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 Capo Al Fine Prol.
1672년 12월 23일, 23시 19분.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굵어져 이제는 숫제 폭포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 되었다. 우산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고 꽁꽁 동여맨 우비 옷자락 사이로도 빗물이 새들어와 온몸이 푹 젖었다.
빗줄기가 어찌나 센지 빗방울이 지붕과 천막, 땅을 때릴 때마다 우두두! 하는 소리가 났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건 아닐까 심히 염려될 정도였다. 불침번을 서던 기사, 욘센은 먹구름이 겹겹이 쌓여 더욱 새카매진 밤하늘을 올려 보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마주하고 시선을 내렸다.
이 밤이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건 시간이 늦어서나 비가 거세서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처지, 신세가 하루하루를 고되게 하는 탓이다. 나뭇등걸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욘센이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르르 쾅쾅 내리치는 천둥과 빗소리가 그의 한숨 소리를 덮고 가려주었다.
그는 오르테가 백작을 섬기는 기사로 열두 살부터 종자 생활을 시작해 어느덧 마흔두 살이 되었다. 본래 오르테가는 에스페란토의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에스페란토 천육백 역사 내내 당대의 국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충성 맹세를 받은 국왕은 그들에게 무궁한 영광과 명예, 부귀를 선사했고 오르테가는 굳건한 충성으로 다시금 국왕에게 보답했다.
그러나 18년 전부터 공고하던 오르테가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기는 선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하루아침에 숨을 거둔 국왕, 사라져 버린 왕비와 왕자들, 군사를 이끌고 왕위에 오른 공작. 천지개벽도 이것보다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 에스페란토가 수군대며 들끓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불타오른 게 바로 북부 명가 오르테가였다.
당시 오르테가 백작은 새로이 왕위에 오른 국왕에게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사람들은 백작이 새 국왕을 두고 ‘반역’ ‘쿠데타’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고 소곤대었다. 처음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백작을 포섭하려던 리카르도 3세도 5년이 지나도록 백작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점점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오르테가 기사들은 왕명에 의해 북부의 험지로 내몰렸고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사나운 마수들을 상대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욘센도 그렇게 내몰린 기사 중 하나였다. 그들의 금번 임무는 시체를 모욕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마수, ‘고어’를 퇴치하는 것이었다. 기실 이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르테가의 기사들은 에스페란토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들로 고어 한 무리 정도야 딱 이틀이면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고어가 출몰한 장소가 문제였다.
에스페란토 북부 끝의 산악지대, 움브라 산맥 중에서도 산세가 가장 거칠고 험하다고 알려진 세 번째 봉우리 ‘토스카나’. 깎아지른 산과 산 사이에 칠흑처럼 새카만 숲이 끝없이 이어진 이곳은 수백 종의 마수가 출몰하는 ‘황혼과 밤의 경계’였다. 마계와 접한 이 땅에서는 고어 이외에도 가지각색으로 위험한 마수들이 등장했다. 다 자란 성인을 한입에 삼킬 정도로 거대한 키마이라, 깊은 호수 밑에 웅크린 히드라, 송곳니가 세 척이나 되는 와이번….
…그래, 그 망할 놈의 와이번. 어제도 와이번 세 마리의 습격으로 기사 네 명이 죽고 여덟 명이 부상을 입었다. 욘센의 후배 웨슬러도 와이번의 공격으로 다리 한쪽을 잃고 말았다. 빌어먹을 와이번이 그의 왼쪽 다리를 꿀꺽, 삼켜버린 것이다. 그 육시랄 것이 멀쩡하던 사내를 순식간에 불구로 만들었다. 한 다리로 말을 탈 순 없으니 기사도 은퇴해야겠지. 기사를 그만두면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일평생 목발을 짚고 부축을 받아야 할 테니 그의 아내만 안타깝게 되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에요?”
답답해진 욘센이 애꿎은 나무줄기만 퍽퍽 내려칠 때였다. 어디선가 짤랑, 짤랑 맑은 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한순간 꽃향기가 풍기고 주변이 화사해졌다. 그리고는 어마무시하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천천히, 조금씩, 시나브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하늘이 개이기까진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기적 같은 변화를 욘센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놀란 그가 시선을 돌리자 한 소녀가 연갈색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방긋 미소를 짓고 그에게 말했다.
“테오도르를 만나러 왔어요. 안내해줄래요?”
테오도르 아슬란 데 프랑소와 아스토리아 에스페란토 카스티야.
그것이 바로 ‘아슬란 데 시에르바’로 알려진 청년의 진실이었다. 18년 전 작고한 알레한드로 2세와 이보나 카스티야 여공작 사이에서 난 첫째 아들. 아스토리아 왕실의 적법한 주인이자 에스페란토 왕국의 정통 왕위 계승자.
본래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했을 청년이 어째서 이름을 숨기고 정체를 숨기고 한갓 백작가의 사생아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선왕 알레한드로 2세가 승하하던 날, 알레한드로의 동생이자 테오도르의 숙부 되는 살바토레 공작 리카르도가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궁정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왕의 선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해일처럼 몰려든 역당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거침없이 왕궁을 휩쓸었고 지휘관을 잃은 왕실 기사단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당시 왕비였던 이보나 데 안드레아 페레즈 카스티야는 충성스러운 기사단장의 희생으로 일곱 살 난 왕자와 세 살 난 공주만을 데리고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본래 이보나는 그녀의 고향 카스티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알레한드로의 충복이자 막역지우였던 오르테가 백작이 왕비를 말렸다. 그는 왕자의 앞날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에스페란토 땅에서 왕자를 키워야 한다며 왕비를 설득했고 자신이 세 모자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맹세했다. 그리해 이보나는 백작 부인의 시녀가 되어, 왕자와 공주는 백작가의 사생아가 되어 오르테가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움과 오욕을 삼키며 숨죽여 버텨온 18년의 세월. 다행히 오르테가 백작은 알레한드로와의 의리를 잊지 않았고 왕비와의 맹세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테오도르가 열다섯 되던 날부터 남몰래 세력을 모아 왕자의 복귀를 기도했고 물심양면으로 왕자와 공주를 지원했다. 리카르도의 끊임없는 박해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남매를 지킨 것도 오르테가 백작의 충정과 우정이었다.
비록, 백작 본인은 3년 전 세상을 떠나 그토록 아끼던 테오도르가 왕좌에 앉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오르테가와 테오도르의 인연은 여전했다. 작고한 백작 대신 그의 아들 아론 오르테가가 테오도르를 보필했고, 오르테가의 망명 높은 기사단은 테오도르의 가장 믿음직한 병사들이 되어 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슬란 데 시에르바의 정체를 드러내고 리카르도의 왕위 찬탈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뿐이다. 십수 년간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의 불만과 울화가 극에 달한 지금이 적기였다. 이번 토스카나 출정을 마무리하고 나면 오르테가 백작가에서 공식적으로 실종된 왕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백작가의 푸른사자 기사단이 테오도르 왕자와 함께 수도로 진격할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보초를 서던 기사의 보고를 들은 테오도르와 아론은 나란히 당황했다. 어떤 여성이 밤중의 숲에 홀연히 나타나 ‘테오도르’의 이름을 언급하며 안내를 부탁했다는 보고였다. 아슬란이 테오도르라는 건 오르테가 백작의 부인과 아들만이 아는 기밀이었다. 보고를 전한 기사도 ‘테오도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아론 오르테가에게 찾아온 것이었고.
아군인가. 적인가. 테오도르와 아론은 장시간 머리를 맞대었으나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오르테가 백작과 이보나 왕비가 죽고,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제 오르테가 백작 부인과 아론 오르테가, 테오도르 데 아스토리아와 제니스 데 아스토리아 뿐이다. 아론 오르테가가 여자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니 남은 것은 백작 부인과 제니스인데 두 사람은 지금 오르테가 거성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 중이다. 그렇담 이 이름 모를 여성은 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를 위해 왔는가?
답은, 아무도 몰랐다. 긴 고민 끝에 두 사람은 우선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아론 오르테가가 막사 밖의 병사에게 손님을 모셔오라고 말했다. 병사가 떠난 후 그들은 ‘손님’이 리카르도의 첩자나 암살자일 가능성을 고려해 복장을 가다듬고 단단히 무장했다. 각자 갑옷과 무기를 정비한 그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의 무장을 점검하고 있을 때, 때마침 막사로 돌아온 병사가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안으로 모시게.”
테오도르의 허락을 받은 병사가 천천히 막사 문을 열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성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테오도르는 물론 아론보다도 한참 더 작고, 자기 키보다 훨씬 큰 지팡이를 든 여자가.
그녀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테오도르는 조금 놀랐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시감. 이유 모를 그리움과 가슴 한켠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망. 본 적 없는 얼굴인데도 친근한 기분이 들었고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갈증, 조급함, 성마른 마음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내달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배 속 깊은 곳이 꿈틀댄다. 마음속 누군가가 당장 그녀를 안고 입 맞추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어쩔 줄 모르고 뻣뻣하게 서 있는 사이, 방긋 웃음 지은 여자가 한달음에 다가와 테오도르를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갑옷 너머 강건한 몸이 잔뜩 경직됐다. 대경실색한 아론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오도르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지만, 그는 차마 그녀를 밀어내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를 생각했다. 아, 당신은 어쩌면 이때에도 이토록 어여뻐서.
테오도르의 손이 움찔대며 조심스레 여자의 뒤통수를 감쌌다. 어째서였을까. 그는 이 행위가 아주 익숙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부러 갑옷 차림을 한 것이 아쉬워졌다. 두껍고 차가운 철갑 때문에 쿵쾅대는 자신의 심장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심장 소리를 느끼고 내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장 따위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반짝 고개를 든 여자가 종달새처럼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테오.”
하얗고 고운 얼굴이 기쁘게 웃는다. 밀싹처럼 푸르고 연한 녹빛 눈동자. 봄날의 따스함과 여름날의 싱그러움이 어우러진. 그 눈 안에 어른대는 물기와 발갛게 물든 눈시울.
그 모두를 마주한 테오도르는 불현듯 깨닫는다. 아. 이제 나는 당신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영원히 이 녹색 그늘 아래서 살아가겠구나.
놀랍게도 그것은, 그에게 퍽 기꺼운 일이라. 테오도르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찾아온 영원에게 화답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고,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윤테이는 지금 전에 없이 즐거운 기분이었다.
“왕자님.”
“….”
“원래 아무나 막 끌어안고 그래요?”
그녀가 한 마디를 던질 때마다 점잖은 왕자님의 귓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주 빈틈없이 새빨개서 활짝 핀 장미 꽃잎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게 정말, 보기 좋았다. 신이 난 그녀가 ‘왕자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응큼해~ 응큼해~’ 노래를 부르며 테오도르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면서도 도저히 테이를 밀어낼 순 없었던 테오도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귀여워. 다 큰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
까르르 웃는 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솔직히 듣기는 좋았지만, 곤란했다. 테이의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 지을 뻔한 테오도르가 실룩이는 입꼬리를 손바닥 밑으로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여기에 더해 아론의 까칠한 잔소리도 테오도르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며 왕자의 속을 긁어댔다.
“손도 빠르십니다. 언제 애인을 만드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런 게 아닌데 보자마자 끌어안고 입맞춤까지 합니까?”
“….”
진짜 내가 왜 그랬지…. 돌이켜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요정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때의 그 행동은 한 점 거짓 없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성경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행동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갑자기 그러고 싶어서? 첫눈에 반해서?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답이다. 더군다나 테오도르와 아론에겐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처음 보는 여성, 만난 적 없는 여성이 어떻게 테오도르의 본명과 소재를 알고 있었는가.
아론과 테오도르의 질문에 스스로를 윤, 테이라고 밝힌 여자는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테오도르에 대해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어떻게?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봐왔는걸.’ 어디에서? ‘바로 옆에서.’ 언제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같이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테오도르의 일거수일투족은 오르테가와 함께였는데 오르테가가 모르는, 심지어 테오도르 본인도 모르는 동반자가 있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테오도르와 아론을 나란히 불신의 늪으로 빠뜨리기에 모자람 없는 말이었다.
“나는요, 사실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이에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아니, 왜 그런 표정이에요? 내 말 안 믿는 거예요? 나 상처받았어. 왕자님을 보려고 시간도 되돌리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에요. 진짜 안 믿을 거예요? 못 믿어요? 나 정말 대단한 마법사거든요! 증명할 수도 있는데!”
차원을 넘고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사? 듣도 보도 못했다. 적어도 인간의 기준에서는. 시간신의 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한낱 인간이 대운명의 수레바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그녀를 온전히 의심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해 웃고, 억울해하고, 뾰로통하게 흘겨보는 연두색 눈동자가 너무도 순수해서.
“완전히 홀리셨군요.”
“…그렇지 않네.”
테오도르를 힐끔대던 아론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테이가 방긋 웃으며, 테오도르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했다.
“나 못 믿어요, 왕자님?”
“…솔직히, 믿기 어렵네.”
“아이참. 큰일인데에. 나는 왕자님 도와주려고 왔는데 왕자님이 날 안 믿으면 어떡하지이.”
끝이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뚝뚝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사뿐사뿐 걷고 춤추듯 빙글 도는 테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감고서는 흐으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게 자못 깜찍했다.
당장 믿지는 못해도,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것쯤은 괜찮겠지. 그렇지 않나? 테오도르가 아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그때.
“백작님! 단장님!”
진영 전체에 쩔렁쩔렁 세찬 종소리가 울리며 병사 여럿이 앞다투어 막사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묻기도 전에 막사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들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고어… 고어 무리입니다! 최소 이백 체 이상 되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드 고어도 확인되었습니다! 병영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송구하오나 지금 있는 병사들로는 고어를 잠시 묶어두는 게 전부….”
…!
테오도르와 아론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백 마리의 고어라니. 병사 이천이 달라붙어도 생존을 걱정해야 할 숫자다. 그것도 ‘잘 훈련된’ 병사일 때의 얘기. 병영 가장자리를 지키는 하급 기사들로는 채 10분도 버틸 수가….
고민할 시간이 없다. 테오도르가 번개같이 뛰쳐나가려던 때였다.
“우리 그럼, 이렇게 해요.”
옥구슬같이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산들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사뿐, 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테오도르와 아론과 기사들을 지나쳐간 테이가 손에 든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린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그들의 눈앞에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긴 지팡이 꼭대기에 달린 보석이 오색찬란한 빛을 뿜으며 반짝였다. 그녀가 지팡이를 좀 더 높이 들자 하늘 저편에서 색색깔의 오로라가 펼쳐지며 검은 밤하늘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아니, 빛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지평선 끝에서 끝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마법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빛을 발했다.
자리에 있는 누구도,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공기에 가득 찬 마력과 강대한 마법의 힘 앞에 경악하고 경외하는 것밖에는. 오로지 테이만이, 그녀만이 이 하늘 아래서 자유로웠다. 자신이 자아낸 마법의 속삭임과 숨결과 기적 앞에서.
“내가 그 나쁜 놈들을 전부 해치우면.”
지팡이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테이의 몸도 조금씩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마법진들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천천히 회전했다. 하나, 둘, 셋, 테이가 손짓할 때마다 수많은 마법진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천궁을 제뜻대로 주무르고 대기를 자유자재로 흔들었다.
놀라 입이 벌어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방긋 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말 믿어주기예요.”
이윽고 하늘이 폭발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오로라를 장막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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