한 쪽에 마련된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던 레이겐은 곧 침대에 쓰러지 듯 누웠음. 어차피 식사만 하기로 한건데, 뭘 이렇게 신경쓰고 있어. 레이겐은 눈을 감았음.
음...
다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날은 어둑해졌음. 헉, 너무 잔건가?! 급하게 아무옷이나 주워입은 레이겐은 지갑과 옷을 담은 종이봉투를 챙긴 뒤 숙소를 나섰음. 간판 불이 빛나는 밤거리를 질주하다 파란문을 보고 레이겐은 숨을 골랐음. 아 젠장 늦은건 아니겠지. 지금 몇시야... 도대체, 그때 파란문이 열리더니 시게오가 나왔음. 어, 오래 기다렸어요? 시게오의 말에 레이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음. 아뇨. 괜찮아요. 그럼 출발하죠.
레이겐이 관광을 하면서 눈여겨봤던 식당에서 기분좋게 식사를 마친 뒤, 골목으로 가 담배에 불을 붙혔음. 어? 카게야마씨는 담배 안 펴도되요? 네. 지금은... 피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무안해서 빠르게 담배를 끈 후, 레이겐은 입을 열었음. 시간도 이른데...
술이나 한잔 할래요?
...술이요?
시게오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레이겐은 아차했음. 아 내가 너무 나댔나, 그냥 옷이나 받고 가려는 사람 억지로 잡은건가? 레이겐이 거절해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시게오가 작게 말했음. 저 술 한번도 안먹어봤어요... ...응? 레이겐의 황당해하는 눈길을 피한 시게오는 다시 입을 열었음. 뭔가... 어른만 먹을 것 같으니까...
카게야마 씨. 실례지만 나이가?
25세 입니다만...
...푸하하!!!
레이겐은 배를 부여잡고 웃었음. 생긴건 위스키 샷으로 먹게 생겼으면서, 한참을 웃던 레이겐은 시게오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음. 카게야마 군. 사회인의 필수 덕목은 술이라구요? 이 레이겐 아라타카가 사회인의 덕목을 알려드리도록 하죠.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진지한 표정을 짓던 레이겐은 곧 표정을 풀며 시게오의 팔목을 잡았음.
아! 그러고 보니 25살이라고 했으면 우리 동갑이죠. 말 편히 할까요? 레이겐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 시게오가 말했음. 그렇게 하세요. 좋아,좋아, 카게야마! 그럼 가자고! 아니, 일단 팔좀...
칵테일 바에 도착한 레이겐이 메뉴판을 보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음. 다행이다. 영어로 써있네. 카게야마. 혹시 좋아하는 음료라던가, 요리는 있어? 으음, 음료라면 역시 우유 일까... 다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은 레이겐이 주문을 했음. 여기 말리부 밀크 하나랑, 모히또에 라임대신 레몬 넣어주세요. 모히또는 논 알콜로 주시구요. 메뉴판을 바텐더에게 건네 준 레이겐이 웃으며 말했음.
아니, 그런데 술을 안먹어봤다니. 신기하네~
그게 그렇게 신기한가요...
뭐어, 특이하긴 해도 틀린건 아니니까. 아니!! 그보다 우리 말 놓기로 한 거 아니였어?
아, 존댓말 하는게 편해서... 조금 천천히 놓을게요. 레이겐 씨는 편하게 하셔도 되요.
으음...그러면 뭐...
마침 나온 칵테일 받아 든 레이겐은 시게오가 마시는 걸 지켜봤음. 긴장하며 한 모금 꿀꺽 하더니 이내 반 잔을 마셔버리는 모습을 보며 킥킥 웃었음. 어때. 맛있지? 오오... 카게야마, 이게 바로 칵테일이란 거다. 과연...대단해... 그동안 봤던 표정과 달리 눈을 빛내는 시게오의 모습은 25살 같지 않았음. 그러고보니 진짜 어려보이네. 레이겐은 속으로 생각하며 모히또를 한 모금 마셨음.
아, 맞다. 저 어떤 요리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잖아요.
으응. 그렇지?
예전에 일본에 있었을 때는, 타코야끼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아요.
타코야끼?
네. 홍콩에선 먹을 수가 없어서, 아쉽게 됬죠.
그럼 일본에 잠시 갔다오면 되는 거 아닌가? 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 책임없이 사람의 과거를 캐묻는 짓은 하지 않았음. 잠깐 침묵이 이어지고, 레이겐이 가볍게 말했음. 그러면 재료 사서 다음에 해줄까? 할 줄 알아요? 뭐, 타코야끼 재료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시게오는 남은 잔을 모두 마시며 말했음. 그럼 다음에 저희 집에 초대할께요.
좋아~. 그럼 그것도 다 마셨으니, 다른 칵테일도 추천해볼까~.
아니, 근데 레이겐 씨는 왜 안드세요?
어허! 오늘의 술자리는 카게야마에게 술이란 뭔지를 알려주는 자리라고?
레이겐은 한층 가벼워진 지갑을 움켜쥐며 숙소건물로 돌아왔음. 젠장... 그렇게 술을 잘 마실줄은 몰랐지. 평소와 달리 어수선해보이는 숙소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 자신의 방 앞에 온 레이겐은 몸이 굳었음. 아 문을 안 잠궜군. 활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음. 다 찢어진 옷과 침구, 그 틈새에서 가방을 찾던 레이겐은 멈칫했음. 이 냄새. 어디서 맡아봤는데?
가끔 어두침침한 골목길에서 나던 냄새,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나던 냄새, 그리고 시게오에게 났던 묘한 담배냄새.
그리고 또 제일 중요한 건... 이상한 냄새가 나는 담배 피는 놈들 있거든? 다 약쟁이야. 질 안좋은 약 피우는 놈들은 다 티가 나는데, 간혹 그 냄새가 나면서 멀쩡하게 행동하는 녀석들이 있어. 그런 놈들이 대부분 약 유통하는 쓰레기들 이거든. 이런 애들이 여행객들 꼬셔다, 판매책으로 이용하더라. 문득 회사 사람의 말이 생각나면서 레이겐은 주저 앉았음. 창문사이로 구룡성을 위태롭게 지나가는 비행기가 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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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손으로 멀쩡한 옷가지를 챙기던 레이겐은 휙 던지고 침대에 앉았음. 아무리 찾아봐도 가방은 보이지 않았음. 젠장, 어떡하지? 여권은? 미리 예매해둔 티켓은? 바닥을 멍하니 보던 레이겐은 묘한 꽁초를 발견했음. 난 저런 거 핀 적 없는데? 주워서 냄새를 맡아 본 레이겐은 표정을 굳혔음. 아, 여기서 나는 냄새였구나.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음. 문을 열어보니, 경찰들과 주인이 있었음. 참 빨리도 신고했네. 속으로 빈정거리고 있을 무렵, 경찰이 레이겐의 몸을 거칠게 구속했음.
뭐야?! 잠깐만!!!
광둥어로 소리치는 경찰들에게 반항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음. 아니, 내가 피해잔데! 소리치던 레이겐의 손에서 아까 주웠던 꽁초가 떨어졌음. 아, 젠장. 불길한 예감이 스쳤음. 방 안에 남아있던 냄새와 손에 들려있던 꽁초. 단단히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음. 잠시, 잠시만요. 영어로 이야기합시다. 영어! 레이겐의 말을 깡그리무시한 경찰은 레이겐을 끌고 내려갔음.
결국 경찰차에 타게 된 레이겐은 한숨을 쉬었음. 일본에서도 경찰차를 탄 적이 없었는데, 수갑은 안 차서 다행인가. 킥킥 웃던 레이겐이 창밖을 쳐다봤음. 휘황찬란한 홍콩의 밤거리가 스쳐 지나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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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겐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었음. 아니, 그러니까 난 그거 안 했다니까? 난 밖에 나갔다 왔더니 방이 다 털려있었고, 그 꽁초는 처음 본다고! 홧김에 일본어로 소리친 레이겐은 의자에 기대 손으로 눈을 가렸음. 씨발... 진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음. 거기다 레이겐의 신분을 인증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가방 안에 있었음. 영사관이 몇 시에 열더라? 아... 오늘 주말이지. 젠장...
통역인을 찾기 위해 전화를 돌리던 다른 경찰들이 포기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음. 시간이 너무 늦어서 통역을 찾진 못하겠고, 일단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피곤한 뇌는 단어를 모두 알아듣지 못했음. 뉘앙스만으로 유추를 한 레이겐은 고개를 끄덕이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음. 소란스러운 경찰서 한쪽 의자에 앉은 레이겐은 주먹을 쥐었다 폈음. 좀전에 구속을 당한 탓에 손이 욱신거렸음.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거지? 가방을 안 들고 나간 거?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한 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약속을 잡은 거? 순간 시게오의 얼굴을 생각한 레이겐은 무릎을 올려 얼굴을 파묻었음. 몇 시간 전만 해도 바에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 했는데,
아.
카게야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겐은 입술을 깨물었음. 미쳤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그런다고? 자신의 어리숙함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음. 레이겐은 피곤한 눈을 몇 번 비비다 눈을 감았음.
레이겐 아라타카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레이겐은 콜록거리며 일어났음. 경찰서 안이 추워서 그런가, 몸이 덜덜 떨렸음. 앞을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음. 누구시죠? 아, 통역이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차가워진 팔을 쓸면서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음.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통역만 잘되면 어떻게든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얘기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음. 자신은 피해자일 뿐이다. 그 꽁초는 처음 보는 거였고, 떨어져 있길래 주운 거다. 라고 억울함을 어필해봐도 경찰은 믿어주지 않았음. 지친 레이겐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음. 그 순간 경찰서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나왔음. 정장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눈에 띄었음. 짙은 보조개와 험악한 인상이 눈에 띄는 남자였음.
레이겐 아라타카 씨? 듣고 계신가요?
예? 아... 예.
통역사가 부르는 소리에 레이겐은 다시 고개를 돌려 집중했음. 남자가 지나가면서 언뜻 레이겐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음. 기분 탓인가? 레이겐은 어느새 자기 앞에 놓여진 종이를 바라봤음. 입국 후 행적을 모두 적으라는 말에 레이겐은 얼어붙은 손으로 펜을 들었음. 몇 자 적어 내려가다 보니,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음. 레이겐 씨.
뒤에서 시게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레이겐은 몸을 돌렸음. 저녁에 봤던 옷차림과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모습이었음. 시게오의 얼굴을 보자 모든 긴장이 풀린 레이겐은 눈에 힘을 주었음. 조금만 힘이 풀리면 눈물이 날 것 같았음. 레이겐의 표정을 본 시게오가 장갑을 벗고 다가왔음. 그래. 이 담배 냄새. 아까까지만 해도 이 망할 담배 냄새를 죽이고 싶었는데, 시게오에게 맡으니 여러가지 감정이 올라왔음.
...도와주러 왔어요. 괜찮아요?
다정한 시게오의 목소리에 레이겐은 고개를 숙였음.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바닥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음. 고개를 숙인 걸 보며 머뭇거리던 시게오는 두 손을 들어 레이겐의 뺨을 잡고 올렸음. ...나는 눈치가 없어서, 얘기를 하지 않으면 몰라. 당신, 괜찮아? 자상하게 눈물을 닦아주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몇 번 입을 열었다가, 포기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음. 알겠어.
앞에 있던 경찰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시게오는 안으로 들어갔음. 레이겐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경찰은 곧 통역가를 보냈음.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레이겐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시게오가 들어간 문을 쳐다봤음.
들어간 지 채 10분이 안 돼서 나온 시게오는 레이겐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음. 이제 다 됐어요. 가요. 시게오의 말에 레이겐은 경찰을 쳐다봤음. 경찰은 불안한 눈으로 시게오를 쳐다본 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안쪽으로 들어갔음. 레이겐 씨. 몸이 너무 차요. 몸을 좀 따듯하게 해야 할 거같은데...
시게오를 한번 쳐다본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를 나갔음. 밖은 해가 뜨려는 건지 밝아지고 있었음. 따듯한 바깥 온기에 잠깐 몸을 녹이던 레이겐은, 뒤따라온 시게오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음. 어떻게 알고 왔어? ...친구가 경찰서에서 레이겐 씨를 봤다고 해서요. 친구가 나를 어떻게 아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주저하는 모습이었음. ...이야기 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고마웠어.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레이겐을 잡은 시게오가 작게 말했음.
그... 고민... 상담을 하다 레이겐 씨 이야기를 했어요.
무슨 고민상담?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던 레이겐이 시게오의 얼굴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음. 새하얀 피부가 목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음. 못볼것을 본것같은 기분에 레이겐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말했음. 그렇다고 해도, 뒤에서 사람 얘기를 하면 안되는거 아냐? 크흠! 미안해요. ...아니야.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시게오가 다시 입을 열었음. 안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도둑이 들었다는 거 같은데, 맞아요? 아... 맞아. 그러면 제가 같이 숙소로 가서 확인해봐도 될까요? ...상관은 없는데,
경찰서에서 숙소까지 걷는 동안, 둘은 말을 하지 않았음. 레이겐이 두어 번 길을 착각해 되돌아갈 때도, 시게오는 묵묵히 따라갔음. 해가 완전히 뜰 무렵 도착한 숙소 앞에는 대충 정리된 레이겐의 캐리어가 놓여있었음. 당황한 레이겐이 안으로 들어가서 따지자, 주인은 다른 숙소로 옮겨달라는 말만 할 뿐이었음. 뭐라 더 이야기하려던 레이겐은 입을 꾹 다물고 나왔음. 시게오가 뒤따라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곧 나오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하나 꺼냈음.
레이겐 씨.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음. 어제까지만 해도 레이겐이 묵었던 방에 시게오가 있었음.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는 시게오를 보며 소리쳤음. 뭐 하는 거야? 내려와. 아니, 레이겐 씨 가방이 없잖아요. 아아... 도둑맞은게 그거야, 경찰한테 이야기 들었다면서? ...아. 시게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안으로 들어갔음. 담배를 끄고 캐리어를 잠그고 있자, 시게오가 나와 말을 걸었음.
갈 곳은 정했어요?
아니.
휴일이니까 구하기 쉽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숙소가 잡힐 때 까지만 제집에서 묵으실래요?
레이겐은 잠시 망설였음. 회사 사람이 했던 얘기가 스쳐 지나갔음. '그런 놈들이 대부분 약 유통하는 쓰레기들 이거든. 이런 애들이 여행객들 꼬셔다, 판매책으로 이용하더라. '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음. 이렇게 착한 사람이 그럴리가 없잖아. 레이겐은 자신을 억지로 위안시켰음. 그러면 부탁할게. 시게오가 캐리어를 끌며 말했음. 네.
시게오의 집은 파란 문 윗층에 있었음. 옆 쪽 벽에 나있는 철제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옥상과 함께 작은 집이 있었음. 홍콩에도 옥탑방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쯤 문이 거칠게 열렸음. 시게오! 도대체 어딜... 아까 경찰서에서 본 짙은 보조개가 인상적인 남자였음. 저 사람이 친구라고...? 시게오가 레이겐의 앞을 막아서더니, 손을 들어올렸음.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몰려왔음.
...뭐하냐? 시게오?
에쿠보. 가만히 있어.
깔끔하게 에쿠보를 무시한 시게오는 레이겐의 캐리어를 집 안에 넣으며 말했음. 들어오세요. 정리를 잘 하는 편은 아닌지, 난잡한 집 내부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음. 모든 냄새가 막 빠져나간 것처럼. 잠시 집 안을 구경하고 있자, 시게오는 문을 닫고 말했음. 청소가 잘 안되있어서... 아니, 남자 둘이 사는 것 치곤 깨끗한 편 아닌가...? ...그런가요?
다시 거칠게 문이 열리고 에쿠보가 뛰어들어왔음. 시게오! 이 몸의 말 무시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에쿠보의 말을 무시한 시게오는 레이겐에게 말을 걸었음. 밤 샌거 아니예요? 피곤할 거 같은데, 조금 잘래요? 아니면, 식사라도 할래요? 우선 조금만 잘 수 있을까? 너무 피곤해서. 탁자에 약간 떨어진 담뱃재를 보던 레이겐이 눈을 굴려 재떨이를 찾았음. 탁자에는 재떨이가 있었다는 흔적만 살짝 있을 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음. 그러면 방으로 안내해드릴께요.
레이겐과 짐을 방 안에 넣고 나온 시게오에게 에쿠보가 광둥어로 말을 걸었음. 경찰서 다녀온거야? 응. 그렇게 급하게 나가더니 결국은 맞았구만? 낄낄거리는 에쿠보를 보던 시게오가 손을 들어올렸음. 동시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던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음. 그걸 보던 에쿠보가 담배를 하나 꺼내물자, 시게오가 짧게 경고 했음.
당분간은 집에서는 피지 마. 아니, 아예 밖에서도 피지 마.
이 몸은 딱히 상관없는데, 너는? 괜찮겠냐?
응. 당분간은...
...확실한 거 맞아?
그보다 부탁이 있는데,
시게오의 말을 들은 에쿠보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음. 가방 하나만 찾으면 된다는 거지? 귀찮구만, 성채를 다 뒤져야 하는 건 아니고? 응. 내가 본 적 있던 사람이었어. 내가 말한 곳에 가면 있을거야. 하아... 금방 다녀올테니, 집 안에 있을거야? 응. 소파에 걸쳐 둔 자켓을 입는 것을 본 시게오가 쿠션을 그 자리에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의 청소가 모두 끝났음.
그럼 이 몸은 다녀올테니까...
아, 에쿠보. 저번에 말한 거 있잖아.
어떤 거?
왼손에 반지가 있으면...
아아.
에쿠보는 흘깃 레이겐이 들어간 방을 쳐다봤음. 시게오. 저기는 네 방인데, 저기에서 재우면 넌 어디서 자려고... 속으로 한숨을 쉰 에쿠보가 시게오의 말에 답을 해줬음.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응, 에쿠보. 그거 확실한거야? 시게오. 서운하네~ 내 말이 틀린게 있었어? 구두를 챙겨신은 에쿠보가 침울해보이는 시게오를 보고 킥킥 웃었음. 시게오. 이몸이 말했지? 넌 뭐든 할 수 있다니까, 신도 될 수 있는 남잔데, 상대가 있던 말던 무슨상관이야. 그럼 다녀온다~. 문을 닫고 나가는 에쿠보를 보며 시게오는 작게 중얼거렸음. 근데, 그건 나쁜짓이잖아.
레이겐이 눈을 떳을때는 저녁이었음. 아, 하루종일 자다니.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겐을 아까 제대로 보지 못했던 방을 한번 쭉 둘러봤음. 꽤 넓은 방임에도 불구하고, 가구는 책상과, 옷장, 침대가 끝이었음. 여기에서 말 하면 울릴 것 같은데... 레이겐은 속으로 생각하며 방 밖을 나왔음.
방 밖은 적막만이 가득했음. 시게오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음. 창 밖은 뭐하러 보고있는거야? 아. 일어났어요? 응. 덕분에 잘잣어. 고마워. 시게오의 옆에 앉은 레이겐은 같이 창 밖을 바라봤음. 저 멀리 높은 건물이 보였음. 배 안고파요? 조금. 밥 먹으러 갈까요? 집에는 딱히 먹을게 없더라구요. 그래.
레이겐은 캐리어에서 그나마 멀쩡한 옷을 찾느라 씨름을 했음. 그걸 옆에서 보던 시게오가 자신의 옷장에서 셔츠를 하나 꺼내 건네줬음. 생각보다 큰 셔츠에 레이겐은 소매를 한번 접었음. 다 입었고, 가자. 볼이 붉어진 시게오를 모른 체 하며 말했음.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나온 레이겐은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려다 시게오를 보고 다시 집어넣었음. 안펴도되요? 응. 지금은 별로, 사실 한 대 피고 싶어서 입과 손이 근질거렸지만, 주머니에 손을 꾹 집어넣는 것으로 참았음. 같이 야시장을 구경하던 시게오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음.
아. 레이겐 씨 가방 있잖아요.
응? 아...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친구한테 부탁을 했거든요. 아마 내일쯤에는 가지고 올거예요.
그 말에 레이겐은 비로소 편하게 웃을 수 있었음. 와! 진짜 다행이다. 밝게 웃는 레이겐을 보던 시게오가 따라 웃으며 물어봤음. 많이 소중한거예요? 소중하기도 하고, 안에 정말 중요한 게 많았거든. 영사관 갈 생각에 눈 앞이 깜깜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 카게야마. 마음이 편해진 레이겐이 중얼거렸음. 다행이다. 미토씨한테 미안할 일이 생기지 않아서.
미토씨?
응?
아, 내가 입 밖으로 말했구나. 식은땀을 살짝 흘리던 레이겐이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음. 응. 내 약혼녀, 이야기 안했던가? ...네. 슬쩍 시게오의 안색을 살폈지만, 옆에 있는 조명에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음. 잃어버리면 곤란하겠어요. 뭐, 그렇지.
9
빗소리에 깨어난 레이겐은 시게오를 찾았음. 어제 집에 돌아온 뒤, 민폐를 끼치기 싫다고 거실에서 자겠다는 레이겐을 꾸역꾸역 방에 집어 넣은 뒤, 시게오는 일이 있다며 밖에 나갔었음. 아직 돌아오지 않은건가? 잠깐 밖을 나가볼까. 하고 우산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우산은 보이지 않았음. 나가는 걸 포기하고 티비를 보던 레이겐은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음.
이제 들어온거야?
네. 좀 바빠서요.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데, 시게오는 한 군데도 젖은곳이 없어보였음. 우산도 없이 맨 손으로 돌아온 시게오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음. 죄송해요. 찾아보려고 했는데. 시게오가 꺼낸 것은 조각조각 흩어진 가방이었음. 가방을 받아든 레이겐은 상태를 살폈음. 가방에는 이음새의 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음. 누가 노리고 실만 뜯어낸 것 마냥. 잔해에서 내용물을 꺼낸 레이겐은 얼굴을 굳혔음. 비행기 티켓이 어디갔지?
혹시, 이것들 밖에 없었어?
...네. 혹시 사라진 게 있나요?
아, 아니. 다 있는 것 같아.
9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잠깐 이어졌음. 밖이 별안간 밝아지더니, 천둥소리가 뒤이어 들려왔음. 아까부터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레이겐의 귓가에 울렸음. 계속 모르는 척 하는 게 맞아? 착한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위안하면서 다 덮어두고 모르는 척 하는 게 맞아? 레이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었음. 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시게오는 레이겐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다 입을 열었음.
...괜찮아요?
아, 응. 가방이 망가져서 조금 놀랐거든.
...미안해요. 제가 다시 찾아준다고 했는데...
아,아니! 네가 사과할 이유는...
제가 새 가방을 하나 사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레이겐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음. 시게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음. 다시 한 번 더 밖이 밝아지고 시게오의 얼굴이 보였음. 새하얀 얼굴과 속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를 보고 레이겐은 입을 열었음.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어. 이젠 나 알아서 할게. ...왜요? 천둥소리가 다시 한 번 더 들리고, 가구들이 덜컹거리기 시작했음.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어요? 말해주시면, 고쳐볼게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린 모양새에 레이겐은 그동안 외면했던 질문을 던졌음.
카게야마 시게오. 넌 뭐야?
...
네가 이상한 능력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넌 도대체 뭐야?
...저는 초능력자예요.
시게오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레이겐이 쥐고 있던 망가진 가방이 한 올 한 올 흩어져갔음. 실이 둘 사이를 날아다니고, 천천히 떨어졌음.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곧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게 돼서, 가족들이 다치기 시작했어요. ...난 그걸 견디지 못했고, 그래서 도망쳤어요. 여기 홍콩으로. 이곳에 있으면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 있다고 친구가 말했거든요. ...약? 네. 약이요. 내가 약을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아요. 레이겐이 잠들던 방문이 열리더니, 작은 철제케이스가 날아왔음. 달칵 소리를 내고 케이스가 열리니, 숙소에서 봤던 묘한 담배가 들어있었음.
...이 '약'을 위해서 홍콩에 살고 있단거야?
네.
순순히 대답하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신음을 참았음. 저게... '약' 이라고? 생각이 복잡해지고 무어라 입을 열려다 다가와서 손을 살짝 잡는 시게오를 보며 고개를 올렸음. 이제 도와줘도 될까요? 라는 표정을 짓는 시게오를 보고 뭐라 말을 할 수 없던 레이겐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음.
허락의 의미로 알아들은 시게오가 밝은 표정으로 거실 쪽 서랍장을 열더니 우산을 하나 꺼냈음. 우산이 시게오에게 날아오고, 그 우산을 레이겐에게 건네줬음. 같이 나가서 찾아봐요. 건네받은 우산은 어린애가 쓸법한 우산이었음. 다소 세월이 흘렀는지 초능력자예요, 깔끔했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레이겐은 손잡이에 달린 개구리를 엄지로 어루만졌음. ...귀여운 우산이네.
어렸을 때 선물 받은 거예요. 정말 소중하게 여겼던 건데...
...
그래서 그런가, 제대로 써 본 적도 없거든요.
...그렇구나.
다시 신발을 신는 시게오를 보며 멍하니 생각했음. 어린애 같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소중한 것을 다 내어주는 어린애. 어서 가요. 시게오의 말에 레이겐도 신발을 신었음. 문을 열고 나가자 장대 같은 비가 둘을 반겼음.
너무 많이 오는데, 우산이 작아서 딱 붙어야겠는걸.
아.
왜그래?
아니요... 그냥...
말을 흐리는 시게오를 보다 레이겐은 우산을 펼쳤음. 뭐해? 이리오지 않고, 시게오가 머뭇거리며 우산 안으로 들어왔음. 으음... 카게야마, 네가 우산을 드는 게 낫겠다. 주세요. 작은 우산에 둘이 들어오자, 어깨가 자연스레 닿았음. 이제는 거의 나지 않는 담배냄새에 레이겐은 입술을 깨물었음.
아, 가방 사러 가기 전에 밥부터 먹을래요?
그래.
먹고싶은 건 있어요?
으음...
자꾸 스치는 어깨가 불편했는지, 시게오는 레이겐의 어깨를 감싸 안았음.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 시게오가 레이겐의 귓가에 말했음. 레이겐씨가 원하는거면 뭐든 좋아요. 귀가 불타는 듯한 느낌에 레이겐은 반대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음. 젖겠어요. 조심해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레이겐은 눈앞에 보이는 상가에 비친 모습을 봤음. 행복하다는 듯 레이겐을 쳐다보는 시게오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보였음. 큰일 났다. 레이겐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음. 계속 붙어있으면 안 돼.
식당에 들어오니 아까와는 달리 푹 젖은 시게오의 어깨가 보였음. 종업원이 건네준 물수건을 시게오에게 건네줬음. 자연스레 손을 닦는 시게오를 보다가 한숨을 내쉰 레이겐이 어깨를 가리켰음. 어깨. 다 젖었잖아. 안 불편해? ...아. 자신의 어깨가 젖었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물수건으로 어깨를 닦아냈음.
난 완탕면으로 할 건데, 카게야마. 너는?
저도, 아. 제가 시킬게요.
종업원을 불러 광둥어로 주문하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손톱으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음. 그러면 언제부터 홍콩에 있던걸까?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구사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아무리 그래도 가끔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을까? 가족들이 있다고 했는데... 보고 싶지는 않을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비가 그쳤음. 우산을 소중히 접은 시게오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음. 비가 벌써 그쳤네요. 그러게.
곧이어 방문한 가게에서 둘은 한창 실랑이를 했음.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카게야마, 너무 그러지 마. 이 이상 신세 지기도 미안해. ...그렇지만, 결국 레이겐의 말을 따른 시게오는 한발 물러섰음. 괜찮은 가방을 찾던 레이겐의 눈에, 똑같은 디자인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음. 다행이다. 저거로 사면 되겠어. 레이겐이 가방을 들어 올리자 시게오가 옆에 다가왔음. 골랐어요? 응. 가방의 디자인을 확인한 시게오의 얼굴이 살짝 굳고,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음. ...똑같은 디자인이네요. ...응. 그렇지 뭐, 시게오의 도움으로 계산을 한 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에 레이겐은 밖으로 나왔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음. ...에쿠보라고 했던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레이겐에게 다가왔음.
시게오는?
...가게 안에.
쯧 하고 혀를 찬 에쿠보가 주머니에서 철제 케이스를 꺼냈음. 잠깐, 여기서 그걸 피면. 다급하게 레이겐이 외치자, 에쿠보는 킬킬거리며 담배를 확인시켜줌. 그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일반적인 연초인 걸 확인 한 레이겐이 안도의 한숨을 쉬자, 에쿠보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음.
뭐야, 시게오가 그렇게 네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더니, 뭔지 알고 있었던 거냐?
...
흐응...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에쿠보를 보다 레이겐은 입을 열었음. 그걸 알려준 게 당신이야? 글쎄? 시게오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에쿠보가 담배를 손으로 튕겼음. 물웅덩이에 빠진 담배가 꺼지고, 에쿠보는 시게오에게 인사했음. 여 시게오. 에쿠보?
시게오. 문제가 조금 생겨서 말이야~
...니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잖아.
아, 이 몸이 해결하기엔 좀 어려워서 같이 가줄 수 있지? 우린 친구잖아.
...
시게오가 잠깐 머뭇거리자, 레이겐은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음. 어서 가봐, ...레이겐 씨는요? 나는 슬슬 피곤해서 말이야. 먼저 집에 들어가도 쉬어도 되지? ...네. 고마워. 뒤돌아 걸어가는 레이겐을 쳐다보다가 에쿠보는 짧게 경고했음. 시게오. 능력이 새고 있잖나.
10
새벽이 될 때까지 레이겐은 잠에 들지 못했음. 밖으로 나가 담배를 파고들어 오기를 수십 번. 뻑뻑한 눈을 비비며 레이겐은 생각했음. 이 이상으로 카게야마와 지내면 안 될 것 같아. 시게오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레이겐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음. 더 같이 있다간 뭔가를 뺏길 것 같아서. 자신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시게오는 여행 중 만난 신기한 추억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음.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레이겐은 캐리어를 열었음.
짐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챙기는 속도는 무척 느렸음. 마치 누군가 자신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점심때가 되어서야 모든 짐이 챙겨졌고, 캐리어를 닫은 레이겐은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겼음. 거실에서 머뭇거리기를 몇 분, 결국 신발을 신은 레이겐이 문을 열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음.
안가면 안될까요.
...
레이겐 씨.
...
여기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레이겐의 캐리어가 두둥실 떠오르고, 문이 닫혔음. 뒤를 돌아볼까 고민을 했지만, 그러면 모처럼 먹은 마음이 흐지부지될까 두려웠음. 작게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레이겐은 입을 열었음.
아니~ 생각해보니까, 내가 내일 출국이라서.
내일 출국 아니잖아요.
레이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았음. 거짓말을 들킨 표정을 하는 시게오를 보고 한숨을 쉬었음. 그래. 티켓은 어딨어? ...미안해요.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냥... 나랑 같이 있어줬으면 했어요.
...카게야마. 나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야. 곧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도 있어.
...
네가 나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단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는 시게오의 모습에 입술을 꾹 다문 레이겐은 몸을 돌렸음. 공중에 떠있는 캐리어를 억지로 내리고, 문을 열고 나가자 뒤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음.
4,7X1
시게오는 반쯤 날듯 걸으며 집에 도착했음. 열쇠를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초능력으로 문을 열자, 소파에 누워있던 에쿠보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음. 뭐 하는 거야? 시게오. 약에 취했어? ...아니. 술을 조금 마셨어. ...누구랑? 평소와 달리 조금 빨라진 말투에 에쿠보는 이마를 짚었음. 소파에 앉아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온 시게오는 벌컥벌컥 들이켰음. 레이겐 씨랑.
...레이겐?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냐? 아니, 어디서 만난 건데?
에쿠보의 말에 시게오는 멍하니 레이겐을 떠올렸음. 일본인 이였는데, 홍콩으로 여행을 왔대. ...그러냐? 응. 광둥어를 못하길래, 주문을 도와줬거든. 에쿠보는 시게오의 말을 들으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음. 계속 이야기해봐. 시게오. 근데, 고맙다면서 나한테 손을 내밀었어. 손? 응.
그 말에 에쿠보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음. 시게오가 홍콩으로 도망친 후로 사람과의 접촉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빼고 없다시피 했음. 특히 구룡성으로 들어간 후로는 더. 구룡성에 있는 사람들은 기이한 소년을 무서워했음. 소년이 손을 들어 올리면 사람들이 나가떨어졌고, 쇳더미들이 찰흙처럼 구겨졌음. 분명히 호의로 한 행동들이었지만, 사람들은 규격 밖의 힘을 가진 시게오를 무서워했음.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느껴진 다는걸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시게오는 다시는 남을 도와주지 않았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시게오.
응.
레이겐을 만나느라 몇 시간 동안 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시게오는 불안해하지 않았음. 술이 조금 들어갔긴 했지만,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음. 그 사람이랑 더 만나고 싶어. 조금 더 이야기하고, 같이 있고 싶어. 시게오의 말에 열렬하구만~ 하고 킥킥거리던 에쿠보는 곧 인상을 찌푸렸음. 시게오. 일이 생긴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 에쿠보가 담배를 비벼껐음. 그 향이 시게오의 코끝을 스치고, 현실에서 다시 꿈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음. 알겠어. 옷만 갈아입고 나가자.
4,7X2
시게오는 컨테이너를 들어 올렸음. 안에서 크게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음. 한쪽 공터에 컨테이너를 내려둔 뒤, 잠금을 풀자 망가진 짐 더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음. 그 사이에서 몇 가지들을 공중에 띄워 확인을 했음. 모두 다섯 상자야. 에쿠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뒤에 있던 사복경찰들을 불렀음. 자, 모두 찾았으니, 약속한 보수는 잘 챙겨달라고? 떨떠름하게 끄덕거리던 경찰은 질린 눈으로 시게오를 쳐다봤음. 불법 마약을 단속하는 일에, 저 사람보다 빠른 사람은 홍콩. 아니 전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음. 그 대가로 약간의 마약을 빼돌리는 것과 막대한 보수를 주고 있긴 했지만,
시게오. 이 몸은 청장을 만나고 올 건데, 집으로 가 있을 거야? 아니면 가게에?
집으로 갈 거야.
시게오는 주머니에서 케이스를 꺼냈음. 담배를 하나 꺼낸 뒤, 말려진 부분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음. 정신이 몽롱해지고, 강제된 행복감이 몸을 덮쳤음. 오감이 흐릿해지고, 시게오는 멍하니 주위를 쳐다봤음. 그러다 경찰들 사이에서 금발을 발견하고 시게오는 느슨하게 웃었음. 아, 그 사람도 금발이었는데,
금발?
응. 레이겐 씨. 금발이었거든.
...그러냐?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쉬고 있던 시게오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에쿠보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음. 머리에 찬물이 쏟아진 듯한 느낌이 들고, 공중에 붕 떠올랐음. 시게오 잠시만, 너무 흥분했어! 에쿠보의 말을 무시하고 창문을 열고 뛰쳐나갔음. 경찰서로 날아가는 순간이 길게만 느껴졌음. 급하게 뛰어들어가니, 창백한 안색을 한 레이겐이 보였음. 담배냄새가 깊게 밴 장갑을 벗고 다가가자,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레이겐이 시게오를 쳐다봤음.
...도와주러 왔어요. 괜찮아요?
그 말에 고개를 숙인 레이겐을 보고, 시게오는 안절부절못했음. 어떡하지, 내가 와서 불편한 건 아닐까.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시게오는 맘을 굳게 먹고, 레이겐의 뺨에 손을 갖다 댔음. 차가운 뺨을 들어 올리자, 한껏 찡그린 얼굴이 보였음. ..나는 눈치가 없어서, 얘기를 하지 않으면 몰라. 당신, 괜찮아? 뺨을 잔뜩 적시던 눈물을 닦아주자, 레이겐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몇 번 열었음.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시게오는 생각했음. 내가 또 도와줄 수 있구나.
알겠어.
청장은 시게오를 불안하게 쳐다봤음. 자신의 앞에 시게오가 있다는 것에 큰 위협감을 느끼는 것 같았음. 당신을 괴롭힐 생각은 없어. 밖에 있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할 뿐이야. 청장은 급하게 다른 사람을 부르더니, 몇 마디 나눴음. 마약을 한 것으로 확인돼서, 현장체포를 했다는 말에 시게오는 얼굴을 찌푸렸음. 저 사람은 마약 안 해. ...아니, 일단 증거가... ...내가 마약 중독자랑 아닌 사람 구분도 못 할 것 같아? 그 말에 청장은 한숨을 쉬었음. 데리고 가던가,
다시 밖으로 나온 시게오는 레이겐의 팔목을 잡았음. 이제 다 됐어요. 가요. 순순히 따라오는 레이겐을 보다가, 시게오는 주머니 안에 있던 철제 케이스를 소리가 나지 않게 구겼음. 이거 때문에 이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한 거야.
4,7X3
시게오는 혹시라도 초능력이 새어나오지 않게 집중했음. 약기운이 떨어진 상태로는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었음. 눈앞에 있는 소매치기들을 쳐다보다 짧게 말했음. 내가 경고를 하나 하겠는데, 함부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마. 그 사람한테는 무척 소중한 걸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걸 모른다면, 내가 알려줄 수도 있어. 고개가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다가 시게오는 가방을 주워들었음.
따로 빼돌린 건 없겠지?
네. 네! 모든 물건이 그대로 다 있습니다!
그 말에 시게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몸이 자유로워진 소매치기들은 다급히 그곳을 빠져나갔고, 시게오는 가방을 찬찬히 살펴봤음. . 응. 내 약혼녀, 이야기 안 했던가? 레이겐의 말이 떠오르고, 초능력을 제어할 틈도 없이 가방이 찬찬히 분해되어 갔음.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사람한테 소중한 거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능력은 말을 듣지 않았음. 곧 안에 있는 내용물들이 두둥실 떠오르고, 시게오는 그 중 비행기 티켓을 손에 잡았음. 4일 후, 일본으로 가는 티켓.
11
레이겐은 새로 잡은 숙소의 침대에 누워있었음. 저렴한 숙소를 찾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또 구룡성 근처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음. 짧은 간격으로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비행기 티켓을 재발급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음. 몸살이라도 오려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머릿속에선 마지막으로 봤던 시게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음. 눈물에 젖은 얼굴. 분명히 자기와 동갑임에도 앳되어 보이던 모습.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이, 마치.
쾅!
어디서 들어본 듯한 폭발소리가 들렸음. 레이겐은 주섬주섬 일어나 창문 밖을 쳐다봤음. 저 근처에 보이는 구룡성에서 폭발이 일어났는지, 뿌연 연기가 나고 있었음.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건물의 잔해가 보였음. 설마... 초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이겐은 고개를 저었음. 아니,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건데, 신경 쓰지 마. 관심을 가질 필요 없어.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레이겐은 주머니 안에 엉망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음.
뭐지?
꺼내보니 며칠 전 시게오가 적어 준 쪽지였음. 삼 일 후 저녁 일곱 시. 파란문. 마치 어린애 같은 삐뚤빼뚤한 글씨. 그 순간 자기 옆에 서서 행복하다는 듯 웃는 시게오의 얼굴이 떠올랐음. 생각할 틈도 없이 레이겐은 문을 열고 뛰쳐나갔음. 손에 쪽지를 꽉 쥐고선 폭발이 일어난 방향으로 뛰었음. 뭘 가져본 적도 없는 어린애. 남들이 다칠까 봐 겁이 나서 숨어버린 어린애. 레이겐은 그런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없었음.
도망치는 사람들을 피해서 뛰던 레이겐은 곧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시게오를 발견했음. 이리저리 파편이 휘날리고 레이겐은 그걸 피해 조심히 걸어갔음. 근처에 다가갈수록 담배냄새는 점점 짙어졌음. 곧 시게오의 앞에 도착한 레이겐은 급하게 숨을 들이켰음. 도대체 얼마나 한 거야. 시게오의 앞에 주저앉아 뺨을 잡아 들어 올리자 동공이 풀린 시게오가 보였음.
카게야마.
...
카게야마 시게오.
...나는 늘 사람을 다치게 해요. 내가 현실을 살아가려고 하면, 자꾸 사람들이 다쳐요.
...
그래서 꿈을 꾸듯 살기로 했어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내가 생각을 안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으니까,
...
근데 당신을 만나니, 현실을 살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욕심을 내고 싶었어요. 당신이랑 같이 현실을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시게오는 다시 고개를 떨궜음. 허공을 맴도는 자기 손을 쳐다보던 레이겐은 멍하니 생각했음. 이 사람을 선택하면 난 모든 걸 포기해야 할 거야. 그럴만한 용기가 있어? 레이겐 아라타카. 자신의 물음에 레이겐은 킥킥 웃었음. 이미 마음먹은 주제에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나는. 그리고, 레이겐은 다시 시게오의 뺨을 잡아 올렸음.
나는, 너랑 만나고 꿈을 꾸는 것 같았어.
...
그 짧은 순간들이 모두 꿈 같아. 그래서 무서워 지는 거야.
...
이 꿈에 빠지면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거든.
...
얼빠진 시게오의 표정을 보고 레이겐은 작게 웃었음. 근데. 생각해보니까, 난 평생을 현실을 살았거든? 그래서, 이제부턴 꿈을 꾸듯 사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입을 맞췄음. 그 순간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리고, 둥둥떠다니던 잔해들이 모두 떨어졌음. 연기가 피어오르고, 쿵쿵거리는 소리 사이에서 레이겐은 입술을 떼고 속삭였음. 소리 사이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시게오는 고개를 끄덕였음. 네.
12
...너, 정말 어제 처음이 맞아?
맞다니까요.
레이겐은 쑤시는 허리를 잡으며 중얼거렸음. 누군가 두들겨 패기라도 한 듯 온몸이 쑤셨지만, 제일 아픈 곳은 허리와,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겐은 반짝거리는 시게오를 흘겨봤음. 나는 지금부터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횡단해야 한다고. ...안가면 좋겠어요. 돌아온다니까, ...그래도요. 옷을 주섬주섬 입는 레이겐을 불만스레 쳐다보던 시게오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음.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보니까, 열도 좀 나는 것 같은데. ...불법체류자가 되라고? ... 다시 조용해진 시게오를 보고 레이겐은 한숨을 쉬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음. 정말, 돌아올 거야.
...약속 한 거에요.
응.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시게오는 쭈뼛거리다가 티켓을 건네줬음. 미안해요. 숨겨서, 그냥... 당신이 가지 않았으면 했어요. 받아든 티켓을 여권 사이에 낀 레이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음. ...티켓은 재발급이 돼서, 숨겨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몰랐어요. 비행기를 타본 적 없어서. 가방에 여권을 넣으려다가 레이겐은 사색이 되었음.
뭐? 그럼 여긴 어떻게... 아, 배라도 타고 온 거야?
...배도 안 타봤는데요.
...
...
이거, 내가 불법체류자가 될 걱정을 할 게 아니고... 밀입국자가 여기 있었구만. 레이겐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음. 일단, 어서 출발하자. 시간에 늦겠어.
공항은 쌀쌀했음. 정말 열이라도 오르기 시작한 건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레이겐을 시게오는 걱정스럽게 쳐다봤음. 정말 괜찮아요? 응. 아까 진통제도 샀으니까, 비행기 타면서 좀 자면 괜찮겠지. 짐을 부친 레이겐은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음. 들어가기 전에 조금만 쉬었다가 가야겠어.
시게오는 그런 레이겐을 보다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백에서 파란색 가방을 하나 꺼냈음. ...뭐야? 제가 말했잖아요. 가방... 미안하다고, 그래서. 이거 드리는 거에요. ...괜찮다니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레이겐은 가방을 받아들었음. 그 안에 작은 쪽지가 있어요. 제가 보고 싶으면 열어주세요. 알았죠? ...그래,그래.
0
일본에 도착한 레이겐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았음. 아까부터 어질어질한 시야와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몸은 공항 관계자들의 걱정을 사기 충분했음. 병원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라는 말에 모두 거절한 레이겐은 게이트 밖으로 나왔음. 그리고 미토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현실감이 닥쳐왔음.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덜덜 떨려왔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곧 암전되었음. 저 멀리서 미토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음.
누가 손을 잡고 있는 느낌에 레이겐은 눈을 떴음.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미토가 잠들어 있었음. 옆자리에 놓인 파란 가방을 보다가 레이겐은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켰음. 움찔거리는 느낌이 들었는지, 미토는 잠에서 깨 레이겐의 상태를 살폈음. 괜찮아? 아라타카? 엄청나게 걱정했다고!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미토씨. ...내 옷은 누가 갈아입혀 줬어? 간호사들이, 그것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동안 연락은 안 되고. 영사관에 전화라도 해야 하나 망설였다고. 미안해. 흠뻑 젖은. 문득 미토가 옷을 갈아입혀 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레이겐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음. 정말, 정말 미안해... 미안해. 미안... 미안합니다. 벌벌 떠는 레이겐을 미토는 걱정스럽게 쳐다봤음. 많이 아픈거 맞지? 기다려, 아라타카.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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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타카.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미토의 말에 레이겐은 고개를 들었음. 눈이 마주치자, 티가 나지 않게 슬쩍 시선을 피했음.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가 봐. ...그렇구나. 하여튼 오늘은 예식장 팸플릿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야. 내가 알아본 예식장들인데, 아라타카 눈에도 괜찮아 보일까 해서,
...미토씨의 눈에 예뻐 보인다면 괜찮을 텐데.
무슨 소리야. 결혼은 둘이 하는 건데, 서로의 의견이 중요하지. 미토의 말에 레이겐은 쓰게 웃었음. ...그렇지. 그러면 그 팸플릿 꼼꼼히 확인해주고, 내일 아라타카 집으로 갈게. 같이 나가서 확인하자. ...응. 팸플릿을 가방에 넣자 미토가 일어났음. 그럼 나 바빠서 먼저 가볼게. 미안해 아라타카. 모처럼의 데이트였는데... 아니야. 바쁘면 그럴 수 있지. 먼저 일어나.
집에 도착한 레이겐은 가방을 소파에 던졌음.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어낸 레이겐은 거울 속 자신을 쳐다봤음. 죄책감에 찌들어있는 얼굴에 레이겐은 고개를 돌렸음. 도망치고 싶어. ...어디로? 레이겐은 문득 시게오가 건네줬던 가방을 떠올렸음. 제가 보고 싶으면 열어주세요. 알았죠? 화장실을 뛰쳐나와 옷장을 연 레이겐은 가방을 꺼냈음.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열어보니 반으로 접은 쪽지가 보였음. 힘을 줘서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적은 글씨에 슬 웃던 레이겐은 내용을 읽었음. [제가 보고 싶어지면, 파란색 문을 찾아요. 파란색 문에서 문고리를 두 번 내리고, 다섯 번 두드린 다음. 내 이름을 불러요. 그러면, 문을 열어줄게. 레이겐.]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레이겐은 다급히 현관을 나섰음. 이미 어두워진 밖에서 파란색 문을 찾기 힘들었지만, 레이겐은 눈을 부릅뜨고 뛰어다녔음. 그렇게 뛰어다니길 한 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옷이 땀에 찌들었음. 잠시 서서 헉헉거리는 레이겐의 눈앞에 가게를 닫으려고 준비하는 철물점이 보였음.
저기, 죄송한데. 혹시 페인트 팝니까?
레이겐은 집에 도착해 페인트 내려놨음. 윗부분에 쓰여 있는 코발트블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뚜껑을 열었음. 특유의 냄새가 집을 가득 채우고, 레이겐은 붓을 들어 올렸음. 위쪽부터 꼼꼼히 칠해내려 가기 시작했음. 회색 문이 점점 파란색으로 변해가고,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아 다급해진 레이겐은 붓을 집어던지고 페인트 통을 들었음. 그 뒤 한걸음 물러서서 페인트를 뿌리자, 벽과 천장. 그리고 레이겐의 몸에도 온통 파란색 페인트가 튀었음. 그런데도 칠해지지 않은 부분이 보이자 레이겐은 비틀비틀 걸어가 다시 붓을 집어들었음.
0
...아라타카? 이게 무슨 냄새야?
열쇠로 문을 연 미토씨는 페인트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미친 사람처럼 벽에 붓질하는 레이겐이 보였음. 아라타카? 미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레이겐은 붓을 떨어트리고 문고리를 잡았음.
미토씨. 미안해.
...아라타카?
우리 결혼 못할 것 같아. 아니. 못하겠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레이겐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두 번 내렸음. 똑,똑,똑,똑,똑, 다섯 번 두들기고, 다시 한번 짧게 사과했음. 미안합니다. 미토씨.
시게오.
다시 1
시게오는 레이겐을 욕실에 집어넣었음. 온몸에 페인트가 튀고, 땀에 절어있는 모습이었음. 욕조에 물을 받은 뒤, 엉망이 된 옷을 벗기자, 마지막으로 봤을 때마다 앙상해진 어깨와 갈비뼈가 보였음. 축 늘어진 레이겐을 부축해 욕조에 집어넣자, 레이겐이 고개를 들었음.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그럭저럭요. 시게오는 조심히 스펀지로 레이겐의 몸을 닦았음. 물이 점점 푸르게 변해가고, 이미 굳어 잘 지워지지 않는 부분들은 초능력을 사용해 조심히 닦아냈음. 좁은 욕실에 곧 푸른 방울들이 둥실 떠오르고, 레이겐은 그걸 멍하니 쳐다봤음.
마치 꿈 같아.
꿈이요?
응. 이 광경들이.
저는 이제야 현실을 사는 것 같아요.
4,8X5
옆자리가 허전한 걸 느낀 시게오는 잠에서 깼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면서 주의를 둘러봤지만, 레이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 주섬주섬 바닥에 어질러진 옷들을 주워입자, 현관 소리가 들려왔음. 밖으로 나가보니 장을 보고 온 것인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헉헉거리는 레이겐이 보였음.
어디 다녀왔어요?
일단, 이것 좀 들어줘. 너무 무거워.
짐을 받은 시게오는 슬쩍 안을 쳐다봤음. 문어, 쪽파, 밀가루,계란... 이게 다 뭐지? 의아한 시선으로 레이겐을 쳐다보자 레이겐은 입꼬리를 쓱 올렸음. 저번에 말했잖아, 깼음 먹고 싶다고? 이 레이겐 아라타카가 만들어주겠다. 이거야.
반죽을 다하고, 문어의 손질까지 끝내고 나서야 레이겐은 전용 팬이 없다는 걸 깨달았음. 홍콩에서 타코야끼 팬을 구할 수 있으려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시게오가 다가왔음. 왜 그래요? 아, 그게 말이야... 타코야끼 팬이 없어서... 으음. 시게오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손을 들어 올렸음. 반죽이 약간 떠올라 동그랗게 뭉쳐지고, 그 안에 레이겐이 썰어둔 문어와 채소들이 들어갔음. 제가 동그랗게 말고 겉 부분이 익을 때까지 돌리면 되지 않을까요?
집 안에 가득 타코야끼 냄새가 차기 시작했음. 현관 소리가 기분 좋게 냄새를 맡으며, 반죽을 들어 올렸음. 처음에는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점점 요령이 생겨 일정한 크기의 타코야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음. 만들어진 타코야끼를 한데 모아, 가다랑어포와 양념을 뿌리니 꽤 그럴듯해 보였음.
자, 어서 먹어보라고!
의기양양한 레이겐을 보다가 시게오는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음. 과거에 먹었던 타코야끼 맛도 이런 맛이었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맛있었음. 맛있어? 네.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으스대는 레이겐의 모습에 시게오는 절로 웃음이 났음.
아라타카.
응?
사랑해.
시게오의 말에 자리를 정돈하던 레이겐의 손이 뚝 멈췄음. 그리고 곧,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타코야끼를 먹다 할 말이냐고 장난스럽게 소리침. 대답없이 쳐다보는 시게오의 시선을 느낀 레이겐은 고개를 돌렸음. 둘 사이에 침묵이 잠깐 오가고, 레이겐은 작게 중얼거림.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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