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겐] 10월10일
백업(24.06.22)
글 쓰면서 들었던 노래
1
스승님.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요.
아, 그래? 레이겐은 서운한 표정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이십 대 마지막 생일은 혼자 보내겠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으나,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사실. 레이겐 아라타카는 생일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철없는 십 대 때나 목을 맸지. 29살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는 생일을 꼬박꼬박 챙기고 기뻐하는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다. 사실, 그 나이대의 사람들은 거의 그렇다. 그냥 흘러가는 날 중 하나 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레이겐은 한숨을 쉬며 서랍 속에 넣어둔 담배를 꺼냈다.
영업을 마친 상담소는 조용했다. 레이겐은 창문을 살짝 연 다음, 담배에 불을 붙이려 애를 썼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습기를 먹은 성냥은 불이 붙질 않았다. 젠장. 짜증을 내며 쓰레기통에 성냥을 쑤셔 넣은 레이겐은 탕비실로 걸어갔다. 가스레인지를 키고, 담배에 불을 붙이자, 작은 탕비실에 연기가 가득 찼다. 그러고 보니 상담소에서 담배를 태우는 것도 오랜만인가, 모브가 온 뒤로 상담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생각이 모브에게 튀자,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가 더 쓰게 느껴졌다. 레이겐은 한숨을 쉬고 담배를 비벼끄고 청소준비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청소도구를 모두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하던 도중 레이겐은 충동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내일 예약도 없겠다. 상담소 문은 닫을까. 딱히... 생일을 챙길 생각은 없지만, 나한테 휴일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레이겐은 가벼운 마음으로 타자를 몇 자 두들긴 다음, 종이를 출력했다.
금일휴업. 이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고 상가를 나오는 길. 건너편 빵집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에 절로 발길이 끌렸다.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집 문을 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레이겐 선생님 아니세요?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겐은 상담소의 단골손님인 A씨라는 것을 깨닫곤 빠르게 영업용 미소를 지어냈다. 안녕하세요. A씨. 근처에서 빵집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였군요! 좋은 기운이 서린 가게입니다. 가벼운 칭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레이겐의 눈에 하나 남은 생크림 케이크가 들어왔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던 A씨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케이크가 필요하신가 봐요. 누구 생일이라도?
레이겐이 무어라 할 틈도 없이, A씨는 빠르게 사장의 얼굴로 변모했다. 빠르게 케이크를 꺼낸 A씨는 솜씨 좋게 포장을 시작했다. 이제 마감이니 싸게 드릴게요. 초는 몇 개나 필요하신가요?
거절 할 타이밍을 놓친 레이겐은 케이크를 들고 빵집 밖으로 나왔다. 이걸 혼자 먹긴 힘든데... 무거운 케이크를 노려본다고 한 들, 케이크가 작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받은 케이크도 꼭 이런 모양이었는데. 작년 생일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청소하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작년 생일은 즐거웠어.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2
집에 도착한 레이겐은 냉장고를 열었다. 크기가 작은 냉장고에 케이크를 집어넣으니 꽉 차 보이는 게 답답해 보였다. 저걸 언제 다 먹지. 투덜거리며 냉장고를 닫은 레이겐은 정장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뒤, 잠옷을 입고 한창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지나 있었다. 10월 10일. 레이겐 아라타카의 생일이 찾아왔다.
그 순간,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문자라니, 누구야. 투덜거리면서도 괜한 기대를 품고 핸드폰을 여니, 생일 축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소중한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매년 생일이면 오는 자동문자에 레이겐은 피식 웃었다. 뭘 기대하는 거냐고 나는. 온갖 미사여구로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문자를 삭제한 뒤, 레이겐은 핸드폰을 침대 쪽으로 던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굳은 몸을 주무르며 기지개를 하던 레이겐은 책상에 올려진 자명종을 들어 올렸다. 익숙하게 건전지를 뺀 레이겐은 일부러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좋아! 내일은, 아니 그러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늦잠이라도 자야지. 정말 즐거운데. 혼잣말이 끝나자 좁은 방 안에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시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저 멀리서 사람들이 즐겁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겐은 그게 싫어 빠르게 불을 끈 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나니, 레이겐 만의 작은 세상이 만들어졌다. 빛이 한 점 들어오지도 않는 작은 공간에서 레이겐은 골똘히 생각했다. 나 지금 외롭구나.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왜 외로운 거지.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첫 만남 이후, 레이겐의 머릿속에서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작은 아이. 무표정한 얼굴 뒤에 누구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착한 아이. 레이겐의 하나뿐인 제자 모브.
몇년전만 해도 한 치수 큰 가쿠란을 입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찾아와선 상담을 했던 것 같은데. 성장이 빠르기도 하지. 딱 맞는 블레이저를 입은 모브는 문제가 생기면 레이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상담하는 일이 잦아졌다. 레이겐은 그게 퍽 서운했다. 질투가 나기도 했다.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자신은 모브가 정착할 곳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시게오에게 레이겐 아라타카란 그저 스쳐 지나가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만, 떠나보낼 준비도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니 외로웠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잠시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 정신건강에 위험해. 눈시울이 붉어진 레이겐은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자신을 다잡았다. 어두운 생각을 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야. 차라리 잠이나 자자고.
3
레이겐은 노크소리에 눈을 떴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했으나, 어제 건전지를 빼둔 자명종은 한시 즈음에 멈춰있었다. 누구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아직도 노크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그날의 일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이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맛있는 먹잇감을 찾았다며 입맛을 다시며 웃는 사람들. 레이겐은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그의 악몽 속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는 숨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도 나지 않게, 살금살금 현관으로 걸어가 도어뷰 너머의 사람을 확인했다.
모브?
아, 스승님. 안에 계시나요
블레이저를 입은 모브가 보이자 레이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걱정을 하자, 모브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스승님께 전해드릴 게 있어서 상담소에 들렀는데, 안 계셔서 찾아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뭘 전해주려고?
어리둥절하게 반문하니 모브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만, 기다려. 깊은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현관을 열자 큰 폭죽 소리가 들렸다. 레이겐 씨! 생일 축하해요! 뭐,뭐야. 토메쨩? 난데없이 생일 폭죽을 맞은 레이겐이 뒤로 주춤하자, 그 틈을 타 토메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토메쨩? 세리자와? 어? 에쿠보까지?
모브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 등등 상담소의 직원들을 모두 데려온 모브는 평소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스승님. 생일이시잖아요. 다들 축하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레이겐이 어벙하게 서 있자, 세리자와가 수줍게 웃으며 토메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실례할게요. 레이겐 씨.
난 저 둘이 어떻게 하나 보러 간다. 시게오! 레이겐 잘 잡아두고 있어!
마지막으로 에쿠보까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에는 모브와 레이겐 둘만이 남았다. 뭐야? 폭풍처럼 지나간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모브가 머쓱하게 웃었다. 스승님. 잠깐 집 밖으로 나와주세요. 토메선배랑 세리자와씨가 생일파티를 준비한다고 했거든요.
-
겉옷을 챙길 틈도 없이 모브의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 공원이었다. 레이겐은 칼칼한 목을 달래기 위해 자판기 앞에 섰다. 아, 나 잠옷이지. 혹시 몰라,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리자 모브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녹차 괜찮으시죠?
레이겐이 입을 열기도 전에, 모브는 자판기에서 녹차를 뽑아 레이겐에게 건넸다. 스승님. 혀 데일 수도 있으니 조심히 드세요. 떨떠름하게 받아든 레이겐은 지적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고마운데, 이거 찬 음료야...
둘은 벤치에 앉았다. 노을이 지고 있는 공원은 어린아이들 몇 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한동안 아이들을 구경하던 레이겐은 녹차를 모두 마시고 입을 열었다.
내 생일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죠.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말투였다. 어떻게 보면 퉁명스러울 정도로 냉정한 말투. 레이겐은 그 말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린 레이겐은 그러냐. 라는 짧은 대답을 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자, 둘 사이에 긴 침묵이 찾아왔다. 레이겐은 그 침묵이 편했다. 허세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되는 관계. 모브와 레이겐의 관계는 그랬다.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레이겐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더라? 한동안 이어진 침묵은 진동소리로 끊어졌다. 금방 갈게요. 짧게 통화를 마친 모브는 레이겐을 이끌었다. 어서 돌아가요.
4
다시 집으로 돌아온 레이겐은 즐거운 마음으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비싼 음식이나 선물은 없었지만, 진심으로 하는 축하에 그는 기쁘게 웃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 음식이 반쯤 비워졌다. 그러고 보니 케이크를 안 사왔네요. 허전함을 눈치챈 세리자와가 운을 떼자, 레이겐은 냉장고에 넣어둔 케이크를 떠올렸다.
아, 케이크 있는데. 먹을래?
그러고보니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었죠. 레이겐 씨가 산 거예요?
토메의 질문에 레이겐은 대답을 하는 대신, 부엌으로 가 케이크를 꺼내왔다.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으니, 모브가 아. 하는 짧은소리를 냈다.
왜? 모브.
이거, 익숙한 모양이라서요.
작년에 카게야마군이 준비한 케이크랑 비슷한 모양이네요. 세리자와의 말에 레이겐은 머쓱하게 웃었다. 다들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구나. 부끄럽고 몽글몽글한 기분. 이런 기분이 싫진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아서.
레이겐 또 우냐?
시끄러워!
5
모두를 배웅하고 현관을 닫은 레이겐은 한숨을 쉬었다. 축하는 감사하는데 말이지... 이거 언제 다 치우냐. 귀찮음에 몸이 축 처졌지만, 입가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일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한 들, 축하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소중한 사람들의 축하는.
똑똑.
천천히 식탁을 치우는 도중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생각할 틈도 없이 현관을 열었지만, 밖은 아무도 없었다. 뭐야. 누가 장난질이라도 하는 건가.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소리는 현관이 아닌 창문에서 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살짝 걷은 레이겐은 눈앞에 보이는 모브를 보고 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모브!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레이겐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온 모브는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스승님. 생각해보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안 해서요.
지금 하려고?
네.
가방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열어봐도 돼? 네. 상자 안에는 곱게 접힌 넥타이가 들어있었다. 아무도 자주 하는 분홍색 넥타이. 흔한 디자인의 넥타이. 레이겐은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이 자주 하시는 넥타이로 골랐어요. 괜찮으신가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예쁜 거로 골라왔네. 네.
스승님.
응.
생일 축하해요.
....
그리고, 태어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제 스승님이 되어주셔서, 제 편이 되어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모브는 말을 마치고, 몸을 숙여 깊이 인사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정한 말투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넌 내 곁을 떠날 생각이 없구나. 나만 겁을 내고 있던 거야. 레이겐은 자기 얼굴을 거칠게 닦고,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브, 나도 네가 내 제자라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요. 레이겐의 말에 모브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응. 네가 있어서 내 인생이 더 특별해졌어. 소중한 사람도 많이 생겨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들을 삼키자 모브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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