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25

오소마츠상! - 마츠노 오소마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수업은 여전히 재미없었다.

공부에 전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이미 부모님도, 선생님도 다 포기했는데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턱을 괸 채 멍때리자, 문득 창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날씨 하난 끝내주네. 이렇게 좋은 날에는 나가서 놀아야 하는데.

오소마츠 잠시 주위를 훑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즐겁다는 듯 저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본능적으로 이때가 아니라면 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를 죽이고 슬그머니 나갔다. 교실 문이 열려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뒤에서 반장이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오소마츠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그대로 건물 밖으로 향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담장을 넘었다. 오소마츠는 교문 근처에 서성거리는 체육을 보았다. 지각생을 한 명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바보 같았다. 대놓고 늦었음에도 교문으로 당당히 오는 지각생이나, 체육이나.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고작 담장 하나 넘었을 뿐인데. 제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상쾌해진 것 같았다. 기분이 들뜨다 못해 주체할 수 없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산해진 거리를 보았다. 아침에는 그렇게 시끄러웠었는데. 매번 볼 때마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아, 한 명 정도는 데려올걸.’

오소마츠는 다른 반인 제 동생들을 떠올랐다. 혼자 빠져나온 탓에 동생들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못했다. 아, 나오면서 한 명 정돈 데려왔어야 재밌는데. 어릴 적부터 동생들과 어울렸던 탓에 혼자보다 여럿이 익숙하고 좋았다. 제각기 성향이 다른 탓에 티격태격할 때도 많지만…… 그래서 더 좋은 게 아닐까? 오소마츠는 제가 낸 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동생들이 보았더라면 폼 잡는다며 타박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오소마츠는 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대충 넘겼다. 이놈의 앞머리. 언제 한 번 잘라야 하는데. 찌푸린 인상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오락실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학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으며, 밥 먹듯이 가던 곳. 이제는 눈을 감고도 오락실 내부를 훤히 돌아다닐 수 있을 지경이 됐다.

“응?”

길을 한 번 꺾으니, 처음 보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어깨까지 닿는 금빛 머리카락에 하얀 리본… 딱 보아도 이 근처 학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의 여학생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처음 본 아이를 향한 호기심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아직 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천천히 다가가도 그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고개를 든 채 하늘을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 전의 자신 같았다. 오소마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문득 교복이 익숙하다는 사실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자세히 보니 제가 중학교 때 입었던 여학생의 교복이었다.

‘후배인가?’

후배겠지. 제가 모르는 걸 보면 백 퍼 후배다. 오소마츠는 잠시 중학교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그리 멀다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해서 올 일은 없을 텐데. 신기했다. 누구에게 볼일이 있나. 그럼 하교할 때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머릿속으로 온갖 의문이 들었다. 오소마츠는 가만히 고민하는 것보다 직접 묻는 걸 택했다.

가만히 있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까. 오소마츠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손을 꺼냈다. 슬그머니 교실에서 나갔을 때처럼 기척을 죽인 채 다가갔다. 톡.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졸지에 볼을 찔린 학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소마츠를 보았다.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손가락은 볼을 깊숙이 찔렀다.

“안녕?”

오소마츠는 제가 한 짓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구는 태도는 정말 뻔뻔했다. 그는 잠시 저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오소마츠를 콕콕 찔렸다. 딱히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발톱 세운 고양이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오소마츠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되는데? 워워, 무서워라.”

“…….”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걸까. 눈앞에 학생은 제 표정 하나 관리하지 못했다.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재밌네. 오소마츠는 흥미로운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기다렸다. 과연, 무슨 말로 저를 즐겁게 해줄까.

*

하나는 난감했다.

오늘은 하필 싫어하는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싫었고, 체육 선생의 집요함이 다 지긋지긋해졌다. 하나는 교복을 입은 채 그대로 땡땡이쳤다. 애초에 학교 자체에 가지 않았으니 무단결석이겠지만.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근처까지 도착했다. 잘못 왔다. 어떻게 돌아가지. 하나는 제가 온 길을 되짚었다. 내키는 대로 걸었던 탓에 돌아가는 방법조차 몰랐다. 아, 망했다. 어쩌지. 이렇게 멍때리고 있는데 누군가 제 볼을 찔렸다.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지만… 어째 생긴 게 불량해 보였다. 양아치? 양아치인 거야? 나 지금 양아치 만난 거야?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도망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어떻게 해.

“꼬맹아.”

“꼬맹이가 아니…! 아니, 아닌데요.”

지금 제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고 말하는 걸까. 상대는 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꼬맹이라니. 제가 또래에 비해 작은 체구에 속하긴 하지만 꼬맹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물론 눈앞에 있는 남자에 비해 작긴 했다. 아니, 근데 그게 꼬맹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하나는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던 반말을 집어삼켰다. 억지로 쥐어 짜낸 존댓말은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건 절대 남자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냐. 자신은 나름 저보다 연상인 사람에게 예의를 차린 거야. 하나는 애써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한참 동안 입 다물고 있었던 남자는 아까와 다른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과 다른 느낌.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불쾌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내뱉은 말은 담을 수 없다는 게 이리 억울할 줄이야.

“흐음. 꼬맹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불러야 하나. 아무리 봐도 꼬맹이인데.”

“…….”

그래. 낚이지 말자. 하나는 저를 향한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속으로 무서웠다.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프다고 양호실에 있었을 텐데. 빠져나갈 방안을 모색해보았다.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진짜 내가 어쩌다 이런 양아치에게 걸려선…….”

“뭐라고 했어?”

아차.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실수로 입 밖으로 꺼낸 모양이다. 하나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무어라고 변명할지 고민했다. ……고민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나는 굳이 눈앞에 남자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저를 향한 시선이 무섭고 소름 끼칠 정도였지만, 그 정도는 살짝 눈감아 줄 수 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마주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에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을 뿐인데, 거기에 질세라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망… 가야 하나?

진짜 어쩌지.

*

아무래도 눈앞에 아이는 저를 향해 도망칠 생각이었나보다.

제가 다가갔을 때 뒤로 물러나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면 딱 보였다. 흐음. 오소마츠는 낮게 신음했다. 만약 도망갔더라면 그대로 놓아주었겠지. 그걸 아무래도 저 아이는 모르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났으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려나.

“정말 대답 안 할 거야?”

“내가… 왜요.”

“대답은 해주네? 착한 아이네.”

“아니, 그러니까 말 붙이지 마요!”

발끈하며 반박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귀여웠다. 고양이보다 더 자그마한 동물이려나. 오소마츠는 올라갈 뻔한 손을 억눌렀다. 이대로 무심코 쓰다듬었다면 아마 쟤는 도망가겠지. 기껏 만났는데 헤어지는 건 아쉬웠다.

생각이 바뀌었다.

가버리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니. 작은 충격과 함께 오소마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날카로워진 눈매에 아이가 움찔거렸다. 아니,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오소마츠는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게 굴려고 노력했다. 두 팔을 올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한답니다. 이런 의미로 해보았지만, 딱히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만 경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 아이는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바쁜 듯했고, 오소마츠는 그 반대였다. 어떻게 해야 저 아이를 묶어둘 수 있으려나. 남들이 들었다면 기겁하고도 남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그 괴물 같은 체육쌤은 잘 있어?”

“…네?”

“그냥. 갑자기 교복을 보니까 생각나서. 내가 이렇게 보여도 너랑 같은 중학교였거든. 그 쌤이라면 아직도 넘치는 체력 주체하지 못하고 있으려나? …아니야?”

“조금 괴물 같, 긴 하죠. 이것저것 많이 시키고….”

대화는 매끄럽게 흐르지 않았다. 어딘가 막혀 있다고 해야 하나. 오소마츠는 경계심 많은 아이가 이만큼이나 말해주는 거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처음에 다 만족할 수 없는 법이지. 나름 머리가 굵어졌다고, 철든 행세 하며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말에도 아이는 체육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미약한 적의. 이렇게 작고 귀여운 애에게 미움받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하긴, 제가 아는 체육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으로 모자라 주변인까지 말려들게 하는 민폐. 심지어 꼰대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안 좋은 건 다 모아다 선생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꼴이었다.

아직도 동생들이랑 중학교 시절 체육 진짜 싫었다고 하는데… 저 아이도 오죽할까. 오소마츠는 턱을 괴었다. 딱히 아이에게 가엽다는 식의 가벼운 동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도 중학교 때 체육이 싫어 밥 먹듯 빠졌기 때문이다. 동정보다는 동질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길어봤자 2년이면 벗어날 수 있으니까. 2학년이지?”

“…….”

여전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있다. 한 번 드러난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험악하게 볼 건 없지 않나. 내가 스토커처럼 군 것도 아니고.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지 않아? 오로지 감에 의존하여 눈앞에 아이를 2학년이라고 판단했다. 아니면, 뭐, 아닌 거지. 틀린 답에 물고 늘어질 정도로 오소마츠는 집요하지 않았다. 의외로 그 나름대로 선이 존재했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재미없어지는데. 오소마츠는 뒷목을 매만졌다.

“왜 이렇게.”

“응?”

“양아치… 아니, 왜 이렇게 관심 가지는, 가지시는 거예요?”

분명 양아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오소마츠와 대화하려고 하는 걸 보면, 합격점이었다. 오소마츠는 씨익 웃었다.

“뭐라고 생각해?”

*

하나는 눈앞에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그는 가쿠란 안에 와이셔츠가 아닌, 피처럼 선명한 붉은 파카를 입고 있다. 어렴풋이 졸업생 중에 붉은색을 좋아했던 선배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마츠노… 마츠노였나? 여섯 명이나 되고, 각기 개성이 넘쳤던. 이미 제가 입학할 때에는 그는 3학년이었다. 1학년과 3학년 교실은 매우 먼 탓에 어지간해서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제가 다니는 학교는 교복 때문에 알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학년까지 맞출 수 있나? 만난 적도 없으니 1학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냐? 하나의 붉은 눈이 가늘게 떠졌다. 최대한 마츠노를 경계하느라 두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여전히 무섭고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궁금했다. 왜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하나는 무심코 튀어나오려던 양아치 새끼라는 걸 억눌렀다. 왜 관심을 가지냐고. 그렇게 묻자, 마츠노가 씨익 웃었다. 어째 영 불길했다. 건드리면 안 될 영역에 발을 들인 거 같았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울 건 없는데. 오히려 장난스러움에 가까운 웃음인데도, 이렇게… 될 수 있나?

눈앞에 있는 인간을 만나서 좋을 일이 없는 건 똑똑히 알고 있다.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게, 그게 옳았다. 그러나 발은 어째선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오소마츠와 대화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이상하지. 평소엔 그렇게 마음껏 잘 돌아다녔는데. 알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분명 제 볼을 찌르며 툭툭 사람 신경 건드리는 말만 했는데.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냐.”

마츠노는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구는 행색을 보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그냥, 그냥 가버렸으면 좋겠어. 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할까. 마츠노는 흡사 광대 같은 몸짓으로 제 심정을 읊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무지 바쁜 사람이거든?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야.”

“그럼 그냥 가버리면 되잖아요.”

“그러기는 아쉽잖아. 오락실이 어디 도망 가냐? 걔는 쭉 가만히 나를 기다려줄 텐데. 근데 너는? 아니잖아. 내가 한 눈 팔면 너 가버릴 걸? 지금도 그 쪼그만 머리로 도망칠 궁리 하는 거 내가 다 알아.”

독심술도 쓸 줄 알았나. 안 그래도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더 이상해졌다. 점점 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가는 거였는데. 아니, 애초에 고등학교 근처로 오지 않는 거였는데. 하나는 마츠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저 제 처지를 한탄했다.

다음부터는 빼먹더라도 여기에 오지 말고, 또, 양호실에만 있자. 양호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없긴 하지만… 거긴 적어도 선생님이 있잖아. 이상한 놈이 접근하진 않겠지. 하나는 마츠노의 말을 무시했다. 무시하면 뻘쭘해져서 입 다물 줄 알았는데. 눈앞에 있는 상대는 예상외의 강적이었다.

이렇게 얽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도망칠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 하며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푸르고 쾌청한 하늘을 보자니 비참해졌다. 하….

“양아치 새끼.”

“꼬맹아, 이 오빠 말은 안 듣고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닌데요.”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원래 자신이 이렇게 속내를 감추는 게 서툴렀던가? 그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나름 사회생활도 잘한 편에 속했을 텐데. 제 작은 중얼거림에 마츠노는 놓치지 않았다. 다 들어놓고서 뻔뻔하게 확인하려는 걸 보니 약 올랐다. 저거, 저거 일부로 저러는 거다. 하나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노려보거나, 작게 반항하듯 본심을 드러내거나. 심지어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눈앞에 상대가 정말 마츠노라면… 그가 중학교 때 저질렀던 행적만 나열해도 장난 아니었다. 그는 정말 불량한 학생 그 자체였다. 수업도 자주 빼먹고, 온갖 장난을 치며 선생님이나 주위 어른들을 머리 싸매게 했다. 그게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는 최대한 바쁜 척하기로 했다. 그래, 바쁘다면 더 이상 안 붙잡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틀었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며 하나의 머리를 헤집었다.

“아.”

제 머리 위로 묵직한 게 올라온 거 같은데…. 이게 대체 뭐지?

하나는 순간 제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뭔가 움직이는 거 같은데. 근데, 나 지금 머리띠 말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머리띠에 자아가 있는 게 아니라면. 하나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얼핏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저를 보았다. 눈동자에 얼핏 비추는 저를 보고 있자니… 어?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그냥 가버리려고?”

“바쁜… 일이 생겼어요.”

“우리 꼬맹이. 이런 시간에 바쁜 일이라니. 나는 땡땡이나 치는 줄 알았는데.”

“잠시! 잠시 머리 망가지잖아요! 나 머리, 아니. 저 머리띠 하고 있어요! 리본 망가지면 안 된다고요!”

하나가 소리쳤다. 마츠노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심상치 않았다. 제 내키는 대로 쓰다듬는 손길이 어디 부드럽겠는가. 다정함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마츠노는 하나가 애써 묶었던 머리띠까지 건드렸다. 아침마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물론, 머리띠니까 거울만 있으면 다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왜 이러시는 거예요!”

결국 하나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제야 마츠노가 손을 멈추었다. 순간 움찔했다. 그저 움직이지 않게 됐을 뿐이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눈에 담았다. 그 행동 하나가 오히려 섬뜩하게 만든다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도망가려면 지금인데. 지금이 아니면 벗어나는 게 힘들 텐데. 하나는 어렵사리 바닥에서 한 발 뗄 수 있었다.

됐다. 도망칠 수 있어. 하나는 마지막으로 마츠노를 보았다. 마츠노는 곰곰이 무언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한눈팔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인사성 바른 아이는 아니었다. 적당히 제 편한 것만 찾는 쪽에 가까웠다. 일단 살고 봐야지. 하나는 머리띠를 쥔 채 달려갔다. 최대한 마츠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

“가버렸네.”

오소마츠는 저 멀리 아이가 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쓰다듬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뒷통수를 차마 참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제 손을 즐겁게 해주었다. 아, 이래서 쓰다듬는 거구나. 비록 자신 때문에 아이의 머리가 망가졌지만, 금방 원래대로 고칠 수 있을 거 같았다. 애초에 제가 고쳐줄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고. 오소마츠는 아이를 쓰다듬었던 손을 보았다. 닿은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쉬움이 질척하게 남는 걸까. 오소마츠는 제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정도로 예쁘거나 특이한 아이는 많이 보았다. 이따금 제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던 아이들도 있었다. 오소마츠는 그런 여자애들보다, 동성인 애들과 노는 걸 택했다. 연애 경험이라고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속 만나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헤어질 때 아쉬움이 들면 뭐였더라?’

이런 걸 사랑이라고 했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우스웠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츠노 오소마츠가 사랑을? 평생 사랑이라고 모를 거 같이 굴었던 게 누구인가.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만약 이게 사랑이라고 하면 자신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맸다. 볼을 찌르지 말고 평범하게 말할 걸 그랬나. 아니, 근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름 못 불어 봤네.’

옅은 분홍빛 카디건을 입고 있었던 탓에 명찰이 보이지 않았다. 명찰만 볼 수 있었더라면 이름은 물론이고 반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오소마츠는 저 멀리 사라진 아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깨까지 닿는 금빛 머리카락, 붉은 눈… 그리고 리본. 적어도 쉽게 잊을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일단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야 되겠네.”

만약 동생들이 안다면 이걸 빌미 삼아 저를 놀릴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눈독 들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게 오소마츠였으니까. 토토코는… 뭐 예쁘잖아.

거기다 동생들이 입단속도 해야 했다. 만약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애들에게 말했다면? 생판 모르는 남자가 그 애랑 있는 걸 본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럴 상황이 오면 오소마츠는 늘 그랬듯 남자에게 주먹을 날리고, 그 애에게 가서…….

그 애에게…?

스쳐 지나가듯 작은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 아는 거라고 얼굴이랑 학교밖에 모르는 주제에, 자신이 뭐라고……. 오소마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반한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반한 모양이다.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하는 건데!

“할 수 없지.”

지금이라도 따라가면 아이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이름을 비롯해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오소마츠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었으니까.

나중에 또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오소마츠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어째 저 아이를 만난 이후 웃을 일이 많아졌다. 아, 이거 얼굴 관리가 전혀 안 되네. 시시덕거리는 모습에 수상하게 여길 동생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분명 쵸로마츠나 토도마츠는 무슨 일 있냐고 할 거야. 나머지는 관심 없는 척 슬쩍 귀 기울이겠지. 응. 그러고도 남아.

하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기껏 제가 발견한 아이였다.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오소마츠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에 만나는 건 과연 우연일까, 아님 오소마츠의 노력이 일궈낸 필연일까.

어느 쪽이든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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