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24

문호 스트레이 독스 - 다자이 오사무

포트마피아는 어둠이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별 하나 보이지 않을 때. 눈앞에 있는 것조차 가늠하기 어렵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내일에 대한 막막함. 결코 빛으로 나아갈 수 없는 시궁창의 쥐들이 모인 게 바로 포트마피아였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곳. 거기에 속한 다자이 오사무 또한 비슷했다.

‘참으로 웃긴 곳이지.’

시궁쥐라는 걸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제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뺏기는 쪽보다 뺏는 쪽이 더 좋긴 하지. 다자이는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서 있었다. 나름 간부랍시고 넓은 방을 배정받았지만, 그 안에 두고 싶은 건 없었다. 제대로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어영부영 지내고 있을 무렵.

“모리 씨가 부릅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다자이를 찾아왔다. 다자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그늘이 진 얼굴은 흡사 죽은 이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부름꾼에게 아무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심부름꾼이 가볍게 인사하더니 이내 모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복도가 울렸다. 정적. 눈앞에 심부름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여기서 제가 도망치거나, 혹은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저 가여운 심부름꾼의 목숨이 위험해지겠지.

모리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처럼 보였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는 누구보다 잔인했으며, 제가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였다. 아마 물밑으로 희생당한 이들도 적잖아 있을 터. 다자이는 심부름꾼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과연 무슨 일로 불렀을까.

심부름꾼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어느 한 방에 도착했다. 심부름꾼은 다자이에게 찾아왔듯 문을 두드리고 제가 왔음을 밝혔다. 문 너머로 모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부름꾼의 역할을 여기까지였다. 이내 다시 한번 다자이에게 인사하고 그는 그대로 가버렸다.

“모리 씨. 왔습니다. 이번에는 과연 무슨 일로 불렀나요.”

한없이 정중하면서도 말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었다.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던지라 모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언제나 모리 방에 있었던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밝은 금빛 가루를 뿌려 만든 푸른 눈을 지닌 인형 같은 소녀. 익숙하게 린타로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의아했다. 문득, 모리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사람이었다. 다자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모리에게 성큼 다가갔다. 모리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제가 모리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매번 부르는 게 신기했다. 언제까지 이럴 건지.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세세하게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모리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 서 있었던 사람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피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 포트마피아 사람이라는 으레 그렇듯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다자이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확실히 제법 눈길을 끌 정도로 미인이었다. 얼굴을 비롯해 붕대나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걸 보자니 동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자이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도저히 나를 부를 만한 이유로 보이진 않는데.’

누군가 들으면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자이는 제 위치를 잘 알았다. 뛰어난 두뇌로 모든 걸 파악하고, 그 누구보다 일을 잘했다. 딱히 충성심이 없어도 간부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자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소녀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지냈으려나. 포트마피아는 대부분 암울한 과거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아마 눈앞에 소녀고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만약 제 예상이 다르다면… 그건 그것대로 흥미롭지 않은가.

“안녕.”

다자이는 예의상 소녀에게 인사했다. 소녀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 거 외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규칙적으로 숨 쉬고 있는 걸 보면 살아 있기는 한데. 도대체 어쩌다 모리가 저런 아이를 데리고 왔는지 궁금했다.

“인사하도록. 오늘부터 포트마피아에 들어오게 된 하나사키 츠보미 양이라네. 그래, 대충 체리 양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런. 이번에는 이름을 주셨습니까? 이제 새로운 이에게 줄 만한 게 다 떨어진 모양이군요.”

다자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리의 속내를 긁었다. 누가 들어도 일부로 그랬다는 티가 팍팍 났다. 모리는 웃고 있었을 뿐, 다자이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만약 다자이가 얌전히 모리의 말을 들었더라면 무어라고 말했을지도. 모리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소녀가 인사를 했다.

인사 자체는 간결했다. 잠시 고개를 꾸벅 숙인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자이는 오히려 그 간결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인사치레같이 복잡한 걸 선호하지 않았다.

미리 모리가 알려준 걸까? 아니면 소녀 자체가 그런 성향을 띄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한 가지 아는 건 다자이에게 있어서 소녀는 제법 좋은 첫인상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소녀는 어느 대단한 이능력을 가진 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예쁘다고 해서 데려온 건 아닐 텐데. 따로 자리를 만들면서 저에게 소개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무지 짐작 가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어때. 다자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태도로 다소 경박하게 세상을 대했다. 두려울 게 없었으며, 만약 몇 초 후에 제 목숨이 꺼지더라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것이다. 다자이의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리를 보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제게 설명해달라는 암묵의 신호였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말게. 가여운 소녀가 방황하고 있어서 데려왔을 뿐이니까. 그래,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알려주면 네게 버거울 수 있으니… 천천히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나. 다자이 군이라면 기꺼이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네만.”

“하하. 그렇게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리따운 소녀와의 만남은 무척이나 끌리지만, 제게 특별히 보여줄 만한 건 없어 보이니까요.”

다소 냉정한 평가. 소녀는 제가 욕먹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서 있었다.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이 넓은 방에 세 명이나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세 명 모두 사람다운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럴 때 바보 같은 부하 한 명이 있으면 좋을 텐데. 침묵이 흐르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좋을지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흐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경박한 태도로 속내를 긁어보아도 두 사람이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광대도 돌아오는 반응이 있어야 즐거운 법이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될까요. 제게 따로 볼일은 없으신 듯하고, 그렇다고 저 아이가 이제 와서 제게 살갑게 인사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으니. 이래뵈도 무척 바쁜 몸이랍니다.”

“그러도록. 오늘은 어차피 이 아이를 자네에게 보여주기 위해 불렀을 뿐이니까. 아마 자주 보게 될 테니, 그때마다 잘 대해주었음 좋겠네. 이 아이는 지금 낯을 가리고 있으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우스운 말이었다.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저 상대할 이유는 찾지 못한 것 같은데. 도저히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소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받아주었다. 다자이는 그대로 몸을 틀어 밖으로 나왔다.

하나사키 츠보미.

과연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포트마피아는 의외로 넓었다. 당장 저만해도 이전에 알고 지냈던 부하의 얼굴을 못 본 지 몇 달이 됐다. 이렇게 자리를 만든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무리 그 아이가 만나고 싶다고 한들, 다자이가 거절하면 그만이다.

‘그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할지 모르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존재라고 대놓고 말했다. 소녀는 제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군 상대를 보고 싶지 않을 터. 다자이는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두컴컴한 복도 속으로 빨려가듯 걸었다.

*

소중한 친우가 죽었다.

그는 이 시궁창에 어울리지 않은 존재였다. 제 나름대로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릴 이는 아니었다. 다자이는 서서히 차가워지는 시체를 껴안았다. 지금이라도 지혈하고 치료하면 살아남지 않을까. 얄팍한 희망이 제 존재를 드러내며 떠올랐다. 그래. 지금이라도 치료가 가능한 이능력자를 부르자. 아주, 아주 잠깐만 기다려줘. 다자이는 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름 말도 잘 통했고,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이렇게 보낼 수 없다.

마음이 한 구석이 허했다. 제 몸은 이렇게나 멀쩡한데. 다친 곳 하나 없는 몸이 욱신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전신에 타박상이라도 입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봤자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자이는 세상이 무너지는 감각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오다 사쿠는 이미 늦었다. 제가 발견했을 때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일 정도로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는 과연 알았을까. 제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걸. 아마 그라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을 거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며 실없는 농담을 건넸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다 그만둘까. 오다 사쿠는 제게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라고 말했다. 사람을 구하는 일. 아마 제가 끝까지 하지 못한 걸 다자이가 대신 해주길 원한 거겠지. 다자이는 그리 이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정의롭지 않았고, 그저 내키는 대로 살아갈 한량이다. 이런 자기가 누굴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넓은 홀 사이로 울리는 발걸음에 고개를 들었다. 잔당이 남아있는 걸까. 다자이는 이능력자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홀로 남은 적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자이는 오다 사쿠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끔찍하게 죽더라도 그만큼은 온전히 보내고 싶었다.

다자이에 시야에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딱 한 번 만났으며,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이였다. 저번과 달리 조금 머리카락이 짧아졌으나 특유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서늘해졌다.

그늘이 진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제게 왔는지 모르겠다. 다자이는 이전에 모리가 저 아이를 제게 소개했다는 걸 떠올랐다. 모리의 명으로 온 걸까. 제가 허튼 생각 하지 못하도록 미리 경고해주기 위해 온 걸까. 다자이는 체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대화 한 번 섞어본 적 없었고, 포트 마피아에서도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 체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체리는 천천히 다자이를 시작해 다른 이의 흔적을 훑었다. 이 자리에서 살아있는 건 오로지 둘뿐이었다. 이 방에선 비록 오다 사쿠와 미믹의 보스만 죽었지만, 바깥은 꽤 짙은 피 냄새를 풍겼을 텐데. 체리는 아무 감흥이 없다는 눈이었다. 제가 보지 못했던 사이에 죽은 이를 많이 본 걸까? 충분히 그럴 법했다. 포트마피아는 깨끗하지 못한 일만 골라서 했으니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시체를 보며 자랐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좋았다. 다자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넉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쥐어짤 수 있는 여유였다.

“이런.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 체리 양. 혹시 누군가의 부탁을 듣고 기꺼이 행차라도 한 건가.”

다자이는 그게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저와 체리의 사이에 언급될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조차 듣지 못했던 목소리. 음영이 가득 진 얼굴 탓인지 무미건조하게 들렸다.

“내가 오고 싶어서 왔을 뿐이지, 누구의 말을 듣고 온 건 아냐.”

거짓말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다자이는 섣불리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보스와 정말 아무 연관이 없을까? 체리가 그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이미 그가 뒤에서 손을 쓴 게 아닐까? ……아무렴,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자이는 포트마피아에 손을 놓았다. 제게 배신자 낙인이 붙고 누군가가 추적해와도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지겨운 삶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체리처럼 아리따운 여인에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슬쩍 운을 떼었다. 조금 더 체리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자신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평소처럼 여유를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체면을 세워봤자 좋은 건 없다. 체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런 걸 신경 써야 해?”

어이가 없다는 말투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다자이는 일단 체리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정말 모리가 보냈거나 혹은 제 의지로 온 건 하등 관계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제 떠날 거다.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다자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곱게 차려입은 정장에 피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이제 어쩔 텐가?”

“글쎄.”

체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자이의 얼굴을 봤으니 만족한다는 태도였다. 그대로 몸을 틀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잘 지내.”

다자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저 멀리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던가.

다자이는 포트마피아에서 벗어났다. 우연히 무장탐정사에 입사할 수 있었으며,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 남들과 다르게 홀로 동떨어진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료했다. 다자이는 때때로 성공할 리 없는 자살 시도를 했다. 제 목숨을 개미보다 하찮게 여기며 해보았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오늘도 죽지 못했네. 다자이는 제 목을 조르고 있는 붕대를 매만졌다. 오늘 아침에 막 갈았던 탓에, 붕대 특유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흐릿하게 누군가의 뒷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잘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겨두고 간 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연락하라면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의외로 좁았다. 무장탐정사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다시 포트마피아로 돌아갈 수 있다. 한동안 번거로운 감시가 붙겠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다자이는 옆으로 드러누웠다.

분명 제대로 된 말 한 번 섞지 않았다. 마지막은 체리의 일방적인 인사에 가까웠기 때문에 예외였다. 왜 이렇게 그리울까. 다자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무엇을 이토록 그리워하는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에 심란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라 여겼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도 그가 그리웠다. 그를 생각할 때만 유일하게 세상에 색이 돌아온 듯했다. 연락해볼까. 수백, 수천 번을 고민했다. 그 끝은 항상 ‘하지 않는다’였지만…… 어째 오늘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의외로 비참하지 않았다. 그저 낯선 감정이 얼굴을 내민 채 저를 쳐다보는 게 익숙지 않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제법 자신이 중증이 됐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전에는 잠들기 직전에 잠깐 떠올랐는데.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보고 싶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자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그와 얽혀 있다는 생각만으로 차분해졌다. 예전에도 이렇게 신중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만났을 때 다정히 대했더라면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어도 자신이 먼저 찾아갔더라면. 이미 지나간 시간에 의미 없을 가정을 더해 보았다.

‘이젠 자기 위안조차 되지 않는군.’

이전에는 생각만으로 족했다. 좋게 흘러갈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다자이에게 용기를 샘솟았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이 일어났다. 만약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다자이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포트마피아, 무장탐정사. 둘 다 다자이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다. 어디든 좋으니까 체리가 제 곁에 있더라면.

창 너머로 들어온 달빛이 방 내부를 밝혔다. 오늘은 보름달이구나. 완전한 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달이 다른 때보다 선명했다. 빛 또한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다자이는 멍하니 달을 눈에 담았다. 이 시간에도 체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제대로 끼니는 챙기고 있을까. 잠은 부족하지 않게 잘까. 사소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가늘게 뜬 두 눈 사이로 이채가 감돌았다. 이제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여태껏 미련하게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보다 나아가는 게 더 좋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깊게 기른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아까보다 시야가 더 잘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포트마피아라면 지금도 안 자고 있겠지. 다자이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몇 년 전에 사용했던 연락 수단이 아직도 유효할지 모르겠다. 평소였더라면 신중을 가하며 움직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자이는 많이 기다렸다. 계속 그리워했다.

벽 한쪽에 걸어놓은 옷걸이에서 갈색 코트를 꺼냈다. 마땅히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슬플 줄이야. 다자이는 작게 웃었다. 기왕 오랜만에 만나는 거, 잘 보이고 싶었는데. 씁쓸한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듬었다. 낡은 현관문을 열자 시원한 밤공기가 다자이를 반겼다.

체리는 과연 제게 무슨 말을 할까. 그때처럼 무덤덤한 눈으로 저를 흘겨볼까. 내심 반겨주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츄야나 아쿠타가와 군이라면 예측할 수 있을 텐데. 이럴 때마다 아무것도 안 한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인연의 끈을 엮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다자이는 제가 일방적으로 체리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별 볼일없는 만남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했다. 제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맛본 단맛이나, 느껴본 온기를 쉽게 저버릴 수 있는 이는 없다. 누구나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다자이에게 있어서 체리란 그런 존재였다.

보고 싶고, 곁에 있는 것으로 모자랐다. 그가 체리를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보상받고 싶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안다. 체리가 그럴 만큼 다자이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닌데. 그럴 만큼 제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자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 체리가 배신자라며 저를 매도해도, 두 번 다시 얼굴을 비춰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체리에게 잘해준 건 하나도 없으니까. 오히려 저를 기억해준다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제가 체리를 그리워하듯, 체리가 저를 조금이나마 기억해준다면. 마지막에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은 채 홀로 온 걸 기억하면. 그때의 마음이 변치 않았더라면, 조금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다자이는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에 점차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아아, 기숙사 근처에 거리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저를 감싸는 밤공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다자이는 더 이상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 없을 생각에 잠기는 것보다, 행동으로 직접 옮기기로 다짐했다.

‘이것도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바람이 불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런.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짓궂은 바람의 장난에도 다자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저 그를 그리워했을 뿐인데, 사소한 것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저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만약 그를 직접 보게 된다면, 저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가겠지. 그 자그마한 체구를 끌어안고, 보고 싶을 수 있다면.

‘……아아.’

그렇구나. 저는 진작에 체리를 좋아했다.

아마 자각하지 못한 첫 만남 때부터 시작해 헤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체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기다려주게, 체리 양. 지금 내가 달려갈 테니. 다자이는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걸 느끼며 그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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