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릴리 AU
1
엔리카는 홀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거대한 성당이었다. 수백 명이 모일 만큼 넓었으나 촛대에 세워둔 불빛은 구석에 가닿지 못했다. 어둠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 사실을 의식할 때 마다 엔리카는 움츠러들었다. 낯선 장소에서 어두운 귀퉁이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법이다.
낮이라고 이 공간이 포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낮이면 속속히 드러난다. 이 공간은 지나치게 넓었다. 천장은 아득하게 높았다. 이 넓은 공간에 가득 들어찬 공기는 차갑고 무거워서 위압적으로 엔리카를 누른다고 느낄 때가 잦았다. 또한 선대의 영광을 기리며 조각한 커다란 조각상과 자신을 응시하는 신도들의 눈은 엔리카에게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 나라에서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이며, 세상을 이어나갈 희망이라고 했다. 엔리카가 오염을 정화할 때마다 안도하고 기뻐한다. 이 일은 엔리카 밖에 할 수 없다. 그 기대와 책임을 엔리카는 배반 할 수 없었다. 엔리카는 기도를 올렸다. 오염이 밀려오지 않기를 빌었다. 오염에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빌었다. 자신이 늦지 않게 정화해낼 수 있기를 빌었다.
순간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엔리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성당이 아무리 넓어도 자연적으로 바람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어딘가가 열렸다. 엔리카의 등줄기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엔리카는 문을 돌아보았다. 그곳까지는 빛이 닿지 않아서 문이 보이지 않았다.
“안녕. 잠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문쪽이 아니었다. 엔리카는 고개를 휙 올렸다. 성당의 벽의 높은 곳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달려있었다. 그 중 색유리 하나가 비어있었고, 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두명? 아니 한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 높은 곳을 올라갔지? 여러 혼란에 잠겨 엔리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쪽에서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은 시간에, 이런 식으로 찾아온 것은 미안해. 하지만 너를 둘러싼 다른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어?”
이런 침입자를 막으려고 엔리카 제게 사람이 붙었을 것이다. 엔리카는 경계어린 눈으로 상대를 보며 그 생각을 잠시했다가, 이 주변에도 여럿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만 큰 소리를 내면 수호자를 비롯한 병사들이 올 것이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엔리카를 보호한다. 엔리카는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그러자 대답할 용기가 났다.
“허튼 일을 벌이면 사람을 부를 거에요.”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내려가도 괜찮을까?”
엔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는 낡은 천을 여러겹 둘러 감싼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엔리카가 후드를 미심쩍을 표정으로 보자 그는 후드를 벗었다. 단발의 머리카락은 검었는데 앞머리를 넘겨 이마가 환히 드러났다. 눈은 선명한 주홍색이었다. 촛불에 그려진 이목구비는 채 성인이 되지 않은 자의 것이었다. 엔리카는 같은 바닥에 서니 키가 엇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사람은 엔리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락해줘서 고마워. 나는 예다한이야. 다한이라고 부르면 될거야. 네 이름은 뭐야?”
“제 이름은 엔리카에요.”
“그렇구나. 반가워, 엔리카. 네가 백무녀라고 불리는 존재가 맞지?”
백무녀. 그 단어에 엔리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백무녀였다. 언제 어느때나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했다. 엔리카는 순식간에 백무녀로서의 제 처세를 끌어올렸다. 손끝와 미소에는 온화함을 담고, 제 말과 행동에 그 어떤 이라도 끌어안는 포옹력을 갖추며, 특별한 존재가 마땅히 취해야하는 권위을 익숙하게 취하며, 사랑과 숭배를 주는 이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되는 것.
아까의 경계와 두려움이 없었다는 듯 엔리카는 희게 웃었다.
“맞아요. 혹시 정화가 필요하신 분인가요?”
“음, 아니.”
“그럼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 네게 묻고 싶은 것이 몇가지 있었서. 그러니까..... 생활은 어때?”
“항상 오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많은 분들의 염려와 도움으로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정화는 괜찮고? 몸에 무리가 온다거나 아프지는 않아?”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무녀니까요.”
“그.....래? 너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녀가 아니었다고 들었어. 많이 혼란스러울 법도 했는데.”
“정확히는 이제 제 자리를 찾은 것이지요. 혼란스러울 일 없어요.”
다한은 당황했다. 방금 전에 상대는 약간의 겁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을 밀어냈지만, 그 반응은 진실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벽한 조각상 같은 모습으로 화했다.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통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이곳에 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듣고 네가 궁금했어. 너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듣고 싶었어. 네가 고립되어 있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면 돕고 싶었어. 처음 본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힘들다는 것은 알아. 그렇지만 아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리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었지? 귀신에 쓰였니? 분명 너인데, 왜 이렇게 미끄러지기만 하는거지?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풀썩 꺾였다. 그때 머리 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가 할게. 나는 수백명의 현인과 논쟁해보았어. 어린아이 하나 휘어잡는 것은 내게 일도 아니야. 잠시 물러나고 나를 보내. 그러나 다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화답했다. 아니야. 내가 할래. 아무리 유려한 수가 있어도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싶어. 다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있잖아, 엔리카. 나는 네게 할 말이 있어. 그것을 위해 동쪽에서 너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어.”
“무엇이지요?”
“네가 유일한 무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사실 나도 무녀야, 엔리카.”
백무녀를 숭상하는 성당 안에서, 단 하나의 백무녀에게 동쪽에서 온 다른 무녀가 선언했다.
그리고 다한은 엔리카의 섬세하고 흰 표정이 깨지는 것을 보았다.
2
엔리카는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당기며 얼굴을 경직시켰다.
“있을 수 없어요.”
다한은 차분하게 물었다.
“무엇이 있을 수 없어? 내가 무녀라는 것이? 아니면 네가 유일한 무녀가 아니라는 것이?”
“둘 다요. 다른 무녀라니.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선대께서 돌아가시고 무녀 자리를 제가 상속받았어요. 그분 또한 그분의 선대에서 이어지셨지요. 지금껏 무녀 능력은 한 사람에게서 한 사람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이어지는 과정은 모든 신도들이 지켜봤어요. 지금은 제가 유일한 무녀에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몰랐을 리가 없으며 새로운 무녀가 이제와서 나타날 리 없어요.”
다한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진정해. 나는 네 선대나 백교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이곳에 무녀는 하나 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나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동쪽에서 왔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이 왕국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먼 곳이지. 그곳은 이곳과는 다르게 나같은 무녀가 많이 있어.”
엔리카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다한의 분위기는 이곳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어쩌면 이국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엔리카는 태어나서 한번도 다른 나라 사람을 본 적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믿어야 할까?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엔리카는 아무 이야기나 덥썩 믿어도 되는 위치가 아니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보증해 줄 근거가 있나요?”
“글쎄. 뭐가 좋을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어. 다른 무녀와는 어떻게 지냈는지도. 하지만 오늘 밤은 시간이 없구나. 내가 그곳에서 가져온 물건을 보여줄 수도 있지. 그러나 빛이 적어서 제대로 볼 수 없겠어.”
다한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엔리카를 힐끗 보았다.
“ 하지만 내가 무녀라는 증거는 보여줄 수 있겠지. 혹시 손을 좀 내밀어 주겠어?”
엔리카는 반사적으로 제 손을 뒤로 감췄다. 다한은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엔리카 앞에 손을 펼쳐보았다. 엔리카가 길게 갈등하는 동안 다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결국 엔리카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다한은 두 손으로 엔리카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맞닿은 손에서 빛이 일었다.
빛은 희었다. 백교가 숭배하는 그 흰 색이었다. 그러나 백무녀들이 퍼뜨리는 것과 약간 달랐다. 엔리카의 것은 빛이 사방으로 번지며 눈을 부시게 하였다. 다한의 것은 조금 반짝였으나 두 사람의 손만을 비출 정도였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필요한 만큼만 뽑아내는 것 같았다. 다한이 엔리카의 손바닥 위의 허공을 쓸다가 팔을 안쪽으로 당기며 주먹을 쥐었다. 손에서 무언가를 가져간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와 함께 엔리카는 속에서 자잘한 오염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염의 여파로 생긴 두통과 따끔거림도 사라졌다.
엔리카는 눈을 깜박였다. 그것은 분명 정화였다. 다한은 엔리카를 정화했다.
“어떻게......”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엔리카는 입을 다물었다. 다한은 불티같은 찌꺼기를 손에서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엔리카는 다한이 무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나의 벽이 깨지자 막혔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목소리가 젖었고 목이 메었다.
“정말 세상에 다른 무녀가 많이 있나요?”
“그들은 백무녀라고 불리지는 않겠지만, 그래 맞아.”
“그럼 이곳에는 왜 하나 밖에 없지요?”
마지막 말은 내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만일 누군가가 유일하고 중대한 존재라면 그 사람은 우월감에 취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을 숭배하는 수많은 신도가 생길 정도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가 신자라면 종교의 단단한 교리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 할 수도 있었다. 다한이 깨뜨리려는 순간 발버둥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엔리카가 드러낸 반응은 그것이 아니었다. 엔리카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큰 부담을 느꼈다. 왕국의 존망이 제 노력에 달려있다고 한다. 만일 무녀가 아주 많아서 서로 일을 나눌 수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다한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엔리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거기까지는 몰라. 옛날에는 이곳에도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 그 이유를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그래서 네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엔리카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고, 곧 호흡을 진정시켰다.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혹은 백무녀로 지낸 몇 달의 시간이 엔리카를 그리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네.”
“......이곳의 생활은 어때?”
“여기 분들은 제게 친절해요. 그리고 제게 거는 기대가 커요. 알아요. 이곳에서는 제가 유일한 희망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 기대에 부흥하기에 저는 너무 벅차요. 부담스럽고 그렇게 느끼는게 미안해져요.”
“오염이 걱정된다고 했지.”
“그건 사실이에요. 오염에 의해 삶이 망가지고 죽을 뻔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어요. 끔찍하지요. 저는 ...... 그런 이들을 보는 것이 마음 아파요.”
“네 책임이 아니야.”
“그렇다하더라도, 이곳에서는 저만이 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너는 많이 애썼잖아. 정화는 쉽지만은 않을텐데.”
“오염이 너무 많아요. 몸에 무리가 오는 것 같기는 해요. 정화를 시작한 이후로 자잘한 통증이 따라붙어요.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쌓이는 것도 느껴지고요. 백무녀는 오염에 면역이라고 들었지만, 이럴 때면 그 말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통증이 느껴진다고?”
“괜찮아요. 당신이 아까 정화해주어서 나아졌어요.”
다한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혹시 네 선대에게 물려받은 것이 있어?”
“아니요, 그분과는 접접이 별로 없었어요. 아주 어릴때 얼굴을 한번 뵌 것이 다에요. 사실 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만남이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좀 더 나중에 백무녀가 될 예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도 갑작스럽게 이 자리에 오르게 되었네요. 그분에게 생전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다한? 왜 그렇게 보시나요?”
“어때?”
나무에서 그림자가 툭 떨어졌다. 다한은 놀라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만나봤어.”
“만나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야밤에 그 고생을 하면서 호위에 틈을 만들었는데.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의 성과야. 무엇을 얻어냈어?”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청록색 머리를 길게 묶은 이가 옷자락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옷에는 흙과 풀쪼가리등이 잔뜩 묻어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보이지만 제법 험하게 구른 모양이었다. 경비병과 추격전을 좀 벌였을 것이다.
“백무녀는 아무것도 몰라.”
“그럴리가.”
“정말이야, 무란.”
무란은 팔짱을 끼었다. 특유의 크게 트인 노란 눈은 순해보일 법도 했으나 비틀린 입매와 어우러져 무서운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무란은 그 인상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이 얼굴로 상대를 비꼬았을 때 효과가 좋았다.
“설마 얼빠진 채 밀리기나 했어?”
무란이 이죽거리자 다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아니야. 나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 애는 백무녀가 된지 얼마 안 되었고 그 이전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는 모양이야.”
“그걸 믿어? 순진한 체 하며 널 속였겠지.”
“응. 나는 믿어.”
“허, 이것 봐라?”
무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정신차려. 이곳의 백무녀라는 것은 종교와 결합했어. 무녀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람들이 따르는 일은 자주 있지만 이렇게 광적이고 거대한 규모는 처음이야. 그런 집단의 꼭대기에 있는 녀석이 아무 계산도 없이 앉아있겠어? 사람 수백을 휘두르는 위치라고. 그런 사람이 솔직하기만 하겠어? 솔직해 보이는 것도 연출일걸?”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 떠밀려 앉혀진 애야. 자기도 그 자리를 낯설어 하는 모양이고. 상징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이 주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돼?”
“무녀라면 파괴적인 권한을 가질지도 모르지.”
“이 이야기는 그만 하자.”
다한은 입을 다물었다. 무란은 냉소적인 면이 있었다. 그 시각은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적당히 걸러내야한다. 다한이 그렇게 대화를 끊자 무란은 신경질을 내었지만 길게 가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이곳의 무녀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으니 원래 하던대로 마저 알아봐야겠지.”
“다시 수소문하고 다니게?”
“그렇지.”
“결국 원점이네.”
무란이 발치의 돌맹이를 툭 찼다.
“오늘은 더 이상 못 해. 나는 좀 자야겠어.”
“그래, 내일부터 이어나가자.”
무란은 하품을 하며 앞서 걸었다. 다한은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던 중 무란이 뒤를 돌아보더니 불쑥 말했다.
“근데 다한. 너 걔한테 왜 이렇게 호의적이야? 방금 처음 본 애 아니야?”
“그냥. 만나보니 불쌍했어. 게다가 반쪽짜리더라.”
무란은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쪽짜리? 무슨 소리야? 귀신 들렸어?”
“그 애? 아니. 오히려......”
“아니, 걔 말고 너.”
외전 1
다한이 엔리카에게 설명했던 동쪽의 마을에 타락자가 기어왔다. 타락자는 무녀 하나면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여서 별로 위협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출몰 그 체였다. 타락자의 출현은 어디에서 오염의 관리 상태가 아주 엉망이라는 뜻이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고 그 즉시 오염을 다루는 모든 공동체로 파발이 가서 관리 현황을 점검했다. 그러나 어느곳에서도 이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런 출현은 몇 번이 반복되었고 사람들은 타락자가 오는 방향에 주목했다. 그들은 서쪽의 황야에서 넘어온다. 그렇다면 서쪽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미쳤다고 이리 부주의하고 경망하게 구는 거지? 위협을 느끼거나 분노에 휩싸이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조사대를 보내기로 의견이 모였다. 대체 타락자들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오며, 이유에 따라 해결하거나 지원을 주거나 처벌을 내리는 것이 조사대의 역할이었다. 혹시 오염을 일부로 누출시키는 경우라면 그 집단을 싹 다 불태워 더 이상의 일을 막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 정도로 오염 누출은 심각한 문제였다.
여럿이 묶여 파견되었고 예다한과 정무란이 그 조사대 중 한 팀으로 왔다.
다한은 무녀였고 오염 문제를 해결할 때 꼭 필요한 존재다. 무란은 무녀는 아니나 무술을 갈고닦은 청년이다. 순탄치만은 않은 일을 하러가는 이런 행렬에 하나씩은 필요하다. 그 둘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녀 하나가 갈때 무녀에 붙은 불사자들이 동행한다. 무녀를 데려가는 것은 군단 하나를 데려가는 것과 같았으니 그 둘은 결코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
무란은 조사대로 편성되며 다한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가 본 다한은 대부분 강신상태였다. 무녀가 대개 그렇지만 다한은 그 시간이 길었다. 물론 그들이 추적 중이라는 특수성은 감안해야한다. 타락자의 경로는 일반 사람이 가는 길을 따르지 않았다. 음식 섭취며 맹수의 영역도 고려하지 않는 경로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기에 타락자들이 기어오며 남긴 흔적을 아주 면밀히 살펴야 했다. 그러나 둘 다 아무리 뛰어난 무술을 다룰 수 있어도 흔적 찾는 눈은 충분히 예리하지 못했기에 다한은 어느 불사자의 혼을 끌어와 눈을 빌렸다.
무란은 여정 내내 다한에게 말총머리의 사냥꾼이 덧씌워진 것을 보았다. 동물의 손에서 자랐다는 야생 소녀와 천리 밖도 훤히 본다는 유목민이 옆에 앉아있고는 했다. 그들 외에도 한 무리가 근처에서 노닥거리다가 무란이 나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한은 태연하게 무란을 맞이하며 경로를 알려주었다. 우리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쳤대.
무란은 그래? 라며 넘길 수가 없었다.
무란이 본 다한의 세계는 혼 속에 잠겨있었다. 말이 좋아서 혼이고 불사자이지 이미 옛적에 죽은 귀신이다. 귀신과 마주하며 귀신과 교류하고 귀신과 의견을 주고 받는다. 무란은 그 모습에 거부감을 느꼈다. 귀신에 대한 공포따위는 아니다. 무녀에게 항상 제기되는, 옛 사람이 남아 신세대의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거나, 발전이나 혁신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은 주장의 영향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다한은 제가 취한 혼에만 동조하고 공감했다.
무란의 말에 그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일때 이상했다. 다한은 너그러웠지만 애초에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의 예의였다. 이동 중에 타락자가 만든 재앙을 마주하고 마른 숨밖에 뱉지 않았다. 초반에는 다한이 세상 풍파를 겪은 이들처럼 닳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을 건져낸 마을에서는 비극에 슬퍼하는 다한을 보고 의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을에 왔을때 사람들 사이의 다한을 보았고, 귀신들 사이에 다한을 비교해보고 확신했다. 그 차분한 얼굴을 기반으로 대조되는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녀에게 귀신이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자신이 되는 존재이다. 세상에 자기자신만큼 공감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신체만 빌려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기억과 감정을 읽어들이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끝은 서사의 거대한 울림이자 클라이막스다. 수많은 사연의 끝을 죽음으로 맺으면 전체적인 울림이 증폭된다. 꽤 매력적인 존재가 된단 말이다. 멋모르는 어린 애이든 잘 나가던 어른이든 오래 살아온 노인이든 안타까운 존재가 된다. 그런 자들 사이에 현재의 사람이 얼마나 선명할까? 그들에 비하면 오히려 희미한 안개일 것이다. 그리 살아온 무녀가 살아있는 타인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무란은 회의적이었다. 이미 귀신들에게 중독되었을테다.
다한은 용케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그냥 말수적고 조용해서 조사대 같은 일이 떠밀려와도 거절하지 않았던 무녀, 또한 경거망동하지 않아 맡길 수 있을 만한 사람 정도로 다들 보았다. 새로 만난 사람들은 조용함 정도 밖에 읽어내지 못했지만 다들 비슷했다. 그러나 한번 동행자로 삼은 무란은 믿지 않았다. 의식을 내내 귀신에게 내맡겼으면서 여기에 계속 있었다는 양, 자신은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 굴며 동료를 한번씩 챙기는 다한의 태도는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이 오염이 시작된 나라에서 다한은 유독 사이비 교단의 무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무란은 어이가 없었다. 너 뭐하는 거야? 우리 할 일을 잊었어? 용의자를 추린다면 무조건 포함될 백무녀라는 녀석을 다짜고짜 믿어? 그러다가 다한이 그런 친밀함은 제 귀신에게나 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같은 무녀가 그리도 반가워? 네가 끌어안은 귀신만큼이나?
아니면 혹시 귀신에 씌었어?
확실히 귀신이라면 새로운 무녀를 반기겠지.
세나는 마법사였다. 마녀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마법을 부리는 존재는 흔치 않으니 대충 비슷한 의미의 호칭을 아무거나 불러도 알아 듣는데 문제는 없다.
물론 마법을 부리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마법 협회에 모여서 나오지를 않는다. 마법 협회 밖에 거주하는 세나가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세나에겐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세나의 마법 실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다. 물론 보통 사람은 놀라 자빠질 정도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 마법이나 보여줘도 그렇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후하게 봐줘도 보통이다. 이 실력으로 협회에 가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히 애를 먹을 것이며, 들어가도 월등한 실력의 마법사들에게 밀려 변변치 않은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노력대비 성과가 작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길은 마법 협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장의 작은 성과는 당연하다. 성실하게 마법을 갈고 닦으면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고 그것이 마법사가 걷는 길이다. 라고 대부분의 이들이 생각한다. 그리고 세나는 그런 생각을 일찌감치 버렸다.
세나는 대신 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을 배웠고 배운 지식을 결합해 마도구를 제작해서 일반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마법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기존의 마도구는 마법 협회 안에서만 돌거나 왕실에만 납품하기 때문에 경쟁자도 적었다. 그리고 세나의 마도구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마법보다는 정밀한 기계 제작이 더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하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협회의 귀에도 들어갔다. 폐쇄적이고 마법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마법사들은 어느 녀석 하나가 마법을 팔고 있다는 소식이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법 점잖은 마법 협회는 세나의 공급처를 끊거나 무기를 들고 찾아오는 대신 마법 협회에 가입하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세나의 실력을 인정하여 특별하게 초빙한다는 좋은 내용의 서신을 날렸다. 물론 마법 협회의 그물 안에 세나를 집어 넣고 보안 유지 등으로 항목으로 마법의 유출을 막을 셈이었다. 세나는 자신의 실력이 변변치 않아 그곳에 오히려 누가 될 것이며 고명한 분들과 나란히 하기에는 자신이 없기에 망설이게 된다는 내용의 답신으로 거절했다. 물론 예의를 차리며 둘러대었을 뿐이다. 그 시절 세나의 장사는 호황기였다. 마법 협회에 들어서는 한번 죽을 때까지 일해도 벌지 못하는 금액을 건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세나는 그 순간을 최대한 누리며 많이 벌고 싶었다.
물론 마법 협회가 알겠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편지가 수 차례 오가는 동안 제안에서 협박의 기미가 슬슬 보였다. 그 즈음 세나는 타협했다. 초빙에 감사드리며 장사를 정리하고 마법 협회에 들어갈 예정인데 마법사로서의 신의를 지키고 싶어서 들어온 주문까지는 전부 마무리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왕실 관계자도 주문을 넣어서 이행하지 않을 시 곤란해질 수 있음을 슬쩍 언급하기도 했다. 주문을 멋대로 처박으면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질것을 걱정해서인지, 왕실과의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협회는 승낙했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 한것이 하나 있다면 세나가 장사를 접기 직전 주문을 될 수 있는대로 끌어왔다는 점이다. 들어온 주문의뢰를 전부 처리하려면 이 년 정도는 족히 걸릴 것이다.
지금은 일 년 팔 개월 차였다. 작업장은 매일 돌아가지만 간판은 내려갔다. 소식이 늦어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주문을 넣던 손님들도 진작에 끊겼다. 세나는 슬슬 작업장을 정리하고 협회로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던 때였다.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그 날은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공기중에 물기가 맴돌았는데 세나는 질색하며 작업장의 창문을 꼼꼼히 닫았다. 높은 습도는 기계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작은 부품을 모아둔 상자는 밀봉했고 습기를 잡기 위해 작업실 곳곳에는 촛불을 켜두었다. 그리고 습기가 잡힐 동안 촛불을 바라보며 그 날 할 일을 머리 속으로 생각했다. 세밀한 공정은 하지 말자. 괜히 부품을 망가뜨릴 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공구들이나 한번 손볼까? 조임쇠가 뻑뻑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내 기계들 어쩌냐? 마도구를 제작하기 위해서 마련하고 그간 관리한 기계들. 마법 협회로 싹 옮길까? 이제와서 내가 연구를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거기는 버섯이 필 정도로 습하다는데, 괜찮으려나. 이거 아까워서 어째?
점점 뒤로 갈 수록 그날 일정과는 관련이 없어졌다. 생각이 흘러 세나가 작업실에서 향수에 빠져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그 소리를 바로 들었지만 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첫째로 기껏 습기를 걷어낸 쾌적한 공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 세나에게 찾아올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밖의 사람은 연신 문을 두드렸다. 세나는 결국 문을 열었다.
“거 누구쇼?”
밖에는 두명이 있었다. 그리고 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마법협회에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맡길 것이 있어요.”
철 지난 손님이었다. 예전이라면 좋게 모셨을텐데 돌려보내야한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주문 안 받는데요?”
“어떻게든 안 될까요? 꼭 만들어 줬으면 하는 마도구가 있어요.”
당연히 세나는 난감했다. 전에 뒷통수를 조금 치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마법협회와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제와서 새 주문을 받아버리는 것은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다. 협회로 이전하는 일이 몇 개월 안 남은 시점에서 괜히 관계를 파탄내고 싶지 않았다.
“마도구 제작은 좀 비싼데, 지불은 가능하세요?”
세나는 치사하게 대응했다. 손님이 따지면 마도구 시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부르는 게 값이다. 그게 아니어도 행색을 보니 원래 가격의 절반도 지불하지 못 할 것 같아보였다.
“사실 지불할 만한 것은 많이 없어요.”
세나는 재빠르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작업이 안 되는데요. 도와드리려고 해도 선금이 없으면 재료를 구입하는 것 부터가......”
“대신 값으로 다른 것을 지불할게요.”
세나는 속으로 얼마나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어이없게 만들지 궁금했다. 그리고 듣고 보니 예상보다 더 어이없었다.
“당신에게 희귀한 주술을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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